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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연원(淵源)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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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천도교중앙도서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318회   작성일Date 21-05-12 09:58

    본문

              천도교 연원(淵源)의 유래      ...........수송   김응조

     

    1. () 조직과 교단의 형성

     대신사께서 경신년 45일 무극대도를 득도하시고 1년여 동안 수이연지 하신 후 다음해인 신유년(포덕2) 6월부터 포덕을 시작했다. 그러자 원처 근처 어진 선비 풍운같이 모아드니, 통개중문 하여두고 오는 사람 가르치니 불승감당 되었더라는 경전 말씀 그대로 소문을 듣고 용담정으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인해 포덕이 날로 늘어갔다.

    이에 따라 신유포덕 후 자연발생적으로 접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처음에는 누구 접이라는 명칭으로 호칭되었다. 그러다가 대신사께서 세상의 음해를 피해 남원 은적암에 다녀오신 후 포덕31229일 흥해 손봉조의 집에서 처음으로 교인들을 조직화하여 경주를 비롯한 각 지역별로 16명의 접주를 임명한 것이 연원의 효시가 된다. 이 때부터 편의상 접주가 있는 지역 명칭을 붙여 영덕접이니 안동접이니 불렀다. 당시 처음으로 조직된17개 접과 접주는 다음과 같다.

     

    경주부내 이내겸, 부서 백사길.강원보, 영덕 오명철, 영해 박하선, 흥해 손봉조, 대구.청도 김주서, 경기도 이창선, 청하 이민순, 영일 김이서, 안동 이무중, 단양 민사엽, 영양 황재민, 신령 하치욱, 고성 성한서, 울산 서군효, 영천 김선달(이름모름), 장기 최중희

     

    이렇게 해서 비로소 동학 교문이 형성되었다. 교단을 형성하는 데는 교리. 교인. 조직 이 3대 요소가 있어야 성립된다. 따라서 대신사께서 접을 조직함으로써 이 3대 요소가 충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포덕4723일에 대신사께서 해월신사를 북접주인으로 정함으로써 우리 교단의 정통연원은 북접에서부터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이 해 814일에 해월신사에게 도통을 전수하였다. 이것이 대신사께서 말씀하신 사사상수(師師相授)로서 우리 교단의 첫 번째 사사상수가 된다.

     

    2. 교단 체제의 정비와 포제(包制)의 시행

     해월신사는 포덕123월 이필제의 영해작변 후 피신생활을 하다가 영월 박영걸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포덕162월에 단양 도솔산 근처에 있는 송두둑으로 이거한 후 이 해 1018일에 정선 등지에 통문을 보내어 교단의 융성을 기원하는 제례를 지냈다. 이 때 해월신사는 예복을 입고 관모를 썼다. 그리고 이 날 용시용활의 법설을 말씀하신 후 내 이 뜻을 후세 만대에 보이기 위하여 내 스스로 이름을 고쳐 수범을 보이노라하시고 자신의 이름 경상(慶翔)시형(時亨)으로 바꾸었다. 이어서 강수는 강시원으로, 유인상은 유시헌으로, 전성문은 전시황으로 고치는 등 여러 제자의 이름을 때 시()’ 자를 넣고 바꾸게 했다. 또한 이날 강수를 서열 2위인 차도주로 임명하고 그 후 유인상을 서열 3위인 도접주로 임명하여 교단 체제를 정비하였다. ()라는 명칭이 등장한 것은 해월신사가 포덕 251028일 대신사의 탄신향례를 지낼 때 처음으로

    각 포의 두령이 참석했다는 기록이 시천교종역사에 나온다. 그리고 같은 10월에 해월신사가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의 육임제를 제정하여 각 포에 두었다. 이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포제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교장: 자질이 있고 신망이 두터운 사람.

