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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성사의 대 영단으로 세워진 천도교.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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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457회   작성일Date 13-02-19 09:19

    본문

       의암성사의 대 영단(大英斷)으로 세워진 천도교.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알림 1; 2012년 1월 3일부로 2G 서비스의 중단으로 인하여, 본인의 손전화 번호가 010 - 6251 - 3240 으로 변경되었음을 알립니다.

    알림 2; 연구소 방문은, 필자의 카페주소인 여기를(http://cafe.daum.net/oamdonghak/오암 동학사상 연구소)를 클릭하여 ‘김 용천 자료실’을 찾으시면, 회원이 아니시더라도, 방문객은 누구나 자료들을 검색하여 읽으실 수 있습니다.

                                                                            포덕 154(2013)년 2월 19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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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 / 어떠한 고통도 감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포덕 154(2013)년 2월 15일)의 보완적(補完的)인 글입니다, 20세기를 전후(前後)로 하여 우리 민족과 국가가 겪은 격동(激動)의 시기(時期)에, 동학(東學)이 어떤 시련(試鍊)의 시대를 거쳤으며 의암성사의 대 영단(大英斷; 남다르게 뛰어난 결단)이 왜 필요했는가를 통하여, 100 여만의 교도(敎徒)를 가진, 대 교단(敎團)인 천도교(天道敎)의 탄생(誕生)을 알아볼 수 있는 사례(事例) 중의 하나를 게재(揭載)한 것입니다. 폐부(肺腑)를 도려내고, 손발을 잘라내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아픈 심정(心情)을 뼛속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변혁(變革)의 시대를 극복(克服)하기 위해서는, 이런 대 용단(勇斷; 용감한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대적(時代的) 소명(召命; 우리에게 맡겨진 역사적인 사명)인 대 변혁(大變革)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물러설 수 없는, 미래를 개척(開拓)해야 할 시대정신(時代精神)이 담긴 혁신(革新)인 것입니다.『天道敎 政治理念』 原本 25페이지 8行부터 31페이지 10行까지의 전문(全文)을 게재하였습니다.天道敎 政治理念』 原本이 난해(難解)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天道敎 政治理念』의 修訂本 1을 원본 뒤에 수정본 전문을 게재하였으니 참고하여주시기 바랍니다. / 原文의 誤字와 脫字를 修正하지 않았으며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등이 잘못되었더라도 원문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註 01;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알고 싶으신 분들은天道敎 政治理念을 되새겨 보며 (1-6/ 2012. 3. 30)’와 ‘天道敎政治理念의 全文과 解題(上, 中, 下./ 2012. 3. 30)’을 정독(精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註 02; 폐부(肺腑)- 의학용어로, 호흡을 하는 척추동물의 한 쌍 또는 한 개의 호흡 기관. 즉 폐(肺), 폐장(肺臟), 허파를 가리킨다. 비유적인 의미로는, 마음의 깊은 속과 일의 긴요(緊要)하고 중요한 점을 표현할 때에 쓰인다.

    註 03; 읍참마속(泣斬馬謖)-울읍, 벨참 , 말마, 일어날 속 

    원뜻: 제갈량(諸葛亮)이 눈물을 머금고 사랑하는 부하 마속(馬謖; 190년-228년/ 자(字)는 유상(幼常)이며, 양양(襄陽) 의성(宣城) 출신)의 목을 베어 일벌백계(一罰百戒)함으로써 질서(秩序)를 바로잡은 일을 이른다.

    속뜻; 1) 법의 공정(公正)을 지키기 위해 사사로운 정(情)을 버림을 비유(比喩).

          2) 큰 목적을 위해서는 자기가 아끼는 사람을 가차(假借) 없이 버림을 비유. 

