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회 창립기념 합동기도 3일차(8월 30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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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청년회 창립103주년 기념 합동재가기도
3일차(8월 30일-화요일)읽을거리
-잡지 「개벽」 통권 35호(1923년 5월호) 수록 김기전 선생의 글-
1922년 5월 1일 천도교소년회의 창립1주년 기념 첫어린이날 행사는 수많은 소년단체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천도교소년회는 1923년 소년운동협회를 결성하고 제1회(回) 어린이날 행사를 추진한 소년운동의 의의를 담은 어린이해방선언을 발표한다. 소춘 김기전 선생은 잡지 「개벽」에 이 소년운동의 의의를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개벽운동과 합치되는 조선의 소년운동
소년운동협회의 장거(壯擧)
듣건대, 경성 안에 있는 많은 소년단체의 관계자 일동은 지난 4월 17일로써 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고 지방에 있는 많은 소년단체 기타 사회단체와 연락을 취하여서 세계적으로 의의 깊은 5월 1일을 기하여 조선 13도 형제로 하여금 일제히 소년운동의 기치를 들도록 하리라 한다. 이번에 고조되는 그 협회의 소년운동의 진의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하여는 우리가 아직(이 글을 쓰는 4월 20일까지) 그 자세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으나, 그 운동이 우선 조선의 소년을 표방하여 계획되는 것이므로 금일 조선 소년의 특수한 처지에 거울하여 먼저 '소년해방'이란 그것을 목표로 삼아 나아갈 것이라는 점은 조금도 의심이 없는 사실일지며 또한 그것이 사실이 되지 아니하면 안 될 것이다.
해방! 해방! 이 말은 근래의 우리 조선 사람들이 퍽도 많이 부르짖게 되는 말이다. 정치적 해방, 경제적 해방을 부르짖음은 물론이고 ‘여자의 해방’과 같은 문제도 우리의 귀가 아플 만큼 떠들고 있다. 그러나 어떤 셈인지 금일 사회의 잠재력이 되고 내일의 사회의 중견력이 될 소년 해방 문제에 대하여는 별로 이렇다 하는 소리가 없었다. 재작년 이래로 이곳저곳에 몇 군데의 소년단체가 생기어 빈 골짜기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얼마큼이라도 소년 문제의 소식을 전한 바가 없지 않았으나, 그 문제가 일반의 여론이 되고 운동이 되어 만인의 주시를 필요로 하기까지에는 너무나 미미하였으며 또한 너무나 선명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오늘, 이와 같은 보편적 소년운동이 일어남을 보게 된 것은 실로 좋은 소식 중의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먼저 말만 듣기에도 한 조각의 충정(情)이 스스로 솟아나 약동함을 금치 못하겠다.
조선 소년의 윤리적 압박
그런데 소년을 해방한다 하면 소년을 압박하는 사실의 존재를 전제로 하지 아니지 못할지니 그러면 종래의 우리 조선 사람은 과연 어떻게 소년을 압박하였는가? 말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깊이 생각해 보면 종래의 소년 압박에 있어 처음으로 헤아릴 것은 윤리적 압박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무슨 종교를 믿고 무슨 주의를 말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사회적 생활의 실제는 100의 99가 모두 유교의 윤리 밖으로는 한걸음을 나가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유교의 윤리는 사람을 사람 그대로 관찰하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로 사람을 나누어서 그 중에서 군(君)이라 하고 부(父)라 하고 부(夫)라 하는 세 벼리(三綱)를 발견하고, 나머지 무리들을 거기에 복속케 하되 특별히 오륜(五倫)이란 그물로 코 같은 것을 만들어서 일반의 탈출을 엄금하였나니, 소년을 압박하는 유일한 도덕적 내지 윤리적 근거가 되는 '장유유서(長幼有序)'라는 금언(金言)도 곧 이 오륜 중의 하나이다.
