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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3-이항복(李恒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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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246회   작성일Date 20-11-27 11:57

    본문

    23. 이항복(李恒福)

     

    이항복은 조선 명종11(1556)에 서 광해군 10(1618) 때 사람으로 경주이씨인데 고려말 명상(名相)인 이제현의 후손이오 참정 몽량(夢亮)의 아들이었다. 자는 자상(子常)이오, 호는 백사(白沙), 또는 필운(弼雲), 청화진인(淸化眞人), 동강(東岡), 소운(素雲) 등으로 불리웠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태어난 지 이틀이 되어도 젖을 빨지 못하고 사흘이 되어도 울지 않으므로 이상히 여겨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았더니 장래에 귀하게 될 사람이라고 하였다.

    여덟 살 때에 아버지가 거문고와 검을 가지고 대구(對句)를 지으라고 하였더니 즉석에서 검은 장부의 기운이 있고 거문고는 태고쩍 소리를 가지고 있다(劍有大丈氣, 琴將太古音)라고 하여 글재주를 보였다고 하며, 12,3세에는 의()를 좋아하여 새옷을 입고 밖에 나갔을 때에 헌 옷을 입은 동리 아이들이 부러워하는 것을 보고 즉시 자기가 입었던 새 옷을 벗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15세가 되면서 용맹을 좋아하여 수족과 신체단련에 힘썼는데 이것을 본 어머니가 꾸중을 하였으므로 그 다음부터는 글공부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15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재주와 학문으로 선조의 신임을 얻었으며 그 후 이조정랑(吏曹正郎)으로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다스리는데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혹은 직제학 우승지 호조참의 좌승지 등을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도승지로 선조를 따라 의주에 갔으며 명나라의 후원을 얻는데 적극 힘쓰기도 하였는데 명나라의 사신 양방정은 동방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느냐고 감탄하였으며, 경략(經略) 양호(楊鎬)는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李尙書 李尙書하고 묻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임란 중에 당쟁조정에 힘쓰는 동시에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를 지내어 군정비에

    힘썼으, 그간에 있어서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하기도 하였는데 1598년에는 진주사(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으며, 그후 좌의정 우의정 그리고 도원수 겸 도체찰사를 거쳐 영의정이 되기도 하였으며, 호성 평란공(扈聖 平亂公)으로 오성 부원군(鰲城 府院君)에 봉()함을 받기도 하였다.

    그후 일단 직을 그만 두었다가 광해군 때에 다시 좌의정 도체찰사 우의정 등으로 있었는데 1613년 은퇴하였다.

    그는 영창대군 옥사와 폐모론을 반대하다가 북청에 귀양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귀양갈 때에 지은


    철령 높은 재에 자고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띄어다가

    임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하리


    라는 유명한 시를 후세에 남겨 놓기도 하였다.

    귀양갈 때에는 삭직(削職)이 되었으나 사후(死後)에 다시 복관(復官)이 되어 포천(抱川) 화산서원(花山書院)과 북청 노덕서원(老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는데 효종때에는 서원에 사액(賜額)이 있었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등록되어 있기도 하다.

    그의 저서로는 백사집(白沙集), 북천일록(北遷日錄), 주소계의(奏疏啓議), 사례훈몽(四禮訓蒙), 노사영언(魯史零言) 등이 있다고 한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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