    교수: 성심으로 수도하여 가히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

    도집: 위풍이 있고 기강이 밝아 시비선악의 한계를 아는 사람

    집강: 시비를 밝히고 기강을 바로잡을 수 있는 사람

    대정: 공평하고 부지런하여 중후한 사람

    중정: 바른말을 능히 할 수 있는 사람


     해월신사는 포덕285월에 보은 장내리로 이거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육임소를 설치하여 매월 1회씩 각 접주들에게 강론을 했다. 당시 동학은 강원도를 비롯해서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남부 등지로 널리 퍼져 있었다. 그 후 대도소와 포 단위로 육임제가 확대 시행되었고, 장실이 있는 대도소에는 육임소를 두어 자문에 응했다. 그 후 포덕 3011월에 해월신사가 복호동에서 내칙과 내수도문을 지어 반포할 때에 각 포에 반포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포덕 33년에 해월신사가 발송한 통유문에도 이 쪽 포 연원이 저쪽 포 연원으로 옮긴다고 하면서 그 잘못을 질책하는 내용이 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포덕20년대 후반부터 포라는 명칭이 많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포명(包名)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포덕 34311일 해월신사가 통유문을 발송해서 교인들을 보은에 소집하여 척왜양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때부터이다. 당시 충청. 전라. 경상. 경기. 강원도 등 각지에서 2~3만 명이 보은 장내리에 모여 42일 해월신사의 해산명령이 내릴 때까지 포별로 행동했다. 당시 보은 취회에 참가한 포명과 대접주는 다음과 같다.


    충의포대접주 손병희. 충경포대접주 임규호, 청의포대접주 손천민, 문청포대접주 임정준, 옥의포대접주 박석규, 관동포대접주 이원팔, 호남포대접주 남계천, 상공포대접주 이관영, 덕의포대접주 박인호, 태인포대접주 김개남, 부안포대접주 김낙철, 청풍포대접주 성두환, 금구포대접주 김덕명, 무장포대접주 손화중, 신산포대접주 김낙삼, 옥구포대접주 장경화, 완산포대접주 서영도, 청산포대접주 박원칠, 고산포대접주 박치경, 풍대포대접주 김석윤, 봉성포대접주 김방서, 공주포대접주 깁지택, 예산포대접주 박희인, 문의포대접주 암정재, 내면포대접주 차기석, 홍천포대접주 심상훈, 인제포대접주 김치운, 보은포대접주 김연국, 서호포대접주 서장옥, 정선포대접주 유시헌, 대흥포대접주 이인환, 덕산포대접주 손은석, 장흥포대접주 이방언, 아산포대접주 안교선, 영호포대접주 김인배.


    이때부터 접의 상위개념인 포가 동학의 연원조직을 대표하는 단위조직이 되었다. 그러니까 포는 여러 개의 접 조직을 포용하는 상위 기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포를 대표하는 대접주 밑에는 접별로 차접주. 수접주. 접주. 접사 등이 있어 포를 형성하였다.

     

    3. 동학혁명당시의 남북접 문제

     동학혁명 당시에는 한 개의 포가 10개 내지 20개의 접을 거느리고 있었다. 지금은 학계에서 동학군이 봉기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과거에는 동학혁명과 관련된 거의 모든 기록에는 동학군이 기포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동학혁명은 동학의 포가 중심이 되어 일어난 혁명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동학혁명을 면밀히 검토해보아도 동학군은 예외 없이 동학의 포조직이 있는 곳에서만 봉기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학혁명은 동학의 핵심조직인 포 조직을 중심으로 기포한 혁명이었다.

     그런데 동학혁명 당시 남접과 북접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결론적으로 말해서 남북접은 한때의 대립적 시각에서 비롯된 한시적 명칭이었다.

     동학에는 종문을 달리하는 남북접은 애초에 없었다. 대신사 당시에도 남접이라는 기록을 아직 보지 못했다. 해월신사를 북도중주인. 북접주인. 북접법헌. 북접대도주 등의 명칭으로 불렀기 때문에 남접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남접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해서 동학혁명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오지영은 그의 저서 동학사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남접이라는 원인은 처음 어디로부터 나온 것이냐. 수운 선생 당시에 북접이란 말이 처음으로 발생되었다. 어찌된 말이냐 하며 수운선생이 있던 용담정과 해월선생이 있던 검악촌이 용담정 북편에 있다함을 지명함이며, 수운선생이 말년에 도를 해월선생에게 맡기고자 하는 의향이 있어서 어느 제자가 오든지 하면 말씀을 이렇게 하였다. ”군등이 만일 나를 보러 오겠거든 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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