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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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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330회   작성일Date 12-12-30 06:20

    본문


       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3)

    ‘문명의 해체(解體)는 필연적으로 그것의 해체로 연결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토인비는 부정적으로 대답하고 있다. 즉 해체이외에 다른 길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분열이 사라지고 충분히 강력한 재거(再擧)가 이루어진다면 몰락의 진행은 중지되고 문명이 몇 세기고 계속될 수 있는 화석기(化石期)에 들어가게 된다. 이집트 문명과 동양문명(東洋文明)에 일어난 사태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해체가 그 초기에 제거되지 않는 경우에는 그대로 진행하게 되며 모든 문명의 최종 단계에 공통적인 약간의 특징적인 현상이 나타난다.’ 고 하면서 그 특징적인 현상의 첫 번째는 사회의 분열(내적(內的) 프롤레타리아와 외적(外的) 프롤레타리아/External proletariat 의 분열)이고, 두 번째는 영혼의 분열로 사회체내(社會體內)의 분열로 인하여 영혼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하여 개인이나 사회전체가 창조성은 자포자기나 자기억제로 모방은 거부당하고 창조적인 비약(elan/ 돌진, 약진) 대신에 불안의 의식과 죄악의 의식이 성장의 표지(標識)였던 분화작용(分化作用)을 몰락의 표지인 표준화 작용으로 대치시키며. 세 번째는 고난의 시기로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투쟁이 일어난다. 강국(强國)과 동맹국(同盟國) 사이에 전면전(全面戰)이라 할 수 있는 사상체계에 사이에 맹렬한 대규모의 전쟁이 일어나 패전국은 가혹한 종국(終局)을 맞게 되고, 최강국(最强國)은 해체과정에서 벗어나 강력한 세계국가를 하여 전 지역의 패전국을 장악하여 패권(覇權)을 갖게 되며, 네 번째는 세계국가와 보편적 종교로, 세계국가란 결국 내적 및 외적 프롤레타리아로부터 도전을 받은 지배적 소수자의 응전의 산물이다. 그러나 이미 지배적 소수자의 지배는 충분한 매력도 가질 수 없고, 또한 신뢰심을 환기시킬 수도 없으므로 프롤레타리아는 세계국가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는 스스로의 새로운 사상체계나 종교를 희구하고 또한 그것을 발전시킨다. 그 중의 하나가 보편적 종교(Universal Church/세계적 종교)로 발전하게 되니, 지배적 소수자가 세계국가로서 대응(對應)을 한 그 도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측의 창조적 응전의 산물이다.’ 라고 보았다. -이하 토인비가 분석한 문명 해체의 최종 단계에 공통적인 특징 중 5, 만족(蠻族)의 군단(軍團)과 6. 공위(空位)시대, 민족이동 및 영웅시대는 생략하였다.(PP.95-102의 요약.)

    註 00; 프롤레타리아(프랑스어;prolétariat. 독일어: proletariat, 영어: proletariat.)-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임금 노동자. 또는 산업노동자 계급을 가리킨다. 넓은 의미로는 자본을 소유하지 않아 자신의 노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지며 농업노동자도 포함된다. 고대 로마 시대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가난한 자유민을 뜻했던 라틴어 'proletari' 에서 유래됐다. 'proletari'의 원 의미는 로마 제국 당시 군에 입대시킬 자신들의 아들(라틴어: proles,=자식) 이외에 부를 소유하지 못하는 무산계급들을 비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그 후 카를 마르크스가 사회학적인 용어로 도입하였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또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고난과 투쟁에 의해 단련되어 자본가와는 다른 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자각을 통해 프롤레타리아는 궁극적으로 모든 경제적 계급을 폐지하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한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란 "자기 자신의 생산 수단을 갖고 있지 않아서 살기 위해 부득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현대 임금 노동자"라고 했다. 그리고 이런 노동자 계급을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른다. 또, "프롤레타리아"와 "프롤레타리아트"에 대응하는 용어로는 성 안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부르주아(bourgeois, 형용사) 와 부르주아지(bourgeoisie, 명사)란 용어가 사용된다.

    IWW의 기관지인 ‘산업 노동자’에 게재된 자본주의 비판에서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그들은 우리를 통치하고, 속이며, 죽이고, 우리 대신 음식을 먹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를 위해 일하며 모두를 먹여 살린다". 프롤레타리아트(독일어: proletariat)는 사회적으로 하위 계급을 일컫는다. 무산 계급(無産階級)이라고도 한다. /위키, 브리태니커 백과과전과 국어사전에서 종합 요약정리.

    註 00; IWW(International Workers of the World)- 1905년 조직된 미국 최초의 전국적 산업별 노동조합 연합체로 전 노동자의 산업별 조직화, 자본주의 제도 폐지를 목적으로 하는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의 확립을 위하여 결집하였으나 제 1 차 세계 대전 중의 반전 활동으로 말미암아 탄압을 받았다. /위키, 브리태니커 백과과전과 국어사전에서 종합 요약정리.

