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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공자(孔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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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241회   작성일Date 20-03-12 16:58

    본문

    2. 공자(孔子)

     

     공자는 옛날 춘추시대 중국 노나라 창평향(昌平鄕)에서 아버지 숙량흘(叔梁紇)과 어머니 안징재(顔徵在)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성은 공이오 이름은 구()요 자는 중니(仲尼)라고 하는데, 학문과 도덕이 높아 유교의 조상이 되는 동시에 세계적 성인의 하나로 꼽혀 오고 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밑에서 자라났는데 어렸을 때에 장난을 하는데도 여러 가지 제기(祭器)를 차려 놓고 예법을 익히는 등 보통아이와 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사실 공자는 상나라 왕실의 일원으로 주나라 무왕에게 봉토를 받아 상나라 역대왕들의 제사를 받든 송나라 시조 미자계의 직계후손으로 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상나라 즉, 은나라는 우리 동이족이 세운 나라이고 은나라의 왕족인 미자계의 후손인 공자는 동이족이라 할 수 있다.)

     제자들은 그를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성자요 인자(仁者)라고 추존하였지만 공자 자신은 결코 성자로 자처하지 않고 무슨 일에나 분발할 때에는 먹는 것도 잊어버리고 즐거울 때는 무슨 근심이든 모두 잊어버려 늙는 것조차 모른다고 하는 동시에 오직 배우기를 싫어하지 않고 남을가르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이를 학이불염(學而不厭 誨而不倦)이라 한다), 스스로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고(志學), 30에는 의지가 확립되었으며(而立), 40에는 어떠한 사물에든지 의혹되는 일이 없고(不惑), 50에는 천명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며(知天命), 60에는 무엇이든 귀로 들으면 순리대로 통하고(耳順), 70에는 마음에 하고 싶은 일을 해도 조금도 법칙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고(從心所欲不踰矩-줄여서 從心), 즉 스스로 노력하여 향상의 길을 찾았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는 노자에게 묻고, 음악은 장홍(萇弘)이라는 사람에게서 배웠고, 거문고는 사양(師襄)이라는 사람의 지도를 받아 일정한 선생을 두지 않고 무엇이든지 배울 만한 것이 있으면 힘써 배웠던 모양이고, 특히 늙어서는 주역(周易)을 좋아하여 가죽으로 엮은 책끈이 세 번씩이나 끊어지도록 공부하였다(이를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 함)고 하니, 그가 학문을 얼마나 좋아하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벼슬은 처음에 위리(委吏)가 되어 맡은 바 임무를 틀림없이 공평히 처리하였고 사직(司職吏)가 되어서는 축산을 장려하여 번식하도록 하였으며, 중도재(中都宰)가 되어서는 사방(四方)의 모범이 되었으며, 그 후 노나라의 사공(司空)을 거쳐 대사구(大司寇) 벼슬에 이르러서는 정승 일까지 대신하게 되었는데 그 당시 정치를 어지럽히는 소정묘(少正卯)라는 대부(大夫)를 사헝에 처하여 노나라의 정치를 단시일에 바로 잡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뜻이 맞지 않아 벼슬을 그만두고, 전후 70여국을 주유(周遊)하면서 가는 곳마다 임금을 달래어 보기도 하고, 혹은 제자들과 문답을 하면서 도를 펴 세상을 바로 잡아보려고 하였지만 이것이 뜻대로 되지 않았었다. 한두 가지 예를 들면 제나라에 갔었을 때에 경공(景公)이라는 임금이 정치에 대하여 물은 일이 있었다. 공자는 대답하기를 임금이 임금 노릇을 잘하고 신하가 신하노릇을 잘하며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잘하고 아들이 아들 노릇을 잘하는 것이 정치의 도(이를 군군 신신 부부 자자(君君 臣臣 父父 子子)라고 함)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경공은 참으로 임금이 임금 노릇을 못하고 신하가 신하 노릇을 못하며, 아버지가 아버지 노릇을 못하고 아들이 아들 노릇을 못하면 아무리 먹을 것이 많다고 할지라도 내가 먹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말로는 감복하였지만 실지로는 써주지 않아, 그 후 제나라는 대를 거듭할수록 더욱 어지러워져 끝내 신하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또 어느 때에는 노나라의 정치를 좌우하던 계강자(季康子)라는 사람이 정치를 물었을 때에 공자는 정치라는 정자(政字)는 바를 정자(正字)의 뜻이니 당신이 몸소 솔선하여 바르게 하면 누가 부정한 일을 하겠는가, 또는 그 몸이 바르게 명령하지 않아도 잘 행해지고, 그 몸이 바르지 못하면 아무리 명령한다 할지라도 따라 오지 않는다고 한 것이라든가, 또는 그의 제자 자공(子貢)이 정치를 물었을 때에 먹을 것을 충분히 마련해 주며, 군대를 강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백성들이 믿어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믿을 신()를 강조한 것이라든가, 또는 언젠가 태산곁을 지날 때에 한 부인이 무덤가에서 슬프게 통곡하는 것을 자로(子路)라는 제자를 시켜 그 까닭을 물어보았더니 자기 시아버지가 전에 범에게 물려 죽고 몇 해 전에 남편이 또 물려 주고 이번에는 아들이 또 물려 죽어 슬프게 운다고 하므로 그러면 왜 이곳을 떠나지 않느냐고 하였더니 이곳은 혹독한 정사(政事)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공자는 제자들에게 향하여 너희들은 이것을 잘 기록해 두어라 혹독한 정치는 범보다도 무서운 것이니라(이를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고 함)한 것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는 유명한 말들이다.

