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천도교인6.7,김흥렬.백낙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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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94주년을 맞이하여 일제만행의 상징이었던 제암.고주리 사건을 회상하면서, 불멸의 천도교인, '김흥렬.백낙렬' 선생에 대한 언론보도를 올려봅니다. 구국의 영웅인 두 분 선생님의 삶을 조명하고 불멸의 정신을 계승하여, 오늘 우리들의 소원인 민족통일을 앞당기는데 본 자료는 천도교인의 교훈으로서 큰 이미가 있다 하겠습니다. 송암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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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11-02-22 18:59 스크랩 0 조회 1091 | |||
백낙렬은 1865년 남양군 장안면 수촌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수원이다. 1885년 남양지역에 동학이 포교되자 동학에 입도하여 포교와 수도에 열중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 29세의 나이로 이 지역에서 농민군을 모집하여 수원의 고석주 접주 휘하에 들어가 활약했다. 1904년 갑진개혁운동 당시에는 솔선수범하여 상투를 자르고 이 지역의 개혁운동에 앞장섰다. 1910년 2월 7일 백낙렬은 천도교 남양교구 금융원으로 일하면서 남양교구 제 446 강습소를 열어 교인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이 지역의 교인들을 위해 수촌리 전교실에 강습소를 열고 교세 확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18년 중앙대교당 건축 성금을 모금할 때에도 남양교구 순회교사로 교인 가정을 방문하여 많은 금액을 모금하였고, 중앙총부로 올려 보내 3․1운동의 거사자금을 마련하는데 큰 몫을 했다. 당시 수원군 우정․장안면 3․1운동은 3․1운동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항쟁지 중 하나이다. 우정․장안면 3․1운동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지도자가 백낙렬이었다. 3․1운동은 우리 민족 모두가 참여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일제의 강압적인 폭력정치와 경제적 예속관계는 우리 민족을 말살하고자 했고,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에 대항하여 우정․장안면의 모든 주민들은 백낙렬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항일의지를 불태웠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백낙렬과 김흥렬의 주도 아래 천도교 전교사들을 중심으로 사전 조직되고 모의되었다. 천도교 전교실은 우정․장안면의 전 지역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었기에 교도들과 주민들을 동원하기가 매우 좋았다.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남양교구의 순회교사로 장안면 수촌리 출신인 백낙렬과 김성열, 안종후 등은 서울에 올라가 3월 1일의 만세 시위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고향 수촌리로 돌아와 비밀리에 활동을 하면서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을 벌이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백낙렬은 수촌리 구장(오늘날 이장)이면서 이 지역 천도교 책임자였다. 그는 천도교 전교실을 통하여 3․1운동을 추진하기로 계획하고, 각 전교실의 책임자들을 만나 3․1운동에 대해 뜻을 같이하기로 하였다. 곧바로 팔탄면 고주리에 거주하는 김흥렬, 팔탄면 가재리의 이정근과도 거사를 논의하였고, 백낙렬과 뜻을 같이한 김흥렬은 다시 제암리의 안종환, 안정옥, 안종후 등과 상의하였다. 백낙렬은 독립운동 자금이 모자라면 빚을 얻어서라도 3․1운동을 추진할 것을 결심하고, 김흥렬은 향남․팔탄면을 책임지고, 백낙렬은 우정․장안면을 책임지기로 하고 3․1운동을 실행할 것을 결정했다. 이러한 사전 준비 끝에 우정․장안면을 중심으로 한 3․1운동은 서울보다 한달 늦은 4월 1일 밤 7시에 수촌리 개죽산의 봉화를 신호로 하여 시작되었다. 그리고 4월 3일 오전 11시 장안면사무소에 약 2백여명이 모여 그동안 말단 식민행정을 행사했던 면사무소를 파괴하고, 장안면장 김현묵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쌍봉산을 향하여 출발했다. 군중들은 수촌리 천도교 전교실에서 만든 태극기와 깃발 그리고 몽둥이를 들고 있었다. 그동안 식민지 백성으로 억울하게 살아왔던 것에 대한 분노와 독립에 대한 의지는 활활 불타올랐다. 쌍봉산에는 약 1여천명이 모여들었다. 군중들은 오후 3시경 우정면사무소로 가서 자신들을 괴롭혔던 서류와 집기류들을 파손하고 불에 태워 버렸다. 의기에 찬 만세 군중들은 우정면사무소를 파괴한 뒤 장안면장을 다시 앞세워 태극기를 들게 하고 군중의 선두에 세운 뒤,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오후 4시경에 화수주재소로 몰려갔다. 주재소 앞에서 군중들은 일제히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에 돌을 던졌다. 이때 놀라 도망치는 가와바다(川端豊太郞) 순사가 권총을 발사하여 시위군중 1명이 넘어져 숨지자 이에 격분한 군중은 가와바다 순사를 추격하였으며, 가와바다 순사가 도망가며 쏘아댄 총에 3명이 더 쓰러졌다. 도망가던 가와바다 순사는 곧 수십 명의 군중에 포위되었고, 차희식, 장소진, 이봉구 등이 순사를 처단하였다. 일본인 순사 가와바다는 1917년 장안면 화수리에 주재소가 설치되자 부임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을 가혹하게 취급하였다. 그는 위생검사 등을 시행하여 모욕을 주고, 주민들이 모여 있으면 풍속단속을 핑계로 도박죄를 뒤집어 씌워 끌고 가 모진 태형을 받게 하였다. 또한 그는 당시 젊은 나이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뺨을 때리며 모욕적인 말과 행동을 많이 하였다. 우정․장안면의 3․1운동은 사전에 계획된 만세운동으로 백낙렬을 중심으로 한 천도교 세력과 수촌리의 기독교 세력, 유교적 토착 세력, 천주교 세력 등이 합심한 만세운동이었다. 또한 2천 5백명의 모든 지역 주민이 동참하여 면사무소와 주재소를 파괴하고 순사를 처단한 대표적인 3․1운동의 항쟁지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3․1운동 당시 54세였던 백낙렬은 천도교 남양교구 순회교사와 장안면 구장회장직과 함께 수촌리 구장을 겸직하고 있었다. 백낙렬은 우정․장안면에서의 3․1운동을 이끈 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3년간 충청도 계룡산에 피신해 있었다. 그후 10년 동안을 고주리 천덕산 수도암에 은신해 있으면서 교인들의 집을 전전하다가 신병을 얻어 집에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백낙렬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살다가 1936년 11월 20일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채 쓸쓸히 눈을 감고 말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적을 인정하여 2002년 건국포장을 수여 독립유공자로 포상하였다. 자료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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