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7-근암공(近庵公) 최옥(崔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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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근암공(近庵公) 최옥(崔鋈)
최옥(崔鋈)은 조선 영조38년(1762년) 경주군(慶州郡) 현곡면(見谷面) 가정리(柯亭里)에서 탄생하였는데 경주최씨로서 자(字)는 자성(子成)이오 호는 처음에 근암(謹庵)이라고 하였으나 후에 근암(近庵)으로 고쳤다.
공(公)은 신라말에 유명한 선비였던 문창후 최치원(崔致遠)의 후예로서 공(公)의 12대조인 예(汭)는 조선초에 국자사성(國子司成)으로 청백리(淸白吏)에 등재되어 있고 6대조인 진립(震立)은 임진왜란대에 의병(疑兵)을 일으켜 공(公)을 세웠고 그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텨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는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 용인군(龍仁郡) 험천(險川)에서 청군(淸軍)과 싸우다가 장렬한 전사(戰死)를 하여 병조판서의 증직과 정무(貞武)라는 시호(諡號)를 받는 동시에 청백리(淸白吏)에 등재되었고 사액(賜額)이 된 숭렬사우(崇烈祠宇) 즉 용산서원(龍山書院)에 배향(配享)되기도 한 훌륭한 인물이었으며 그리고 5대조인 통덕랑(通德郎) 동길(東吉)은 정무공(貞武公)의 제4자(第四子)로서 정무공(貞武公)의 맏형인 진흥에게로 입양하였으며 고조(高祖)인 통덕랑 국전과 증조(曾祖)인 수기(壽基)와 조부(祖父)인 경우(慶雨)와 부친인 종하(宗夏)는 모두 학덕으로 명망이 있었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비상한 재질을 가졌으며 8세에 능히 봉덕종부(鳳德鐘賦)를 지어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13세에는 부친의 명령으로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기와(畸窩) 이상원(李象遠)의 문하에 들어가 10년 동안 수학하면서 장래의 입신양명을 기약하였는데 기와(畸窩)도 촉망(囑望)하는 바가 컸다고 한다.
14세때부터 사장(詞場)에 출입하기 시작하여 여러 차례 상위를 차지하였으며 성인인 되어서는 때로는 서울에 올라가 장실(場室)에 출입하였으나 당시로 말하면 권문세도의 영향력이 컸던 때라 불우한 세월을 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공(公)은 17세에 정씨와 결혼하였으며 30세에는 부친상을 당하게 되어 이때부터 가사(家事)를 돌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3세에는 조모상을 당하였고 36세에는 부인 정씨가 세상을 떠나게 되어 다음해에 서시와 재혼하였으며 47세에는 모친상을 당하고 50세에는 서씨마저 1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 불행이 겹치게 되었는데 이때에 아우인 규(珪)의 아들 제환(濟寏)을 양자로 삼게 되었다.
공(公)은 54세때 구미산하(龜尾山下) 와룡담상(臥龍潭上)에 용담서사(龍潭書社)를 짓고 이곳에서 「담상만영」과 「용담26영」 등을 읊으면서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63세때에 곡산 한씨와 동거하게 되어 1남 1녀를 남게 되었는데 남(男)의 이름은 제우(濟愚)로 이 분이 바로 후(後)에 동학(東學)을 창시한 천도교 제1세 교조인 것은 이미 세상이 다 아는 바이다.
