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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1- 진시황(秦始皇)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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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228회   작성일Date 20-10-30 15:24

    본문

    21. 진시황(秦始皇)

     

     진시황의 성은 영()이오, 이름은 정()인데, 장양왕(莊襄王)의 뒤를 이어 13세에 왕위에 올랐다. 체격이 장대하고 힘도 세었다.

     처음에는 여불위(呂不韋)를 상국으로 삼아 정치를 하다가, 점차 자라면서 이사(李斯)를 중용하여 변사(辯士)와 돈으로 각국의 군신을 모략 이간시킨 다음 강병으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왕이 된 지 26년에 제·····초 등 6국을 모두 정복하여 천하를 통일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덕은 삼황을 겸하고 공은 오제보다 지나친다는 뜻으로 삼화의 황()자와 오제의 제()자를 다소 황제(皇帝)라 하고, 또 처음으로 황제가 되었다 하여 시황제라 하는 동시에 그 다음부터는 자자손손이 2, 3세로 계승하여 만세에 이르도록 전지무궁하리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임금의 명을 제라 하고, 령을 조라 하였으며 임금이 자신을 말할 때에는 짐이라 하고, 백성의 명칭은 검수(黔首)라고 하였으며, 또 임금이 죽은 후에는 그 행적을 보아 적당한 시호를 지어오던 것을, 익서은 아들이 아버지의 한 일을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이며 신하가 임금의 한 일을 시비하는 불손한 행동이라고 하여 시법(諡法)을 폐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또 진나라는 주나라의 화덕(火德)을 이긴다고 하여 수덕(水德)을 숭상하는 동시에 하수(황하(黃河))의 명칭도 덕수(德水)로 고치고, 연시(年始)의 하례도 10월 초하루에 하도록 하였으며, 의복과 기치(旗幟)도 흑색을 숭상하였으며, 1·6수라고 하여 6자를 내세우는 동시에 임금의 수레도 여섯자의 규모에 말여섯필을 표준으로 하엿으며, 병부도 6, 그리고 6척을 보()라고 하고, 전국을 6·6·636 36군으로 정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본래 천하를 통일한 후에 봉건제도를 두자는 의견도 신하의 일부에 없지 않았으나, 주나라 때에 자제와 공신들을 여러 작은 나라 왕으로 봉하였지만, 수백년을 지나는 동안에 점차 친밀도가 멀어져 서로 세력을 확대하며 싸우는 춘추전국시대가 되어, 주나라는 그만 망해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봉건제도는 채택되지 않고 천하를 36군으로 나누어 군에는 수(군수(郡守), (군수(郡守)의 보좌역으로 병사를 취급), (어사(御史)로서 감독관(監督官))을 두어 중앙집권제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반란을 근절하기 위하여 천하의 병기를 모조리 서울인 함양에 거두워들여 이것을 녹여서 각종 악기와 종, 그리고 동상 열두 개를 만들었는데 그 동상의 무게가 각각 천석(천석은 약 12만근)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도량형을 통일하였으며, 또 글자도 고문을 전부 고쳐 새로 대전(大篆)과 예자(隸字)를 제정하여 이것을고 문자를 통일하였고, 그리고 수도의 번영을 도모하기 위하여 천하의 부호 20만호를 모두 함양에 이주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토목공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하였는데 전국 각지에 통하는 대로의 광()50보로 하고 삼장(三丈) 사이에는 가로수를 심어 미화하는 동시에 참가 달리는데 조금도 지장이 없게 하였으며, 또 제후의 나라를 빼앗은 후에는 그 나라의 궁궐이었던 건물을 도면으로 그려 그 모양대로 함양에 건설할 뿐 아니라. 함양 2백 리 내에 궁관 270이라는 많은 건물을 지어 거기에는 악기와 미인들을 가득히 채워놓고, 건물 사이에는 임금 전용의 복도를 만들어 다른 사람은 임금의 동정을 알 수 없도록 해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지방을 순회하기도 하여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며, 돌에 글을 새겨 진나라의 공덕을 찬양하기도 하였는데, 동쪽을 순회할 때에는 박랑사 중에서 한인(韓人) 장량이 계획한 역사(力士)의 철퇴저격(鐵槌狙擊)을 당하여 무사하기는 하였지만 범인 체포령이 내리기도 하였으며, 이보다 수년 앞서서는 궁전에서 연나라의 자객(刺客)인 형가(荊軻)의 칼을 맞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힘이 센 탓으로 잡혔던 소매만 찟어지고 위험한 고비를 간신히 면한 적도 있었던 것이다. 남방으로 순회할 때에는 동정호(洞庭湖)에서 심한 풍랑을 만나, 그 원인이 순임금의 아내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 신이 발동한 탓이라는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그 부근 상산(湘山)이라는 산중에 있는 아황 여영(娥皇女英)의 사당을 헐어버리는 동시에 죄인 삼천명을 동원하여 그 산에 있는 나무를 전부 베어서 산을 새빨갛게 만들었다는, 벽창호같은 성격을 나타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28년에는 불사약을 구하기 위하여 많은 동남동녀(童男童女)와 함께 제나라 사람 서시(西市)를 동해에 있다고 전해지는 봉래, 방장, 영주 등 삼신사에 보낸 적이 있으며, 32년에는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이 바다로부터 돌아와 보고한 가운데 녹도서(錄圖書)라는 참서(讖書)에 이르기를 진나라를 망케 할 자는 호라는 말을 듣고 호()자를 자기의 아들인 호해인 줄을 모르고 북호(北胡)인 흉노인 줄로만 오해하여, 몽염(蒙恬)이라는 장수를 시켜 군사 삼십만으로 북쪽 오랑캐를 공격하여 물리치는 동시에 다음해에는 북호가 다시 쳐들어오지 못하도록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게 하였던 것이다.

