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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희선생님의 장례식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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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박노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393회   작성일Date 19-02-26 07:39

    본문

      ➒ 장례식   이에 장례준비위원회는 구체적인장례 절차를 확정하니 장례일은 6월 5일로정하고 신축된 대 교당에서 영결식을 거행하기로 하였다. 1918년 12월 1일기공하여 1921년 2월에 완공한 대 교당 조금만 건강이 회복되면 그렇게 가보고 싶어 하시던 대 교, 살아생전 그 원을 못 푸시고 이제 싸늘한 시신이 되시어 마지막 가시는 길에야 그곳을 들리게 된 것이다. 오전 9시 영결식이 끝나고 선생의 가 우이동장지로 출발하니 장례위원을 선두로 종학원(천도교 교리교사강습학원)보성초. 보성중. 보성전문학교 동덕여학교 학생과 교직원등 1천5 백여 명이 뒤를 따르는 행렬 뒤에는 3 라는 뒤로 70여 대의 꽃차와 270 여개의 만장이 숲을 이루고 다음으로 장례위원장 중앙총부 간부들이 영여를 모신 뒤에 주상인 춘암상사 <4세교주>와 유족 및 친족들이 그 뒤로 20여대의 자동차와 200 여대의 인력거와 이어 수천 명의 남녀 교인들과 일반조문객들이 뒤를 따르니 장례행렬의 선두가 창경궁 정문을 지날 때 후미가 대 교당 정문을 빠져나올 만큼 일직이 볼 수 없었던 길고도 장엄한 장례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선생의 장례 행렬에 보성학교와 동덕학교의 학생들이 대거 참여한 동기는 본장에서 밝혔듯이 경영난에 처한 보성학원을 이종호로부터 인수받아 전문학교로까지 승격시켜 경영하다 3.1광복 투쟁 후 천도교의 재정악화로 후원금까지 얹어 재단을 결성하여 박인호 교주도 재단이사의 한사람으로서 보성전문의 경영에 참여중인 까닭이며 동덕여학교 역시 천도교에서 경영난에 처한 동덕여학교에 많은 지원을 하여 경영하다 3.1광복 투쟁 후 애초의 설립자 조동식에게 168평의 2층 양옥 신축교사와 지원금 까지 얹어서 돌려준 연고라 이러한 인연으로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 학생들이 장례행렬의 선두에서서 마지막 가시는 선생의 영구를 배웅하였던 것이다.   ❼ 사후 탑골공원에 있는 손병희의 동상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충북 청주의 삼일공원에 충북 출신 민족대표 33인인 권동진, 권병덕, 신홍식, 신석구와 함께 동상이 설치되어 있다. 청원군 생가 자리에는 기념관도 건립되었다. 저서로는 일본 망명 시절에 국부 달성과 근대화를 주장하며 저술한《 1902《1903》❮1906❯= (현재의 지방자치제) 등이 있다. 어린이 운동으로 유명한 방정환은 손병희의 사위로서 천도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정환의 부친은 천도교 신자였으며, 방정환 자신도 1923년 천도교계 잡지에서 작가로 활동하였고 어린운동의 선구자다. 혹자들은 3.1만세 당일 민족대표 33인이 애초에 탑골공원에서의 독립선언서 낭독의 약조를 깨고 비겁하게 태화관에 숨어 선언서 낭독을 한 후 일경에 자수하였다고 폄훼 하는 부류도 있지만 민족대표 33인의 어른들이 피 끓는 청년 학생 대중 앞에서 선언서를 낭독하고 일경에 체포 되 갈 경우 이 를 목격한 대중들의 격분으로 벌어질 폭력사태를 막고자 한 사려 깊은 판단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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