    註 00; 부르주아지(bourgeoisie, 명사)-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소유하고 노동자를 고용하여 사업을 해서 이윤을 얻는 계급으로 여러 가지 계층이 있다.

    1. 프티 부르주아지(petit bourgeoisie)-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중간에 위치하는 소생산자, 소상인 및 봉급생활자, 자유직업자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생산 수단은 소유했지만, 타인의 노동을 착취하지 않고 스스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2. 소부르주아지(小bourgeoisie)- 생산 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에 기초하여 주로 자기 자신의 노동으로 생활하는 계급, 농민, 도시 수공업자, 중소 상인, 농촌의 중농 따위가 있다.

    3. 매판 부르주아지(買辦 bourgeoisie)- 외국 독점 자본에 의존하여 기업 활동을 보장받으면서 그들에게 예속되어 각종 편의를 제공하는 토착 자본가

    4. 제삼 계급(第三階級)- 프랑스 대혁명 이전에 귀족, 성직자와 함께 삼부회를 구성하였던 평민층으로, 좁게는 시민 계층을 나타내는 말, 중세 유럽 봉건 사회에서, 제1계급인 국왕이나 제후, 제2계급인 귀족이나 성직자에 대하여 일반 평민 계급을 가리키던 말이다. /위키, 브리태니커 백과과전과 국어사전에서 종합 요약정리.

    토인비의 이러한 역사에 대한 견해는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 중 종교적 성향에 대한 비판으로 토인비의 견해가 순수한 과학적 연구의 산물이 아니라, 분석이 종국에 가서는 그의 기독적인 선입견을 바탕으로 한 종교적인 신념에 좌우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이러한 비난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미국의 사회학자인 바안즈(H E Barnes)는 ‘「역사연구」는 냉정한 직접적인 역사의 설명이 아니라 과거의 각벌(却罰)과 미래의 궁극적인 인간성의 구제극(救濟劇)을 구성하고 전개시켜보려는 것이 토인비의 제 일 의적(第 1 義的)인 목적이다. 진정한 신앙이 없었기 때문에 몰락해버린 사회의 발전과정과 단계가 「역사연구」의 이론과 행동의 골자를 구성하고 있다. 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와 해석이 불공평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토인비는 자기가 기독교적 신앙의 안내를 받았고 또 자기의 생각으로서는 서구문명의 생존은 기독교적 신앙의 부활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지마는 그 반면에 그가 다른 문명의 몰락을 결코 진정한 신앙을 받들지 못한 탓으로 돌리지 않았고, 한 문명의 각 발전단계에 관한 결론이 그의 종교적인 입장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는 점도 명백한 일이다. 그러나 토인비가 기독교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진지한 입장에서의 주장-편견(偏見/bias)이라기보다는 기반(基盤/basis)이라고 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 같다.-은 근본적으로 타당한 것이며, 따라서 이에 대한 답변이 있어야만 할 줄 안다.’고 드 뷰스는 설명하고 있다.

    이에 대한 답변으로서는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는데 첫 번째 답변은, 기독교적인 신앙의 인도를 받는 과학자가 이성의 힘을 믿는 H G 웰스적 신앙, 운명을 믿는 시펜글러식의 신앙, 마르크스주의적 신앙, 또는 민주주의적 신념, 등등의 인도를 받은 과학자보다 더 편협하고 비과학적인 이유는 없지 않은가라는 것이다. -중략- 학문분야에 있어서는 순전히 과학적인 해결이란 불가능하므로 거의 모든 과학자가 좋든 나쁘든 간에 그 명칭을 어떻게 갖다 붙이든 간에 혹종(或種)의 원리, 입장, 또는 편견에 좌우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답변은 순수한 사실만을 토대로 하여 역사의 진실을 찾아내보겠다는 사람도 마치 시펜글러의 군국주의적 견해에 찬동함이 없이 그의 결론의 많은 부분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토인비의 기독교적 원칙을 거부하면서도 그가 정리해 놓은 사실부터 도출(導出)된 혹종의 결론을 용납할 수가 있지 않을까 라는 점이다.’라고 하여, 토인비가 기독교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해서 드 뷰스는 설명했다.(PP.105-108의 요약.)

    1971년에 大洋書籍에서 世界思想大全集 20.으로 간행된. “시펭글러”의 卷頭 解說인, 朴煥德의 ‘시펭글러의 生涯와 思想’에서 시펭글러는 문화와 종교의 관계와 자기 신앙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그의 생각을 고백하고 있다.