     공자는 이렇게 주유천하(周遊天下)하는 가운데 난국(亂局)을 당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라에 갈겨 광()이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에 그 지방 사람들은 전에 양호(陽虎)라는 사람에게 폭행을 당한 일이 있었는데 공자의 용모가 양호의 용모와 비슷한 것을 보고 양호가 왔다고 하여 못가게 하는 동시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다가 양호가 아닌 줄을 알고 놓아 준 일이 있었으며 송()날에 갔을 때에는 제자들과 함께 큰 나무 밑에서 예법을 익히고 있었는데 환퇴(桓魋)라는 자가 공자를 죽이려고 그 나무를 베어 넘어뜨릴 때에 간신히 화를 면한 일이 있었으며, ()나라에 갔을 때에는 그곳 사람으로부터 동문밖에 피폐한 꼴로 서있는 모습이 마치 초상집 개와 같더라라는 비평을 듣기도 하였으며, 그 후 초()나라 왕의 부름을 받고 진()나라와 채()나라를 거쳐 초나라에 가던 길에 진나라와 채나라 사람들이 만약 공자가 초나라에 가면 자기 나라에 위협이 되지 않을까하여 못 가도록 공자일행을 포위하였기 때문에 7일 동안을 먹지도 못하여 기운이 빠질 대로 빠져 제자들 가운데는 선비라는 것은 이렇게도 궁한 것인가고 불평을 털어 놓는 이가 있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이대로 굶어 죽을 것이 아니라 죽기는 마찬가지인데 싸워야 한다고 울뚝불뚝 덤비는 사람도 있었지만, 공자는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가 언제나 푸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궁할 때에야 비로소 선비의 가치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니라 또 언제인가 내가 아침에 도를 들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고 하지 않았던가(이를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 함), 즉 옳은 마음을 가지고 옳은 행동을 하다가 아무 대 죽은 들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리고 죽고 사는 것은 모두 천명이니 그리 근심할 것이 아니니라하고 거문고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며, 또 평상시에 있어서도 나물먹고 물마시고 풀을 베고 누었어도 낙()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며 불의한 짓을 하여 부귀하게 되는 것은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은 것이라고, 즉 부귀를 누가 싫어하리오마는 그러나 나쁜 짓을 하여 부귀하게 되는 것보다는 아무리 가난하게 살지라도 옳은 행동으로 살아가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하고 또 즐겁다고 안빈낙도(安貧樂道)를 강조하였던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도를 펴보려고 무진 애를 써보았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가 행해지는 것도 천명이오 도가 폐지되는 것도 또한 천명이라고 하면서 68세의 늙은 몸을 이끌고 고국인 노나라로 돌아와 시() () () () () 춘추(春秋)를 다듬으며 삼천제자를 가르치는데만 힘을 썼는데 신통육예(身通六藝)한 사람은 칠십이인이며, 그 중에서도 공문십철(孔門十哲: 덕행엔 안연(顏淵), 민자건(閔子騫),염백우(冉伯牛),중궁(仲弓) 언어엔 재아(宰我),자공(子貢) 정사엔 염유(冉有),계로(季路) 문학엔 자유(子游),자하(子夏))이 유명하였다.

     공자는 73세에 세상을 떠난 후 후세 사람들이 그를 추존(推尊)하여 당나라 때에는 문선왕, 송나라 때에는 지성문선왕, 원나라때에는 대성지성문선왕, 명나라 때에는 지성선사, 청나라때에는 대성지성문선선사공자라고 하다가 다시 지성선사공자라고 고쳤는데, 우리나라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 향교를 두어 공자의 학문을 닦으며 공자를 제례하여 왔던 것이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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