     34년에는 승상인 이사가 글을 올려 말하기를, 지금은 세상이 안정되어 백성은 집에서 일만 부지런히 하고 선비는 법령만 배워 익히면 될 터인데, 모든 선비들이 그렇지 않아 옛 학문만 하고 지금 것을 배우려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새 법령이 나오면 입즉심비入則心非(입즉심비)하고 出則巷議(출즉항의)하여 나라 일을 훼방만 하고 인심을 현혹시키니 이런 일을 일체 금하는 동시에 역사책도 진나라 역사가 아니면 전부 불살라 버리되 만약 시서를 가지고 말썽을 부리는 자가 있으면 당장에 목을 베고, 또 옛날 도리만 옳다하고 지금 정치를 비방하는 자는 일가족을 전멸하고, 만약 관리로서 이것을 알고도 집행하지 않는 자는 같은 죄로 다스리며, 명령이 내린 지 30일 내에 불사르지 않는 자는 묵형(墨刑))을 가하여 강제노동을 시키도록 하고, 다만 없애지 않은 책은 의약에 관한 것과 점서(占筮)책 그리고 곡시과 초목을 심는데 관한 것 뿐이고, 법령을 배우려는 자는 관리를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이 대체의 내용이었는데 시황은 이것을 옳게 여겨 그대로 실행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35년에는 후생(候生), 노생(盧生) 등이 시황을 비방하고 어디론지 도망해 버렸다. 시황은 크게 노하여 함양에 있는 선비들을 모조리 잡아다가 비방한 자를 문초한 결과 선비들은 자기 발뺌만 하고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 씌워 서로 불어넣는 것이 460여 명에 달하였다. 시황은 이들을 모두 함양에 구덩이를 파고 산 채로 묻어버렸던 것이다. 이것을 본 맏아들 부소가 극력 간하였지만 시황은 간하는 말에 또 노하여 부소를 북쪽으로 내 쫓아 그곳에 가 있는 몽염(蒙恬)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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