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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옥경사모님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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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박노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435회   작성일Date 19-02-26 07:45

    본문

    ❶ 장례식 그 후   300만교도와 교단의 간부들이 비록 주옥경님 보다 나이는 위일망정 모두가 성사님의 사모님으로서 또한 광복투쟁을 함께해온 동지로서 사모님을 우러러 받들고 존경하니 성사의 환원 1주기를 맞아 추모강연회를 하고 우이동 성사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청년당은 천도교의 실천 강령인 정신개벽. 사회ㅣ개벽 민족개벽의 3대 개벽을 실천해나가 각오를 다지며 농민부. 노동부. 청년부. 학생부. 여성부. 유 소년부. 상민부의 7대 부문 운동을 추진하며 우리나라 신문화 운동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봉황각 경내에 있는 빨간 벽돌 2층 건물 이 건물은 1921년 대교당과 함께 건축한 천도교 중앙총부 사무실이었던 이 건물에서 어린이. 개벽. 신인간. 신여성 등의 잡지를 만들어낸 신문화운동의 산실이기도한 이 건물은 1960년 이곳 봉황각 앞뜰로 본 형태 그대로를 살려 이전해 온 것이다. 이때에 주옥경님은 여성부의 선두에서 내수단이라는 이름으로 여성계몽 운동에 앞장서니 이것이 한국 여성운동의 시초이다.   ❷ 일본유학   이렇게 성사님 환원 후 천도교 여성의 지적. 신앙적. 생활적 향상을 위하여 5년간 헌신하시던 주옥경님은 잠시 일선에서의 여성운동을 접으시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유학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아무리 모든 교인들이 성사님의 사모로서 존경하여 받들지만 아직도 앞길이 창창한 33세의 젊은 여성으로서 언제까지나 천도교 여성의 주장으로서만 살 수없는 까닭이요 또한 시대의 변화를 보고배우며 세계정세에 대처하는 새로운학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일본으로 건너간 주옥경은 일본 어학원에 입학하여 어느 정도 일본말을 익힌 후 에 있는 정칙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장차 미국에 유학하여 근대화하는 선진국의 문물과 제도를 배워 짓밟히는 조국에 이바지하고자하는 일념으로 교회에서 보내주는 생활비를 절약하려고 교인이며 동지인 이종숙과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며 열심히 공부했으나 점점 어려워지는 교회의 사정으로 미국유학의 포부를 접고 정칙학교 영문과 2년을 수료하고 1929년 귀국한다.   ❸ 귀국 그리고 여성회 활동   이후로 여성들의 권리향상을 위하여 1930년 2월 6일부터 서북지방 11곳을 순회하신다. “내가 오늘날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유형무형의 큰 도움을 받은것은 돌아가신 손선생님의 덕이지요. 지금이나 앞으로도 당신이 주지를 받들어 한평생을 천도교에 바치는 동시에 조선사회를 위하여 미약하나마 도우려합니다.”라고 귀국 후 가진 매일신보와의 인터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주옥경은 성사님이 주도하신 3.1광복 투쟁의 시작단계에서는 일경을 감시하여 동지들을 안내하고 수감 중 옥바라지와 병보석 후 상춘원에서의 병수발 환원 후 그 뜻을 받드는데 있어 정성()과 공경()과 믿음()을 다하신 천도교 모든 여성들의 귀감이며 우리민족 모든 여성들의 귀감이 되신 어른이다. 