    ‘모든 문화의 본질은 종교이다. 그러므로 모든 문명의 본질은 비(非) 종교이다. 비(非) 종교는 무정신(無精神)이다. 문화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세계도시의 인간은 비(非) 종교적이다.’라고 생각하여 ‘마음의 종교’라고 믿었던 시펭글러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일찍이 멸망의 흔적을 체험하였다고 하였고 ‘신(神)에 대한 나의 회의(懷疑)는 나의 나이 열 살 때부터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는 자기의 자아(自我)를 열 살 때 발견한 것이다. ‘종교는 나에 대해서는 회의와 심사숙고의 대상이다. 나는 내 자신이 만든 기도를 외웠다. 그러나 오늘 나는 내가 그것으로 믿음을 강요하고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은 나에게 한 마디의 말 이상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신이 더 많은 다른 것을 위하고 있음이 확실하다는 생각을 할 때면 불안해진다.’고 서술하였고 그는 기도가 쓸데없는 일인 줄 알았으나 기도를 드렸고, 물론 그는 신이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고 분명히 느끼고 있었지만 그러나 그는 기도하였다고 했다. 가정적으로는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하지 않았으나 형식적인 신앙으로 교회의식에 참여하기도 하여 그가 15세가 되던 해인 1895년 3월 말에 견진성사(堅振聖事)를 받았지만 ‘견진성사를 받은 뒤로 나에게는 종교투쟁이 없었다.’고 말한 이후 일생동안 종교적인 대화는 화제에 오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PP.68-69의 요약.)

    서구문명이 기독교가 등장하면서 기독교적인 종교사상을 바탕으로 형성 발전 쇠퇴 붕괴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에, 한 인간의 종교적 신앙여부를 떠나 모든 학문분야에서 종교적 시각으로 분석하고 평가한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가 절대적인 가치를 진리라고 인식하고 주장하는 한, 그로 인한 배타적(排他的)이고 일방적(一方的)이며, 편향적(偏向的)적이고, 편협(偏狹)한 시각(視覺) 때문에 만사에 대한 분석과 평가 및 대안에 있어서 조화와 균형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시펭글러도 위에서 고백한 그가 살아온 삶속에서 형성된 종교에 대한 견해는 제 5장 영혼상(靈魂像)과 생활감정(生活感情)에서 동서양의 문명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었다.

    ‘옛 문명들의 영혼이 최후의 세련단계에 임하여 자기 고유의 소유형식의 내용, 자기와 더불어 탄생했던 근본상징을 질투하듯 죽어가는 것 같다. 불교에는 기독교적일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스토아주의에는 서력 1,000년의 회교에 나타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공자(孔子)가 사회주의와 공통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다시는 되풀이 되지 않는 살아있는 생성을 문제 삼고 논리적으로 인과율적으로 수적(數的)으로 파악할 수 있는 생성결과를 문제 삼지 않는 모든 역사적 관찰의 제일 첫머리에 와야 할 문장인 ‘두 사람이 같은 것을 하면 같은 것이 아니다.(si duo faciunt idem, non est idem,)는 특히 하나의 문화운동을 종결시키는 그러한 의견들에 해당되는 말이다. 모든 문명에 있어서 영혼화된 존재는 정신화된 존재에 의해 해체된다. 그러나 이 정신은 개개의 경우마다 다른 구조, 그리고 다른 상징의 형식언어의 지배를 받는다. -중략-

    어느 영혼이나 종교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다만 영혼의 현존재를 위한 다른 말에 불과하다. 영혼이 자기를 표현하는 모든 생생한 표현들, 모든 예술, 학설, 관습들, 모든 형이상학적 수학적 형식 세계들, 모든 장식, 기둥, 시구(詩句), 이념은 가장 깊은 곳에 있어서는 종교적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된다. 따라서 모든 문명의 본질은 무종교(無宗敎)다. 이것 역시 동일한 현상을 위한 두 말이다. 이것을 벨라스케스에 대한 마네의 창작에서, 하이든에 대한 바그너의 창작에서, 피디아스에 대한 뤼지포스의 창작에서, 핀더에 대한 테오크레토스의 창작에서 느끼지 못하는 자는 예술이 가지는 최선의 것을 전혀 모르고 있다. 로코코문화의 건축물은 그것의 몹시 세속적인 건축물에 있어서도 아직 종교적이었다. 고대 로마인들의 건축물들은 신전들까지도 무 종교적이다. 내면 공간이 깊은 마술적인 신의 감정을 일깨워 주는 원시 회교사워인 판테온 신전이 참된 종교적 건축물의 유일한 건물로서 로마 고도(古都)에 세워지게 되었다. 세계적 대도시들까지도 문명의 고도들에 대하여, 예컨대 알렉산드리아가 아테네에 대하여, 파리가 브뤼셀에 대하여, 베를린이 뉘른베르크에 대하여, 가로의 양상, 언어에 이르기까지 도시인들이 갖는 냉담한 지적인 얼굴 모습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세부분에 있어서 무 종교적이다. 이것을 반 종교(反宗敎)적인 것과 혼돈하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전적으로 대도시의 형식언어에 속하는 윤리적 세계 분위기 또한 무 종교적이고 영혼이 들어 있지 않다. 따라서 전적으로 대도시의 형식언어에 속하는 윤리적 세계분위기 또한 무 종교적이고 영혼이 들어 있지 않다. 사회주의는 무 종교적으로 되어 버린 파우스트적 생활감정이다. 이것은 영국 사회주의가 기꺼이 입에 담고 어떤 독단 없는 도덕 같은 것을 이해하는 소위(참된) 기독교를 말하기도 한다. 스토아주의와 불교는 오르페우스적, 인도의 베다교적인 종교와 관계해서 볼 때 무 종교적이다. 그리고 로마의 스토아 철학자가 황제 숭배를 용납하고 실시하든, 후기의 불교가 자신의 무신론을 확신을 가지고 부인하는, 사회주의자가 자신을 자유 종교적이라고 칭하든, 혹은 장차 신을 믿겠다고 하든, 이것들은 전혀 부차적인 것이다.

