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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1- 진시황(秦始皇) 3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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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1- 진시황(秦始皇)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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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302회   작성일Date 20-10-30 15:26

    본문

     그런데 이번에는 이사가 그만 조고의 모함에 걸려들게 된 것이다. 그것은 시황이 죽은 후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맨 처음 진승(陳勝), 오광(吳廣) 등은 기()에서, 항량(項梁)과 항우(項羽) 등은 강동(江東)인 오()에서, 유방(劉邦)은 패()에서 각각 기병(起兵)하여 온 천하가 어지럽게 되었다. 조고는 임금인 호해에게 데하여 이렇게 나라가 어지럽게 된 것은 이사가 승상으로서의 책임을 제대로 못한 것은 물론이요, 삼천군수로 가 있는 그의 아들 이유가 진승 등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허위로 이유를 만들어 일가족과 함께 모두 잡아 죽였던 것이다. 이때에 이사는 자기의 작은 아들을 돌아보며 내가 부귀공명을 고사하고, 이제는 고향에서 누런 사냥개를 데리고 토끼사냥이나 하고 싶은 마음이 있은들 어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하고 비참하게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이사를 죽인 조고는 호해마저 죽이고 나라를 빼앗을 작정으로 먼저 한 가지 시험을 하였다. 그것은 모든 신하들이 호해를 따르는가 또는 자기를 따르는가를 알아보기 위하여, 일부러 사슴 한 마리를 바치면서 이것은 말이라고 하였다. 호해는 웃으면서 이것은 분명 사슴인데 왜 말이라고 하는가 하고 두 사람은 서로 말이다 사슴이다하고 우겨댔다. 그리하여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아 말인지 사슴인지 판단짓기로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은 조고의 위세에 눌리어 사슴인 줄 뻔히 알면서도 양심을 속여 조고의 편에 들어 말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서 그저 묵묵부답으로 있기도 하였다. 그래도 정직한 사람은 사슴이 틀림없다고 솔직하게 대답한 사람도 더러 있었다. 조고는 이런 사람들을 눈여겨 봐뒀다가 그 후 자기 의견에 반대한 사람은 모두 잡아죽였다. 이것이 유명한 고사성어 지록위마(指鹿爲馬)라는 말이 생겨난 유래인데 이쯤 되고 보니 인심은 극도로 공포에 휩싸여 있고 조고의 위세는 황제인 호해를 누르게 되었다.

     드디어 조고는 자기의 사위인 함양령(咸陽令) 염락과 동생인 조성 등과 공모하여 호해를 없애기로 하였다. 먼저 적이 쳐들어오니 막아야겠다고 거짓 꾸며대어, 사위인 염락(閻樂)을 시켜 군사 천여 명을 이끌고 엉뚱하게도 호해가 있는 망이궁을 포위하였다. 호해를 모시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 도망해 버리고 오직 한 사람만이 남아 있었는데 호해는 그 사람에게 물었다. 왜 이런 기미를 미리 알려주지 않았느냐. 그러나 그 그 사람의 대답이 아주 걸작(傑作)이었다. 제가 미리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껏 목숨이 붙어있지, 미리 말하였더라면 벌써 죽은 지 오랬을 것입니다라고. 호해는 아무리 성을 내고 아무리 안타까워 했지만 이제는 별도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염락에게 향하여 승상 조고와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당하였다. 그러면 황제의 자리를 내놓을 터이니 한 고을의 와이나 되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안 된다고 하였고, 그러면 만호(萬戶) 가량되는 지방에 제후로나 있게 해달라고 하였지만 역시 안 된다고 거절당하였다. 마지막에는 할 수 없이 그러면 일개 평민으로 처자와 함께 목숨이나 살려달라고 애원하여 보았지만 염락은 이것마저 안 된다고 거절한 후 나는 승상을 명령을 받아 너의 목을 베러 여기에 왔다고 하지 않는가. 호해도 이제는 할 수 없었던지 그만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조고는 여러 대신의 공자(公子)들을 불러 놓고 시황 때에는 천하를 통일하였기 때문에 황제라 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각국이 모두 자립하여 진나라는 더욱 작아졌으니만치 이름뿐인 황제보다도 옛날과 같이 왕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한 후 호해의 형의 아들인 공자(公子) ()을 진왕(秦王)으로 정하기로 하고 호해는 평민장으로 하였는데 호해가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겨우 3, 그 후 조고는 공자 영()에게 찔려 죽고 그의 삼족도 전멸을 당하였으며, 공자 영()도 왕이 된 지 46일 만에 진군을 격파하고 관중(關中)에 들어온 패공(沛公) 유방(劉邦)에게 항복하고 말았는데, 항우가 함양에 들어와서는 공자 영()과 여러 공자(公子) 및 종족들을 모조리 죽이고, 각종 보물을 탈취하였으며, 아방궁을 위시한 모든 궁실에는 불을 질러 그 불길이 석달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하며, 진시황의 무덤도 항우에게 무참히 발굴되어 진나라는 여기에서 망해 버리고 만 것이었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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