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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회 창립기념 합동기도 6일차(9월 2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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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재선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871회   작성일Date 22-09-02 17:12

    본문

    천도교청년회 창립103주년 기념 합동재가기도

    6일차(92-금요일)읽을거리

    - 오늘은 천도교청년회 창립 103주년 되는 날입니다. 100년이라는 긴 시간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역사를 되살펴 볼 때마다 언제나 선배님들의 노고에 깊은 존경과 추모의 정이 깊습니다. 축하해주시는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청년회 창립인사이며 교단에서 많은 일들을 하셨던 오암 이병헌 선생과 천도교청년회 이야기이다. 이 글은 희암 성주현 천도교상주선도사의 경기3·1운동4호에 수록한 글 일부를 요약정리하고 천도교청년회의 이야기를 덧붙였다.

     

    오암 이병헌과 제암·고주리 학살사건

     

    오암(梧菴) 이병헌(李炳憲)은 천도교청년회 초대 수원지회장을 맡는 등 천도교청년회 역사 속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3·1독립선언의 여파로 천도교는 큰 위기에 처하였고, 청년들이 교단지도부를 대신하여 교단의 전면에 나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이병헌 역시 아래 사진과 같이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 임원으로 참여하여 각종 신문화활동을 전개하고 독립의지 고취에 힘써 왔다. 특히 천도교청년회로 개칭하며 개벽사를 설립하여 출판문화운동과 함께 전국순회강연을 전개하였는데 정도준, 이돈화, 박달성, 박사직, 방정환, 김기전, 등과 함께 주요연사로 이병헌이 활약하였다. 이병헌의 주요활동지 중 하나였던 수원에 청년회 수원지회를 조직하여 초대지회장을 맡고 이후 홍종각에게 물려주고 그는 중앙에서 활동하였다. 1927년 민족최대운동단체인 신간회가 결성될 때, 이병헌은 신간회 경성지회 설립대회에서 간사로 선출되는 등 독립지사로서 역할이 두드러졌다.

    오암 이병헌은 천도교인으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운반하였을 뿐만 아니라 만세시위에 직접 참여하였고,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민족운동가이다.

    이병헌은 천도교 수원교구에서 주요 교역자로서 활동하면서 청년기를 보냈다.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초에 천도교 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진출한 이후 31운동의 현장을 몸소 체험하였고, 일제의 검거령을 피해 수원으로 피신하였다가 수원지역 31운동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한편 제암리학살사건을 목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72월 신간회가 결성되자 경성지회 설립준비위원 및 총무간사를 맡아 설립 자금을 조성하는 한편 조직부 총무간사로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손병희의 부름을 받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게 된 이병헌은 31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병헌은 1919227일 밤 10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끝나자 이를 가마니에 넣은 다음 그 위에 석탄을 담아 석탄가마니로 위장하였다. 그리고 신숙(강재 신숙은 1903년 천도교에 입교하였으며, 1912년 종학강습소 간사로 천도교중앙총부의 임원으로 임명되어 서계원, 종법원, 대구교구장 등을 역임하였다. 3.1운동 이후 천도교를 대표하여 임시정부에 파견되었으며, 광복군 참모총장을 역미하며 항일에 앞장섰다.)과 함께 이종일 보성사 사장의 집으로 운반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227일 오후 10시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끝나자 박동 오모(博洞 吳謀)씨 집에 운반하기로 하였으나 오모는 돌연히 거절하므로 慶雲洞 88번지에 신축 중인 천도교당 기지로 운반할 때 때마침 전기고장으로 전등이 꺼져 전 시가가 암흑세계로 화하였다. 안국동, 재동 두 파출소 앞을 무사히 지나 목적지에 왔었다.

     

    이병헌은 신숙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옮길 때 다행히 정전이 되어 무사히 이종일의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31일 독립선언을 하는 당일 이병헌은 손병희를 따라 민족대표 33인이 모이기로 한 태화관 현장에 참석하였다. 원래는 민족대표들이 이날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하였으나, 불의의 사고를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해 이병헌은 태화관은 전일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 李完用이 거주한 집으로 을사보호조약을 일본인 이등박문과 밀의하던 장소이며 서기 1907717일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도 이 장소에서 했고 合邦條約 준비도 이 잡에서 모의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병헌의 이러한 인식은 민족반역의 장소를 독립선언의 장소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이병헌은 학생 대표인 이규갑과 같이 탑골공원과의 연락책으로 활동하였다. 33인 민족대표들이 피체된 이후에는 남대문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어 33일부터 5일까지 만세시위대와 함께 서울 시내를 돌면서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이병헌은 종로경찰서로부터 검거령이 내려졌다. 이에 이병헌은 315일을 전후하여 자신이 활동하였던 수원지역으로 피신하였다.

