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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개벽이야기(1)/신인간 5월호 신앙체험소설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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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송암이윤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475회   작성일Date 20-05-22 16:56

    본문

     

    신인간 5월호/신앙체험소설

    [161.5] 나의 개벽이야기(1) -원본 클릭

     

     

     

    신앙체험소설

    나의 개벽이야기(1)

    이윤영/동학혁명연구소장

    1. 끝없는 방황

     

        나의 개벽開闢이야기는 고향 시골집 골방에 틀어박혀 수십 일을 침묵으로 일관하던 것에서 출발한다. 그때는 군대에서 제대하고 한 치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현실에서, 오직 우주에서 홀로 존재한다는 극단의 상태였다. 생각했던 모든 계획이 무너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세상도 두려웠고 자신에게 더욱 두려웠다. 본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말주변이 없고 혼자 생각하기를 즐기는 터라 캄캄한 골방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밥도 먹는 둥 마는 둥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그야말로 나무토막 하나가 뒹구는 듯 지냈다.

     

        어느 날, 홀로 계셨던 어머니께서 해질녘 밭일을 마치고 내 골방으로 들어왔다. 무궁화가지 한 다발을 양손에 나눠쥐고는 머리부터 등짝까지 사정없이 내 온몸을 후려치기 시작했다. ‘정신 차려라 이놈아’ 나는 이를 악물고 허공에 바람소리를 일으키며 와 닿는 매를 끝까지 참았다. 그런데 그 매가 아픈 것은 고사하고 왜 그리 후련했는지, 바위처럼 굳었던 육신은 한바탕 매타작에 온몸의 기혈이 꿈틀거리고 정수리가 터지는 듯 정신이 들었다.

        골방에 틀어박힌 채 입술이 부르트고 앙상한 몰골로 고민했던 것은 양단간의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 세상에 나가 인생을 개척하는 것과, 홀로 입산하는 것이었다. 결국 입산으로 결심하고 어머니 몰래 커다란 더블백을 구했다. 혼자 살 수 있는 모든 것을 차곡차곡 준비해 나갔다. 이른 아침, 짐 보따리를 짊어지고 도둑고양이처럼 집 뒷골목을 돌아 몇 걸음을 떼었다. 마침 새벽일을 끝내고 커다란 깨다발을 머리에 이고 오는 어머니와 마주쳤다. 막내아들의 이상한 행동을 예의주시하던 어머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겨우 어머니를 일으켜 안방에 모시고 두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빌었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는 떨리는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말씀하였다.

        “너는 지금껏 하고 싶은 일 맘대로 하면서 살아왔지 않느냐? 너의 행동에 근심걱정이 떠나질 않아 용한 점쟁이에게 점까지 쳐보았는데, 너 하는 대로 놔두라고 하였단다. 너도 이제 군대도 갔다 왔고 청년이 되었으니, 제발 속 좀 차리고 사람답게 살아라.”

        어머니의 말씀 중에 ‘사람답게 살아라.’는 말씀에, 사람의 근본 도리는 효도라는 생각이 나를 뉘우치게 하면서, 입산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서 홀로 도사처럼 살아야겠다는 계획은 훗날로 미루어 졌다. 가을이 지났다. 혹한의 겨울동안 나는 꿈쩍도 하지 않고 오직 묵언일념으로 명상에 몰두하였다. 이내 새싹이 돋아나고 꽃들이 만발하는 봄이 찾아왔다. 더 이상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는 게 민망하여 집에서 농사를 짓던 셋째 형님께 부탁 하나를 하였다.

        “형님, 오천 원만 빌려주세요.”

        나는 오천 원짜리 중고 자전거를 한 대 사가지고 입산준비 용 더블백에 자취도구를 몽땅 넣었다. 무작정 원평에서 전주로 향했다. 내 주머니에는 몇 끼 먹을 돈이 전부였다. 입산대신 도시로 향하는 마음은 허전하고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비포장도로를 삐거덕거리며 굴러가자 그동안 살아왔던 삶이 스크린처럼 지나갔다.

        유학자였던 아버지와 불교신자였던 어머니 사이에 칠남매 중 막둥이로 태어나 그래도 호강하면서 자랐다. 중학교 졸업할 나이에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죽음에 대한 공포가 늘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또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은 나를 더욱 방황으로 몰고 갔다. 학교공부는 별로 취미가 없었고 사색과 독서를 즐겼다. 나약한 심신을 연마하기 위해 태권도를 비롯한 각종 무예와 기공, 단전호흡 수련에 심취했었다.

