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와 3.1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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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는 보국안민(輔國安民)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창생(廣濟蒼生) 지상천국건설(地上天國建設)을 목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종교이다. 보국안민이란 백성이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도록 나라를 위해서 봉사하라는 뜻이다. 포덕천하란 사람마다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는 시천주(侍天主)진리를 세상에 널리 펴서 세상사람 모두가 사람을 한울님처럼 공경하며 살게 하라는 뜻이다. 광제창생이란 세상 사람들이 시천주신앙을 통해서 도성덕립(道成德立)을 이루어 모든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라는 뜻이다. 지상천국건설이란 세상 사람들 모두가 한울사람이 되게 하여 이 땅 위에 천국을 건설하라는 뜻이다.
조선왕조 말엽 천도교가 창도될 당시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라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백성들은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며 관리들의 횡포까지 감당해내야 하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각자위심(各自爲心)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어지러운 세상을 구해낼 새로운 도(道)를 찾아서 고심하던 수운(水雲) 최제우 선생께서 깨달은 진리가 바로 시천주(侍天主) 진리였다. 수운선생은 사람들이 ‘자신이 바로 한울’이란 시천주 진리를 알게 된다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천주 진리를 깨닫고 이를 실천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보국안민을 할 생각을 하게 되고, 포덕천하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며, 광제창생을 해서 지상천국을 건설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시천주 진리야말로 각박해진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최고의 방도라 생각하고 동학(東學)이란 이름으로 천도(天道)를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 동학이 오늘날 천도교(天道敎)이다. 즉 천도를 가르치는 학문이 동학이라면 천도를 가르치는 종교는 천도교인 것이다.
이처럼 천도교인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이란 목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에 나라를 위하는 일에는 기꺼이 목숨을 바쳐왔다. 1894년 갑오년에 일어났던 동학혁명(東學革命)이 그러했고, 1919년 기미년에 일어났던 3.1운동이 그러했다. 동학혁명은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근대적 민주의식을 당시 봉건제도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백성들의 가슴속에 처음으로 일깨워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고, 3.1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하에서 신음하던 백성들의 가슴속에 자주독립정신을 일깨워주었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러한 사건의 밑바탕에는 항상 동학의 시천주 사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천도교인들은 시천주 사상에 위배되는 억압에 대해서는 언제나 힘을 합쳐서 당당하게 저항해 왔다. 이것이 바로 천도교 정신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 소식을 들은 천도교 3세 교조 의암 손병희선생은 아침조회에서 “내가 앞으로 10년 안에 일본으로부터 반드시 나라를 되찾겠다.”고 말했다. 1911년 봄 고종황제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공(李堈公)은 의암성사를 찾아와 우이동 골짜기에 함께 가자고 했다. 그해 8월에 천도교중앙총부에서는 의암성사의 명으로 우이동 골짜기에 임야와 전답을 3만평 정도 사들였다. 그해 11월부터 수련도장을 짓기 시작해서 1912년 6월 19일 수련도장인 봉황각(鳳凰閣)을 준공했다. 의암성사는 이곳에서 전국의 천도교 두목 483명을 선발해서 1912년 4월부터 1914년 6월까지 3년에 걸쳐서 7차로 나누어 49일씩 이신환성(以身換性) 특별수련을 시켰다. 이신환성이란 육신관념에서 탈피해서 한울님 성령을 주체로 한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데 마음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되면 생사(生死)를 초월하게 된다. 이렇게 양성한 지도자들이 자신이 속한 교구에 돌아가서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면 우리민족 모두가 천도교를 믿어야 한다고 열심히 포덕운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천도교단은 1918년 말경에는 이미 300만이 넘는 우리나라 최대 종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의암성사는 국제정세를 살피러 떠났던 일본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1906년 1월에 귀국한 이후로 항상 일본의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면서 국제정세를 면밀하게 살피고 있었다. 국제정세를 살펴볼 때 1919년이 독립운동을 시작하기에 매우 적합한 때라고 판단한 의암성사는 1918년 12월 24일 인일기념식에 참석차 상경한 교단 간부들을 상춘원(常春園)으로 불러서 말하기를 “지금 우리 면전에 전개될 시국은 참으로 중차대하다. 이 천재일우의 호기를 우리의 무위무능으로 간과한다면 천추의 한이 될 것이다. 내 이미 계획한 바 있으니 제군들은 내 지시에 따르라. 보국안민이 되고 못되는 것은 새해(1919) 1월 5일부터 시작하는 49일 특별기도에 달려있으니 정성껏 시행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최측근 제자인 권동진, 오세창, 최린 세 사람을 불러서 우리민족 전체가 참여하는 평화적인 독립만세운동을 천도교가 중심이 되어서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의암성사의 명을 받은 세 사람은 기밀유지를 위해서 최린이 실무대표로 외부 인사들과 접촉한 후에 그 결과를 가지고 함께 논의하기로 했다. 최린은 중앙학교 기숙사로 찾아가서 평소에 친분이 깊었던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과 만나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계획을 설명하고 함께 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민족대표로 적합한 저명인사들을 물색한 후에 이들과 접촉해 보았다. 그러나 모두가 거절하는 바람에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래서 나온 대안이 종교계 인사들과 접촉해서 독립운동을 함께 하는 것이 좋겠다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 때 거론된 사람이 기독교 장로이면서 정주에서 오산학교를 경영하고 있던 이승훈이었다. 김도태를 통해 전달을 받은 이승훈은 2월 11일 상경했으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최남선은 만나지 못하고 대신 송진우와 현상윤을 만나 셋이서 계동 김성수를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계획과 그동안의 경과를 자세히 설명하고 천도교 측 운동에 기독교 측의 참가의향을 물었더니 이승훈은 이에 적극 찬동하고 동지를 규합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날로 서울을 출발하여 2월 12일 선천에 도착한 이승훈은 사경회에 참석한 장로교 목사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등 동지를 만나 서울의 운동계획을 설명하자 일동은 모두가 이에 찬성했다. 다시 14일 평양으로 나와 왜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기독병원에 입원하면서 장로교 목사인 길선주와 신홍식을 만나 동의를 얻었다. 그리고 2월 17일 재차 상경하여 최남선을 만나려 하였으나 연락할 방도가 없어 고민하던 차에 기독교청년회 간사인 박희도를 만나 기독교 측에서도 독립운동에 관하여 논의가 분분하다는 말을 듣고 2월 20일 박희도의 집에서 남감리교 목사 오영화, 정춘수, 북감리교 감리사 오기선, 신홍식 등 여러 사람이 회합하여 독립운동에 관한 방략을 서로 협의한 결과 서울과 각 지방에서 동지를 규합할 것과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을 결의하였다. 당초 함태영의 집에서도 이와 별도로 이갑성, 안세환, 오상식, 현준 등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협의를 하였으나 의견이 구구하여 결정을 내리지 못하였다.
