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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과 손병희선생님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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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박노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165회   작성일Date 19-02-26 07:29

    본문

      ❺귀국     일본에서 귀국하여 1905년12월1일, 동학군에 대해 극심히 탄압하던 대한제국이 외세의 간섭으로 무기력해진 상황 속에서 동학을 신앙단체인 천도교로 개칭 大鼓天下 하였다. 또한 애초에 개혁 운동의 전위단체로 조직했던 진보회의 이용구 송병준 등이 진보회를 일진회로 개명하고 친일행각으로 매국행위를 함에 일진회 인물들에게 출교 처분을 내림으로써 이들과 결별한다.   ❻독립운동   귀국 후에는 교주 자리를 박인호에게 승계하고 교육 사업(보성전문학교, 동덕여숙)과 출판사업에 관심을 쏟다가, 1910년 8월 29일 조선이 일제에 의해 강제 병탄되자“ 내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고 교도들 앞에 천명 하신 후 그 준비목적으로 1911년 11월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현 우이동에 임야 27,946평을 매입, 이듬해 1912년 3월 수도연성을 위한 장소로 봉황각을 건축하여 6월19일에 완성하였으니 건물의 이름을 봉황각 이라 지은 것은 나라를 구할 봉황 같은 인재를 길러내시고자 하는 선생의 의지가 담긴 이름이다. 이 건물을 완공 하신 후 선생께서는 주로 이곳에 머무시며 독립운동에 뜻을 두신 외부인사들과 접촉하시며 3.1광복 투쟁에 대한 구상도 하시고 그 구체적 준비로서 1912년 4월 15일부터 도선사의 암자를 빌어 제1회 49일 수도연성을 시작하셨으니 수도연성의 제목은‘이신환성’이었다. 이신환성이란 육체적 모든 욕망을 제거하고 생각을 성령으로 바꾼 다는 뜻이나 앞으로 광복투쟁을 벌려나갈시 겪게 될 모진 고통과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절대 신념을 불어넣기 위한 정신 교육이었다. 이러한 뜻으로 시작된 연성은 제7회 1914년 2월 5일부터 105명이 49일간 수도연성이 끝날 때까지 총 7회에 걸쳐 483명이 이 연성을 마쳤는데 그 대상은 전국 272 교구를 이끌어가던 청년교도들이였으며 이들이 연선을 마치고 돌아갈 때 등사기 한대씩을 선물로 들려 보냈으니 이는 훗날 독립선언서의 원본을 등사해내기 위한 준비작업 이였음이다. 이러한 주도면밀한 손병희 선생과 천도교의 준비작업이 1919년의 3.1광복투쟁을 성사시켜 비록 그 투쟁으로 많은 동포가 학살당하고 천도교도 혹독한 탄압을 받아 혹자는 3.1광복 투쟁을 실패한 투쟁으로 무고한 동포의 희생을 불러왔다 고 폄훼하는 이도 있으니 3.1광복투쟁은 독립의 능력이 없는 무지몽매한 조선인 그래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음이 마땅하다고 선전하던 일본의 기만전략이 만천하에 거짓임이 증명되고 조선을 무지몽매한 무능한 민족으로 알고 있던 전 세계 인에게 조선인은 마땅히 독립의 자격을 갖춘 민족임을 인식시켰고 전 세계 약소민족의 가슴속에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어 중국의 손문이 5.4운동을 벌렸고 마히트마 간디가 비폭력 무정항의 독립운동을 벌렸던 것이다. 그런 손병희 선생은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아 수감 생활이 시작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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