어느 정경부인이 이토록 몸과 마음을 다 바쳐 그 뜻을 함께하여 거사를 도우시고 옥바라지 병수발에 청춘을 바치고 사후 그 뜻을 받드는데 일생을 바칠 수 있을까. 1932년 잡지 신여성의 끈질긴 요청에 의하여 ‘과부정조론’이라는 짧은 글이 실린다. “글쎄요. 일반적으로 이를 말 할 때는 예전과 달라서 다시 개가하기를 제창하고 있지만 나 개인으로서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남들이야 어찌하던지 자기 한사람의 성격과 의지에 달린 줄 압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이 아무리 개가하는 것이 옳다고 열렬히 주장한다 하여도 당사자로서는 그것이 옳지 못하다고 생각하던지 또는 자기 양심이 이를 부정한다면 이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본건사상의 전제가 내 머리를 좌우 한다 기 보다 당자 자신이 죽기로서 이를 지켜야 한다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러니까 과부의 정조문제는 요컨대 당사자 자신의 결심 여하에 있을 줄 압니다. 이렇게 주옥경님은 오로지 일편단심 성사님을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성사님의 뜻을 이어 천도교의 발전과 조선의 광복만을 생각하며 살아오신 것이다. 참으로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자라는 자들의 저급한 호기심은 3.1광복투쟁의 대표 민족의 스승 의암손병희 선생의 사모님이신 주옥경 여사님에게 까지도 저급한 호기심을 발동시켜 청춘과부임을 기화로 과부 정조론 에 대하여 인터뷰를 청했다는 사실 자체가 씁쓸한 마음을 일게 한다.   ❹ 광복 그리고 김구 임시정부주석 손병희 선생 묘소참배   1945년 11월 23일 주한미군사령관 하지의 주선으로 c 47군용기 편으로 귀국한 임시정부의 주석 김구는 귀국 후의 바쁜 일정이 대강 끝나자 1946년 2월 28일 의암 손병희 선생의 묘소를 찾는다. 임시정부주석 김구. 김규식박사 .이시영. 유동열. 엄항섭. 안미생. 장준하와 젊은 수행원 등, 3.1 광복투쟁의 주역이었던 권동진 과 오세창 등 일행, 추운겨울날 우이동 골짜기 손질을 제대로 하지 못한 엉성한 묘 앞에 선 일행의 가슴은 너무나도 슬프다. 먼저 백범선생이 묘소 앞에 정중히 머리 숙이고 읍하자 누군가의 입에서 흐으윽 울음이 터지고 한 옆에 나란히 서있던 권동진. 오세창 두 분이 와락 껴안고 기쁨도 아닌 슬픔만도 아닌 감격을 터뜨렸다. 여보! 이제 정말 내 땅을 찾았구려! 나는 어느 분의 목소리인지 구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도 아닌 비장한 오열이었다. 내가 그리워하던 조국의 숨소리를 이제 이곳에서 듣는 것이었다. 그렇다. 조국은 숨어서 울고 있었다. 그리고 아직도 그 슬픔을 다 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허공이라도 미친듯이 치고 싶었다. 차례로 머리를 숙이고 안미생 (안중근의 조카 김구선생의 며느리) 여사가 들고 온 꽃다발을 받아 묘지에 놓아 드렸다. 이렇게 대한민국입시정부 주석 김구는 말없이 무덤 속에 계신 손병희 선생을 만나고 있었다. (이상 장준하의 돌 베게에서 발췌)   ❺ 6.25전쟁   1950년 6.25 전쟁이 터지고 충북진천 피란지에서 환도 후 서울로 올라오신 주옥경님은 어느 듯 1955년 1월 21일 환갑을 맞는다. 21세 꽃다운 나이에 의암성사님을 만나 5년이라는 짧은 기간을 부부로서 살아 본 후 20개월 19일간의 고달픈 옥바라지에 17개월간의 병수발 그리고 28세부터 환갑이 되기까지 33년을 오로지 성사님의 유업을 이어 조국의 광복과 천도교의 발전 이 나라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바쳐온 일생이다.   < >     원래 장수는 끝없이 큰 것이지요. . 사람들은 어찌 살아온 햇수만 세일까요.   나이 많으신 사모님이 우리교단에 계시니 크나큰 복입니다.   성사님이 세상을 떠나셨다는 것은 그 배필의 인연 쪽일 뿐이지요.     만고에 드믄 정조는 길이길이 달처럼 맑고 밝은 것입니다. 그 당시 배필의 사랑이야 한때의 연기처럼 사라지지요.   늘그막에 사모님이 나으신 자녀가 없다고 한탄하지 마십시오. 백만 신도가 슬하에 가득할 것 입니다.   1958년 포덕100주년에 대비하여 성사님의 뜻을 받들어 천도교내 대 교당에 경운학원을 열고 불우한 환경으로 진학을 못한 8세에서 20세까지의 초등학교 과정을 무료로 가르치기 시작하여 이듬해 포덕 100주년을 기하여 1회 졸업생을 배출 한다. 당시 경운학원의 재학생수는 150명에 이르렀고 포덕100년에 개원한 유치원은 3회 졸업생까지 배출하였으나 1960년의4.19혁명, 1961년의5.16등 시국이 불안한데다 분단 이후 침체된 교세로 인하여 영리법인이 아닌 무료교육기관으로서 더 이상 이끌어갈 여력이 없어 문을 닫는다.   ❻ 의암 손병희 선생 기념 사업회   1959년 의암 성사께서 환원하신지 어언 40여년이 가까워 오는데 일제하의박해 6.25 후의 혼란기 등 격동의 세월 속에 의암 성사 묘소는 묘비하나 없이 퇴락해가고 있었다. 이때 대한제염의 사장이며 대한상공회의소 의원이었던 의암 성사의 조카사위 김상근이 공진항 교령을 방문하여 이를 상의하니 이는 천도교만의 독자적 사업으로 할 것이 아니라 범사회적 운동으로 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동덕여대 조동식 학장에게 이 뜻을 전하니 조동식도 이 뜻을 흔쾌히 받아드리고 묘비건립과 묘소보수 작업을 범사회적인 의암 손병희선생 기념사업으로 추진하는데 의견 일치를 보았다. 손병희 선생기념사업은 동덕여대 학장인 조동식이 가장 큰 힘을 기울였으니 조동식이 이일에 적극 발 벗고 나선 것은 일제하 청년시절에 동덕 여학교를 운영하며 재정적인 어려움 속에 폐교의 위기에서 의암 성사님의 지원으로 학교를 유지할 수 있어 오늘에 이른 큰 은혜를 입은바 어찌 이 어른의 기념사업에 무심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의암 성사의 탄신일 4월 8일을 기해 중앙 대교당 에서 발기 총회를 겸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기념사업회는 4월 23일 상임위원회를 열고 고문을 선임하니 국회의장 이기붕. 부통령 장면. 대법원장 조용순. 33인 유족대표회장 이갑성. 전부통령 함태영. 전 대법원장 김병로. 내무부장관 최인규. 문교부장관 최재유를 추대하였다. 이 자리에서 김상근은 1 천만 원을 희사하였고 시사시보는 3천만 원을 희사하였다. *************기념사업의 목적으로는 ****************** 1. 묘소보수 2. 묘비건립 3. 의암성사 전기 간행 4. 기념관건립 5. 동상건립 다섯 가지를 정했다. 대표들이 추모사를 하고 33 인 유족회대표 이갑성이 감사의 인사를 끝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길로 우이동 의암성사 묘소를 참배했다. 1956년 12월 24일 인일기념일에는 창도100주년 기념사업준비를 하는 원주직 간담회에서 봉황각을 수도원으로 사용하기로 결의하고 명칭을 수도원이라 결정하니 이는 의암성사의 로움을 한다는 의미이다. 해가 바뀌고 주옥경 사모님을 의창수도원에 옮겨 사시게 하니 주옥경님은 이제 비로소 묘소일망정 스승이요 남편인 의암성사의 옆에서 함께 생활 하게 되었다. 매일 묘역 정비현장을 둘러보시는 가운데 1959년 10월 8일 오후 2시 묘소 앞에서 묘비 제막식이 거행되니 3부 요인과 각계각층의 대표 학생. 시민. 교인 등, 2 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육군군악대의 주악과 예포소리가 우렁차게 우이동 계곡에 메아리쳤다. 