    역사의 세계상에서 문화가 문명으로 전환하는 것으로서, 필자가 앞서 칭했던 바로 문화의 갱년기로서, 일종의 인간이 갖는 영혼적 생식력이 영원히 고갈되어 생식의 자리에 구조(構造)가 오게 되는 전환시기로서 나타나는 것은 생생한 내면적 종교성의 그와 같은 소멸인 것이다. 이러한 종교성의 소멸은 점차 생활의 하찮은 면까지도 형성하고 충만시키고 있다. 결실본능(Untruchtbarkeit)이라는 말을, 이 말이 지닌 전체적 근원적인 깊은 의미에서 파악할 때 이 말은 세계적 대도시의 두뇌인간이 갖는 전체 운명을 표시해 준다. 그리고 이러한 전환이 큰 예술, 사회적 형태, 큰 사고조직, 큰 양식의 소멸에서 뿐만이 아니라 또한 구체적으로 지식이 없는 데서, 문명된 땅으로부터 분리된 계층의 인종 사멸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은 가장 중요한 역사적 상징에 속한다.’(PP.474-476의 요약.) 라고 시펭글러는 종교와 세계사의 흐름의 맥락과의 관계를 “西洋의 沒落/西歐의 沒落”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인류문명사에서 논의 되고 있는 종교의 역할에 대한 공과(功過)는 분명히 해야 하고, 종교의 유용론(有用論)과 무용론(無用論)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할 때가 됐다. 고 생각된다./시펭글러; 世界思想大全集 20. 大洋書籍. 1971.

    註 00;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과 형이하학(形而下學; physical science); 브리태니커

    "메타피직스(Metaphysics)"는 그리스어의 메타(meta: 뒤)와 피지카(physika: 자연학)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합성어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은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근본을 연구하는 부문을 "제1철학"이라 하고 동식물 등을 연구하는 부문을 "자연학"이라 했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학문의 순서를 말할 때 자연학을 먼저 배운 다음 모든 존재 전반에 걸친 근본원리 즉 존재하는 것으로 하여금 존재토록 하는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제 1 철학(pretcphilosophia)> 또는 <신학(theologike)>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는데, 그가 죽은 뒤 BC1세기 안드로니코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유고(遺稿)를 정리, 편찬하는 과정에서 <제 1 철학>을 <자연학> 뒤에 놓고 <자연학 뒤에 놓아진 것(tametataphysika)>이라 한 데서 유래한다. 편찬과정에서 자연학(自然學: physica)에 관련된 책의 다음으로 놓였으므로, '자연학 다음의 책(ta meta ta physica)'이라고 불린 데서 유래한 metaphysica(형이하학) 와 그에 반대말인 metaphsics(형이상학)를 일본에서 번역하던 중. 아무리 번역을 하려해도 매우 어려웠던 상황이었으나 역경(易經; 주역이라고도 함) 계사전상(繫辭傳上) 중 다음과 같은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 이전의 것을 도(道)라고 하고, 형상 이후의 것을 기(器)라고 한다."는 구절의 뜻을 바탕으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이라는 그럴싸한 말을 만들어 내었다.

    내용은 처음에는 자연계의 모든 존재사물의 존재에 대한 여러 원리와 원인을 초월(trans)한 최고의 원리·실재(實在)를 다루는 초 자연학을 뜻하였으며 그 뒤에는 일반적으로 경험적 현상(現象)을 초월한 원리·실재 또는 가설, 상정(想定)에 관한 이론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을 뜻하게 되었다.

    형이상학은 철학적 기본 가정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존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철학의 한 분야로 형이상학은 논리학, 인식론, 미학, 윤리학 등 철학의 다른 연구 분야와 상호작용을 한다. 형이상학은 전통적으로 철학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광범한 주제를 다루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주제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언급한 것으로, 정신의 대상이 되는 추상적 실재, 즉 형상의 존재와 성격이다. 고전 그리스 철학자들이 실재 세계의 대상인 감각할 수 있는 사물들과 정신의 대상인 관념들을 구별한 뒤 형이상학적 철학자들은 추상과 실체의 관계에 관심을 기울여 둘 다 존재하는 것인지, 또는 둘 중 어느 하나가 나머지 하나보다 더 실재적인지를 해명하려 했다. 형이상학자들은 형상과 관념의 관계를 이해하려는 시도 속에서 자연세계, 시간과 공간의 의미, 신의 존재와 본성 등을 해석했다.