     

        내가 자란 김제 원평 부근에는 불교의 미륵불 성지인 금산사, 전봉준·김덕명과 관련된 동학혁명 사적지, 정여립 모반사건과 관련된 유적지, 증산교, 원불교, 천주교 성지 등의 유명 종교 시설들이 즐비하였다. 이러한 문화와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종교사상 즉 도道라는 것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성장해갔다.

        자전거를 타고 고향을 등지며 전주로 향하는 내 모습을 돌이켜 보면, 군대생활의 단련기를 거쳐 마치 둥지 안의 보금자리를 박차고 바깥세상으로 힘껏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는 한 마리 새가 된 느낌이었다. 이제 아무 의지 처도 없고 나를 보호해줄 사람조차 없는 아니, 내가 온전히 홀로 자립하며 살아갈 시기가 된 것이다.

        전주 용머리 고개 부근에 월세 자취방을 정하고, 밥만 먹여주는 무보수 태권도 사범, 취학 전 어린이를 지도하는 일일교사, 새벽에 정신없이 뛰며 달리는 신문배달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하였다. 돈이 좀 모아지면 어머니 용돈도 드리고 통장에 적금도 하면서 더 나은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당시 유행하던 지압, 척추교정원을 열면 쉽게 돈도 벌고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을 가지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이름 꽤나 있는 지압, 침술, 척추교정 전문가를 찾아가 수 백 만원을 지불하고 비법을 전수받았다.

        수개월의 전수과정을 거치고 돌아와 은행에서 빚을 내어 버젓이 『동양지압척추교정원』이란 간판을 내 걸고 민간의술행위를 시작했다. 소문도 나고 사람들도 모여들며 본격 돈벌이가 시작될 쯤, 갑자기 단속반이 들이닥쳤다. 불법의료행위로 고발한다는 단속반의 한마디에 하늘이 무너지는 허탈감에 빠지고 말았다. 단속반에게 간판 내리고 철수하고 문을 닫는다는 조건에 고발은 무마되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보니, 말 그대로 빈손이었다.

        다시 빈 털털이가 된 나는 본격 방황을 시작하였고, 마음의 병도 깊이 도져갔다. 다시 입산하고 싶은 충동이 거의 매일 일어났다. 전주 완산칠봉과 기린봉, 모악산 꼭대기에 올라 서성거리다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명상을 하다보면, 늦은 밤에 하산 하거나 아예 날을 새는 경우도 있었다. 밤새도록 수많은 모기떼에게 물리고 피를 빨려 온몸이 빨갛게 부어오르고 손으로 긁어대느라 고생한 날들도 있었다.

     

    또한 마음의 의지 처를 찾아 산중 사찰이나 도시 교회를 찾는 일도 빈번하였다. 특히 원불교와 증산교에 관심이 끌려 같이 법회를 보거나 도담을 나누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참선과 단전호흡에 열중하면서 구도의 길에 전념하기 위해 진리와 관련된 종교, 철학 서적을 닥치는 대로 탐독하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두 남녀 동창의 결혼식장에서 중·고등학교 모교인 교감선생님 주례사 말미에 귀가 번쩍하였다.

        “두 제자의 결혼에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불교재단 학교의 선생님이 부처님 말씀은 안하고 하느님 말씀으로 마무리 하는 것을 보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피로연이 끝나고 잠시 찻집에서 교감 선생님께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부처님이 아니고, 왜 하느님입니까?”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기독교의 여호아 즉 하나님, 하느님은 성경의 우리말 번역어에서 비롯되었다네. 내가 말한 하느님은 고조선 단군시대 때부터 사용하던 우리나라 고유의 신神이라네. 그리고 이곳 원평에서 큰 혁명으로 일어났던 동학에서도 하느님을 신봉했지, 현재 우리가 부르고 있는 애국가의 하느님도 바로 우리 조상들이 믿었던 신의 명칭이라네.”

        교감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난 이후부터 나에게는 새롭게 강한 희망의 메시지가 다가왔다. 지금까지 주로 행했던 사색과 명상 즉 참선의 수양방식에서 기도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었다. 시간만 나면 무릎을 꿇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상이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 고유의 신이신 하느님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면서 내 삶도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수련해오던 태권도 사범 직업도 생겼으며, 평생 동반자인 부인도 만났다. 또한 만학도로서 체육대학(추후 문화역사전공)에서 공부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먹고살만한 환경이 되다보니 다시 방황과 구도라는 것이 나를 유혹하기 시작했다.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의 강한 의심도 끝없이 일어났다. 기독교의 신처럼 복도 주고 벌도 주고 세상을 의지대로 창조했다는 등의 인격신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이었다. 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은 서지 않고 의심과 의심이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혔다.  

