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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4-이덕형(李德馨)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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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574회   작성일Date 20-12-21 09:13

    본문

    24. 이덕형(李德馨)

     

    이덕형은 명종(明宗) 16(1561)에서 광해군 5(1613) 때 사람으로 광주이씨인 중추부사 민성의 아들인데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또는 쌍송 구옹산인(雙松 拘雍散人) 등이오, 시호는 문익(文益)이다.

    20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이조정랑·직제학·승지·대사헌·대사성·이조참의·예조참판 등을 거쳐 호조판서 겸 대제학에 이르렀는데 그때의 나이 31세였다고 한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가는 도중 왕명을 받고 청원사로 명나라에 들어가 구원병을 청하는데 성공하였으며 귀국 후에는 평양과 서울 탈환 등에 공로가 큰 동시에 한성부판윤과 형조판서를 거쳐 병조판서가 되었으며 1594년에는 이조판서 겸 훈련도감이 되기도 하였다.

    1595년에는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 체찰부사로 활동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시는 명나라 사신을 설복시켜 서울을 지키게 하였고 그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이 되었는데 그때의 나이는 38세였다. 1601년에는 도체찰사로 남방을 다스리고 그후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영의정이 되어 호를 받기도 하였다. 광해군 때에 영창대군의 처형과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였으며 이항복과는 특히 친교가 두터웠다. 결국 반대파의 모략으로 면직(免職)이 되어 양근으로 돌아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서예에도 능하였다고 하며 인조때에 복관이 되었는데 포천 용연서원과 사중 근암서원에 배향(配享)되었고 그의 글로는 한음문고(漢陰文稿)가 있다고 한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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