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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12-왕희지(王羲之)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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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956회   작성일Date 20-04-17 09:19

    본문

    12. 왕희지(王羲之)

     

    왕희지(王羲之)는 진()나라 때 회계(會稽)사람으로 자()는 일소(逸少)라고 하는데 성격을 아첨할 줄 모르는 충직한 편이었고, 어렸을 때에는 말이 너무나 떠듬떠듬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처음 글씨공부를 할 때에 못가에서 하였는데 글씨를 얼마나 많이 썼던지 못에 있는 물이 모두 꺼멓게 되었다고 하며 벼슬은 여러 계단을 거쳐 우군장군(右軍將軍)과 회계내사(會稽內史)에 이르렀는데 보통 왕우군(王右軍)이라고도 부르고 있으며 그의 글씨는 특히 초서(草書)와 예서(隸書)에 유명하여 왕희지의 필적 또는 우군묵적(右軍墨跡)이라고 하면 고금(古今)을 통하여 제일로 치는 동시에 그의 아들 왕헌지(王獻之)도 글씨로 유명하여 두 사람을 합쳐 이왕(二王)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언제인가 집산(戢山)이라는 곳에 갔을 때에 한 노파가 부채를 팔고 있었는데, 왕희지는 그 부채에 각각 다섯자씩을 써 주었다. 그 노파는 부채를 버렸다고 투덜대면서 야단을 하였다. 이때에 그는 다른 말 말고 왕우군의 글씨라고만 말하며 값을 많이 받아내라고 하였다. 노파는 시키는 대로 하였더니 뜻밖에도 사람들임 낳이 몰려와 서로 값을 올려가며 앞을 다투어 샀기 때문에 톡톡히 재미를 보았던 것이다. 그 노파는 다시 부채를 한아름 안고 왕희지를 찾아가 또 글씨를 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그가 빙그레 웃기만 하고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난정서(蘭亭序)와 악의론(樂毅論)과 황정경(黃庭經)을 지었는데 특히 난정서를 쓸 때에는 친지(親知)와 명사(名士) 4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목욕재계(沐浴齋戒)하고 잡신(雜神)을 제거하는 의식을 거행한 후 누에고치로 만든 종이에 쥐수염으로 된 붓으로 온 정력을 다하여 썼다는데 아름답기도 하고 굳세게 보이기도 하여 다시 없는 훌륭한 글씨였다고 한다. 그 글은 스물여덟줄에 삼백 스물넉자로 되었는데 같은 글자가 나올 때에는 체()를 달리하여 썼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자가 가장 많아 스무군데나 되는 것을 각각 다르게 써서 꼭같은 글씨는 한자도 없었다고 하니, 그 절묘한 필치(筆致)는 여기에서 추측할 수 있는 동시에 왕희지 자신도 그 글을 다 쓴 후에 써 보았지만 그런 글씨는 되지 않았다. 후일에도 수백 수천번을 써 보았지만 역시 그런 글씨를 다시는 써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실로 입신(入神)의 묘()를 극()하였다고 할까, 우군(右軍) 자신도 이것을 무척 애지중지하여 후손들에게 대대로 보관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거위()를 무척 좋아하였던 모양이다. 언제인가 산음(山陰)지방에 갔을 때에 한 도사(道士)가 거위를 기르고 있었는데 이것을 본 우군은 그것이 마음에 들어 돈을 주고 사려고 하였다. 그랬더니 그 도사의 말이 도덕경(道德經)을 써 주면 거위는 그저 드릴 터이니 이렇게 서로 맞바꾸자고 하였다. 