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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회 창립기념 합동기도 1일차(8월 28일-시일)읽을거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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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재선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639회   작성일Date 22-08-28 15:52

    본문

    #천도교청년회는 창립103주년을 맞아 합동재가기도를 시작합니다. 매일 저녁8시부터 1시간동안 주문공부를 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청년회에서는 매일 오후 청년회103년이야기를 읽을거리로 공유드리겠습니다. 함께 읽으시고 합동기도에 생각거리로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9월3일 오후에는 기념식을 겸하여 간담회를 진행합니다. 아직 참가신청이 저조합니다. 아래링크로 참가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 9월 3일 행사 참가 신청 

    https://docs.google.com/forms/d/18hAiFY4Fi0wZeeSaeVCqDCeGbxBrTfXzrWCk-4loIEQ/edit


    천도교청년회 창립103주년 기념 합동재가기도 1일차(8월 28일-시일)읽을거리

    -천도교약사191쪽-195쪽 중에서-


    1. 재도약을 향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의 창립


    3·1운동 후 일제는 한국 강점 10년동안의 무단통치가 우리 민족의 거센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고 판단한 나머지 포덕 60년 8월 사이토(齋藤實)를 제3대 총독으로 임명하면서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하고 나섰다.

    이에 따라 무단통치의 상징이었던 헌병경찰제도와 일반 관리 및 학교 교사 등이 금선제복(金線制服)에 긴 칼을 차고 다니는 대검(帶劍)제도가 폐지되고 보통경찰제도를 실시하였다. 또한 제한적이나마 언론 · 집회 · 출판에 대한 자유와 정치단체를 제외한 결사의 자유도 허용되었다. 이것은 격앙된 한국민의 민족감정을 무마하기 위한 방편에서 비롯된 것일 뿐 정치개혁이나 대한식민지정책의 근원적 변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제의 이러한 통치변화가 비록 양두구육(羊頭狗肉)의 정책적 수단에 불과했지만 이 기회를 이용해서 전국 각처에는 각종 단체가 우후죽순처럼 조직되었다.

    3·1독립운동으로 교단 지도부가 거의 투옥된 천도교 역시 교단의 공동화현상을 극복하고 지도체계의 재정비를 위해 젊은 지도층을 주축으로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곧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天道敎青年敎理講硏部)의 창립이다.

    일제가 문화통치를 발표한 다음달인 9월 2일 천도교의 교리연구와 선전 및 조선신문화의 향상 발전을 목적으로 이돈화(李敦化)·정도준(鄭道俊)·박래홍(朴來弘) • 박달성(朴達成)·신태련(申泰鍊)·김옥빈(金玉斌) 등이 중심이 되어 교리강연부를 창립하고 정도준을 부장으로 선임하였다.

    교리강연부가 창립되자 그 조직이 지방으로 확산되면서 그 산하에 편술부 · 지육부 • 음악부 · 체육부를 두는 한편 3개월만에 지방지부 10여개소에 부원이 6백여명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창립 7개월이 지나면서 전국에 교구가 있는 곳은 거의 지부가 조직되는 등 급속한 발전을 보였다.

    교리강연부는 창립 후 매주 교리를 연구 발표하고 교리강습회를 개최하는 한편 창립 이듬해인 포덕 61년 4월 5일 천일기념일에 특별대강연회를 개최하고 '천도교포교문'을 선포하였다. 이처럼 교리강연부가 점차 활기를 띠는 가운데 이 해 4월 25일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보다 적극적인 활동과 미래지향적인 발전을 위해 교리강연부의 명칭을 '천도교청년회'로 바꾸었다. 그리고 교리강연부의 정도준부장이 청년회의 회장직을 그대로 승계하였다.


    2. 천도교청년회의 출범과 역할


    천도교청년회가 새롭게 출범하면서 제일 먼저 중점적으로 추진한사업이 종합월간지 『개벽(開闢)』의 창간이다. 청년회는 이미 교리강연부 시절인 포덕 61년 1월에 최종정(崔宗禎)과 변군항(邊君恒)의 재정지원 아래 이두성 명의로 『개벽』지의 발행허가를 신청하여 5월22일에야 신문지법에 의해 출판허가를 받았다. 이것은 총독부가 한국인에게 잡지발행을 허가한 첫 번째 케이스였다.

    청년회는 곧 송현동 중앙총부 안에 개벽사를 설립하고 사장 최종정, 편집인 이돈화, 발행인 이두성, 주필 김기전, 인쇄인 민영순으로 진용을 구성하여 6월 25일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종합잡지인『개벽』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그 후 개벽사는 계층별로 각종 잡지를간행함으로써 우리나라 잡지문화의 신기원을 이룩하였을 뿐 아니라당시 우리 사회를 풍미했던 신문화운동의 주역을 담당했다.

    청년회는 회장, 간무(幹務), 간의원(幹議員) 밑에 포덕부 · 편집부 · 체육부 · 지육부 • 음악부 · 실업부의 6개 부서로 조직하였다. 편집부는 앞서 밝힌대로 개벽사를 설치하여 출판문화운동을 주도하였으며, 포덕부는 그 산하에 포덕 6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하고 어린이운동을 적극 펼침으로써 우리나라 전역에 어린이운동을확산 보급하는데 견인역을 담당했다. 또한 체육부에는 축구부와 야구부를 두어 각종 시합에서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렸다.

    지육부는 주로 회원 강습과 순회강연회를 실시하였는데, 포덕 61년과 62년의 2년간 청년회본부는 전국적으로 163개처에서 이돈화·정도준 • 김기전 · 박사직 등을 연사로 하여 순회강연회를 실시하였다. 특히 포덕 61년 5월 23일의 진남포 순회강연에 4천여명, 6월 24일의 단천 순회강연에 5천여명, 6월 17일과 27일의 함흥강연에 4천여명, 6월 20일의 북청강연에 3천5백여명이 모이는 등 가는 곳마다 수많은 청중이 모인 것으로 보아 청년회의 순회강연이 상당한 인기와 호응을 불러 일으켰음을 알 수 있다. 그 밖에 방정환을 비롯한 청년회 동경(東京)지회 유학생들이 포덕 62년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도별로 조를 편성하여 순회강연회를 실시하였다.

    교리강연부가 청년회로 탈바꿈한 후 3년 반에 걸쳐 전국적으로 2백여개소의 지회와 8천여명의 회원을 포용하게 되었다. 회장은 초대 정도준에 이어 포덕 63년 10월부터 조기간(趙基竿)이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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