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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5-김덕령(金德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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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535회   작성일Date 21-01-12 12:31

    본문

    25. 김덕령(金德齡)

     

     김덕령은 명종 22(1567)에서 선조 29(1596)때 사람으로 광주김씨 붕섭((鵬燮)의 아들인데 자()는 경수(景樹), 시호는 충장(忠壯)이었다.

     광주 석저촌 사람으로 용력이 뛰어나 달아나는 개를 따라잡아 그 고기를 다 찢어 먹기도 하고 말을 달리다가 좁은 곳에서도 곧 말머리를 돌리기도 하였으며, 그리고 지붕을 훌쩍훌쩍 넘기도 하였다는데, 언젠가는 대나무 숲속에 호랑이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활과 창을 가지고 가서 먼저 활을 쏘았다. 호랑이는 입을 벌리고 달려오는지라 그는 창으로 호랑이 턱밑을 찌르고 타고 앉으니 범은 꼼짝도 못하고 다만 꼬리만 흔들다가 그의 손에 죽었다고 하니 힘이 얼마나 세고 또 몸이 얼마나 날센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는 담양부사 이경린과 장성현감 이귀의 천거로 종군하게 되었는데 이귀는 일찍 말하기를 지혜는 공명(제갈량)과 같고 용맹은 운장(관우)과 같다고 하였으며, 광해군이 세자로 있을 때에 호남지방 순시차 전주에 들려 그를 불러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이름을 주기도 하였다.

     또 그는 땅을 팔아 무기를 장만하는 동시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과 대항하여 싸우기도 하였는데 일찍이 몸에는 백근이 되는 철퇴를 두 개를 허리 좌우에 차고 다니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진주목장에 사나운 말이 있어 달아나 곡식을 막 짓밟고 이리저리 나는 듯이 뛰어 다니는데도 누구하나 잡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가 이 소식을 듣고 곧 그곳으로 달려가 맨손으로 그 사나운 말을 붙잡아타니 말은 꼼짝도 못하고 순순히 말을 잘 들었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왜병들은 겁이 나서 그 다음부터는 석저장군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가 광주 석저촌 사람이니까 정말 돌밑에서 나온 장수인 줄 잘못 알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의병을 정돈하고 일시 선전관이 되기도 하였으며, 권율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고성·진행 등지를 방어하였는데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적군을 물리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성에 상륙하려하던 적병은 격퇴되어 그들은 무서운 의병장이라고 벌벌 떨었다고 한다.

     1596년 이몽학에 호서에서 반란을 일으키다가 진압되었을 그대에 김덕령을 시기하던 무리들이 이몽학과 내통하였다고 무고(誣告)하였으므로 그는 체포되어 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그는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받으면서 어찌 역적과 통하겠느냐하면서 힘껏 힘을 쓰니 몸에 묶었던 철사가 다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옥중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심한 고문을 당하여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그때의 나이 불과 30이었다.

     그후 1661년에 신원(伸冤)이 되어 복직되었으며 1668년에는 병조참의에 추증(追贈)되었고 1678년에는 벽진서원에 제향되었으며 1681년에는 병조판서로 가증되었고 영조때에는 의열사(義烈祠)에 배향되었으며 1788년에는 좌찬성에 가증되었다고 한다.

     그는 일찍이 見志라는 시를 통하여


    絃歌不是英雄事(현가불시영웅사) 거문고 들고 노래 부르는 것 영웅의 할 일 아닐세

    劒舞要須玉帳遊(검무요수옥장유) 칼 춤추고 무예 익힘 큰 뜻이로다.

    他日洗兵歸去後(타일세병귀거후) 국가를 위하여 적을 평정하고 돌아가서

    江湖漁釣更何求(강호어조갱하구) 한가로히 강호에 낚시질 밖에 또 무엇을 바라는가?

    자신의 기개를 드러낸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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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운대신사는 안심가에서 전세임진 그때라도 오성, 한음 없었더면 옥새보전 누가 할까 아국명현 다시 없다라고 하여 오성과 한음의 공적을 찬양하였으며 또 만고충신 김덕령이 그때 벌써 살았더면 이런 일이 왜 있을꼬, 소인참소 기험하다 불과삼삭 마칠 것을 팔년지체 무삼일고라고 하여 만고 충신 김덕령이 아무 죄없이 억울하게 죽은데 대하여 아쉬워하는 동시에 소인참소에 대하여 일면 분개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오성과 한음의 공적에 대하여는 위에서도 기록된 바와 같이 임진왜란 때에 선조를 따라 의주에 가기도 하였으며 혹은 병조판서로 군정비에 힘썼다든지 혹은 민심을 수습하였다든지 혹은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청해 온다든지 하여 왜적을 물리치며 국권을 보존하는데 힘쓰는 등 큰 공이 있었으므로 그렇게 말한 것으로 보이는데 특히 아국명현 다시없다라는 문구에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성과 한음 이후에도 문장과 지위로 이름을 날린 사람들이라든지 혹은 문묘(文廟)에 배향된 선비라든지 소위 명현이라는 사람이 전연 없는 바도 아닌데 수운대신사가 본 아국명현 다시없다라고 하였으니 수운대신사가 본 명현은 보통 세상에서 보는 명현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글을 잘 하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할지라도 당파싸움이나 하고 국가를 우선적으로 보지 않는 사람. 다시 말하면 외적의 침입으로 국난이 있을 때에 그 국난을 평정할 줄 모르는 그런 사람에 대하여는 명현으로 손꼽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수운대신사께서 얼마나 애국심에 불타고 있었느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또한 한울님께 옥새보전 봉명했네라고 하여 자신이 국가에 대한 결의를 밝혀놓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덕령에 대하여는 만고충신이라고 격찬하였으며, 또 이런 충신을 소인참소에 의하여 죽인다는 것은 진실로 아까운 일일뿐 아니라 국가를 위하여 큰 손실인 동시에 욱일념에 찬 자신에 대하여도 세상에서 온갖 음해를 다하여오니 참으로 답답한 일이라고 개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또한 신선되어 비상천 한다해도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받아 일야에 소멸하고서 전지무궁하여 놓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한의 원수 값아 보세. 중수한 한의비각 헐고나니 초개같고 붓고나니 박산일세. 이런 걱정 모르고서 욕악한 세상사람 눌로 대해 이말 하노. 우리 선조 험천땅에 공덕비를 높이세워 만고유전 하여보세. 송백같은 이내절개 금석으로 세울줄을 세상사람 누가알까. 애달하다 저사람이 눌로대해 음해하오 요악한 저인물이 눌로대해 저말하노 한울님이 내몸내서 아국운수 보전하네이와같이 수운대신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뼈에 사무친 국가적 대원한을 풀려고 무척 애를 썼으며 또 이러한 진충보국(盡忠報國)의 일념은 아무리 세상에서 음해와 중상을 한다 할지라도 그로 인하여 조금도 꺽일 바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동시에 나라의 운명을 전적으로 떠받는 굳은 신녕에 찬 자부심과 단호한 결의를 나타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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