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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5-최치원(崔致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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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617회   작성일Date 20-03-18 11:13

    본문

    5. 최치원(崔致遠)

     

    신라시대의 학자이며 경주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이다. 자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869(신라 경문황 9) 13세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가서 874년 과거에 급제해 선주표수현위(宣州漂水縣尉)가 되고 승무랑(承務郎시어사(侍御史내공봉(內供奉)에 올라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879(헌강왕 5) 황소(黃巢)의 났을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885년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수병부시랑(守兵部郞지서서감(知瑞書監)이 되었으나 문란한 국정을 통탄하고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대산(大山) 등지의 태수(太守)를 지냈다. 894년 시무(時務) 10여 조()를 상소하여 아찬(阿飡)이 되었다.

    그후 관직을 내놓고 난세를 비판, 각지를 유랑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쳤다. 글씨를 잘 썼으며 난랑비서문(鸞郎碑序文)은 신라시대의 화랑도를 말해 주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고려 현종 때 내사령(內史令)에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배향(配享), 문창후(文昌侯)에 추봉(追封)되었다. 조선시대에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岳書院) 등에 종향(從享)되었다. 글씨에 숭복사비(崇福寺碑),진감국사비(眞鑑國師碑),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무염국사백월보광탑비(無染國師白月葆光塔碑)등의 사산비명(四山碑銘)이 있고, 저서에 계원필경(桂苑筆耕),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석순응전(釋順應傳)등이 있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수많은 작품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두 작품을 소개하면,

     

    추야우중

     

    秋風唯苦吟(추풍유고음) : 가을 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니,

    世路少知音(세로소지음) : 세상에 날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창외삼경우) :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등전만리심) : 등불 앞에 마음은 만리 밖을 내닫네.

     

    신라 말기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한시. 오언절구이다. 비가 오는 가을밤에, 자신을 알아 줄 지기(知己)가 없는 외로움을 노래한 작품이다. 추야우중제가야산 題伽倻山·등윤주자화사 登潤州慈和寺와 더불어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최치원의 문은 대개 변려체(騈儷體)이고 시도 육조풍(六朝風)이 농후하여 격이 높지 않다는 평이다. 그러나 이 추야우중등윤주자화사시는 가작으로 칭도되고 있다(芝峰類說 지봉유설·惺叟詩話 성수시화). 이규보(李奎報)도 그의 백운소설 白雲小說에서 최치원의 시가 격이 높지 않은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성현(成俔)용재총화 慵齋叢話에서 우리 나라의 문장이 최치원에서 시발하였다. 시에 능하기는 하나 의()가 정치(精緻)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추야우중의 원시는 다음과 같다. “쓸쓸한 가을바람에 괴로워 읊조린다. 이 세상 뉘라서 내 마음을 알아주리, 삼경 깊은 밤 창밖에 비는 내리고, 등불 앞에 초조한 심사는 만리를 달리네(秋風唯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추야우중은 지금까지 결구의 의미 내용을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최치원의 귀국 이전의 작품이라고도 하고, 또는 귀국 후의 작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계원필경에 수록되어 있지 않고 그의 시 경향과 내용으로 보면 귀국 후의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최치원의 시의 경향을 보면 그가 고변(高騈)의 종사관이 되기 이전의 시기에 지어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작품들에서는 대체로 회의와 자조가 흔하게 발견된다. 그러나 귀국의 길에 올랐을 때에 읊은 몇 편의 시작에서는 그의 고고한 세계관이 나타난다.

    추야우중의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도 결구의 萬里心(만리심)’은 언표(言表)에 나타난 그대로 만 리 타국에 있는 작자의 심경이기보다는, 마음과 일이 서로 어그러져 세상과는 이미 천 리 만 리 떠나고 있는 작자의 방황하는 심회를 호소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는 귀국하여 벼슬이 아찬(阿飡)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이 때는 이미 진성여왕의 난정(亂政)으로 나라의 운세가 기울고 있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의탁할 곳을 얻지 못하여 시무십여조 時務十餘條를 올리고 스스로 가야산으로 숨어 들었다. 이러한 만년의 행적은 만리심의 실천 현장이기도 하다.

     

    제가야산독서당

     

    狂奔疊石吼重巒 : 첩첩한 바위에 무겁게 달려 겹겹한 산이 울려

    人語難分咫尺間 : 지척에서도 사람들의 말 분간하기 어려워.

    常恐是非聲到耳 : 항상 시비의 소리 귀에 닿을까 두려워

    故敎流水盡籠山 : 일부러 흐르는 물로 다 산을 둘렀네.

     

    이 시는 가야산 해인사 입구에 왼쪽 계곡의 농산정(籠山亭), 오른쪽 언덕 위의 독서당(讀書堂)과 함께 길 옆 오른쪽 암벽에 초서로 음각(陰刻)되어 전하고 있다.

     

    세차게 흐르는 물이 겹겹이 쌓인 바위 틈을 마구 달려 겹겹 산봉우리에 울려대니, 사람들 말소리가 아주 가까운 거리에도 분간하기 어렵다. 옳다 그르다 하는 시비(是非) 소리가 귀에 들려 올까 봐, 일부러 흐르는 물로 하여금 온 산을 감싸 흐르게 했다는 것이다. 결구의 ()’는 사역동사(~ 하여금)로 쓰였다. 이 시는 세상의 시비로부터 벗어나 자연 속에서 안주하려는 고운의 내면의식이 잘 드러나 있으며, 후대 선비들의 처세에 한 모형을 제시하기도 했다. 고운의 삶을 돌아보면 한 인간이 살면서 겪어야 할 고뇌를 누구보다 많이 겪었으리라 짐작된다.

     

    어려서는 신라를 떠나 당나라에서 이방인으로서 외로움을 겪었을 것이고, 돌아와서는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적 한계 상황으로 인해 정치적 소신을 제대로 펼치지 못해 울분이 쌓여 갔을 것이다.

     

    그래서 지방 군수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마흔이 넘자 벼슬을 그만두고 산천이 아름다운 곳을 찾아 다니면서 마음을 추스르며 지냈던 것 같다. 위 시에서도 세상의 시시비비로부터 벗어나 자연 속에서 지내려던 고운의 은거의식이 잘 드러나 있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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