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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 28-홍경래(洪景來)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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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종학대학원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4,735회   작성일Date 21-02-22 15:26

    본문

    28. 홍경래(洪景來)

     

     조선시대의 민중반란 지도자. 본관 남양(南陽). 용강(龍岡) 출신. 외숙인 류학권(柳學權)에게서 배우고 1798(정조 22) 사마시(司馬試)에 낙방하자 서북출신의 임용(任用) 제한 정책과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횡포에 반감을 품고 과거를 단념, 입산하여 병서를 연구하면서 정권탈취를 기도하였다.

     1800(순조 즉위년) 박천의 청룡사에서 서자 출신인 우군칙을 만나 서로 뜻이 맞아 모반(謀叛)할 것을 약속하고 이어 만주의 마적단 두목 정시수(鄭始守), 거부로서 가산역(嘉山驛) 관리로 있는 이희저(李禧著)를 포섭하고 가산의 다복동을 거사의 본거지로 삼았다. 이어 학자 김창시(金昌始), 역사(力士) 이제초(李濟初), 모사(謀士) 김사용(金士用) 등을 참모로 삼고 전국에서 기인(奇人도사·술사·무인 등을 널리 규합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때를 기다렸다.

    1811(순조 11) 때마침 혹심한 흉년으로 민심이 혼란해지자 122천여 병력을 동원, 평서대원수(平西大元帥)를 자칭하고 난을 일으켰다. 먼저 가산 군아(郡衙)를 습격하여 군수를 죽이고 남북 2대로 나누어 진격을 계속, 8읍을 단숨에 공략, 평안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에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 등의 군사 1천여 명이 조정에서 급파한 양서순무사 이요헌의 정예군과 안주에서 합세, 공격을 가해오자 이를 박천 송림리에서 맞아 싸웠으나 참패하고 정주로 퇴각, 장기전을 각오하고 북으로 진격한 북군의 구원을 기다리던 중 419일 관군의 화약전술로 성이 폭파하자 밀려든 관군에 대하여 전사했다. 그의 난은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민중 반항운동의 하나이다.



    자료 참고 및 출처: 천도교경전에 인용된 인물고(천도교종학원, 포덕1268월 발행, 저자 우암 박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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