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1- 진시황(秦始皇)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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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해에 또 조궁(朝宮)을 지으려고 먼저 전궐(前殿)인 아방궁을 짓게 되었는데 그 규모는 동서가 5백보(3천척)요, 남북이 50장으로 위에는 만명 가량 앉을 수 있고 아래에는 오장기치(五丈旗幟)를 세울 수 있는 굉장한 건물이었다. 그리고 모든 궁전에는 악기와 미인을 가득 채워 놓고 수시로 이곳 저곳 가서 마음대로 즐기기도 하였던 것이다. 언젠가는 시황이 양산궁에 갔다가 산위서 거리에 지나가는 승상의 행차에 수레와 말탄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좋지 않게 여긴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승상은 시황의 시종 가운데 한 사람으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듣고 수레와 말탄 사람의 수효를 많이 줄였다. 그 다음 승상의 행차규모가 전보다 많이 줄어진 것을 본 시황은 이것은 필시 전에 양산궁에 같이 갔던 수행원 가운데 누가 말한 것이라고 보고 한 사람 한 사람 불러 물어 보았으나 누구 하나 실토하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다음부터는 시황의 간 곳을 아는 사람도 없었으며, 모든 정사의 결재는 대소를 막론하고 오직 함양궁에서만 친히 행하여 그의 사생활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고 한다.
37년에는 시황이 지방순시에 나섰는데 좌승상 이사와 작은 아들 호해와 중거부령 조고와 근신 몇 명 등이 수행하게 되었다. 여러 군데를 돌아다니던 중 시황은 무서운 해신과 싸운 꿈을 구고 그만 병이 생겨 점차 중하게 되었다. 죽음을 각오하였던지 자기가 죽으면 함양에 와서 장례를 같이 지내도록 하라는 편지를 써서 만리장성쪽에 가 있는 맏아들 부소에게 전하려고 옥새(옥새(玉璽)까지 찍어 놓은 후 이 서신이 조고에게만 넘겨지고 사신이 채 떠나기도 전에 시황은 그만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죽게 되었다. 그때의 나이는 50세.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 어떤 변란이 일어나지나 않을까 하여 승상 이사는 이것을 절대로 비밀에 붙이교 식사 올리는 것과 보고사항 등 생시와 다름없이 하였기 때문에 시황의 죽음을 아는 사람은 호해, 조고 등 근시자 5,6명 뿐이었다. 조고는 호해, 이사 등과 공모하여 한 가지 꾀를 내었다. 극서은 시황의 조서를 위조하여 호해로 태자로 삼고, 공자 부소와 장군 몽염에게는 죽음을 주는 서신을 보내는 동시에, 시황이 죽기 전에 써놓은 부소에게 보내는 글은 몽땅 없애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길을 재촉하여 함양으로 향하였는데 며칠이 지나는 동안 시신이 석기 시작하여 냄새가 나므로 이것을 속이기 위하여 썩은 복어를 한섬 가량 수레에 실어 냄새를 풍기기도 하였던 것이다. 함양에 돌아와서는 즉시 시황의 붕(崩)한 것을 발표하는 동시에 호해가 뒤를 이어 황제의 위에 오르고 시황은 여산(驪山)에 장례 지내기로 하였는데, 여산은 황금과 미옥(美玉)이 많이 나오기 때문이었다.
시황의 무덤은 천광(穿壙)할 때에 70여 만 명을 동원하였으며, 무덤안에는 여러 가지 이상한 보물을 간직함은 물론이오, 수은으로 강과 바다를 만들기도 하였으며, 금은으로 오리와 학을 만들어 기계로 오락가락하게 하였으며, 또 사람이 가까이 오면 저절로 화살이 발사되는 장치를 하여 누구나 근접하지 못하도록 하었으며, 자식없는 후궁들은 전부 순장하고, 내부시설을 한 장인(匠人)들도 그 시설을 세상에 알릴까 봐 전부 그 속에서 죽어 버렸다고 전하여지고 있는데 무덤의 크기는 높이가 50장, 주위가 5리나 되었다고 한다.