    형이상학에 대한 동서양의 견해는 차이가 있다. 대표적인 차이로는 서양의 경우 인간은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 수 없다는 견해가 많은 반면, 동양의 경우 형이상학적 진리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 알 수 있다는 견해가 많다. 경험세계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본질에 관한 궁극적 원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학문으로. 어원은 "형이상자(形而上者)를 도(道)라 하고 형이하자(形而下者)를 기(器)라 한다./ 形而上者謂之道,形而下者謂之器.-역경(易經)의 계사전 상(繫辭傳上)"라고 정의를 내린데서 출발하고 있다.

    형이하학은 형체를 갖추고 있는 사물에 관한 학문으로, 형이하란 형이상에 대응되는 말로, 시간, 공간 속에 모양을 갖추고 나타나서 감성적인 경험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흔히 영어의 'metaphysical'을 형이상으로, 'physical'을 형이하로 번역한다. 동양에서의 형이하, 형이상이라는 용어는, 앞에서 인용한 주역(周易)의 계사전(繫辭傳)에서 취한 것이다. 물리학, 동물학, 식물학 등이 형이하학에 속한다.

    토인비의 저작물들을 모아 토인비 역사전집 전10권으로 출간한 것은 출판사의 의도에 따라 된 것이지만, 토인비의 인생관, 종교관, 역사관 등등을 이해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다. 그러나 번역 문장이 매끄럽지 못하여 난해한 부분이 많다. 그러므로 문장이나 대화에서 논의되고 있는 핵심적인 어휘나 주제들을 확실히 하고 읽어야 할 것이다. 그 중 여기에서 토인비가 말하는 고등종교나 역사적인 종교라 명시되는 종교는, 일차적으로 기독교를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이해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토인비는 20세기가 당면하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 중에서 기술과학의 발달로 인하여 기존의 문명이 몰락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문명이 몰락하는 와중에도 희망을 주는 것으로, 나아가서 새로운 문명의 발생을 위해, 세계종교의 역할이 크다는 점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 속에서는 물론 현재에도 종교가 인간의 삶에 많은 위험과 폐단을 제공하고 있다는 단점에 대해서 논하지 않은 것은 토인비의 문명사관의 맹점(盲點)이라 할 수 있다. /토인비 역사전집 전10권 : A. 토인비, 공덕룡 외, 대중서관, 1982/ 대한서적공사. 1985재판.

    모든 고등종교는 다 인간이 신(神) 혹은 절대적인 실재와 조화됨으로써 인간의 인격이 성화(聖化)되는 것을 믿고 있다. 비록 고등종교들이 각각 이러한 정신적인 결과를 얻기 위한 규범은 상이하다 할지라도 다 그렇게 믿는 것이다. 사회정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살지 아니하고 신의 영광을 기리고 신을 향수(享受)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한 수단으로서의 사회정의- 는 분명히 고등종교의 정신적 목적과 일치한다. 사실 사회정의는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이러한 정신적 목적을 달성하는 동안에 생겨나는 하나의 부산물로서만 성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 토인비 역사전집 10권. 現代 宗敎의 課題/ Christianity Among The religions of The world. / P. 83.에서