가만히 그 간의 경위를 생각하면 오륜은 삼강에 속하게 하고 삼강 중에도 부(夫)는 부(父)에 속하게 하고 부(父)는 군(君)에 속하게 하고 군(君)은 천(天)에 속하게 하고 천(天)은 일종의 완전한 기성품(旣成品)이라 하여 일체의 규범을 거기에서 취하고 있다.
그런데 천(天)은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지라, 스스로 말하여 천(天)을 계승하여 지극한 경지에 들었다는 군왕(君王)의 의사를 천(天)의 의사라고 대표하게 되었으니 요순(堯舜) 우탕(禹湯) 문무주공(文武周公)이 즉 그들이며, 공자와 같은 사람은 그들을 잘 조술(祖述, 앞사람의 설을 본받아서 서술하여 밝힘)하고 헌창함으로 말미암아 거의 그들과 동렬에 있는 성인(聖人)이 되었었다.
이후에는 유도의 교조(敎條)를 중심으로 삼아서 생활한 제왕이나 학자나 또한 그 무리들은 천편일률로 그 방식을 반복함에 지나지 못하였다. 즉 일체의 제왕은 다같이 요순을 바라보면서 요순보다는 조금 못한 제왕이 되는 것으로써 최후의 이상을 삼았고, 일체의 선비는 공자를 바라보면서 공자보다는 조금 못한 성인이 되는 것으로써 마지막 목표를 삼았으며, 그밖의 무리들은 그 당시당시의 제왕 군자의 위풍(威風)과 지도(指導) 밑에서 그날그날 판박은 생활을 지속하였을 뿐이다. 만일 누구라도 여기서 한걸음 벗어나면 그는 곧 이단자라는 지목 밑에서 하염없는 희생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한 마디로 줄이면, 지금까지의 우리들(유교의 교화에 젖은)의 머리에는 과거에 대한 신앙밖에는 다시 어떠한 것이 없었다. ‘執古之道 以御今之有(집고지도 이어금지유-옛날의 도를 굳게 지켜 오늘을 다스린다)’라는 노자(老子)의 말은 그 동안의 경위를 유감없이 상징하고 있다. 우리에게 만일 과거가 아닌 현재나 미래가 있었다 하면 그것은 과거라는 큰 모형(模型)에 판박은 현재나 미래였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연장인 현재이며 미래였었다.
이와 같이 과거를 조술함으로써 유일한 인생의 목표를 삼은 그때(오늘까지도)에 있어서는 과거와 가장 잘 아첨하고 과거와 가장 인연이 가까운 사람이 사회적 지위가 제일 높은 사람이 되었다. 그런데 같은 인간 중에서도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과거와의 인연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며 과거에 대한 지식이 가장 많은 사람이다. 따라서 어른인 그는 그 사회에 대한 가장 높은 지위와 가장 많은 혜택을 받는 반면에 어른이 아닌 어린이는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되고 말았다. 근본적으로 그의 인격을 부인하였던 것이다. 그의 존재는 어른의 완롱품(玩弄品-가지고 노는 물품)이 되는 데에서만, 어른의 심부름꾼이 되는 데에서만 의의가 있었다. 이와 같이 어린이에 대하여는 근본적으로 그의 인격을 부인하였는지라 일상의 접촉에 있어서도 그에게 대해서는 사랑은 있었을지언정 공경(恭敬)은 없었다. 그 사랑은 마치 주인이 견마(犬馬)를 사랑하는 사랑이었으며, 견마가 그 새끼를 사랑하는 사랑이었다. 즉 그가 귀여웠음으로 사랑하였으며 그가 가련하였음으로 사랑하였으며 그를 자기 소유로 보았기 때문에 사랑하였었다. 과연 얼마나 천박하고 야비한 사랑이었는가?
