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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16-도잠(陶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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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029회   작성일Date 20-06-03 17:28

    본문

    16. 도잠(陶潛)

     

     도잠은 진()나라 때 심양(尋陽) 자상(紫桑) 사람인데 진나라의 도독(都督)으로 있던 유명한 공신인 도간(陶侃)의 증손으로 자()는 연명(淵明) 혹은 원량(元亮)이라고 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고상한 취미를 가지고 공부를 많이 하여 글을 잘 짓기도 하였다. 집 부근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이라는 글을 지어 자신을 오류선생에 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 글에 의하면 성격이 한정(閑靖)하고 말이 적으며 영리를 생각지 않고 독서하기를 좋아하되 심히 파고 들려하지 않고 자기 뜻에 맞는 것이 있으면 기뻐서 끼니조차 잊어버리고, 술을 무척 좋아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항상 사 먹을 수 없는 형편이므로 친구들이 그 사정을 알고 술을 사서 초청을 하면 불려가서 있는 술을 다 기울여 취하도록 마시고 취한 후에는 그 자리를 떠나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았고, 집으로 말하면 아주 처량할 정도로 햇볕과 바람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옷으로 말하면 보잘것없는 데다가 누덕누덕 기워 입었으며 먹는 것으로 말하면 끼니를 몇 번씩 굶기도 하지만 아무 근심걱정도 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언제나 글짓는 것으로 취미를 삼아 자기의 뜻을 나타내기도 하고, 이해득실에 관하여 생각조차 아니하여 이와같이 한평생을 지내니라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성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젊었을 때에 부모는 늙고 집은 가난하여 한때 주제주(州祭酒)라는 벼슬에 나아가기도 하였으나, 곧 그만 두었으며, 후에 팽택령(彭澤令)이 되었으나 팔십여 일만에 군감독관이 오게 되었는데 관리들은 예의와 정장을 갖추어 맞아들여야 한다 하므로 그는 내가 몇 푼 안 되는 봉급 때문에 젊은 애들에게 허리를 굽실거려야 하느냐고 그날로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와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때의 나이는 41세로서 문장으로 유명한 구양수는 말하기를 진나라 시대에는 유명한 글이 별로 없었지만, 있다고 하면 오직 이 글이 있을 뿐이다고 격찬(激讚)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후 세워은 변하여 진나라는 망하고 남북조의 송나라가 등장하게 되었다. 진나라 의희 말(義熙 末)에 나라에서는 저작랑이라는 벼슬을 줄 터이니 들어오라고 불렀지만 이에 응하지 않았고, 원가초(元嘉初)63세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는데 시호(諡號)를 경절선생이라 하고, 또 그를 높여 도징사(陶徵士)라고도 한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자연을 즐겨 전원(田園) 시인으로 유명하였는데 언제나 거문고를 끼고 다니면서 친구와 같이 술을 마시고는 이것으로 창()에 화합하기도 하여 자칭 희황(羲皇) 이전 태고적 사람이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는 처음 유학에 들어갔다가 다음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아 우주자연에 합치하는 데 뜻을 둔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작()도화원원기(桃花園源記)는 그의 이상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는 진나라가 망한 후 송나라에 벼슬하는 것은 의리상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여 글을 쓰는 데 있어서도 년 월일 반드시 기록하긴 하였지만 진나라 시대에는 진나라 연호를 기입하고 송나라 시대에는 갑자식(甲子式)으로 기입하였다고 한다.

    그의 글로 도연명집(陶淵明集)이 세상에 전하여 지고 있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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