      십팔사략(十八史略)에 전하는 이야기로, 삼국시대 초엽(初葉)인 촉(蜀)나라 건흥(建興) 5년(227) 3월, 제갈량(諸葛亮)은 대군을 이끌고 성도(成都)를 출발했다. 곧 한중(漢中: 섬서성 내)을 석권하고 기산(祁山: 감숙성 내)으로 진출(進出)하여 위(魏)나라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급파(急派)한 위나라의 명장 사마의(司馬懿: 자는 仲達)는 20만 대군을 이끌고 기산의 산야에 부채꼴 모양의 진을 치고 제갈량의 침공군(侵攻軍)과 대치(對峙)했다.

    이 진(陣)을 깰 제갈량의 대책은 이미 서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지략(智略)이 뛰어난 사마의인만큼 군량 수송로의 가정(街亭)을 수비 하는 것이 문제였다. 228년, 만약 가정을 잃으면 중원(中原) 진출의 웅대(雄大)한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 중책(重責)을 맡길 만한 장수가 없어 제갈량은 고민했다. 그때 마속(馬謖)이 그 중책을 지원 했다. 그는 제갈량과 문경지교(刎頸之交; 서로 죽음을 대신할 수 있을 만큼 막역한 사이)를 맺은 명 참모(名 參謀) 마량(馬良)의 동생으로 ,평소 제갈량이 아끼는 재기(才氣)가 발랄(潑剌)한 장수였다. 그러나 노회(老獪)한 사마의와 대결하기에는 아직 어리다 했는데, 마속은 출전(出戰)할 것을 거듭 간청(懇請)했다.

    "다년간(多年間) 병략(兵略)을 익혔는데 어찌 가정 하나 지켜 내지 못 하겠습니까? 만약 패하면, 저는 물론 일가권속(一家眷屬; 온 가족)까지 참형(斬刑)을 당해도 결코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좋다. 그러나 군율(軍律)에는 두 말이 없다는 것을 명심(銘心)해라."

    제갈량이 가정 전투에서 산을 맡아보는 책무(責務)를 마속에게 맡기려 했을 때 다른 장수들은 경험이 많은 오의(吳懿)나 위연(魏延)을 추천했지만, 묵살(黙殺)되었다고도 전한다. 서둘러 가정에 도착한 마속은 왕평(王平)과 함께 지형(地形)부터 살펴보았다. 삼면(三面)이 절벽(絶壁)을 이룬 산이 있었다. 제갈량의 명령은 그 산기슭의 도로(道路)를 사수(死守)하라는 것이었으나 마속은 적을 유인해서 역공(逆攻)할 생각으로 산 위에 진을 쳤다. 그러나 위나라 군사는 산기슭을 포위한 채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식수(食水)와 식량(食糧)이 끊겼다. 이로 인해 마속은 전 병력(全兵力)으로 포위망(包圍網)을 돌파(突破)하려 했으나 용장(勇將)인 장합(張郃)에게 참패(慘敗)하고 말았다. 전군(全軍)을 한중(漢中)으로 후퇴(後退)시킨 제갈량은 마속에게 중책(重責)을 맡겼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 군율을 어긴 그를 참형(斬刑)에 처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듬해 5월 ,마속이 처형(處刑)되는 날이 왔다. 때마침 성도에서 연락관으로 와 있던 장완(蔣琬, ? ~ 246년)은 '마속 같은 유능한 장수를 잃는 것은 나라의 손실'이라고 제갈량을 설득 했으나 제갈량은 “사사(私事)로운 인정(人情)에 이끌리어 군율을 저버리는 것은 마속이 지은 죄보다 더 큰 죄가 되오. 아끼는 사람일수록 가차(假借) 없이 처단(處斷)하여 대의(大義)를 바로 잡지 않으면 나라의 기강(紀綱)은 무너지는 법이요.”

    일설(一說)에는 "손무(孫武)가 싸워 항상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군율(軍律)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처럼 어지러운 때에 군율을 무시하면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했다고도 한다.

    마속이 형장(刑場)으로 끌려가자 제갈량은 소맷자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마룻바닥에 엎드려 목을 놓아 울었다고 하여 제갈량 휘루 참 마속(諸葛亮揮淚斬馬謖)이라고도 한다. / 각 종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를 종합 정리.