    한 인간 존재가 우주를 바라볼 경우 가령, 그 신비를 찾아냈다 할지라도 결국은 별견(瞥見)에 지나지 않으며, 더욱이 그것마저도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인간은 자기가 놓여 있는 시공(時空)의 일점을 바탕으로 하여 그 관찰의 거점(據點)을 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필연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될 수밖에 없는데 이것은 이 세상에 피조물(被造物)로 태어났다는 대가(代價)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편견적이며 주관적인 관찰을 피하기는 어려운 것이며 만약 모든 인간이 마치 무슨 대량생산 기계의 규격대로의 부품(部品)과 같이 하나의 표준이 되는 거푸집(鑄型)에 넣어서 만들어진 정확한 복제품(複製品)이라 가정할 수 있다면 인류는 오히려 좁은 범위로 제한된 실재(實在)의 관찰을 하게 되리라. 다행이도 우리 인간은 그렇게 까지 악조건하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들 인간은 개성이 각양각색이기 때문에 인간성이 그 획일성에서 구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개개인에게는 각각 제 나름 대로의 특이성이 있으며 또한 그 놓여 진 신분에 따라서 저마다의 독특한 경험과 사물의 관찰 방법과 생활양식이 있는 셈이다. 이를테면 이 우주의 신비에 대한 접근방식에도 의사(醫師)에게는 의사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으며(의사의 종교) 또 수학자(數學者), 선원(船員), 농부, 광부(鑛夫), 실업가, 목양자(牧羊者), 목수 그 밖의 여러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각각 저 마다의 방법이 있으며 역사가의 방법(역사가의 종교)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인지(認知)의 총체(總體)란 여러 가지 기록을 비교한다거나 또는 개인적이며 전문적인 경험을 규합(糾合)함으로써 얼마간의 인간의 시야(視野)를 넓힐 수 있으며, 개개인을 위해서도 또는 인간 전체를 위해서도 도움을 주고 있는 것으로서 -중략- 지상의 생활에 있어서의 자기중심성의 역할은 이른바 양면(兩面) 가치적(價値的)인 것이다. 한 편으로는 자기중심성은 분명히 현세의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나의 생명체는 설사 미소하고 부수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사실상 이 우주를 구성하는 한 조각의 분자라고 정의(正義)할 수가 있는 것이며 더우기 그것은 부분적이나마 다른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게다가 이 우주의 다른 존재를 이기적인 자기 목적에 종속시키도록 일종의 '묘기'를 연출하고자 안간힘을 다하는 하나의 자율적인 힘으로 독립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즉 저 마다의 생명체는 모두 앞을 다투어 스스로가 우주의 중심이 되고자 하고 있으며 그리고 다른 모든 생명체와 또 이 우주 자체와 더욱이 이 우주를 창조하고 유지하고 있는 '전능한 힘' - 이 순간적 현상하에 깔려 있는 실재(實在)하는 '전능한 힘'- 과도 우열을 겨루려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자기중심성은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체로서의 존재에 필요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하나의 필수조건이 되어 있으나, 만약 가정해서 자기중심성을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면 -설사 그것이 생명자체의 소멸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해도- 대체로 생명체로서의 여하한 것도 이 지상에서의 그 시간과 장소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한 매개수단(媒介手段)마저도 동시에 완전히 상실하게 되리라. 그리고 이와 같은 심리적인 진실에의 통찰이 불교의 지적인 출발점이 되고 있다. -중략- 자기중심성은 이와 같이 삶의 필수조건이며 동시에 인과응보(因果應報)를 수반하는 하나의 죄라고 본다면, 모든 생명체는 한평생 빠져 나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려 있는 셈이다. 하나의 생명체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도 다만 그것이 자기주장 끝에 오는 자살과 또 자기포기에서 오는 안락사들 둘 다 애써 피해가는 한에서만 가능하며 또한 그 중도(中道)에서 만이 가능하다. 이 중도란 면도날과 같이 좁은 길이며 그 좁은 길을 걸어가는 나그네는 그 길의 양측에 있는 두 개의 대심연(大深淵)에서 끌어당기는 힘에 대항하면서 언제나 고도의 긴장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삶의 균형을 유지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중심성으로 말미암아 생명체에 부과하고 있는 문제는 그런 까닭에 하나의 생사 문제이며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끊임없이 붙어 다니는 문제이다. 이런 상황에서 역사가의 관점도 이 가공할 도전에 대응코자 인간이 마음에 무장하는 몇몇 도구 중에 하나라 하겠다. / 토인비 역사전집 10권. 한 歷史家의 宗敎觀/ an historian’s approach to religion. / PP. 19-21.에서

    註 00; "한 歷史家의 宗敎觀"은 1952-3에 에든버러 대학에서 두 번의 깃포드 기념 초청강연에서 행한 강연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전 20장으로 이루어진 저서이다. 핵심 주제는 '종교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는 무엇인가'이다. 이는 서구문명이 1, 2차의 양대(兩大) 세계대전을 치루는 과정에서 서구문명의 핵심사상이였던 기독교사상이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신의 부재(神의 不在)라는 대 혼란에 빠지게 되자, 서구문명의 재액(災厄)으로 받아들여 기성종교에 대한 반성과 새로운 종교의 모색을 하게 된데 원인이 있었다. 초판은 1956년에 'an historian’s approach to religion.' 란 제목으로 Oxford University Press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에서의 번역 단행본은, "토인비 歷史全集(全10卷)"보다 8년 전인 1974년에 "歷史家의 宗敎觀"이란 제목으로 姜基哲 역으로 一志社에서 초판이 간행되었다.

    천도교의 교의를 바탕으로 토인비의 견해를 이해하려면, 동학과 천도교가 어떤 종교이며 궁극적으로 무엇을 추구하는가를 명백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막연하게 수운의 심법을 이해해서는 토인비가 보고 있는 우주와 종교 그리고 종교에서 가장 중요한 자기중심성에 대한 이해와 이론을 절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동학과 천도교를 다 종교로 보거나, 동학은 심학(心學) 또는 도학(道學)이고, 천도교는 종교로 보거나를 관계없이 기존의 종교라는 틀 안에서 동학과 천도교를 이해하는 한 자기모순에 빠져 새로운 종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토인비가 요구하는 것은 새 시대에 맞는 새로운 종교이며, 새 시대에 살고 있을 인간의 문제를 쉽게 이해하고 해결해 줄 수 있는 역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새로운 시대는 어떻게 다가올 것이며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그리고 인간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예견(豫見)하고 알아야 해결할 수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토인비는 미래세대가 과학문명이 발달하게 됨으로서 지구가 일일 생활권이 되면, 지방국가(지역국가 또는 개별국가를 의미함)들이 갖고 있는 특성이 문화교류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이와 같이 지방국가 사이의 전쟁행위는 첫 단계에서는 일정한 범위 안에 머무렀는데, 그것은 자기 영토 안에서 각기 주권적 지방신(민족신 또는 종족신)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는 신념을 공통되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신념은 붕괴하기 쉬우며 또한 이런 신념으로 강요된 억제력도 함께 붕괴하기 쉽다. 왜냐하면 지방 공동체의 자기숭배는 「나도 살고 남도 살리자.」라든가, 「그대가 원하는 바를 남에게도 베풀라.」든가 하는 격언 속에서 가르치고 있는 절도와는 본질적으로 용납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형태의 인간숭배는 자기중심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종교적 표현이고, 따라서 우주의 일부를 마치 그 전체와 같이 생각하며 우주의 종속적인 한 부분 이외의 그 아무 것도 아니며, 아니어야 할 그 무엇에 우주를 억지로 집중시키고자 하는 지적인 과오와 도덕적 죄에 놓여져 있는 것이다. 자기중심성은 모든 생명체에 고유한 것이므로 자기중심을 만족케 해 주는 종교일 때 어떤 종교이든 이에 대한 귀의자의 충성 획득에 별로 어려움을 격지 않는다. 자기중심성은 이를 탈피 못하는 모든 생명체로 하여금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지 못하게 막으며, 이 힘겨운 도덕적인 재능을 달성하는 데 실패하게 되면 그것은 모든 사회관계에 일대 재액(災厄)을 초래하게 된다.' / 한 歷史家의 宗敎觀 PP. 52-53.에서