그리하여 우군은 그 자리에서 도덕경을 다 써주고 거위를 전부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는 만년(晩年)에 경사(京師)에 있는 것이 싫증이 나서 고향인 회계(會稽)에 내려가 친우(親友)들과 함께 산수를 즐기면 낚시질로 세월을 보내다가 59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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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역시 글씨를 좋아하고 또 글씨를 잘 썼던 것으로 보인다. 문헌에 의하면 임술년에는 홍해 손봉조의 집에서 글씨를 썼다든지, 또는 계해년에는 영천 이필선의 집에서 아이들에게 글씨 쓰는 법을 가르쳤다든지, 이와같이 각지 도인(道人)댁을 순회하면서도 글씨를 놓지 않았을 뿐 아니라 용담 자택에 돌아와서도 당신의 아이들과 여러 제자들에게 글씨 공부를 시켰다는 기록이 있으며 때로는 손수 필법(筆法)을 지으시고, 또 때로는 액자(額字)를 써서 여러 도인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선전관(宣傳官) 정운구가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를 체포하기 위하여 먼저 부하인 양유풍(梁有豊), 고영준(高英晙) 등을 시켜 실정(實情)을 탐지한 대목에 복술(福述)의 앉아있는 자리 앞에는 육언(六言)으로 된 글귀 즉 과거볼 때의 부()와 비슷한 것을 쓴 종이가 수십장 쌓여 있었는데 한 장에 십여 구씩 적혀 있었고, 또 벽애도 많은 글씨가 붙어 있었는데 어떤 것은 자획이 범서(梵書)와 비슷한 것도 있었다는 기록이 관변(官邊)에 나오는 것을 볼 때에 제자들과 함께 수도도 하고, 제자들과 함께 글씨공부도 하는 동시에 또 이것을 지도하기도 하였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도의 효력이 글씨에도 나타나 붓을 들어 글자를 쓰면 사람들이 왕희의 필적(筆跡)인가 의심하고라고 수덕문(修德文) 한 구절을 보아도 제자들 가운데는 정성을 다하여 수도한 결과로 글씨까지 기적적으로 잘 쓴 사람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문필이 무엇이게 도덕을 의논하노란 도덕가(道德歌)의 말슴으로 보나 또는 여기에 나오는 글의 문맥으로 보나 이것은 물론 글씨보다도 도()에 치중한 말씀이긴하지만 필법(筆法)에도 있는 바와 같이 글씨도 일심(一心)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일심(一心)이란 지극한 정성을 뜻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도()와 직결되는 것이다. 옛사람이 말한 바 한 가지 마음이면 백 가지 일을 할 수 있지만, 백 가지 일을 할 수 있지만, 백 가지 마음이면 한 가지 일도 할 수 없다말과 같이 비상한 정신의 작용에는 반드시 비장한 사상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리고 경상감사 서헌순(徐憲淳)인 나라에 보고한 글가운데도 그는 대력 필법을 아는 사람으로 글씨를 청()하면 구룡이자(龜龍二字)를 써주곤 하였다라든지, 붓을 잡으면 신이 내린다라든지, 복술은 본래 글씨를 잘 쓴다는 이름이 있어서 구룡운상의(龜龍雲祥義)등 글자를 여러 사람에게 써주었다라든지, 또는 필법이 신()에 접하면 더욱 신기하여 글씨를 받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종종 써주었다라는 문구들이 나오는 것을 볼 때에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같다. 이런 훌륭한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의 글씨가 동경(東經) 4()과 유사팔편(遺詞八篇) 그리고 시구와 각종 문서 등에 나타나 있을 터인데도 그 필적(筆跡)이 제대로 전해지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쉽기만 하다.