종래의 사회에서 어른이 어린이를 무시한 생각을 하면 실로 기가 막힌다. 먼저 일일시시로 쓰는 언어에서 그를 한층 낮은 놈으로 취급하였다. 어른은 반드시 어린이를 하대하고 어린이는 반드시 어른을 공경으로 대하였다. 가고 오고, 앉고 눕고, 의복이나 음식의 모든 절차에 있어서도 반드시 어른과 어린이를 구별하여 어른을 제일차, 어린이를 제이차에 두었다. 예를 들면 길을 갈 때에는 어린이는 반드시 뒤에 서라 하고(앞에 가는 어론을 질러가는 것을 일러 공경이 아니라 함), 음식을 먹을 때는 어린이는 반드시 어른이 잡수시고 난 뒤에 먹으라고 하는 것 같은 것이다.
관혼상제(冠婚喪祭)는 재래의 사회적 의절(儀節) 중에서 가장 중요한 의절이었다. 그런데 그 의절 중에 어린이에 대한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들어있지 아니하다. 그 중의 관혼(冠婚)은 의절의 성질상 스스로 어린이를 제외하였다 할지라도 상제(喪祭)에 대해서는 얼마라도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상제에 어린이가 있는가? 제례(祭禮)에 어린이가 있는가? 어린이는 죽으면 그저 거적이나 유지(油紙) 조각으로 둘둘 말아서 내다 버릴 뿐이다. 아무러한 의식도 없고 아무러한 추념도 없다. 어른에게 대해서는 몇 해를 두고 입는 복(服)이요 몇 대를 두고 하는 제사가 어린이에 대해서는 단 하루도 복(服)이 없고 한 번의 제사가 없다. 반드시 복(服)을 입게 하여야 되고 제사를 지내게 하여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재래의 어린이에게 대한 범절은 그렇게도 야속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일일이 말할 수는 없거니와 한 마디로 하면, 종래의 우리 동양 사람들은 천(天)이라 하는 일대 유령과 같은 고물(古物)을 등 뒤에다 숨겨두고 그 앞에서 우리 인간이라는 것을 나우어 보기 시작하였다. 군(君), 신(臣), 부(夫), 부(婦), 장(長), 유(幼), 노(老), 소(小), 남(男), 여(女), 군자(君子), 소인(小人), 빈자(貧者), 부자(富者), 부자(父子), 조손(孫), 숙질(叔侄), 형제(兄弟)와 같은 수많은 호칭은 이러한 나눔의 결과로 생긴 큰 조각, 작은 조각에 지나지 못한 것이다. 그 중에서 군(君)이란 것이 가장 큰 조각이 되었고 어린이라는 것이 가장 작은 조각이 된 셈이었다.
그런데 어린이라는 조각은 보통 사람의 안중에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았다. 실로 말이지 지금까지의 사람들의 안중에는 아주 어린이란 것이 보이지를 않았었다. 그때의 형편에는 이렇게밖에 할 수가 없었는지, 또는 이렇게 하여야 및 특수계급의 이익을 옹호할 수 있다는 그런 악의에서 그러하였는지는 아직 별 문제로 하고라도 어찌하였든 재래의 사회제도 그것이 인간이란 것을 나누어 어린이를 최하위급에 둔 그것은 흔히 하는 말로 인사불상(人事不祥)이었다. 우리가 이러한 사회제도를 하루를 유지한다 하면 하루만큼 재앙을 받을 것이다.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하도다.
보다 심한 경제적 압박
둘째로 생각할 것은 경제적 압박이니 먼저 윤리적으로 압박하여 어린이의 정신을 침식하고, 다시 경제적 압박으로써 어린이의 몸뚱이를 결단낸다. 사실대로 말하면 오늘 사회에 있어 어린이에게 주는 경제적 압박은 그들의 심신을 전적으로 패망하게 하고 있는 것이 된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사회제도에서 오는 무산가정(無産家庭-돈없는집)의 생활난의 영향은 대로 그 가정에 있는 어린이에게 미쳐 즐겁게 놀아야 하고 힘써 배워야 할 어린이들이 불행하게도 노동을 하여야 하고 수난을 받아야 하는 그것이다.