    토인비는 인간숭배와 인간의 고뇌는 서로 상관관계에 있을 수도 있지만, 잘못된 인간숭배는 인간의 삶 그 자체를 그릇되게 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모든 형태의 인간숭배 속에는 그것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도 죄가 되는 두 가지 오류가 내포되어 있다. 그 하나는 인간을 숭배한다는 것 자체의 오류이다. 그 이유는 가령 개인 쪽이 집단에 비해 더욱 신에 가까워질 수 있다 하더라도 결국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인간의 힘 -그것이 집단적, 물질적인 것이든 개인적, 정신적인 것이든- 을 숭배하는 일인 데 그 이유는 인간의 힘을 숭배하는 자는 이로 말미암아 고뇌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발견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생활에 있어서 고뇌는 힘의 대조(對照)를 이루는 것이며 게다가 그것은 힘 이상으로 특징적이며 근원적인 삶의 요소이기도 하다. 우리들이 이미 보아 왔듯이 고뇌는 삶의 본질을 이루는 것인데 그것은 이 고뇌가 생명체에 갖추어져 있는 스스로 우주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충동과 그것이 본래 다른 만물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며 또 존재」하는 바 절대적 실재에도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풀기 어려운 긴장에서 필연적으로 나오는 산물이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인간의 힘은 그것이 어떠한 형태를 취하든 모두 한도가 있으며 또 궁극의 의미에서 환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삶에 대한 어떠한 태도는 그것이 인간의 힘을 우상화하는 것이라면 필연적으로 고뇌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낳기 마련이며 마침내는 삶 그 자체에 대한 그릇된 태도를 낳기 마련이다.' /한 歷史家의 宗敎觀 P. 92.에서

    토인비는 “미래에 살다.”에서 21세기에 대하여, 우리가 맞이할 세상과 종교에 대한 교또 산업대학의 와까이즈미와의 문답형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고 있다. / 토인비 역사전집 2권 “미래에 살다.”/ surviving the future. by Arnold J. Toynbee. 1971. Oxford University press. London. 이 두 교수의 대화의 핵심적인 주제는 광범위하지만 요약해서 말하면,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다음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에서의 질문들은 한 젊은 지성에 의해서 제시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와 같은 질문은 온 세계의 젊은 세대로부터 제기되고 잇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오늘 날 우리는 같은 것을 생각하고 같이 느끼고 있으며, 우리는 공동의 문제와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다음에 말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문제로부터 파생하고 있다. 즉, 「우리 인류는 어떻게 미래를 살아갈 것인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산업혁명 이래 특히 오늘날에 있어서의 기술의 비상한 발전에 의해서 우리들은 자신이 초래한 이 새로운 인위적인 환경 속에서 어떻게 해서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견디어 낼 수 있는 것으로 만들 것인가, 혹은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어떻게 해서 살아남을 수가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라고 하면서 1970년대 초에서 본 미래의 전망을 말하고 있다. 40여 년 전에 두 교수가 나누었던 대화의 핵심인 「우리 인류는 어떻게 미래를 살아갈 것인가」하는 주제는 오늘날 더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두 교수의 대화에서 상당부분이 문제점으로 드러났고 해결의 대안이 논의되었지만 확실하게 문제가 개선되었다고 믿겨지는 부분이 없다는 것이다. 서론에서(P.27) 와까이즈미 교수가 첫 질문으로 던진 내용을 지금 살펴보면, 조금도 변하지 않았으며 개선되지도 않았고 좀 더 많은 문제들이 야기되어 사회문제로 발전되고 있는 우리의 암담한 현실을 직감하게 될 것이다.