     

    별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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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희지가 남긴 서론(書論)을 옮겨보면,

     

    무릇 글씨라고 하는 것은 심오하고 미묘한 기예라서 만약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거나 뜻있는 선비가 아니라면 배움이 미치지 못할 것이다.

    대저 글씨는 모름지기 배우겠다는 절실한 생각이 있어야 하니 내가 이사

    등이 필세를 논한 것과 종요의 글씨를 보고서 골력이 심히 가볍지 아니함을 느꼈다.

    자손들이 기억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서술하여 이를 논한다.

     

    대저 글자는 평정하고 안은함을 귀히 여긴다. 먼저 모름지기 용필에는

    누운 것, 쳐다보는 것, 기울어진 것, 쓰러진 것, 비껴진 것 등이 있으며

    혹은 작고 큰 것, 길고 짧은 것 등이 있다. 무릇 한 글자를 쓸 때에도

    전서나 주문과 유사하기도 하고 학두서 같기도 하며, 또한 산예(예서)

    같기도 하고 팔분에 가깝기도 하다. 또한 벌레가 나뭇잎을 갉아 먹은 듯

    하거나 물 속에 있는 올챙이 모습 같기도 하며, 장사가 칼을 차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부녀자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모습 같기도 하다.

     

    글씨를 쓰고자 할 때 먼저 근력을 이룬 다음 장속(꾸밈을 차림)

    하는데 반드시 유념할 점은 찬찬하면서 우아하게 붓을 일으켜 펴면서

    면밀하고 소활한 것이 서로 적당하도록 해야 한다.

     

    매번 한 점을 찍을 때 반드시 손을 들고서 하여야 하며 하나의 파책을

    할 때는 큰 붓을 누른 다음에 끌어내야 한다. 매양 한 글자를 쓸 때에도

    모름지기 여러 종류의 필의를 사용해야 하니 가령 횡획을 팔분처럼 해서

    나타나는 것은 전서나 주문처럼 한다.

    혹 세로로 당기는 획은 깊은 숲 속의 교목과 같이 해서 전절하는 부분이

    마치 강철 갈고리 같이 하여야 한다. 또한 위가 뾰족한 것은 마른 줄기

    같이 하거나 아래가 가는 것은 바늘이나 까끄라기 같이 하여야 한다.

    둥글게 기운 형세는 마치 나는 새가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하며

    모서리가 기운 형태는 마치 물이 굽이쳐 흐르는 것처럼 하여야 한다.

     

    한 글자를 쓰면 횡획과 수획이 서로 향하게 하고 한 행을 쓰면 아름답고

    고움이 서로 호응을 이루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모름지기 근력을

    갖춘 장봉을 운용하되 그 자취를 없애고 붓끝을 갈무리해야 한다.

    첨필(뽀족한 붓)을 사용할 때 낙봉이 뒤섞여 이루어져야 하며

    호가 드러나서 들떠 있거나 속됨이 없게 하여야 한다.

    새 붓을 들 때는 상쾌한 정신이 있은 즉 점획의 결점에 구애되지 말아야 한다.

     

    한 글자를 쓸 때 여러 체가 모두 들어 있어야 한다.

    만약 한 장의 종이에 글씨를 쓸 때 모름지기 글자마다 필의가 달라야 하며 서로

    같게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글씨 쓰는 종이가 부드럽다면 강한 붓을 사용하고,

    종이가 강하다면 부드러운 붓을 사용해야 한다. 강약이 고르지 못한다면 차질이

    생겨 먹물이 제대로 스며들지 않는다.

    무릇 글씨는 침착하고 조용한 것을 귀하게 여기니 뜻이 붓 앞에 있어야 하고

    글자는 마음 뒤에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글씨를 쓰기 전에 마음으로 생각한

    바가 이루어져 있어야 한다. 이에 하필(붓을 대어)은 급하게 해서는 안되며

    따라서 반드시 더디게 해야 한다. 무엇 때문인가? 붓은 장군과 같기 때문에

    반드시 더디면서 신중하여야 한다. 마음이 조급하면 의당 더딜 수 없다.

    왜 그런가? 마음은 화살촉과 같다.

    화살은 더딜 수가 없다. 만약 더디면 사물을 맞추어 뚫을 수 없다. 대저 글자는

    느리고 급한 것이 있다. 한 글자 가운데 어떤 것이 느리고 급한 것이 있는가?

    예컨데 자에서 아래 한 점을 찍을 때 점은 모름지기 빨라야 하며 횡획은

    곧으니 모름지기 더디게 한다.

    의 다리는 빨라야 하니 이것은 바로 그 형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매양 글씨를 쓸 때 열이 더디면 다섯은 빠르게 하고, 열이 굽으면 다섯은 곧게 하고,

    열을 감추면 다섯은 나오게 하고, 열을 일으키면 다섯은 엎드리게 하여야만 비로소

    글씨라 할 수 있다. 만약 붓을 곧게 해서 급하게 안으로 끌어당기면 이것은 얼핏보면

    글씨 같지만 오래 음미하면 무력함을 느낀다.

    이에 모름지기 붓으로 먹을 드러내되 아래로 붓의 3분 정도 묻혀야 하며,

    먹물이 너무 깊이 침투하면 힘을 얻지 못하니 붓털이 약해져서 무력해진다.

    먹은 송절(소나무 마디)을 사용하여 함께 갈면 오래오래 변하지 않고 더욱 아름다워 질 것이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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