    수원에 내려온 이병헌은 수원교구에서 31운동을 논의하였고, 수원지역에서도 31운동이 크게 확산되었다. 이병헌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수원에서도 만세운동과 이에 대한 비용을 부담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병헌은 316일 밤 수원 수원교구에서 교구장 金仁泰(김인태), 이문원 安政玉(안정옥), 전제원 金正淡(김정담), 강도원 羅天綱(나천강), 순회교사 李星九(이성구), 安鍾麟(안종린), 전교사 洪鍾珏(홍종각), 安鍾煥(안종환) 등 주요 교역자들이 모여 만세시위를 할 것과 천도교에서 전개하고 있는 만세운동 자금을 수원교구에서도 부담할 것을 논의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날 모임에서는 천도교의 최고책임자이며 민족대표인 손병희가 일경에 피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45일 서울로 올라가 구출하려는 비밀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수원교구에서 이병헌이 중심이 되어 만세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정탐한 일제 측의 소방대와 일본인이 합세하여 소방용 갈고리와 괭이 등으로 교구를 난입하는 한편 교인들을 마구 구타하였다. 이로 인해 이병헌은 김정담 김정모 안종환 안종린 홍종각 김상근 등과 함께 중경상을 입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이병헌은 수원과 진위 경찰서에서 계속 추적을 하자 수원교구에서 활동할 때 절친하게 지냈던 향남면 제암리 金學敎(김학교)의 집에서 숨어 지내면서 치료를 하였다. 이병헌이 김학교의 집에 머무는 동안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시위에서 우정면사무소와 장안면사무소가 불타버렸고, 화수리주재소의 일본인 순사부장 川端豊太郞을 참살하였다. 이에 대해 일제는 수비대를 동원,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보복을 자행하였다.

    44일부터 413일까지 우정면과 장안면 마을을 보복한 수비대는 향남면 제암리로 몰려왔다. 41512시경 아리타 중위는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한 후 한 사람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 아리타 할 말이 있으므로 교회로 전원 다 모이라고 하였다. 마을사람들을 불러 모을 때 이병헌은 탈출을 시도하던 중이었다. 주민들은 金學敎의 집에 숨어 있던 이병헌에게 통역을 부탁하였으나 이병헌은 자신도 검거될 상황이라 하는 수 없이 거절하고 뒷산에 숨어서 동태를 파악하였다. 이때 제암리학살사건을 비롯하여 이 지역에서 본 참상을 목격한 이병헌은 훗날 水原事件이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당시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전략) 金學校氏宅에 숨어서 탈출을 준비하고 있던 중 415일 정오에 발안장터 경찰관주재소에서 제암리에 와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에게 오후 한시를 위하여 수원수비대가 打合할 말이 있으니 예배당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당시 교인들이 필자를 보고 통역을 요구하였으나 필자는 자신이 체포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이를 거절하고 安政玉씨의 안내로 뒷산에 숨어서 그 동정을 감시하였던 바, 예배당 정문 앞에 日兵倭奴 佐板才吉이가 섰는데 순한 양과 같은 교인들은 예배당으로 모이기 시작하였다. 문 앞에 섰던 일병은 총 길이로 사람 키를 비교해서 안으로 들어가게 한 후 문을 닫아버리고 석유를 뿌리고 교회에서 방화를 하고 생화장을 하는 천인이 공로할 참극을 연출시켰다. 그 중에 홍순진씨가 뛰어나오다가 총에 맞아서 넘어졌다.

     

    제암리에서 탈출한 이병헌은 마을 뒷산에서 제암리학살사건을 목격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병헌은 팔탄면 고주리에서 있었던 김흥렬 일가 학살사건도 함께 기록하였다.

     

    隣洞(고죽골) 天道敎金興烈氏 집으로 가서 金聖烈, 金世烈, 金周男, 金周業, 金興福 等 六人逮捕(체포)하여 結縛(결박)하여 놓고 짚단과 나무로 덮어놓고서 石油(석유)를 뿌리고 또 生火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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