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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성사 순도 100주기...민중의 사이에서 약동하는 선생(의암성사)의 정령(精靈) > 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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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성사 순도 100주기...민중의 사이에서 약동하는 선생(의암성사)의 정령(精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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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천도교중앙도서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639회   작성일Date 22-05-04 12:38

    본문

                 의암성사(義菴聖師)의 환원(還元)에 대

              사회(社會)  각방면(各方面)의 감상(感想)


       민중(民衆)의 사이에서 약동(躍動)하는 선생의 정령(精靈)

    손의암 선생님의 환후는 점차 시일의 멀어감을 따라 정()코 평복(平復)되실 줄로 일반이 기대하였던바 마침내 장서(長逝)하신 선생을 봉도(奉悼)하게 되었음은 다만 의()를 결()하고  동기(同起)하든 나()의 일 개인으로나 그 문도된 천도교인의 애통(哀慟)뿐 아니라 즉 우리 전 민족의 일대 불상사라 합니다. 그러나 선생의 세정(世情)은 이미 민멸(泯滅) 하시었다 할지라도  선생의 평일 사업은 더욱 정령(精靈)으로 더불어  신()기운을 착착 촉진(促進)될 줄로 확신합니다.... (삼장역(회장 백상규 씨담)


     

      민족의 情神化(정신화)된 선생의 精靈(정령)

    나는 일찍이 손 선생님의 문하에 출입한 일이 없었던 바,  때 마침 三昨年(삼작년) ()를 일으킬 때에 비로소 承顔(승안)하였습니다.

    그 후부터는 오래동안 수감되어 자주 접촉키 어려운 소이로 선생님의 성격, 언행 기타에 주시치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선생님 환원 하시기 전에 一次(일차) 상춘원 요양시로 往拜(왕배)하였을 시에 가장 절실히 感得(감득)한 것은   선생님께서 최후의 일언으로써 나의 病根(병근)은 우리 민족을 위하는 데서 시작되었으니  今後(금후)라도 우리 전민족이 행복을 얻는 날이면 나의 병이 나으리라'. 하시었습니다. 아! 과연 이 말씀에 느낀 나는 자리를 물러난 이후 지금까지 무엇이 耳朶(이타)打鳴(타명) 하듯이 驚嘆(경탄)되는 동시에 흉중에 선생님의 정령이 전 민중의 운명과 같이 渾然(혼연)融化(융화) 될 줄 압니다......(신생활사장 박희도 씨담)

     


     敎政雙全(교정쌍전)한 선생의 다각적 趣味(취미)

    내가 의암선생을  면회하기는 거금 23년 전 일본 경도 내량현이었습니다.

    당시의 선생은 성명을 변하여 이상헌이라 칭합디다.  초면인에게 인사를 청하려면 반드시 소개자를 요함이 통례이나 그러나 당시 선생은 거액의 금을 ()하고 조선 각지로부터 선발한 聰俊(총준)청년 사십여명을 招募(초모)하여 그 지원대로 각종 학교에 입학 시키어  교육사업에 진력함과 ()히  일방으로는 조선 명사와 慇勳(은훈)결탁하여 점차 정치가의 색채를 帶來(대래)함으로부터 그 명성이 사방에 전파되었습니다


     그러함에 따라 나 역시 但願一識(단원일식)()勃起(발기)하여 ()히 직접으로 회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후부터 交誼(교의)가 차차 敦厚(돈후)하여 선생의 거처를  대판 동경 등지로 轉移(전이)한 후까지 일주간 일차씩은 반드시 往訪(왕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거금 19년 전 渡鮮(도선)한 이래 금일 까지  전후 20여 년 간을 시종이 여일하게 또한 여타 유별하게 교제를 계속 하였음은 다만 나의 일인뿐인 줄로 首肯(수긍)함과 함께 선생의 年期(년기)가 나와 같음이요,  선생의 좌우가 거개 好個南兒(호개남아)일 뿐 아니라  오래 동안을 두고 사면팔방으로  관찰한 선생의 성격은 가히 百聞一見(백문일견)에 경탄치 아니치 못하였습니다.


     그  堅忍不拔(견인불발)한  自信力(자신력)이며,  壯絶快敢(장절쾌감)決斷力(결단력)이며,  기타 無言(무언)臨械應變(임계응변)하는  奇拔(기발)胸算復案(흉산복안)의  豐富(풍부)함은 가히 풍운과 기회를 겸전 활용하는 人上人(인상인-사람 위의 사람))이라  激賞(격상)치 않을 수 없음으로써입니다.


     지금에 선생의 성격과 처세의 경로를 일본 역사적 인물에 對較(대교)하오면 오래된 인물로는 종교가인 親驚上人一蓮上人이며,  정치가의 西鄕隆盛西鄕從道,  신인물로는 河野廣中과 같은 인물 등의 성격은 有或(유혹) 거의 선생에 근사하다 할듯하나,  그러나 보편적으로 종교로나 정치로의 다각적 취미를 具有(구유)하였음은 아마도 선생 한사람에 이를 사람은 없는 듯 합니다.


     아! 선생의 長逝(장서)는 실로 통절합니다.  선생을 考妣(고비)와 같이 尊崇(존숭)하는 조선민족은 물론  우리 일본인 측도 특히 선생의 일대기에 대하여 ()有識(유식階級(계급)에  ()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입장상으로  비판불일하나 그러나 易地思之(역지사지)하면 위인을 논함에는 반드시 성공과 실패를 校擧(교거)하는 것이 아니라  여하간 조선국운의 末路(말로)에  ()하여  민중으로 더불어 파란이 중첩한 선생으로서 유구한 歷史的生命(역사적생명)을 지속하였음은 감탄치 않을 수 없습니다.......(경성통신사장 大垣丈夫 氏談).

                                    천도교회월보 (의암성사 환원호 1922. 5)에서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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