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천도교
로그인 회원가입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7-두목(杜牧) > 자유게시판

회원메뉴

쇼핑몰 검색

  • 천도교소식
  • 자유게시판
  • 천도교소식

    자유게시판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7-두목(杜牧)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018회   작성일Date 21-02-18 10:01

    본문

    27. 두목(杜牧)

     

    두목은 당나라때 경조(京兆)인로서 자()를 목지(牧之)라 하고 호()를 번천(樊川)이라고 하였는데 어렸을 때부터 재명(才名)이 있었다고 한다.

    진사에 급제하여 벼슬은 감찰어사가 되었다가 선주단련판관과 황주 지 목주 조주 등지의 자사를 지내고 회창중에는 중서사인으로 옮겨졌는데 만년에는 불우하여 주사청루(酒肆靑樓)에 몸을 담기도 하였던 것이다.

    천성이 강직하여 기절지사라는 칭호가 있었으며, 작은 일에 구애되지 않고 천하대사에 대한 담론은 좋아하였다고 하며 그리고 풍채도 좋았던 모양이다.

    그의 시는 호매(豪邁)하였으며, 자기의 묘지를 자기의 손으로 미리 지어 두기도 한 좀 색다른 일도 하였으며, 그리고 평생 동안 지은 글을 스스로 불살라버리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50에 세상을 떠났는데 번천집(樊川集)이 있다고 하며 당나라 시대의 시인으로 이백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두보(杜甫)를 노두(老杜)라 하고 두목을 소두(小杜)라고 하여 구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

    수운대신사께서는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얼굴은 관옥이오 풍채는 두목지라라고 하여 자신의 풍채를 두목지에 비하였는데, 여기에서 대신사의 얼굴과 풍채가 보통 아니고 훨씬 뛰어났다는 것을 짐작하게 되는 것이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별첨자료


    산행山行 


                                           두목(杜牧) (당唐803~853)


    원상한산석경사(遠上寒山石徑斜) 멀리 오르는 쓸쓸한 산 돌길 비탈지고
    백운생처유인가(白雲生處有人家) 흰 구름 이는 곳에 인가가 있다
    정거좌애풍림만(停車坐愛楓林晩) 수레 멈추고 앉아 즐기노니 단풍 숲은 저무는데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서리 맞은 잎이 이월의 꽃보다 붉다

    한산寒山은 쓸쓸한 가을 산이겠지요. 杜牧(두목)(당唐803~853)은 풍채로 이름 날리던 바로 그 두목지(杜牧之)입니다.  자(字)가 목지(牧之)고 호는 번천(樊川)입니다. 경조부(京兆府) 만년현(萬年縣) 즉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출생입니다. 이상은(李商隱)과 더불어 이두(李杜)로 불리며, 또 작품이 두보(杜甫)와 비슷하다 하여 소두(小杜)로도 불립니다. 26세 때 진사에 급제하여, 굉문관교서랑(宏文館校書郞)이 되고, 황주(黃州) 지주(池州) 목주(睦州) 등에 지방장관격인 자사(刺史)를 역임한 후, 벼슬이 중서사인(中書舍人)까지 올랐습니다. 세사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과 방탕에 가까운 탐미주의자, 풍류객의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혔고 관옥 같은 용모에 당당하고 멋진 풍채로 수많은 여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도 했습니다. 그가 낙양자사(미인이 많은 도시로 낙양의 직할시장 내지는 도지사급)로 재직할 당시 술에 취해 마차를 타고 거리를 지날 때면 기생들이 귤을 던져 마차를 가득 채웠다고 하는 ‘취과양주귤만거(醉過楊洲橘滿車)'는 고사의 주인공 바로 두목지입니다. 

     두목은 살아있는 동안에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동생이 실명(失明)하자 그의 가족을 보양했을 뿐 아니라 지아비를 여읜 여동생의 일가까지 맡아 부양할 가족이 40 명이 넘었습니다.

     대가족을 거느리고 빈궁과 싸우면서 국사에 마음을 바친 그가 마지막까지 버리지 못했던 것은 미인을 얻으려는 갈망 한 가지였습니다.

     천성이 강직하여 절개가 남다르고 작은 일에 구애됨이 없이 대사를 논단했던 그는 당나라의 쇠운 만회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으나 역사의 큰 물줄기를 되돌리지는 못했습니다.

    정치와 병법을 연구하고, 《아방궁阿房宮의 부賦》라는 시를 지어 경종(敬宗)을 충고하려고 애썼습니다. 산문에도 뛰어났지만 시에 더 뛰어났으며, 근체시(近體詩) 특히 칠언절구(七言絶句)를 잘 했습니다. 만당시대(晩唐時代)의 시인에 어울리게 말의 수식에 능했으나, 내용을 보다 중시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역사에서 소재를 빌어 세속을 풍자한 영사적(詠史的) 작품이 나오고 함축성이 풍부한 서정시가 나왔습니다. 

     나이 쉰이 되던 해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는지 그는 스스로 묘지(墓誌)를 짓고 시문을 정리했고 이때 많은 시고(詩稿)를 불태워 버렸습니다.

    대표작으로 시 《아방궁의 부》 이외에 《강남춘江南春》 《번천문집樊川文集》(20권) 등이 있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