2세 황제인 호해는 나이가 21세로 조고의 공작(工作)으로 황제가 되었으니만치 언제나 조고를 가장 가깝게 하는 동시에 모든 정치를 조고에게 맡기고, 조고 역시 호해에게 아첨하는 동시에 법을 가혹하게 운용하여 자기의 지위를 더욱 굳혀 갔던 것이다. 그런데 다만 이사가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경우가 있어 먼저 이사를 제거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사는 본래 초나라에서 태어나 순자(荀子)의 문하(門下)에서 공부한 사람으로 언제인가 측간(廁間)에 갔더니 그곳 쥐는 더러운 것만 먹고 사람을 보면 자주 놀래어 달아나기만 하는데, 창고(倉庫)에 갔더니 그곳 쥐는 사람을 겁내는 일도 없고 깊숙이 틀어박혀 배부르게 맛있는 곡식만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쥐는 마찬가지 쥐인데 어떤 놈은 편안히 잘 살고, 어떤 놈은 잘 먹지도 못하면서 놀래기만 하니 그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처할 탓에 달렸으니, 사람도 이와 같아 좋은 곳에 처하면 잘 되고 나쁜 곳에 처하면 못될 것이 뻔하니 무엇보다 좋은 곳에 처해야 되겠다 하고 즉시 시골을 떠나 진나라 서울로 가서 길을 밟아 벼슬이 차츰 높은 대 올랐던 것이다. 그 후 진나라에는 축객(逐客令 : 나그네를 추방한다는 명령. 외국인을 미워하여 추방하는 것)이 내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다른 나라 사람은 모두 쫓겨나게 되었는데 그때에도 그는 정 유명한 「상진황축객서(上秦皇逐客書) : 진나라는 한단 전투에서 조나라에게 패했지만 이듬해인 기원전 256년에 한나라와 조나라를 쳐부수고 이후 이름만 남아 있던 동주(東周)를 멸망시켰다. 소양왕이 죽은 후에 손자 장양왕이 즉위했다. 그런데 즉위한 지 3년이 못 되어 죽는 바람에 13세인 태자 영정(赢政)이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진나라 정권은 재상인 여불위가 장악하게 됐다. 여불위는 재상이 된 후에 문객들을 조직하여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엮어 세상에 내놓았는데 이로 인해 명성이 매우 높아졌다. 영정이 22세가 되던 해에 궁정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여불위도 여기에 관련되어 있었다. 평소 여불위가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것을 안 좋게 생각하고 있던 영정은 이 기회를 이용해서 재상직을 박탈하고 유배를 보냈다. 여불위는 유배지로 가는 도중에 자살했다. 여불위가 죽자 일부 대신들이 영정에게 청하기를, 지금 타국 사람들이 진나라로 와서 한자리씩 차지하고 있는데 다들 자국의 이익만을 고려하고 있으며 어떤 자들은 간첩질까지 하고 있으니 그들을 쫓아내야 한다고 했다. 이에 영정은 진나라 사람이 아닌 관원들을 모두 추방하는 이른바 ‘축객령(逐客令)’을 내렸다. 이사(李斯)는 초나라에서 온 객경이었다. 그는 유가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순자, 즉 순황(荀況)의 제자였는데 진나라로 온 후에는 여불위의 중시를 받아 객경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축객령 때문에 쫓겨날 지경에 이른 것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축객령을 이해할 수 없었던 그는 함양을 떠날 때 진나라 왕에게 상주서를 올렸다. “목공께서 계실 때 백리해와 건숙이 있었기에 진나라는 패주가 될 수 있었습니다. 효공이 계실 때는 상앙의 변법으로 나라가 부강해졌으며 혜문왕이 계실 때는 장의를 등용하였기에 6국의 동맹을 파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소양왕도 범휴를 등용하였기에 나라를 강성하게 하고 위훈을 세웠습니다(앞에서 열거한 신하들은 모두 타국 사람들로, 진나라로 와서 재상이 되었다). 그런데 대왕께서는 지금 타국에서 온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있으니 오히려 타국의 국력을 키워주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상주서를 본 진나라 왕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즉시 사람을 보내서 이사를 도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의 관직을 복직시키고 ‘축객령’을 철회했다. 그 다음부터 영정은 이사를 매우 신임했으며, 이사 또한 진나라의 강성을 위해 많은 방책들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진나라는 한편으로는 각 나라에 대한 진격을 강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각 나라에 사신들을 보내서 제후국들의 동맹을 파기시켰다.)」라는 글을 지어 시화을 감동케 하여 쫓겨나지 않음을 물론이요, 시황의 신임을 더욱 얻어 승상이 되는 동시에 통리사업과 문물제도의 개혁에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그러나 일을 너무 가혹하게 처리하여 백성의 원망을 사기도 하였는데 순자(荀子)의 문하에서 같이 공부하였던 한비자(韓非子)가 자기보다 우수한 것을 알고, 그 후 한비자가 진나라에 왔을 때에 임금에게 음해하여 잡아가두는 동시에 제멋대로 사약(死藥)을 주어 그를 죽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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