    註 04; 마량(馬良)과 백미(白眉)- 良字季常宣城人 兄弟五人 竝有才名 鄕里謂之諺曰 馬氏五常 白眉最良 良眉中有白毛 故以稱之 / 마량의 자(字)는 계상(季常)으로 의성(宣城)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5 형제가 있었는데 모두 재주가 뛰어나 세상에 이름이 잘 알려졌다. 마을 사람들이 그들을 평(評)하여 말하기를, “마씨(馬氏) 집에 오상(五常)이 있는데 그 중에 흰 눈썹이 가장 뛰어나다. 마량의 눈썹에는 흰털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백미란 여럿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나 사물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 촉한(蜀漢)의 유비(劉備)가 군신들에게 구원지계(久遠之計; 長久한 計策)를 묻자 이적(伊籍)이 어진 선비를 추천할 때 올린 말./ 「三國志 蜀志 馬良傳」 / 각 종 백과사전과 관련 자료를 종합 정리.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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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道敎 政治理念 原本

                          / 본문 내용 총 71페이지 / 縱書 全段(右에서 左로 記述) 漢主國從體(國漢文混用體)

    乙. 甲辰改革運動.

    甲午年 淸日戰爭에서 日勝淸敗의 結果를 맺은뒤에 朝鮮은 淸國의 從屬國의 地位를벗어나 獨立國家로서 大韓帝國이 되게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大韓獨立이란 朝鮮의 自主的獨立이 아니요 外國인 日本의 策略에서 되어졌더니만큼 日本의 勢力이 朝鮮에 進出하게 될것은 旣定의 事實이거니와 그와 利害相反되는 한個의 敵手가 생기가 되었으니 그는 말할것도 없이 南進을 圖謀하는 帝政露西亞이다. 말하자면 朝鮮과 滿洲를 自己의 手中에 넣자고하는것은 露日兩國의 꼭 같은 뱃장이었다. 그리하여 이兩大侵略勢力은 朝鮮과 滿洲를 도마위에 놓고 서로 밀고 당기고 짛고 까불고 하다가 甲辰二月에 와서는 마침내 武力戰으로써 雌雄을 決하게 되었다. 그런데 朝鮮과 滿洲는 露日戰의 目的物이니만큼 露日그어느便이 이기나 朝鮮의國權을 侵害할것은 當時의 具眼之士로는 다 같이 憂慮하던 판이었고.

    東學黨은 甲午革命에서 八十萬의 犧牲者를 내이고 一敗塗地하고 말았으나 그餘勢는 날로 發展하여 中南六道에도 다시勢力을 扶植하게 되었지마는 特히 西北으로 흘러드러 平安道와 咸鏡道에는 한때 家家戶戶가 全部 東學軍이라 하여도 別로 틀리지 않을만큼 發展이 되었었다. 안으로 東學의 發展이 이렇게 잘되는 反面에 밖으로 東學에對한 官憲의 壓迫이 너무나 苛酷하기 때문에 海月先生의 뒤를 이어 東學을 指導하게 된 孫義庵은 外國遊覽을 標榜하고 上海 日本等地에서 亡命生活을 하던 때이다.

    『國權確立』 『東學現道』의 二大念願을 품은 孫義庵은 이機會에 一擧 그 念願을 達成하려는 雄圖를 가지고 國內의 百萬敎徒들을 動員하여 進步會를 組織해가지고 一大民衆運動을 이르키게 되었다. 그때 進步會의 表面綱領은 ① 獨立基礎를 鞏固히할 것. ② 政府를 改革할것.

    ③ 軍政 財政을 整理할 것. ④ 人民의 生命財産을 保護할것等 네가지었으나 孫義庵의 腹案은 國體政體를 根本的으로 改革시키고자 한것이 事實이었다.