2월 21일 최남선은 소격동 이승훈의 숙소로 찾아가 그동안 왜경의 주목 때문에 상봉치 못한 이유를 말하고 같이 재동 최린의 집으로 찾아갔다. 이승훈은 그동안의 경위를 말하고 전날 박희도의 집과 함태영의 집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고 기독교 측에서는 독자적으로 운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자 최린은 독립운동은 민족적 대사업인 만큼 절대로 통합해야 된다고 역설하였다. 이에 대하여 최남선도 이승훈도 동의하면서 내일 기독교 측과 다시 상의하여 대답하겠다고 하면서 어제 회의에서 운동자금 조달문제가 가장 난제로 거론되었다고 하면서 천도교에서 5천원을 융통해 주면 좋겠는데 그것이 어렵다면 3천원만이라도 변통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최린은 천도교에서도 은행에 예금하였던 돈을 일전에 왜경에게 전부 압수당하여 곤란 중에 있으나 될 수 있는 대로 주선해 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날 저녁 최린은 상춘원에 가서 성사님을 뵙고 그동안의 경과를 보고하고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운동자금에 대해 말씀드리자 성사께서는 기독교 측에서 요구한 5천원을 융통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하시면서 “춘암에게 말할 터이니 돈을 받으면 곧 기독교 측에 보내시오.”라고 승낙하였다. 다음날 2월 22일 천도교 금융관장 노헌용이 5천원을 최린의 집으로 가져왔다. 최린은 즉시 이승훈이 묵고 있는 숙소로 찾아가 5천원을 직접 교부하였다.
기독교 측에서는 22일 밤 이갑성의 집에서 이승훈, 박희도, 함태영 등 여러 사람이 모여 독립운동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을 협의한 끝에 천도교 측의 운동방법을 정확히 탐문한 후 합동여부를 결정하기로 하고 이 교섭을 함태영, 이승훈 양인에게 일임하였다. 다음날 저녁 함태영과 이승훈이 재동 최린 댁을 방문하여 전날 기독교 측의 회의결과를 설명하고 독립선언보다는 독립청원을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고 말했다. 이에 최린은 우리의 자주적 정신에 의한 독립운동이므로 독립선언이라야 옳다고 주장하자 두 사람은 이에 찬의를 표하고 동지들과 상의 후에 회답하기로 하였다. 그날 밤 이승훈, 함태영 두 사람은 함태영의 집에서 오기선, 박희도, 안세환 등 여러 사람과 숙의한 결과 천도교 측과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결정하고 함태영, 이승훈 두 사람을 기독교 측 대표로 선정하여 제반 교섭을 일임하였다. 2월 24일 이들 두 사람이 최린 댁을 방문, 기독교 대표자격으로 천도교와 합동하여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을 하기로 발표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합동이 공식으로 성립되었다. 최린은 의암성사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의암성사는 양대 종교단체의 합류는 이번 민족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라 하여 매우 기뻐하였다.
2월 22일에 1월 5일부터 시작한 49일 기도회가 끝난 후 보고 차 상경한 교구장들과 우이동 봉황각 기도회에 참석했던 중앙총부 간부들에게 의암성사는 말하기를 “우리가 만세를 부른다고 당장 독립이 되는 것은 아니요. 그러나 겨레의 가슴에 독립정신을 일깨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꼭 만세를 불러야 하겠소.”라고 했다. 그리고 이번 거사에는 기독교, 불교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하시면서 운동의 성격과 운동추진에 따른 제반 사항 등을 설명하고 추후 독립선언서의 발송 등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갈 것이니 각 교구에 내려가 준비에 착수하도록 지시하였다.
당시는 일제가 종교 이외의 단체는 모조리 해산시켰기 때문에 일반 사회단체를 포섭할 수 없었다. 그리고 종교단체 중에서 불교와 유교의 참가 없이는 일원화된 통일체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에 2월 24일 밤 최린은 평소부터 친교가 있었던 신흥사 승려인 한용운을 계동 자택으로 찾아가 그동안의 경과를 밝혔더니 즉석에서 불교 측 동지들과 협의하여 공동으로 참가할 것을 승낙하였다. 한용운도 기독교 측과의 연합을 대단히 기뻐하였으나 유림측의 참여가 없음을 못내 섭섭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 후 한용운은 불교 측 동지들과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시기가 급박하고 일경의 감시가 심해 한용운, 백용성 두 사람만 민족대표로 참가하기로 하였다. 다만 유교 측을 참여시키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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