조동식회장. 주옥경님. 33인 유족회장. 문교부장관이 묘비를 제막하니“ 라는 한문 글씨가 뚜렷하다.   ❼ 이승만대통령 묘소참배   묘비제막식을 마친지 보름후인 1959년 10월23일 오후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인 이승만 대통령이 묘소를 찾아와 80고령에 묘소 언덕길을 올라 화환을 올리고 묵념을 한 다음“위대한 분 이 였어.”라고 하시며 주옥경님의 손을 잡고 한참 동안 의암 성사의 유덕을 추앙 하였다.그리고 지난번 묘비 제막식 때 공무가 바바 참석지 못한데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였다. 사회각계의 성금과 조동식. 김상근. 김학서등의 헌금에 이어 박정희 대통령도 1961년 9월 2일 금1백만 원을 보내며 50만원은 동상 건립에 50만원은 주옥경님의 생활비에 보태라고 당부 하였다. 마침내 여러 사람들의 정성으로 환원43주기인 1965년 5월 19일 독립만세의 진원지인 탑골공원에서 의암손병희 선생 동상건립식이 시작되어 1966년 의암 성사 환원 44주기인 5월 19일에 동상제막식을 마칠 수 있었다. 이에 주옥경님은 답례로 묵화 한 폭을 그려들고 청와대를 방문하니 묵화 를본 박정희 대통령은 묵화가 70 이 넘은 주옥경님이 직접 그렸다는데 너무나놀라워 하였다. 그 솜씨가 너무도 훌륭하였기 때문에 감탄한 대통령은 장개석이 선물한 필묵 한 벌을 선사하였다. 의암성사 환원 45주기인 1967년 마침내 420 면의 의암성사 전기가 완간되어 천도교 중앙 대교당 에서 45주년 추모식 및 출판기념회가 열리니 대통령을 비롯 각계각층의 화환과 정부기관의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동아 방송의 중계로 성대하고 경건하게 의암성사의 영전에 전기를 헌정했다.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성사님을 만나 겨우 7년의 세월을 고초 속에 함께하고 이제 40여 성상을 33인 유족회회장 광복회부회장직을 통하여 오로지 성사님 유업을 받들고 천도교 여성회를 통하여 이 나라 여성들의 의식 향상과 여권운동에 이바지 해오셨다.   ❽ 아름다운 은퇴   천도교는 이에1968년 천도교여성회장이신 주옥경님에게 라는 최고의를 올렸다. 1971년 3.1절 52주년을 맞아 서울시에서 주도하는 3.1정 기념행사에서 주옥경님은 유족회장으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니 낭랑한 음성으로 또렷하고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는 모습을 보는 청중들은 저분이 77세나 되신 분이라는 데 모두가 놀라워했다. 1971년 4월 5일 천도교 중앙총부는 천도교의 최고예우 직 종법사로 추대하니 연세가 77세이시다. 이해 6월 20일 천도교 여성회 중앙확대위원회가 소집되고 주옥경님의 완곡한 뜻을 받들어 그동안 천도교 여성회의 대표직을 모두 사임하고 은퇴하시니 여성회 에서는 명예회장으로 추대하였다. 1974년 3월 25일 천도교 여성회창립 50 주년을 맞아 여성회 중앙본부는 50 주년 기념식을 가지고 주옥경님에게 감사패와 공로 메달을 헌정했다. KBS 와 중앙일보 등, 각종 언론이 기념식과 주옥경님에 대한 기사를 실으니 성사님 환원후 50 여 성상을 학처럼 살아오신 주옥경님께 드리는 사회의 보답이리라 봉황각에 옮겨 사신지도 어느새 20 여년이 되었다.   ➒ 군자는 군자를 알아본다.   봉황각에서 성사님의 묘소와 그 정신을 지키며 사시는 주옥경님을 교인들이찾아 뵈면 “옛날에는 인물 많은 천도교. 돈 많은 천도교. 회의 잘하는 천도교라 했지! 그때는 정말 대단 했어”라고 혼자 독백하시며 지내시는 동안 어느새 80세가 되셨다. 시중을 들어드리는 김재선 내외가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여성회원들과 교단간부들이 자주 찾아뵙지만 피붙이 하나 없이 외딴산골에 큰집에서 여생을 보내시는 주옥경님에게 말벗이 되어 주시고 아이들의 재롱을 보여주신 고마운 집안이 있었으니 개울건너 초가집 차 씨 어른 댁이다. 