    이렇게 發起된 進步會는 京鄕各地에서 一齊히 開會를하고 斷髮黑衣로써 死를 決하고 政府改革國政更新을 絶叫하는한편 道에는 支部, 郡에는 支會를 設하여 十三道三百餘郡에 進步會의 旗발이 번득이지 않는곳이 別로 없이되었다. 그래서 當時의 官民이 한참동안은 그原因을 알지못하여 唐慌罔措하였었으나 얼마後 進步會는 곧 東學黨의 後身임을 알게되자 政府에서는 더욱驚劫하여 一邊軍隊를풀어 鎭壓하며 一邊日兵과 交涉하여 再次甲午의 覆轍을 밟고자하였다. 이때 國內指導者인 李容九는 孫義庵에게 報告도없이 日兵의 保護를받는 『一進會』와 合作하여 進步會를 一進會로 變更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李容九는 孫義庵의 指導精神과 背馳되는 길을 向하여 마침내 日軍과의 妥協을取하여 나가다가, 最後에는 所謂保護獨立宣言이란것을 發表하기 때문에 結局 一進會는 世人의 打마를 받게되고, 最後에는 孫義庵의 英斷으로 一進會를 解散시키고 李容九以下 六十二人은 除名處分하여 局面을 收拾하고 말았다.

    進步會의 運動은 以上과같이 龍頭蛇尾의 結果를 짓고 말았으나 그러나 이運動이 天道敎의 政治運動史에 있어서 看過하거나 黙殺해 버릴수 없는 한個의 크다란 事實이니만큼 우리는 이에對한 意義와 過誤를 眞摯旦嚴正하게 究明하는데서 功罪兩面이 한가지로 우리에게 活敎訓이 될것을 믿는다.

    첫째, 甲辰運動의 性格을 우리는 民主主義政治의 現實運動이라고 規定한다. 封建的인 當時의 政府를 民主主義的으로 改革해가지고 그힘으로서 獨立國權을 鞏固히 하자는것이 根本趣旨요 目的이었다. 孫義庵의 本意대로 말하면 露日戰爭은 滿韓問題때문이니 露國이 勝하면 滿韓은 露國의 勢力圈이 될 것이요, 日本이 勝하면 滿韓은 日本의 勢力圈이 될것은 明若觀火의 事實이다. 그러므로 이에對한 對策으로는 露日 어느便이 이길것을 잘보아가지고 이길便에 加擔해서 敗할便을 向하여 宣戰布告를 하여서 戰勝國의 地位를 얻어야한다. 그래야 戰勝國의 地位를 利用해가지고 獨立國權을完全히 保全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이對策은 政府當局者가 아니고는 實現할수가없다. 더구나 當時政府 當路者들은 國際情勢에 暗昧하고 政治的識見이 不足하여 孫義庵의 致書를 요言이라 排斥하기까지에 이름을 볼때 다시 그러한 政府애 對해서 무엇을企待할 餘地가없다. 뿐만아니라 이럴까 저럴까 걱정하는 동안에 露日戰爭은 벌써버러지고 말았다. 그래서 第二段策으로 設計한것이 進步會의 發起이다. 開會를 契機로하여 멧十萬의 會員을 京城에 集結시켜가지고 一擧에 現政府를 뒤집어엎고 民主主義的新政府를 樹立해서 萬事를 解決해보자던것이다. 이것으로보아 이 運動의 成敗得失은 別問題로하고 政治的理念만은 民主主義政治現實인것이 틀림없다.

    둘째, 甲辰運動의 效果로 말하면 ① 民權伸張 ② 新文化建設 ③ 封建意識打破等等을 들수있다. 純粹한 民衆으로서 政治的集團을 組織해가지고 政府를 攻擊하고 官吏를 彈劾한것은 有史以來 처음일이 었으며, 머리를깎고 色衣를입고 新聞을 發行하고 學校를 세워서 新敎育을 獎勵하고 한것이 또한 이로부터始作하였으며, 그때까지도 班常의 階級과 官民의 差別觀念이 强하던 朝鮮社會에서 民主主義를 高唱한 이運動은 實로 朝鮮의 封建殘黨에게 最後의 弔鐘을 울려준 셈이다. 말하자면 朝鮮의 封建階級은 甲午革命에서 그 生命을 읽어버리고 甲辰運動에서 아주 葬事를 지냈다고 할수있다.

