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선생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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❹갑진개화운동과 천도교
손병희 선생은 망명 중에도 국내 간부급 교도들과 꾸준히 연락하여 교세확장에 힘쓴 결과 동학혁명의 여파로 그 세가 위축된 삼남 지방과는 달리1903년경 서북 지방에는 집집마다 주문소리요 사람마다 주문을 외우고 다닐 정도로 동학의 세가 급속도로 번져나갔다. 이러한 여세를 몰아 손병희는 조직체계를 재정비하고 접주제를 강화하는 한편 간부들을 수시로 불러 민회를 조직토록 지시하고 대동회를 조직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1904년 박인호 송병기 양인이 일본에 갔을 때 국내 동학도들로 하여금 일제히 머리를 단발하여 새로운 문명대열에 참여 할 것을 권유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 도인으로 하여금 세계문명에 참여하는 표준이 되게 하는 것이요.
둘째 도인들이 일심단결 하는 의지를 굳게 하는 것이니 이럴 때 도인은 먼저 용기를 떨치게 하라 .우리가 동학에 입도한 뒤로부터 현재까지 이 한 몸이 죽고라도 현도하기가 소원이었는데 죽지 않고 현도만 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대 스승님께서는 대도를 위하여 단두대에 목을 내 베이셨는데 목 대신 머리털쯤이야 무엇이 어렵겠느냐?
예로부터 은혜를 갚기 위하여 머리털을 베어 신을 삼아 바친다 하였으니 이번에 우리가 단발하는 것으로 과 을 아울러 갚는 것이요. 또 우리가 먼저 단발하여 세계문명에 참여한 뒤에라야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니 이 뜻을 일반 도인에게 알리라. 이러한 지시를 받고 귀국한 양인(박인호. 송병기)은 동년7월에 이종훈. 엄주동. 김명배. 나용환등 10여명이 대동회를 민회로 바꾸고 전국적인 민회운동을 시도했으나 각처의 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동학을 미워하는 정부나 양반들은 러시아군에게는 동학을 친일파라 모함하고 일본군에게는 친러파라 모함하고 관군은 관군대로 동학을 핍박하니 각 지방에서 많은 동학도들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이 소식을 접한 손병희는 권동진. 오세창. 조희연 등과 상의 하여 중립회를 진보회로 개명하고 다음과 같은 4대 강령을 발표함과 동시에 이용구를 회장으로 하여 민회운동을 강력히 추진케 한다.
* 강령*
1. 황실을 존중하고 독립기초를 공고히 할 것.
2. 정부를 개선 할 것.
3. 군정. 재정을 정리 할 것.
4. 인민의 생명재산을 정리 할 것.
이에 따라 1904년 8월 29일(음) 전국360여 개 소에 진보회 지부를 설치하고 경향각지의 회원16만 여명이 일제히 궐기 단발흑의로써 정부개혁과 국정쇄신을 부르짖기 시작하였다. 이를 갑진개혁. 갑진 개화 운동이라고 한다. 전국360여개 민회가 조직되는 동시에 관찰사. 군수 등의 관원을 상대로 각종민원에 대한 담판을 실시함으로써 동학혁명당시의 집강소 정신을 계승한 민원해결 등, 수천수만의 군중을 상대로 시국계몽을 하였다. 이러한 진보회의 행동을 주시하던 정부는 이들의 실체가 동학도임을 알고 탄압하기 시작한다. 이 같은 정부의 탄압을 기회로 친일주구인 송병준은 이용구에게 접근 진보회와 일진회의 합동을 제의한다. 회장인 이용구는 스승인 손병희의 재가도 없이 당면한 위기만을 모면할 요량으로 동년 10월 13일 일진회와 합동 진보회라는 이름마저 없어진다. 일진회로 흡수된 진보회장 이용구는 이때부터 태도를 표변 송병준과 손을 잡고 배교 친일 매국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한다. 일진회가 진보회를 유혹 합병 한 것은 당시 많은 민회조직이 있었으나 조직의 주체인 서울조직만 있을 뿐 360여지부에 16만 회원을 보유한 조직은 진보회 뿐이었던 까닭이다. 상황이 이렇게 된 줄 모르는 전국의 회원들은 손병희의 지시에 의하여 일진회가 움직이는 줄만 알고 있다 뒤늦게 이용구의 배신행위를 알게 됐다. 일진회는 1905년 11월6일 일본의 지도와 보호에 의하여 독립을 유지해야 한다는 매국적 선언서를 발표하고, 뒤이어 17일에 이 체결되자 동학교단은 한때 백성들로 부터 친일 매국집단으로 오해를 받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에 손병희는 1905년 12월 1일(음) 동학을 천도교로 개명 선포하고 하고 () 1906년 1월 5일 귀국 이용구 일당을 회유하려던 노력을 접고 동년 9월 21일 이용구 이하 62명의 배교 친일행위자를 출교 처분함으로써 실추된 교단의 위상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이들 동학의 간부들이 관장하고 있던 교단의 예금과 재산들을 가지고 나감으로써 천도교는 심각한 재정위기를 맞게 된다. 이에 손병희는 성미 제도를 제정 이와 함께 교도들의 수행 법칙을 제정하니 5관이다. 5관이라 함은 교도로서 1. 주문 2. 수련 .기도. 청수. 성미 이다. 앞의 4가지 수행은 동학 즉 천도교의 신앙인으로서 지켜야할 정신적 신앙의 기본이며 성미는 교단을 이끌어 가기위한 동력이 되는 물질적 정성이다. 이제까지의 동학을 이끌어온 비용은 애국심에서 발로한 동학도들의 자진 납부식의 성금에 의하여 충당해왔으나 심각한 재정적 위기를 맞아 이를 타개하고 앞으로의 원활한 재정 확보를 위해 만든 성미제도는 매 식기마다 밥을 하는 주부가 쌀을 뜰 때, 식구 수마다 한 숟갈의 쌀을 정성으로 기도하며(기도문, 이 밥을 먹고 보국안민 포덕천하 광제창생 지상천국 건설에 앞장서겠습니다.) 따로 모아두었다 한 달에 한 번씩 교회에 바치니 이를 모아 팔아 교단을 이끄는 재정으로 썼다. 당시 동학도가 전국적으로 300만이니 매끼 한 숟가락의 쌀이 300만 숟갈이요. 어려운 시절 두 끼만 따져도 하루에 600만 숟갈의 쌀이 천도교의 재정으로 모여들었다. 교도들 중 끼니를 거르는 가난한 이도 있었으나 정성 있는 부자도 있었으니 이 성미와 또 정성 어린 성금으로 교단의 재정이 안정되고 많은 학교를 지원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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