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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입문요결4(조화정造化定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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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금주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925회   작성일Date 22-05-15 13:16

    본문

    조화정造化定에 관하여

     

    < 원문의역 >

    (ᄒᆞᄂᆞᆯ님의 지기가 무위이화無爲而化에 의하여) 창조적으로 변화되어 (우리들의 덕성을 ᄒᆞᄂᆞᆯ님과 일치시키고, 우리들의 마음을 바르게) 정하는 것이다.

     

    < 동학론 >

    造化者 無爲而化也 定者 合其德正其心也

    조화란 것은 인위적 행위 없이 자연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결정한다는 것은 그 품격을 합치시키고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다.

     

    < 한자풀이 >

    지을 조. 변할 화. 造化 조물주의 힘과 재주, 또는 신통하게 된 사물, 창조적으로 변하는 것. 無爲 인위적인 행위가 없음. 결정할 정. 합할 합. 마음을 닦아 몸에 얻은 것, 도덕, 능력 덕.

     

    < 사족 >

      알 수 없고 볼 수 없는 ᄒᆞᄂᆞᆯ님의 본체가 우주 대생명의 기운인 지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서 무위이화로 인간은 이 세상에서 ᄒᆞᄂᆞᆯ님의 아들, 화신化身·분신分身이 되었다. 이제 인간들이 할 사명은 무엇인가? 바로 이웃들과 함께 조화정造化定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너와 나 우리가 한 몸이 되는 동귀일체의 인간관계를 맺는 친민親民의 삶을 시작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경애관敬愛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간관계를 설명한 것이다.

     

    1. 노자老子와 공자孔子의 무위無爲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 37장에 도는 늘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아니함이 없도다(道常無爲而無不爲)’라는 말이 있으며, 57장에 성인이 함이 없으니 백성이 스스로 변화되도다(我無爲而民自化)’라는 말이 있다. 그리고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함이 없이 다스림은 순임금이로다. 그분이 무엇을 하였던가? 자신을 공손히 하여 올바르게 임금자리에 앉아 있었을뿐이다(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이처럼 성인은 모두 무위이화無爲而化가 특징이다. 마찬가지로 ᄒᆞᄂᆞᆯ님 지기의 특징 또한 어떤 모습 같으나 형상하기 어렵고, 소리가 들리는 것 같으나 보기 어려우나 일마다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으니이를 무위이화無爲而化라고 하는 것이다.

     

    2. 대인大人·군자君子·성인聖人이 되어 이웃과 함께 하는 친민親民의 삶

      ᄒᆞᄂᆞᆯ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ᄒᆞᄂᆞᆯ님의 지기의 무한한 능력인 무위이화無爲而化의 덕택으로 삶을 살아간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므로 저 멀리 홀로 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무위이화의 도움으로 우리들은 대인大人·군자君子·성인聖人이 되어, 자연과 인간과 ᄒᆞᄂᆞᆯ님 사이에 조화 즉 창조적 변화와 소통의 관계가 이루어진다. 소승小乘은 혼자만의 해탈의 삶을 추구하지만 대승大乘은 대중과 함께 살아간다. 주역 문언전文言傳대인(夫大人者)은 천지와 더불어 그 덕을 일치시키고(與天地合其德), 일월과 더불어 그 밝음을 일치시키고(與日月合其明), 사시와 더불어 그 질서를 일치시키고(與四時合其序), 귀신과 더불어 길흉을 합치시킨다(與鬼神合其吉凶).” 고 하였다. ᄒᆞᄂᆞᆯ님을 모시면서 그 은덕과 도움으로 이상적인 성인의 경지에 이르러서 천지만물을 이웃으로 삼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중용에 중화를 이루면 천지가 바르게 서고, 만물이 길러진다(致中和 天地位焉, 萬物育焉)” 이라고 했다. 인간이 우주천지만물과 더불어 살게 된다는 말이다. 또한 천하의 지성은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고, 천지와 더불어 일체가 된다(惟天下至誠, 可以贊天地之化育, 可以與天地參矣).”고 하였다. 인간의 힘은 미약하고 부족한 것 같지만 ᄒᆞᄂᆞᆯ님의 은덕과 도움을 받은 성인의 힘은 위대한 것이다.