한학이 깊으시던 차 어른과 나누는 시국 이야기며 옛시조나 종교에 관한 이야기 등, 꽃다운 청춘을 광복투쟁 하시는 성사님을 그림자처럼 따르며 어려운심부름, 찾아오시는 손님접대 다 해내시고 모진간난고초 다 겪으시며 오로지 성사님의 뜻을 이어 교회와 민족을 위해 일하시다 노년을 봉황각에서 외로이 지내시는 주옥경님에게 차 어른 댁에서는 언제나 존경하며 별식을 하면 청하여 대접하고 보내드리며 지극정성으로 따뜻이 보살 펴드리니 역시 ‘군자가 군자를 알아본다.’는 옛말이 틀리지 않는가보다. 특히나 차 어른의 손자 어린 차승연을 귀여워하시던 주옥경님의 봉황각과 차 어른 댁의 연락병 역할을 하였던 차승연 노인회장님이 기억하는 주옥경님은 언제나 손에 염주를 드시고 자주 성사님 묘소 앞에 기도를 드리셨다. 고한다. 세상에 어느 조강지처가 주옥경님 보다 더 남편을 잘 보필하였으며 어느 정경부인의 정절이 주옥경님의 60여 성상 일편단심의 정절보다 더 고귀 할 수 있을까? 1983년 12월 28일(음) 86세의 생신을 맞아 교인들이 지극한 정성으로 생신을 차려드린 후 모시는 분이 새로 오셨다.   ➓ 꺼져가는 촛불 아름답던 그 생애   흐르는 세월은 그 기품 있고 아름다우시던 주옥경님도 점점기력이 쇄해지시고 정신이 혼미해 지시니 자주 봉황각 숲속을 헤매며 길을 잃어 보살펴드리는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하셨다고 한다. 성사님을 모시던 짧은 세월, 그리고 길고긴 인고의 세월 아무리 교인들이 지극정성으로 받들어드리기로 외롭고 고달팠을 가슴속 사연을 터놓고 하소연할 피붙이하나 없이 인내와 자존심으로 버텨 오신 그 많은 세월 성사님의 명예에 조그만 흠집이라도 생길 가 조심조심 학처럼 고고하게 살아오신 주옥경님 이제 그 많은 인고의 세월을 기품 있고 당당하게 살아온 주옥경의 생애가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1984년 1월 17일 오전 6시40분 주옥경님은 유언조차 없이 언제나 손에서 놓지 않으셨던 염주를 손에 꼭 쥐신 채 눈을 감으시니 이날은 음력으로 12월 23일 이었다. 87세의 생신을 닷새 앞두고 스승님이자 사랑하는 님, 그님이 일생을 바쳐 사랑했던 조국과 그 민족, 천도교라는 종교를 통하여 이룩하려던 지상천국의 꿈을 따르시던 수의당 주옥경님의 순애와 순국의일생은 막을 내렸다. 이에 천도교중앙총부는 천도교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기로 정하여 봉황각에 빈소를 차리니 주옥경님의 환원 소식에 최규하 국정자문 위원을 비롯 국회의원 이재형. 박영수. 이종찬. 홍성우. 이규정. 김상길. 광복회장. 33인.유족회장.원호처장. 충북지사. 도봉구청장. 3.1여성동지회. 원불교. 고려대학교. 동덕여대. 성신여대를 비 롯 각계각층의 화환괴 꽃바구니 등, 조화로 봉황각 뜰이 가득 찼다. 의암성사의 묘비 건립 및 동상건립에 참여했던 90 고령의 이응준 장군과 유진오 박사도 빈소를 찾아 고인의 유덕을 기리니 오로지 한길 님의 뜻을 따르던 그 길이 결코 외로운 길만은 아니었다. 21일 봉화각 별채에서 발인식을 거행하였다. 장례행렬은 앞뒤로 경찰경호차의 호위를 받으며 오후1시에 우이동 성사님 묘역 입구에 당도 영구는 성사님 묘역 동쪽 기슭에 마련된 유택으로 모셔져 참례자들의 애도 속에 임운길 집례로 정중히 라는 을 덮은 후 하관식과 함께 장례절차를 마쳤다. 천도교 여성회 임원들 모두가 장례기간동안 상복을 입어 고인에게 조의를 표하였다. 의 로움을 지킨다는 뜻의 를 오롯이지켜 내신 수의당 주옥경님의 생애는 이렇게 막을 내리니 붉은 옥같이 영롱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일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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