공(公)은 젊었을 때에는 사장지학(詞章之學)에 힘썼으나 노년에는 구류백가(九流百家)와 주퇴양서(朱退兩書)는 물론이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운자(韻字)에 맞추어 자신이 귀거래사를 지었는가 하면 「제고실인유인정씨(祭故室人孺人鄭氏)」와 「제고실인서씨(祭故室人徐氏)」 등 인정어린 글을 남기기도 하였으며 혹은 가훈 10조를 작성하여 지비, 문학, 불혹좌도(知非,問學,不惑左道) 등을 위시한 근신절용(勤身節用)과 보족의가지어(保族宜家之語)로 교훈하였는가 하면 혹은 명승지를 탐방하여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양성하기도 하였으며 또 때로는 화초와 약초재배에 취미를 가졌는가 하면 혹은 선조의 지표를 작성하기도 하였으며 기타 촌수(村秀)와 제자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등 언제나 손에 책을 놓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헌종6년 경자(1840년) 2월 20일에 79세의 노령(老齡)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동년(同年) 4월1일에 관산에 장례를 지내었는데 유작(遺作)으로는 「근암문집(近庵文集)」이 전하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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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는 수덕문(修德文)에서 「선조의 충의(忠義)는 절개가 용산에 남아있고 우리 임금의 성덕(聖德)은 해가 다시 임진 병자에 돌아왔더라(先祖之忠義,節有餘於龍山,吾王之盛德勢復回於壬丙)라고 하였고, 용담가에서는 「산음인가 수음인가 위국충신 기장하다」라고 하였으며, 안심가에서는 「우리선조 험천당에 공덕비를 높이 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라고 하여 7대조인 정무공(貞武公) 최진립의 국가에 대한 공적을 높이 추앙하는 동시에 권학가에서는 「나도 또한 충령손이 초야에 자라나서 군신유의 몰랐으니 득죄군왕 아닐런가」라고 하여 선조와 같이 충의를 다하지 못한 자신의 부족함을 스스로 송구스럽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선친에 대하여는 수덕문에서 「이같이 남은 음덕(蔭德)이 그치지 않고 물흐르듯이 하여 아버님이 세상에 나시먀 이름이 한 도(道)에 덮였으니 선비들이 모르는 이가 없었고 공덕이 6대를 이었으니 어찌 자손의 남은 경사가 아닌가(若是餘蔭 不絶如流 家君出世 名盖一道 無不士林之共知 德承六世 豈非子孫之餘慶)」라고 하여 아버님의 훌륭하였던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입신양명을 못하시고 귀거래사나 지으면서 구미용담에서 산림처사로 한평생을 지내시다가 세상을 떠난 선친(先親)의 그 불우하였던 신세에 대하여 슬픈 생각을 한없이 나타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용담가에서는 「가련하다 가련하다 우리부친 가련하다 구미용담 좋은승지 도거문장 닦아내어 산음수음 있지마는 입신양명 못하시고 구미산하 일정각을 용담이라 이름하고 산림처사 일포의로 후세에 전탄말가」라고 하는 동시에 「가련하다 가련하다 이내기운 가련하다 나도또한 출세후에 득죄부모 아닐런가 불효 불효 못면하니 적세원울 아닐런가」라고 하여 자신이 효성을 다하지 못하였다고 부모에 대한 간절한 생각을 나타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수십년 동안 주유천하 하다가 별 성공을 보지 못하고 맥없이 고향에 돌아올 때에 부모에 대한 생각은 한층 더 간절하였다. 그리하여 「용담의 옛집은 가친께서 지내던 곳이오(龍潭古舍 家嚴之丈席)」라고 하는 동시에 「가련하다 우리 부친 구미산정 지을때에 날주려고 지었던가」라고 하여 돌아가신 선친(先親)을 무척 그리워 하였으며 때로는 「부모님께 받은세업 근력기중 하였으면 악의악식 면치마는 경륜이나 있는 듯이 효박한 이세상에 혼자앉아 탄식하고 그럭저럭 하다가서 탕패산업 되었으니 원망도 쓸데없고 한탄도 쓸데없네」라고 부모님께 받은 세업을 지키지 못하고 탕패산업을 한데 대한 한탄을 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는 낙망하지 않고 굳게 믿는 데가 있었다. 그것은 「부하고 귀한사람 이전시절 빈천이오 빈하고 천한사람 오는시절 부귀로세 천운이 순환하사 무왕불복 하시나니 그러나 이내집은 적선적덕 하온공은 자전자시 고연이라 여경인들 없을소냐」라고 한 「천운과 여경」이었다. 부귀 빈천이 돌고 도는 것도 천운의 순환이오 쇠운이 지극하면 성운이 오는 것도 역시 천운의 순환이었다. 동시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격언과 같이 「좋은 일을 하였으면 좋은 결과가 생기고 나쁜 일을 하였으면 나쁜 결과가 생긴다」는 것이 또한 당연한 이치므로 수운대신사는 「고진감래(苦盡甘來)」가 반드시 있을 것을 믿는 동시에 정무공(貞武公)의 충의와 근암공(近庵公)의 도학(道學), 그리고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덕망으로 인한 여경(餘慶)이 반드시 있을 것을 또한 굳게 믿었던 것이다. 이런 신념과 「불출산외(不出山外)」의 굳은 맹세로 더욱 노력한 결과 드디어 만고(萬古)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대각(大覺)하기에 이르렀는데 각도(覺道)할 그 당시에도 「우리집안 여경인가 순환지리 회복인가」라고 하여 말씀한 것으로 미루어보아 대신사(大神師)의 「천운과 여경」에 대한 심경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정무공(貞武公)의 충의와 근암공(近庵公)의 학덕이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낳게 한 것만 보아도 세상만사는 결코 우연이라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년 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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