        무조건 신을 믿으면 천국을 간다는 이해되지 않는 것과 살다가 죽으면 진짜 어디로 가는가의 화두였다. 더 나아가 물질만능주의의 끝없는 경쟁사회의 모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진리를 꿈꾸면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구도의 열정은 끝없는 방황에 종지부를 찍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혼신의 노력을 멈추지를 않았다.

        신의 존재, 하느님은 진짜 있을까, 아니면 인간이 하느님의 존재를 상상으로 그렸을까, 모든 것이 의심으로만 가득하였다. 의심은 의심을 낳고 방황은 방황을 낳고 화두는 화두만을 생산하였다. 그러한 연속적인 기도를 거듭하다가, 어느 날 해는 서산에 기울고 지친 육신은 흔들거리면서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그곳, 완산칠봉 동쪽 기슭, 평화동 언덕 위 잡초밭에 도착하여 두 손 깍지를 베개로 벌렁 누워 무수히 빛나는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았다. 적막에 휩싸인 산기슭, 간간히 들려오는 개짓는 소리, 심금을 울려주는 풀벌레 노랫소리,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반짝이는 별들, 저 별들은 도대체 무슨 작용에 의해 저토록 질서정연할까. 만약 신의 조화 같은 불가사의한 힘과 원리가 없다면 저 모습을 과연 어떻게 이해할까. 현대 물리학의 이론도 이론으로써 설명할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다, 우주의 질서는 물론 만물의 생성변화와 인간의 생로병사 등 그 어떤 무한한 힘과 질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바로 하느님이 안계시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후딱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하늘을 우러러 보며, 이마를 땅에 대고 하느님께 큰 절을 연속적으로 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신은 분명 존재하십니다. 그러나 어디에 계시는지, 어떤 분이신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하느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저의 기도는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2. 신은 어디에 계십니까?

     

        나의 기도는 신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어떤 분인지의 해답과 가르침을 청하는 것에, 지극정성으로 기도에 기원을 쉼 없이 행하였다. 정말 사느냐 죽느냐의 심정으로 기도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철주야 봉행하였다. 주로 자취방에서 행하였고, 때로는 시간 나는 대로 조용한 산에 올라가 기도했으며, 여느 암자와 토굴까지 가리지 않고 미친 사람처럼 기도에만 열중하였다.

        그때, 전주 우아동의 자취방에서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대각선으로 마주잡고 기도하던 중, 무아지경에 빠졌던 것으로 기억을 되살린다.

        “하느님, 가르침을 주십시오. 제가 여쭤볼 말씀이 많습니다. 하느님 대답에 응하소서. 만약 가르침을 주지 않으신다면 이대로 돌이 되어버리겠습니다.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하느님!!!”

        나의 간절한 기도 끝에 하느님의 말씀이 들렸다.

        “내가 하느님이다. ~ 무엇이 그리 궁금 하느냐?”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품었던 의심을 모두 질문하였고, 하느님은 하나도 거르지 않고 대답해주셨다. 꿈같은 시간이 지나고 정신을 차려보니 대략 3시간이 흘렀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했다. 내가 마음으로 물어보면, 하느님도 마음으로 대답해주시는 것이었다. 신과의 만남이 마음속에서 이루어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나의 생각과 마음, 하느님의 생각과 마음이 일체되어, 나와 하느님은 하나로서 문답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바로 내 마음과 하느님 마음이 하나가 되면, 나와 하느님은 이위일체이자 일심동체라는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아,..순간 진리를 깨달았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때가 새벽, 동터 오르기 직전이었다, 나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갔다. 세상천지의 밝은 기운이 나를 향하고 있으며, 하늘의 모든 별들이 나를 비춰주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천지간에 큰 원형이 무지개 색으로 빛나며, 산천초목, 삼라만상이 함께 기뻐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때의 환희와 충격, 기쁨과 설렘을 어찌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오직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뿐이었다.

        하느님이 나의 마음에 계시고, 서로의 마음과 마음으로 하나로 통한다는 것을 직감하면서 나의 기도생활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해야 되는지 갈피를 못 잡을 즈음, 눈을 감고 기도하던 중에 동학東學 즉 천도교天道敎라는 글씨가 불현 듯 떠오르며, 그 글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러한 체험을 하면서 바로 하느님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였고, 결국 전주 시내 곳곳을 찾아보았지만, 천도교를 쉽게 찾을 수 없었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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