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월신사의 순도(殉道)를 추모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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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월신사의 순도를 추모하자.............표영삼
6월에는 국민적으로 행사하는 현충일이 끼어있고 교회적으로 행사하는 해월신사 순도일(殉道日)이 끼어있다. 해월신사께서 대도를 위해 순도하신지도 벌써85주년(올해 123주년)이 된다. 강원도 원성군 호저면 고산리 송골이란 마을에 있는 원진여의 집에서 포덕38년(무술년1898) 4월 5일(양력7월20일) 교형(絞刑)으로 72세의 생애를 마치셨다.
신인간지(1927년7월호)에 보면 ‘해월신사의 수형전후실기’가 조기간의 글로 실려 있다. 이 글은 당시 종법사인 정암(正菴) 이종훈선생(천도교 민족대표의 한분)의 생생한 증언을 그대로 적은 것이다. 정암장은 해월신사 체포 후부터 처형된 다음, 산역(山役)에 이르기까지 참관했던 유일한 어른이다. 이제 당시의 해월신사를 생각해 보는 뜻에서 주요한 내용을 그대로 소개한다.
...이종훈씨는 날마다 김준식집에 내왕함으로 신사께서 언제 재판받으러 가시는 것을 알고 그날이면 새벽 조반을 하시고는, 그 감옥문 밖에 미리미리 가서 이리저리 거닐면서 기다리다가 열시나 열한시쯤 되면 신사께서 나오심을 보이게 되는데 신사께서 아무리 기골이 장대하신 어른이실지라도 나이 칠십 이세나 되시고 수삭동안 옥중에 계시고 겸해서 병환으로 오랫동안 계신 어룬으로서 목에는 전목칼을 쓰시고 나오시는 얼굴을 보이면 뼈가 저리고 창자가 끊어지는 듯 하였다 한다.
그 전목칼이 하도 무거워서 옥졸한사람이 칼 앞머리를 받들고야 평리원으로 들어오시게 되었다 한다. 들어오시다가는 ‘아이고 목이야! 아이고 다리야!’ 하시면서 한두 번 씩은 그대로 길에 앉으셔서 쉬어서야 오시었다 한다. 그 때에 이종훈 씨는 신사의 곁을 따라다니면서 보였는데 신사- 묵묵히 바라다보시면서 어떤 때에는 퍽–비감하시는 때도 있었는데 그런 때에 제일 괴로운 것은 자꾸 눈물이 쏟아지는데 그 자취를 곁에 있는 사람이 모르게 하기 위하여 어찌하면 이 눈물이 못나오게 할까함이 제일 고통이었다 한다. 그렇게 다니시면서 재판받기를 십여 차를 하시었다.
...그러다가 유월 일일에는 갑작스럽게 좌도난정률(左道亂律)이라는 죄명으로 사형선고를 받으셨다. 그리하여 바로 그 다음날인 초 이틑 날로서 곧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다
무슨까닭으로 그와 같이 갑작스럽게 판결을 하였으며 판결이 나자 곧 집행을 하였는가 생각할 때엔 소름이 끼친다. 그 때에 신사의 병환이 나날이 침중하셔서 병세가 위태 위태하다하여 하루바삐 판결하여 한시바삐 사형을 집행치 않으면 병사할 염려가 되어, 그런 큰 죄인을 병으로써 죽게 한다는 것은 나라의 체면으로나 정부의 위신상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 하여 그와 같이 급작스럽게 판결해서 그대로 곧 사형을 집행하였던 것이라 한다. 얼마나 놀라운가?
...유월 이일 오전에 서소문 감옥에서 신사를 육군법원(전 좌포청(左捕廳)이요 현 경성(京城) 수은동 59. 국민협회와 시사평론사가 빌려 들어있는, 총독부소관인데 바로 단성사 뒷집)으로 옮겨 가두었다가 그날 오후 다섯 시 쯤에 교형(絞刑)으로써 사형을 집행하였다 한다.
...그런데 한 가지 무참한 일이 있는 것은 갑오년 동학당 난리 때에 관군측 안성부대대의 참령 이선재가 동학군에게 전사하였는데 그의 아들 되는 자가 항상 자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하던 중에 신사께서 사형 당하심을 알고 신사의 시체가 육군법원 교형장 뒤뜰에서 이틀 밤을 지나는 동안에 뒷담 떨어진 데로 밤에 넘어 들어와서 신사 시체의 뒷머리를 나무로 난타하여 크게 상하게 하였다한다.
대신사의 최후도 비참했지만 해월신사의 최후도 이처럼 비참했다.
바른 길을 가는 데는 반드시 가시밭이 있게 마련이며 정의로운 주장을 하게 되면 불의의 거센 탄압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거룩한 이의 발자취를 회고하면서 나 자신이 오늘에 걸어가야 할 길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서 해월신사의 순도를 추모한는 6월이 되었으면 한다 .(삼) (신인간1983.6월호)
'해월신사의 수형전후실기'는 파일로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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