    ‘토인비 교수님. 선생님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세계적 규모로 변화가 일고 있는 오늘날 세계 인류는 특히 젊은이들은 많은 심각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전쟁과 평화, 권력과 자유, 삶과 죽음, 사랑과 섹스, 세대사이에 단절(斷絶), 오늘날의 가족형태, 막대한 지식의 양과 그 속에서의 인간의 주체성, 이러한 것들에 대한 갖가지 의문은 우리를 몹시 혼란케 하고, 삶의 자신을 잃게까지 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를 돌아보면 과학과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확실히 인간의 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고, 많은 점에서 유효(有效)하게 작용해 왔습니다. 인간은 자연을 변화시키고, 환경을 콘트롤하고, 게다가 우주의 개발까지도 해내었습니다. 컴퓨터는 많은 분야에서의 비약을 가능케 하고, 복잡한 정보조직과 결부되어 효과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게 하였습니다. 그러난 그 결과 과연 과학 기술의 진보, 물질적 번영은 참다운 의미에 있어서 인간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었는지요. 오히려 정신면에서의 새로운 문제나 위기를 낳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요. 이를테면 전통과 혁신, 종교와 과학, 개인과 사회 등의 인간이 오늘날 경험하고 있는 숱한 모순이나 대립의 출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 사이의 알맞은 밸런스와 융화(融和)를 구하기 위해선 훌륭한 사상가의 전면적인 조언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토인비 교수님. 우리는 선생님께서 긴 생애를 통해서 문명이나 사회의 발전, 혹은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오신 분이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 며칠 동안, 현재의 가치관의 변화, 오늘날의 인간의 고뇌의 본질, 인간과 그 사회에 어떠한 미래가 열리어 있는가 하는 것과 같은 기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들려주시기를 바랍니다. 특히 이제부터의 시대를 건설할 젊은 세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은 무척 기쁜 일입니다.‘ 라고 70년대가 맞고 있는 시대적인 상황을 적시(摘示)하고 다음 세대를 창출(創出)할 주인이 될 젊은 세대에 대해서 토인비 교수의 조언을 구하고 있다. 이어서 두 교수는 사람이 산다는 것, 보람 있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 합니다.

    토인비는 인생의 목적 즉 인간의 사는 목적은 사랑, 영지(英智), 창조(創造)의 수행에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은 이 세 가지를 목적 전부를 추구하기 위해서 마땅히 모든 능력과 모든 정력을 바쳐야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이 희생이 없이 달성되었으면 바랄게 없겠지만 가치 있는 것은 흔히 자기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면서, 일단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을 경우엔 희생도 아끼지 않는 마음가짐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이어서 인간의 사는 목적인 세 가지 즉 사랑, 영지(英智), 창조(創造)에 대하여 구체적인 설명을 하는 가운데 토인비는 자기가 말하는 사랑(love)이란,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고 했다, 아내, 자식, 동포, 신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이들 사랑의 의미는 아주 다르다고 했다. 이들 중 ‘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종교적 영역에 대하여 각 지역마다, 각 종교마다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상세하게 예를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과 함께 우주의 일부이고 이 우주는 그 존재의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무언가 궁극적인 정신적 존재라고 함직한 존재가 있다고 했다. 이 궁극적인 존재(또는 대상)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다양한 것이 아니고 단일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신념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우주의 배후에 있는 이 정신적 존재를 내가 믿는다는 것은 하나의 신앙이라고도 했지만 그 존재에 대한 증명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궁극적인 정신적 존재가 만능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고 했고, 그것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하는 것, 이 우주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도 했다.

    토인비는 이 지구상에 살아 있는 것들 중에서 의식과 이성이 있는 점과 생각하여 선택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점으로 비교한다면 인간이외에서 다른 유례(類例)를 찾을 수 없다고 했다. 인간은 인간이 지니고 있는 인간성조차 합리적이라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의 이성을 기르고 사용하는 것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간은 다른 동물들과 같이 감정과 무의식적인 동기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올바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선택을 해야 하고 그 선택은 이성과 의식으로 해야 하기 때문에 이성과 의식을 계속적으로 작용시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인간은 합리적인 면과 비합리적인 면과 부단한 투쟁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고, 이것은 영지의 역할이며, 인간의 이성을 감정의 위의 최고의 자리로 올리려는 투쟁이라고도 했다.

    마지막으로 사람이 가치 있고 보람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선 창조적이어야 하고 그 창조적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바꾸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 없는 자연도 생존하기 위해서는 우주의 불완전 면을 창조하여 모두가 생존할 수 있는 자연환경을 보충하고 부분적으로 로 인공(人工)의 환경을 바꿔 놓는 일을 우주의 불완전 면에 덧붙임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인간이 추구하는 보람 있는 삶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사랑, 영지(英智), 창조(創造)의 수행은 사람이 살고, 인생을 바치는 것이며 만일 그 목적을 추구함에 있어 희생을 치룰 것을 요구받게 된다면 그것을 위해 마땅히 스스로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이 나, 토인비의 신념이라고 했다.(PP. 31-37의 요약.)

                                                                                                   / 기술 과학문명과 미래종교(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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