    셋째, 甲辰運動에 對한 過誤로 말하면 우리는 義庵先生이 直接陣頭指揮를 못한것이 그첫째라고 생각한다. 만일 先生이 이運動에 直接當局을 하였다고하면 成敗得失間에 先生의 腹案은 果敢하게 實行해 보았을것이요, 李容九가 會務를 自意로 專橫하지 못했을것이요, 또는 그렇게 되었다면 宋秉畯을 앞잡이로한 日軍의 弄絡과 利用을 當치 아니하였을것이다. 우리로서 先生에게 過誤를 돌린다는것은 千萬未安한 일이지마는 實狀인즉 이것이 先生의 終世不忘하던 後悔이기 때문에 우리는 先生의 情曲을 대신해서 이뜻을 披瀝하는 바이다. 둘째로는 李容九의 背信과 專橫이나, 李容九가 만일 義庵先生의 指導대로 積極果敢하게 나아갔다면 어느程度의 成功이 있었을것도 事實이요, 不幸成功을 못한다 할지라도 民族社會에 부끄러움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 번 先生에게 背信의 妄念을 품은瞬間부터 會務를 專橫하게 되었을것이요, 會務를 專橫하게되자 모든魔手는 그를 誘惑하였을것이요, 誘惑에 걸리게되자 그의앞에는 오즉 千丈斷崖인 自滅의 一路만이 나서게된것이다. 一言으로 말하면 李容九의 過誤는 惡으로서의 크다란 敎訓인것을 우리는 잊지말아야 한다. 그다음은 當時頭目들에게도 過誤가 있다는것을 우리는 指摘하고 싶다. 李容九가 그처럼 背信專橫하는데도 어찌하여 民主主義的 批判과 抗爭이 없었던가. 民主主義政治를 實現하자는 그들로서 어찌하여 會內에서는 그와같이 袖手傍觀만 하였던가. 一進會가 百萬會員의 一進會가 아니고 李容九一人의 一進會였던가. 알고도 말을못했다면 이는 無勇이니 無勇도 罪過요, 몰라서 말을 못했다면 이는 無知이니 無知도 또한 罪過이다. 우리는 오늘에있어서 過去의 先輩들에게 귀태여 過誤를 돌리자고 하니보다도 우리들 스스로의 自己批判, 自己反省이 될까하여 이 말을 吐露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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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道敎 政治理念 修訂本 1.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의 附錄. PP.209-246.

                                                                                / 縱書 上下 二段. 國主漢從體(國漢文混用體)

       原文의 誤字와 脫字를 修正하지 않았으며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등이 잘못되었더라도 원문 그대로 옮겨 놓았습니다. (222페이지 2행부터 225페이지 12행까지 전문 수록) 그러나 이 수정본은 내용의 첨삭(添削) 정도(程度)가 너무 심(甚)하여 원작(原作)의 의도(意圖)가 왜곡(歪曲)될 수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필자는 독자들께서 이해하는데 매우 쉽도록 『天道敎 政治理念』의 원본(原本)과 수정본(修訂本) 1. 2 의 비교연구에서 註와 解說로 修正補完하여 충분하게 설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 금년 3월말 이전에 공개 게재할 예정입니다.

    二. 甲辰改革運動.

    甲午年 淸日戰爭에서 日本이 戰勝한 뒤에 韓國은 淸國의 종속국의 지위를 벗어나 독립국가로서 大韓帝國이 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의 大韓獨立이란 韓國의 자주적 독립이 아니요 외국인 일본의 책략에서 되어진 것이니만큼 日本의 세력이 韓國에 進出하게 될 것은 기정의 사실이거니와 그와 이해 상반되는 한 개의 적수가 생기가 되었으니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南進을 도모하는 帝政 露西亞의 마수라 하겠다.

