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주동하신 손병희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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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손병희
천도교 입도
1861. 4.8-1922 5. 19 망명중 가명 이상헌 도호 의암 충청도 청주 목(현 충청북도 청주시)에서 세금징수를 담당하는 향리의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응구이며 1882년(22) 조카 손 천민의 권유로 동학에 입도했는데 처음 동학에 입도하면‘삼재팔난’을 면할 수 있다는 말에 “사나이 대장부가 삼재팔난이나 면하려고 나라에서 금하는 도에 들어가겠느냐 ”며 거절 하였으나, 나중‘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동학의 교리와 보국안민 광제창생 하려한다는 동학의 목적에 감동하여 입도 하였고 3년 뒤 최시형을 만나 그의 수제자가 되었다.
청주 관아 아전의 서자로서 젊은 시절 자신의 처지를 비관 의로우나 파락호의 길을 걷다 나라에서 금하는 동학이지만 그 목적이 보국안민 하는데 있다는 데 뜻을 합하여 목숨을 걸고 동학에 입도 착실한 수행과 지도력으로 접주가 되어 외세에 대항 혁명의 대열에 앞장서 동학의 3세 교주가 되었다. 그러나 동학은 그 당시 나라에서 금하는 이단이었지만 오늘 동학혁명은 민족사를 빛낸 위대한 혁명으로 자리매김 되었고 더구나 그 동학의 저력으로 3.1광복투쟁을 계획하고 진행하고 선포하여 우리민족의 자주독립의지를 세계에 만방에 천명한 위대한 민족의 지도자로 자리매김 되었지만 한때 역적으로 오해받던 대열에 섰던 굴곡 많았던 분으로서 이분역시 사후 한 푼의 사유재산이 없었던 청렴한 분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살아생전 일제강점기 세인이 보기에 그 누구보다 사치와 호사로 한강에 유람선을 띄우고 질타한 풍류를 즐기며 포드승용차를 두 대씩이나 구입하여 위세를 떨쳤으니 이는 어디까지나 일제 강점기 조선의 왕이 없는 총독정치 하에서 300만교도의 우두머리로서 총독보다 더 버금가는 위세를 떨침으로 조선의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전략적 차원의 행위였다. 돈 많은 교단의 타락한 교주라는 가면을 쓰고 1910년 국치이후 천명하신“ 내 10년 안에 나라를 되찾겠다던 그 말씀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치시고 순국 하셨다.
❷동학농민운동 가담
1894(34)년 동학혁명당시 동학군 북접통령으로서 남접의 전봉준과 함께 관군에 맞서 싸웠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원산 및 관서지방으로 피신한 그는 동학농민혁명실패로 무너진 동학의 재건과 포교 활동에 큰 공을 세움으로써 1897년 정신적 스승이었던 최시형의 뒤를 이은 제3대 교주가 되었다. 한편 관에 체포된 최시형은 이듬해 혹세무민했다는 죄목으로 처형당한다. 이후 손병희는 동학운동의 지도자만이 아닌 근대화 운동의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보인다. 독립협회 인사 등 개화파 인물들과 만나서 일부는 동학에 입교시켰으며, 이들로부터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❸일본 망명
그러나 동학에 대한 탄압이 거세지면서 먼저 동학에 입도하여, 자신에게 포교했던 조카 손 천민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자, 1901년 안경장수로 변장하여 중국에 피신했으나 조선정부의 압력으로 중국에서 살 수 없었기 때문에, 1901년3월 일본으로 망명하며 제자들에게 출국의 목적을 밝히셨으니“ 장차 동학을 세계에 창명하고 세계문명의 대세를 살피는데 그 목적이 있다 ”고 말씀하셨다. 처음 미국으로 가실 예정이었으나 여건이 여의치 않아 일본에 머무르면서 일본이라는 창을 통해 세계를 바라보게 되었다. 여기서 이 상헌이라는 가명으로 국사범으로 망명중인 오세창.권동진.박영효. 조희연 등 개화파 전직 관료들과 교류하였고, 상하이와 메이지 유신(1867년)이후 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던 도쿄 등을 돌아보면서 인재 양성이 시급함을 깨달았다. 이에 따라 1902년부터 24명, 1904년 40명 두 차례에 걸쳐 총64명의 똑똑한 청년들을 선발하여 일본에 유학시키게 된다. 망명 중 신문기고 등으로 내정개혁론과 근대화론을 설파하다가 1904년에는 갑진개혁 운동을 일으켜, 권동진. 오세창과 더불어 진보회를 조직했다. 회원들에게 머리를 자르고 개화복을 입을 것을 명하는 등 개화 운동의 확산을 위한 단체였다.
일본을 통해 선진국의 문물을 보며 조선의 미개함을 혁파하고자 1904년 윤 용선에게 다음과 같은 비정 혁신론을 보낸다. 하여 이 하니 라. 로 히 하야 을 에 니 하여 하려니 이 아!
이렇게 간곡히 사농공상을 무불통지할 인재를 양성하여 국력을 회복할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정부는 혁신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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