     

    3. 해월 신사님의 경인敬人과 예수님의 이웃사랑

      천주교의 예수님의 이웃 사랑과 동학의 해월신사님의 경인의 경지를 인위적으로 비교해본다면 초월적 신관과 내재적 신관의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의 율법은 613조나 된다. 율법 학자가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복음 12, 28-31).” 여기서 ᄒᆞᄂᆞᆯ님을 사랑하는 것은 경천敬天이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경인敬人이다.

      해월신사 법설 삼경三敬도인집에 사람이 오거든 사람이 왔다 이르지 말고 ᄒᆞᄂᆞᆯ님이 강림降臨하였다 이르라 하였으니, 사람을 공경치 하니하고 귀신을 공경하여 무슨 실효實效가 있겠느냐. 어리석은 풍속에 귀신을 공경할 줄은 알되 사람은 천대하나니, 이것은 죽은 부모의 혼은 공경하되 산 부모는 천대함과 같으니라. ᄒᆞᄂᆞᆯ님이 사람을 떠나 따로 있지 않는지라, 사람을 버리고 ᄒᆞᄂᆞᆯ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물을 버리고 해갈解渴을 구하는 자와 같으니라.’

      앞구절에서 ᄒᆞᄂᆞᆯ님을 사랑함은 경천敬天이며 이웃을 사랑함은 경인敬人이라고 하였다. 천주교의 경인은 이웃 = 너 자신이지만, 동학의 경인은 이웃 = ᄒᆞᄂᆞᆯ님이다. 동학의 경인이 더 적극적이며 능동적임을 잘 알 수 있다.


    4. 해월 신사님의 은악양선隱惡揚善과 예수님의 용서

      인간관계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에 대한 관점이다. 예수님의 용서에 대한 관점은 다음과 같다.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테오 18, 21-22).”

      해월신사 법설 대인접물에 사람을 대하고 물건을 접함에 반드시 악을 숨기고 선을 찬양하는 것으로 주를 삼으라. 저 사람이 포악으로써 나를 대하면 나는 어질고 용서하는 마음으로써 대하고, 저 사람이 교활하고 교사하게 말을 꾸미거든 나는 정직하게 순히 받아들이면 자연히 돌아와 화하리라. 이말은 비록 쉬우나 몸소 행하기는 지극히 어려우니 이런 때에 이르러 가히 도력을 볼 수 있느니라. 혹 도력이 차지 못하여 경솔하고 급작스러워 인내가 어려워지고 경솔하여 상충되는 일이 많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마음을 쓰고 힘을 쓰는데 나를 순히하여 나를 처신하면 쉽고, 나를 거슬려 나를 처신하면 어려우니라. 이러므로 사람을 대할 때에 욕을 참고 너그럽게 용서하여, 스스로 자기 잘못을 책하면서 나 자신을 살피는 것을 주로 하고, 사람의 잘못을 그대로 말하지 말라(待人接物 必隱惡揚善爲主 彼以暴惡對我則 我以仁恕待之 彼以狡詐飾辭則 我以正直順受之則 自然歸化矣 此言雖易 體用至難矣 到此來頭 可見道力矣 或道力未充 率急遽難忍耐 率多相沖 當此時 用心用力順我處我則易 逆我處我則難矣 是故待人之時 忍辱寬恕自責內省爲主 非人勿直).” 사람의 잘못을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은 은악隱惡의 경지이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 상대방의 선이나 장점을 찬양하는 양선揚善은 은악보다 더 어려운 경지이다.

      1919년 중국 상해 임시정부에서 이승만을 정부수반으로 선출하였다. 윌슨 대통령 등 미국 정치권과의 학연과 남다른 인지도 등으로 외교가 큰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출신의 신채호는 이승만은 위임통치를 제창하던 자이므로 국무총리로 신임키 불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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