    말하자면 韓國과 滿洲를 자기의 수중에 넣자고 하는 것은 露日 양국의 꼭 같은 뱃장이었다. 그리하여 이 양대 침략세력은 韓國과 滿洲를 도마 위에 놓고 서로 밀고 당기며 각축을 벌리다가 甲辰 二月에 와서는 마침내 무력전으로써 자웅을 결하게 되었다. 그런데 韓國과 滿洲는 露日戰爭의 목적물이니 만큼 露日 어느 便이 勝利만 하면 韓國의 국권을 침해할 것은 당시의 실정으로써 누구나 다 같이 우려하던 것이었다.

    東學黨은 甲午革命에서 八십만의 희생자를 내고 일패도지에 이르고 말았으나 그 여세는 날로 발전하여 中部 六道에서 다시 세력을 부식하게 되었지마는 특히 西北으로 平安道와 咸鏡道에는 한 때 家家戶戶가 全部 東學軍이라 하여도 별로 틀리지 않을 만큼 발전이 되었었다. 안으로 東學의 발전이 이렇게 잘되는 반면에 밖으로 東學에 대한 관헌의 압박이 너무나 가혹하기 때문에 海月선생의 뒤를 이어 東學을 지도하게 된 孫義菴선생은 외국 유람을 표방하고 上海, 日本 등지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때이다.

    國權確立과 東學現道의 二大 염원을 품은 孫義菴선생은 이 기회에 단번에 그 염원을 달성하려는 큰 뜻을 가지고 국내의 백만 교도를 동원하여 進步會를 조직하여 일대 민중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 때 進步會의 표면 강령은

    ① 獨立 기초를 견고히 할 것.

    ② 政府를 개혁할 것.

    ③ 軍政 財政을 정리할 것.

    ④ 人民의 생명 재산을 보호할 것.

    네가지였으나 孫義菴의 복안은 국가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저 한 것이 사실이었다.

    이렇게 발기된 진보회는 경향 각지에서 일제히 開會를하고 斷髮 黑衣로써 결사적으로 정부개혁 국정쇄신을 절규하는 한편 道에는 支部, 郡에는 支會를 설치하여서 당시의 官民들을 그 원인을 알지 못하여 당황하였었으나 얼마 후 진보회는 곧 東學黨의 후신임을 알게 되자 政府에서는 더욱 놀래서 군대를 풀어 탄압하며 한편으로는 日兵과 교섭하여 재차 갑오의 전철을 밟고저하였다.

    이 때 국내 지도자인 李容九는 孫義菴에게 보고도 없이 日兵의 보호를 받는 一進會와 합작하여 진보회를 일진회로 변경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李容九는 孫義菴선생의 指導정신과 배치되는 길을 향하여 마침내 日軍과 妥協하여 나가다가, 최후에는 소위 보호독립선언이란 것을 발표했기 때문에 결국 一進會는 世人의 지탄을 받게 되고, 최후에는 孫義菴의 영단으로 一進會를 해산시키고 李容九 이하 六十二인은 제명 처분하여 국면을 수습하고 말았다.

    進步會의 운동은 이상과 같이 용두사미의 결과를 짓고 말았으나 그러나 이 운동이 天道敎의 政治운동사에 있어서 간과하거나 묵살해 버릴 수 없는 커다란 史實이니만큼 우리는 이에 대한 의의와 과오를 엄격하게 구명하는데서 우리에게 산 교훈이 될 것을 믿는 바이다.

    첫째, 甲辰運動의 성격을 우리는 民主主義政治의 실현운동이라고 규정한다. 봉건적인 당시의 정부를 민주주의적으로 개혁해가지고 그 힘으로서 독립주권을 공고히 하자는 것이 근본 취지요 목적이었다.

