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10-제갈량(諸葛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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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제갈량(諸葛亮)
제갈량(諸葛亮)은 중국 삼국시대 촉(蜀)의 낭야(琅琊) 사람으로 자(字)는 공명(孔明)이고 시호(諡號)는 무후(武侯)라고 하였다.
일찍 어버이를 여의고 남양(南陽) 융중(隆中)에 들어박혀 몸소 밭을 갈며 스스로 옛날의 관중(管仲)과 낙의(樂毅)에 비교하곤 하였다. 그러나 알아주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오직 박능(博陵)의 최주평과 전천(顚川)의 서서(徐庶)라는 사람만이 그의 비범함을 알고 있었다.
유비(劉備)가 신야(莘野)에 주둔하였을 때에 서서(徐庶)가 유비를 보고 「제갈공명은 와룡(臥龍)이라, 장군께서 장래 큰 일을 하려면 그를 찾아보아야 합니다」하였더니 유비는처음에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지 「그대와 같이 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서서는 다시 「이 사람은 장군께서 직접 찾아 가봐야지 그를 억지로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자 그제서야 유비는 초라한 공명의 집을 세 번 씩이나 찾아(이로 인해서 만들어진 고사성어가 바로 삼고초려(三顧草廬)이다) 겨우 그와 굳은 친교를 맺게 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 사이가 더욱 친밀해지자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는 불결하게 생각하였는데 유비는 「나에게 공명이 있는 것은 마치 고기가 물에 있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여 오해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후 그는 유비를 도와 조조의 군사를 적벽강에서 대파(大破)하고 성도(成都)와 형주(荊州) 그리고 익주(益州) 한중(漢中) 등을 평정하여 조조의 위나라와 손권의 오나라와 더불어 삼국이 정립(鼎立)하기에 이르렀었다.
후에 승상이 되었는데 유비가 세상을 떠나자 후주(後主) 유선을 도와 촉한(蜀漢)의 위험한 고비를 막기에 많은 애를 쓰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북으로 위나라를 치기도 하고, 동으로는 오나라와 화친(和親)하기도 하였으며, 때로는 남쪽의 맹획을 평정하였는가 하면 또 위나라를 치기 위하여 여섯 번 씩이나 기산(祁山)에 진출하기도 하였으며 멀리 오장원(五丈原)에 출진하여 사마의(司馬懿)의 군사와 대치하다가 아깝게도 그만 군중(軍中)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으니 그때의 나이가 54세였었다.
그는 목우유마(木牛流馬)를 만들기도 하고 팔진도(八陣圖)를 벌이기도 하여 사마의를 경탄케 하였으며, 또 읍참마속(泣斬馬謖)이라고 하여 생시에 가장 사랑하던 재치있는 마속(馬謖)이 군법을 어겼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면서 용서없이 마속의 목을 단호히 베어 후세에까지 모법을 보였다는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의 글로는 「제갈무후집(諸葛武侯集)」이 세상에 전하여지고 있는데 특히 전후에 걸친 「출사표(出師表)」는 오직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일념에 찬 눈물겨운 글로서 널리 세상에 알려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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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는 수덕문(修德文)에서 「동산 가운데 복숭아꽃은 고기잡이배가 알까 두려워하고, 집 앞에 푸른 물은 뜻이 강태공의 낚시에 있었더라, 난간이 못가에 다달은 것은 주염계의 뜻과 다름이 없고, 정자이름을 용담이라 한 것은 어찌 제갈량을 사모한 것이 아니겠는가. (園中桃花 恐知漁子之舟 屋前滄波 意在太公之釣 檻臨池塘 無違濂溪之志 亭號龍潭 豈非慕葛之心)하였는데, 이것은 선친(先親) 근암공(近庵公)의 고상한 뜻과 기품을 용담부근의 경치와 결부시켜 표현한 대목이었다.
위에서도 소개한 바와 같이 강태공은 뜻을 이루지 못하였을 때에는 칠십이 넘도록 궁한 몸으로 위수(渭水)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던 신세였지만 그후 무왕(武王)을 도와 천하를 동일한 훌륭한 인재였으며 주염계로 말하면 화결시(和訣詩)에도 인용된 바와같이 「연목의 깊고 깊음이어 이것은 주염계의 즐거움이로다.(池塘之深深兮 是濂溪之所樂)」라고 하였는데, 그는 천박을 싫어하고 심원한 뜻을 간직한 사람으로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을 때에 있어서도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우주 본체인 태극위에다 (太極無極)이라고 하여 태극보다 한층 더 깊이 들어가 「무극(無極)」이라는 글자를 놓았을 뿐 아니라 연꽃은 군자다운 점이 있다고 연당(蓮塘)을 바라보고 좋아하는 동시에, 정명도·정이천 등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여 유학의 중흥(中興)을 열어놓은 인물이었으며, 제갈량으로 말하면 남양(南陽) 융중(隆中)에서 밭이나 갈고 있을 때에는 실로 와룡(臥龍)같아서 세상에서 넓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유비의 삼고초려가 있은 후부터는 용(龍)이 기세를 부리는 것과 같이 풍운조화(風雲造化)와 변화막측(變化莫測)의 계략으로 천하영웅인 조조를 혼비백산(魂飛魄散)케 하는 동시에 죽은 후에도 「죽은 공명이 살아있는 사마중달을 도망치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남겨 놓을 정도로 삼국시대에 있어서는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인물로 등장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집앞에 푸른 물이 흐르는 것을 볼 때에는 위수(渭水)가에서 낚시를 드리우고 있던 강태공(姜太公)을 생각하게 되며, 난간 앞에 연못을 볼 때에는 연꽃을 즐기던 주염계(周濂溪)를 생각하게 되며, 정자 이름을 용담(龍潭)이라고 한 것은 (처음에는 와룡정(臥龍亭)이라고 지었다가 다른 곳에 와룡정이 있기 때문에 같은 이름을 사용할 수 없어 다시 용담정이라고 고쳤음) 와룡선생(臥龍先生)인 제갈량(諸葛亮)을 사모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여 선친(先親) 근암공(近庵公)의 고결한 인격과 고상한 뜻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사람은 마땅히 마음과 뜻을 고상한데 두어야 한다. 학자(學者)에 뜻을 둔 사람은 학자가 될 수 있으며, 세상 경륜에 큰 뜻을 둔 사람은 영웅(英雄)호걸(豪傑)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뜻을 낮은 데 둔 사람은 낮은 사람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남의 재산에 뜻을 둔 사람은 절도나 강도밖에 될 수 없으며, 남을 속이는데 뜻을 둔 사람은 사기한(詐欺漢) 밖에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훌륭한 사람은 사물을 접촉할 때마다 고상한 뜻이 발로(發露)되는 것이다. 옛날 공자는 산(山)을 보고 인자(仁者)를 생각하였고, 물을 보고서는 지자(智者)를 생각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구미(龜尾) 용담(龍潭) 좋은 풍경 산림처사(山林處士) 일포의(一布衣)로 세상의 영욕(榮辱)을 잊어버린 근암공(近庵公)으로서 어찌 고결한 뜻을 두지 않을수 있으며, 또 이러한 부친(父親)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던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역시 어찌 깊은 정회(情懷)에 잠기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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