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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9-맹자(孟子)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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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643회   작성일Date 21-03-02 17:05

    본문

    29. 맹자(孟子)

     

     맹자는 공자보다 백여 년 뒤 떨어진 중국 전국시대 사람으로 추()나라에 태어났는데 성()은 맹이오 이름은 가() ()는 자여(子輿)이다.

     어렸을 때에 어머니 장()()의 삼천지교(三遷之敎)라 하여 처음에는 지금의 공동묘지 부근 같은 그러한 곳에 살았는데 맹자의 장난이 장례 지내는 흉내를 내므로 아이를 기를 곳이 못 된다고 하여 시장으로 이사를 하였던 바, 거기에서는 또 물건을 사고 팔고 하는 장난만 하므로 이곳도 아이를 기를 곳이 못 된다고 하여 그 다음에는 글방 근처로 이사하였던 바 보고 듣는 것이 책을 읽으며 글씨를 쓰는 행동이었으므로 이 곳이 과연 아이를 기를 곳이라고 하여 그 곳에서 지내기로 하였다는 것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며 또 그 다음 맹자가 공부하기 위하여 먼 객지에 나갔다가 기한 전에 돌아온 것을 본 그의 어머니가 베를 짜다가 대단히 노하여 짜던 베를 끊어버리면서 네가 공부를 끝내기도 전에 중도에 돌아온 것은 마치 베를 칼로 칼로 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호되게 책()하였다는 것도 넓게 알려진 이야기인 동시에 공자의 손자인 자사의 문인(門人)에게서 공부하였다는 것도 역시 세상에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당시로 말하면 전국시대라 소진(蘇秦), 장의(張儀)의 주창한 바와 같은 합종(合從)연횡(連橫)의 설이 횡행(橫行)하여 전쟁이 그칠 날이 없었다. 맹자는 제나라와 양나라 그리고 기타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인의와 왕도정치를 설명하였지만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지막에는 고국에 돌아와 제자인 공손추(公孫丑), 만장(萬章) 등과 함께 맹자(孟子) 칠편(七篇)을 지었는데, 그의 학문은 성선설에 기초를 두고 요,,,,,,주공,공자의 덕을 찬양하는 동시에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도를 배척하였으며, 호연지기(浩然之氣)와 사단설(四端說) 등을 제창하여 세도인심에 기여하는 바가 적지 않았으며, 그리고 84세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는 공자와 아울러 공맹지덕 또는 추로지풍(鄒魯之風)이라고 하여 삼강오륜(三綱五倫)과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윤리도덕에 근본을 두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목적으로 유가(儒家)의 주류를 이루는 동시에 이것이 다시 후세의 주염계(周濂溪), 정명도(程明道), 정이천(程伊川), 주자(朱子) 등에 인계되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시대에 유교로 나라를 세우는 등 영향력이 대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어 오늘날에는 그 존재조차 희미해 가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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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운대신사께는 각도(覺道)하기 전 곤란한 생활속에서 가족을 위로하면서 세세유전 착한마음 잃지말고 지켜내어 안빈낙도 하온후에 수신제가 하여보세라든가, 또는 고진감래 없을소냐 흥진비래 무섭더라 한탄말고 지내보세등등 안빈낙도에 관한 말씀을 자주 하였으며, 그리고 각도(覺道)한 이후에는 논학문(論學文)에서 보여 준 바와 같이 우리 도는 고금을 통하여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새로운 진리를 가진 종교하고 하여 재래의 종교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였지만, 그러나 유교가 과거 수천년 동안 커다란 힘을 가지고 세도인심을 지배해 온 것처럼 우리 도도 그러한 성운을 맞이하여 새 세상을 건설하는 큰 힘이 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생각이 간절하였던 것 같고 또 그렇게 확신하였던 것 같다. 즉 논학문에서 공자는 노나라에서 나서 추나라에 도를 폈기 때문에 추로(鄒魯)의 풍화(風化)가 이 세상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우리 도가 서도(西道)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할 때에 추로의 풍()을 예로 들었으며, 또 수덕문(修德文)에서는 나면서부터 아는 것은 공부자(孔夫子)의 성인 바탕이오 배워서 아는 것은 옛 선비들의 서로 전한 것이라든가, 용담가에서 서읍주산 있었으니 추로지풍 없을소냐라든가, 또 수덕문(修德文)에서는 어른들이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은 마치 삼천제자의 반열같고 어린이들이 읍하고 절하는 것은 6~7의 읊조림 같더라, 나이 나보다 높은 것은 자공의 예와 같고 노래부르고 춤추는 것은 어찌 중니(仲尼)의 뛰노는 것이 아니겠는가라든가, 또는 도수사(道修詞)에서 자고성현 문도들은 백가시서 외워내어 연원도통 지켜내서 공주자 어진도덕 가장더욱 밝혀내어 천추에 전해오니 그아니 기쁠소냐 나역시 이세상에 무극대도 닦아내어 오는사람 효유해서 삼칠자 전해주니 무위이화 아닐런가라든가, 화결시(和訣詩)에 있어서 태산이 높고 높음이여 공부자가 오른것은 어느때인고(, 맹자(孟子)(盡心章) 에 공자(孔子)가 동산에 올라서는 노()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말에 의한 것인 듯)라든가, 또는 사람은 공자가 아니지만 뜻은 같다고 한 것 등, 문구에 있어서는 약간씩 다른 점이 있지만 대체에 있어서는 언제나 자신과 공자를 대조하여 보는 동시에 자신의 의지와 신념과 기쁨을 아울러 표시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드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수덕문(修德文)에서는 공부자의 도를 깨달으면 한 이치로 될 것이오, 우리 도로 말하면 대체는 같으나 약간 다른것이 있다고 한 동시에, 인의예지는 옛 성인의 가르친 바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내가 다시 정한 것이니라고 유교와 다른 점을 분명히 하고 수심정기를 뚜렷이 내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교훈가(敎訓歌)에서는 유도 불도 누천년에 운이 역시 다했던가하고, 몽중노소문답가에서는 이 세상은 요순지치라도 부족시오 공맹지덕이라도 부족언이라하여 과거의 낡은 정치와 낡은 도덕인 요순의 정치와 공맹의 도덕이 과거에 있어스는 아무리 세도인심에 공헌한 바가 있었다 할지라도 시대의 진운에 따르지 못하여 쇠퇴의 운명에 빠진 이것을 가지고서는 도저히 세상을 건질 수 없을뿐더러 세태 그 자체도 병이 골수에 든 중환자와 같아서 어찌할 도리가 없이 되어버린 것을 무한히 한탄하는 동시에, 이것을 타개하는 데는 새시대 새 운수에 맞는 새로운 진리가 있어야 되겠다는 그 필요성을 심각히 생각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로 깨달은 금불문 고불문 금불비 고불비(今不聞 古不聞 今不比 古不比) 의 새로운 진리 즉 만고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 각처에서 어진 선비들이 풍운같이 모여 들어 성운성덕을 이루었지만, 그 반면 음해중상하는 자도 적지 않아 수운대신사께서는 도덕가(道德歌)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공자지세에도 환퇴(桓魋)가 있었으니 우리 역시 이 세상에 악인지설 피할소냐하고 탄식 겸 스스로 위로하여 보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리해도 죄없으면 그뿐일세, 또는 한울님이 내몸내서 아국운수 보전하세등등 자신만만한 신념으로 죄악을 멀리하고 오직 천리 그대로를 선전하며 실천하여, 나라를 바로잡고 백성을 잘 살게 하는 동시에 허다한 세상 악질을 퇴치하여 포덕천하와 광제창생의 길을 개척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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