    孫義菴의 본의대로 말하면 露日戰爭은 滿州와 韓國문제 때문이니 露國이 勝利하면 滿·韓은 露國의 세력권이 될 것이요, 日本이 勝利하면 滿州와 韓國은 日本의 세력권이 될 것은 명약관화의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대책으로는 露日 어느편이 이길 것을 잘 보아가지고 이길편에 가담해서 패전한 편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여서 전승국의 지위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전승국의 지위를 이용해 가지고 독립국권은 완전히 보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대책은 정부 당국자가 아니고는 실현할 수가 없다. 더구나 당시 정부 當路者들은 국제정세에 어둡고 정치적 식견이 부족하여 孫義菴선생의 致書를 排斥하기까지에 이름을 볼때 다시 그러한 정부에 대해서 무엇을 기대할 여지가 없다.

    그래서 제二 단계로 설계한 것이 진보회의 발기이다. 개회를 계기로 하여 몇십만의 회원을 京城에 집결시켜가지고 일거에 현 정부를 뒤집어 엎고 民主主義的 신정부를 수립하여 만사를 해결해 보자던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이 운동의 성패득실은 별 문제로 하고 정치적 이념만은 민주주의 정치 실현인 것이 틀림없다.

    둘째, 甲辰운동의 효과로 말하면 ① 民權伸張 ② 新文化建設 ③ 封建意識打破 등등을 들수 있다. 순수한 민중으로서 정치적 집단을 조직해 가지고 정부를 공격하고 관리를 탄핵한것은 유사이래 처음 일이었으며, 머리를 깎고 色衣를 입고 신문을 발행하고 學校를 세워서 新敎育을 장려한 것이 또한 이로부터 시작하였으며, 그때까지도 班常의 계급과 官民의 차별관념이 강하던 韓國社會에서 民主主義를 高唱한 이 運動은 實로 韓國의 봉건잔당에게 최후의 弔鐘을 울려준 셈이다. 말하자면 韓國의 봉건계급은 甲午혁명에서 그 生命을 읽어버리고 甲辰運動에서 아주 소탕다고 할 수 있다.

    셋째, 甲辰運動에 대한 과오로 말하면 우리는 義菴선생이 직접 진두지휘를 못한 것이 그 첫째라고 생각한다. 만일 선생이 이 운동에 직접 지휘를 하였다고 하면 성패득실 간에 선생의 복안은 과감하게 실행해 보았을 것이요, 李容九가 會務를 마음대로 조종하지 못했을 것이요, 또 그렇게 되었다면 宋秉畯을 앞잡이로 한 일군의 농락과 이용을 당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우리로서 선생에게 과오를 돌린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지마는 실상인즉 이것이 선생의 돌아가실 때까지 잊지 않던 후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선생의 심정을 대신해서 이 뜻을 피력하는 바이다.

    둘째로는 李容九의 背信이니, 李容九가 만일 義菴선생의 지도대로 적극 과감하게 나아갔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이 있었을 것도 사실이요, 불행하여 성공을 못한다 할지라도 민족사회에 부끄러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한번 선생에게 배신의 망념을 품은 순간부터는 會務를 마음대로 處理하였을 것이요, 會務를 自意로 處理하게 되자 모든 魔手는 그를 유혹하였을 것이며, 유혹에 걸리게 되자 그의 앞에는 오즉 自滅의 길만이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李容九의 과오는 惡으로서의 커다란 교훈인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다음은 다시 두목들에게도 과오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지적하고 싶다. 李容九가 그처럼 배신전횡하는 데도 어찌하여 民主主義的 비판과 항쟁이 없었던가. 민주주의 정치를 실현하자는 그들로서 어찌하여 會內에서는 그와같이 방관만하였다가. 一進會가 백만회원의 일진회가 아니고 李容九 一人의 一進會였던가. 알고도 말을 못했다면 이는 죄과이요, 몰라서 말을 못했다면 이는 無知이니 無知로 인해 잘못을 범했다면 역시 그 책임을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에 있어서 과거의 선배들에게 귀태여 과오를 돌리자고 하느니보다도 우리들 스스로의 자기 비판, 자기 반성이 될까 하여 이 말을 토로하는 것이다.

                                                                                      / 의암성사의 대 영단(大英斷)으로 세워진 천도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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