오늘 조선에서 그 무산아동들의 머리 위에 눌려져 있는 경제적 압박을 생각하면 실로 기가 막히는 실정이다. 학교가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고약한 형편이려니와 학교가 집 옆에 있어도 먹을 것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그 형편은 더구나 고약하지 않은가? 형제야 오늘 우리의 어린이들 중에서 학교는 있을지라도 먹을 것이 없어서 공부를 못하는 이가 얼마라도 있는 줄을 아는가? 그들의 다수는 지금 매일 몇 푼 안 되는 임금과 지질치 못한 노역(勞役)에 종사하며 전정(前程-앞길)이 만리(萬里)인 자신의 장래를 그르치며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오늘 사회의 경제제도를 근본부터 개조하지 않으면 해결되지 못할 것인바, 그 문제가 돌아갈 곳은 그리 단순치 아니한 것이 사실이나 그 문제가 단순하지 않다는 이유로 그 해결을 등한히 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이렇게 해방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없는 어린이들을 이와 같이 윤리적으로 압박하였으며 경제적으로 압박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스스로 가로막았으며 우리의 금후의 광명을 우리 스스로가 부인하였다. 지금까지의 우리는 이와 같은 큰 과오를 거듭하여 왔었다.
형제여, 이러한 과오를 대명천지의 오늘에 있어서도 또다시 거듭하여야 할 것인가? 천지가 개벽하여 세상의 문운(文運)이 장차 그 근본부터 한번 뒤집히려 하는 오늘에 있어서도 이러한 과오를 또다시 거듭하여야 옳을 것인가? 아니다. 아니다. 그들을 근본적으로 해방하여야 한다. 먼저 윤리적으로 해방하고 다시 경제적으로 해방하라. 어린이 그들은 사람의 부스러기도 파편도 아니요 풀로 비유하면 '싹'이요 나무로 비유하면 '순'인 것을 알자. 또 우리 사람은 과거의 연장물도 조술자도 아니요, 한도 없고 끝도 없는 내일의 보다 높은 이상을 향하여 줄달음치는 자라는 것을 알자. 그리고 우리가 싸여있는 이 우주는 태고쩍 어느 때에 제조된 기성품도 완성품도 아니요 이날 이 시간에도 부단히 성장되며 있는 일대 미성품(未成品)인 것을 알자. 그런데 해마다 날마다 끊임없이 나타나는 저 새 싹 새 순이 그 중에도 우리 어린이들이 이 대우주의 하루하루의 성장을 표현하고 구가하고 있음을 알아야 하며, 그들을 떠나서는 다시 우리에게 다시는 아무러한 희망도 광명도 없는 것을 깨닫자.
몇 천 년을 두고두고 과거만을 내다보던 우리의 목은 아주 병적으로 그 편에만 기울어지게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억지로라도저 미래를 내다보기로 하자. 언제는 과거의 상징은 어른이라 하여 사회규정의 일체를 어른을 중심으로 삼아 이야기해 온 바와 같이 이제는 미래의 상징은 어린이라 하여 사회규범의 일체는 어린이를 중심으로 삼아 이야기하도록 하자. 저 풀을 보라. 나무를 보라. 그 뿌리와 줄기의 전체는 오로지 그 작고 작은 새로운 순 하나를 받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이슬도 햇빛도 또한 비도 맨 처음으로 받을 자는 그 순이 되도록 해야 하지 아니한가? 우리 사람도 별 수가 없다. 오직 그렇게 해야 할 뿐이다. 사회의 맨 밑바닥에 깔려 있는 과거 어린이들의 가련한 처지를 위로 끌어올리어 그들을 사회의 가장 높은 자리에 두게 하는 것뿐이다.
그러면 그렇게 하는 구체적 방책이 무엇일까? 먼저 윤리적으로 그의 인격을 인정하여
첫째로, 언어에 있어 그들을 경대(敬待)하자. 어떤 이는 말에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른인 자기 자신으로서 생각해 보라. 만일 자기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어떤 사람에게 하대(下待)를 받아본다 하면 어떠할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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