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천도교
로그인 회원가입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6-최진립(崔震立) > 자유게시판

회원메뉴

쇼핑몰 검색

  • 천도교소식
  • 자유게시판
  • 천도교소식

    자유게시판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6-최진립(崔震立)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675회   작성일Date 20-03-20 10:11

    본문

    6. 최진립(崔震立)

     

     최진립(崔震立)은 선조(宣祖) 원년(元年 : 1568)에서 인조(仁祖) 14(1636)간의 경주(慶州) 사람이다. 자는 사건(士建)이오 호는 잠와(潛窩)인데 공의 원조는 신라때의 유명한 선비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이오 6대조는 청백(淸白)으로 이름난 조선초기의 성균사성인 최예로서 대대로 명문가정이었다.

    신보(臣輔)의 셋째 아들로 태어난 공()은 불행히도 세 살 때 어머니를 잃고 열 살에 또 아버지를 잃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은 경주부윤(慶州府尹)과 연락하여 동생인 계종(繼宗)과 함께 부하 수십명을 거느리고 경주남쪽 공()의 옛집에 주둔하고 있던 적 수백명에 대하여 밤중에 불을 질러 타죽게 하고 혹은 뛰쳐나오는 생존자는 쏘아 죽이는 등 적을 전부 소탕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조총과 창·검 등을 빼앗아 부윤에 바쳤다. 이를 본 부윤이 탄복한 것은 물론이오 이 소문을 들은 경주일대에서는 서로 앞을 다투어 공()과 함께 적을 몰아내기 위하여 의병(義兵)으로 나선 사람이 오천(五千)에 달하여 승승장구(乘勝長驅), 큰 공을 세웠는데 그때의 나이 25세였다고 한다.

     27세에 무과에 급제하고 1597년 정유(丁酉)에 왜적이 재침할 때에는 결사대 수백명을 이끌고 서생포에 있는 적을 섬멸하였는데 이때에 배꼽밑에 총알을 맞았으나 공()은 얼굴빛을 조금도 변치 않았다고 한다.

    이해 겨울에 명나라의 경략(經略) 양호(楊鎬)와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도와 도산(島山)의 적을 공격하게 되었는데 새로 착임한 부윤 박의장(朴毅長)이 공()을 시기하여 없는 죄를 있다고 하여 무고하여 죽이려 하였으냐 양호(楊鎬)의 반대로 죽음을 면하였다. 이때에 공()은 분하여 내가 무고하게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적에게 죽는 편이 낫겠다고 한 후 적진으로 뛰어들어 좌충우돌(左衝右突)하여 큰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에 적탄이 날아와 오른쪽 뺨을 꿰뚫고 왼쪽 볼따구니 뼈에 박혔는데 공()은 돌아와 이것을 파내니 보고 듣는 사람들이 모두 경탄하였고 나라에서는 크게 표창(表彰)하였다고 한다.

     체찰사(體察使) 이덕형(李德馨)이 역전(力戰)한 장사들을 위문하기 위하여 순회차 이곳에 와서 말 한필을 공()에게 주니 공()적이 침입하고 있는 이 판에 관직에 있는 자로서 마땅히 할 일을 하였는데 무엇을 받으리오하고 끝까지 사영하며 이덕형으로 하여금 더욱 감탄케 하였다고 한다.

     1600년에는 선조의 부름을 받아 적을 공격한 경과와 앞으로의 대책 등을 자세히 보고하니 선조는 기뻐하여 술과 활을 주는 동시에 여조만호겸선전관에 임명하였으나 공()은 취임하지 않았다.

     1607년에는 오위도총사(五衛都總事)에 취임하였고 그후 마량 첨사와 경사우휴를 거쳐 경원분사에 재직한 일도 있었으며 그리고 가덕첨사,경흥부사,공조참판,경기수군절도사 겸 삼도수군통제사, 전리도 수군절도사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인심을 얻었고 청백하기로 이름이 나서 임금의 사랑을 받기도 하였다.

     1634년 병자호란 때에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되자 당시 공주영장으로 있던 공()은 감사 정세규(鄭世規)로부터 늙었으니 황박(黃珀)으로 대신해야겠다는 말을 듣고 내가 아무리 늙었지만 나의 할 일은 해야겠다고 분연히 일어나 출발하게 되었다.

     용인군 험천(용인군(龍仁郡 險川)에 이르러 감사는 뒤에 있고 공()은 선봉이 되어 많은 적군과 싸우다가 세궁역진(勢窮力盡)하여 촌보(寸步)의 후퇴도 없이 장렬한 전사(戰死)를 하였으니 그때의 나이 69세였다.

     그때에 역시 의병으로 목천(木川)에 와 있던 셋째 아들 동량(東亮)이 이 소식을 듣고 죽음을 무릎쓰고 시체를 찾아 거묘(居墓) 3년에 효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그후 인종 때에는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명받았고 효종때에는 시호(諡號)를 정무(貞武)라 하는 동시에 청백리(淸白吏)에 기록되었으며 숙종때에는 대보단(大報壇)과 경주 숭렬사(崇烈祠), 그리고 경원 충렬사(忠烈祠)에 배향(配享)하기도 하였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