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에게나 농락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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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1)
/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야 할 후손들을 생각하며. 내가 짐승이 아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를 자문(自問)하고 있다.
천도교 홈에 게재된, 본인의 모든 글과 동학, 천도교와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은, 모두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의 김 용천 자료실과 교리, 교사 연구 논문과 학술논문 자료실에 게재되어 있사오니, 자주 방문하시어 많이 읽어주시고, 교단발전에 널리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유의사항
1. 필자가 관련 자료로 주로 사용하고 있는 위키 백과사전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원문이 영어로 된 사전입니다. 국역판(國譯版)을 이용하고 있지만 기술의 내용이 애매할 때에는 원문을 참조하고 있습니다. 모든 자료들은 서구(西歐)의 가치관과 역사관을 바탕으로 우리와는 다른 시각(視覺)으로 기술되었기 때문에, 한국 관련 자료는 불충분하거나 애매한 부분이 있어, 그런 부분들은 필자가 알고 있는 한국 관련 자료들로 보완하였습니다.
2. 농락(籠絡)의 의미는, 직역(直譯)하면 새장과 고삐라는 뜻으로, 사람을 교묘한 꾀와 말로 속여서 제가 하고자 하는 마음대로 상대를 놀리고 꼬여내는 것을 의미한다.
3. 이 글은 어디까지나 천도교인으로서 동학 천도교의 교의를 바탕으로 하여 필자 개인의 생각이며 평가이고, 판단이며 의견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신앙하고 있는 교단인 천도교 중앙 총부의 입장과는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다만 교단이 현실과 미래의 문제에 대하여 종교적 4 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기초적인 작업의 하나로, 적극적인 참여를 통하여 교의에 맞는 교단의 방향을 정하여 앞으로 나아갔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동학과 천도교는 근대사에 있어서 ‘갑오동학혁명’, ‘갑진개화운동’, ‘기미독립운동’의 3대 운동을 통하여 근대사의 흐름을 미래지향적으로 전환시킨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3대운동의 정신이 헌법 전문(前文)에 새겨진 대로, 조국이 나아가야 할 바의 방향과 정신을 앞장서서 계승하여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지상천국을 건설해야 할 책무(責務)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동학의 시대를 관철(貫徹)하고 있었던 수운과 해월의 사상도 그러하지만, 다시 개벽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목표는 의암에 의하여 천도교시대를 열어 근대사를 미래지향적으로 천도교의 종교적 4대 목적을 당당하게 설정하였습니다. 해방공간에서 “天道敎政治理念”이란 글을 통하여 천도교의 종교적인 목표와 미래지향적인 역사관을 제시하였음을, 필자가 ‘포덕 153(2012)년 3월 30일에 발표한 ’天道敎政治理念을 되새겨 보며’와 ‘天道敎政治理念 全文과 解題.’에서 구체적으로 밝히고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그 글을 바탕으로 한국이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直視)하여 ‘다시 개벽’의 새 기운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포덕 153(2012)년 8월 31일.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운영관리자. 김 용 천 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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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1. 들어가는 말.
2. 상식과 비상식의 진실과 허상.
3. 진실(眞實)과 상식(常識)의 허상(虛像)과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인 역사관(歷史觀).
1).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 와 악법도 법이다.
2).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Join, or Die / United we stand, divided we fall.
3). 국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바라지 말고,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라. 의 진실.
4). 에이브라햄 링컨(Abraham Lincoln) 대통령의 진실.
5).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진실.
가.) 사회주의란 어떤 사상인가?
나.) 공산주의란 어떤 사상인가?
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차이는 무엇인가?
6). 진보주의와 종북(從北) 세력의 진실.
4. 혼돈의 시대인 한국의 현실
5. 대한민국 헌법이 명시한 국민의 권리와 의무.
6. 대한민국 교육법이 명시한 교육의 목적.
7. 세대 간(世代 間)의 갈등(葛藤)과 도덕적(道德的) 해이(解弛).
8. 나아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우리 민족이 힘겹게 걸어 온, 근, 현대사의 비극을 이해하는 사람이, 국립묘지(國立墓地)를 찾아갔다면, 숙연(肅然)하고 비통(悲痛)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 받쳐 지킨 이 땅에서 살아감에 대한 한없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만이라도 찾아 갔다면, 나라를 빼앗겼던 시기에, 독립을 위하여 혼신(渾身)을 다하여 싸우시다 순국(殉國)하신 애국지사(愛國志士)나 열사(烈士)와 북괴군의 침공(侵攻)을 저지(沮止)하다 순국하신 국군장병들이, 또 세계평화를 위하여 타국에서 순국하신 국군장병들이, 생전에 대한민국 국군의 위용(偉容)을 보여주었던 열병(閱兵)과 행진을 하듯이, 죽어서도 오(伍)와 열(列)을 맞추어 그 드넓은 묘역(墓域)에 안장(安葬)되어 있는 현충원(國立顯忠院; National Cemetery, National Memorial Board,)의 현장을 보고는, 그 누구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언행을 함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진정 누구를 위하여 젊은 목숨을 산화(散華)한 것인가? 그리고 해방공간 속에서 내 민족의 손에 무의미하게 암살당한 수많은 애국지사와 북괴군의 침공으로, 무참하게 총살당한 애국시민의 죽음을 누가 알아주고 위로해 줄 것인가? 우리 모두 이들의 희생을 잊고 산지 오래 됐다. 그들의 애국애족의 마음과 순국으로 지켜온 이 땅에서 웃으며 살아온 이 나라 국민으로서 목전(目前)의 손익(損益)에 눈이 멀어 그 충혼(忠魂)을 잊고 산지가 정말로 오래됐다. 정말 부끄럽다. 유족이 아닌 우리들 중에서 진심으로 그 충혼을 기리기 위해서 한 송이의 꽃이라도 바쳐본 적이 있는가? 한번 만이라도 찾아가 줄지어 서있는 묘석(墓石)을 보았다면, 내가 왜 사는 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처절(悽絶)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자가 함부로 가벼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내가 앞장서서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말을 하려거든, 내가 대중을 향해 하는 언행이, 진정 사욕(私慾)을 버린 순수하며 보상(補償)을 바라지 않는 애국애족의 충성심(忠誠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행동하라.
현충원에 묻힌 수많은 전몰(戰歿) 장병들처럼 조국에 목숨을 바칠 용기는 없어도, 목숨을 바칠 조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내 가슴을 뛰게 하는지 누가 알까? ‘無名勇士의 塔’ 앞에서, 또는 1949년 5월 4일 북한군과의 송악산 전투에서 폭탄을 안고 적의 진지에 뛰어들어 장렬히 산화한 ‘肉彈 十勇士 忠勇塔’ 앞에서, 조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우리의 조국이 수많은 전몰(戰歿) 장병들이 젊음을 받칠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 를 지금 혼돈에 빠진 조국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조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하면서 지금 살아가고 있고, 조국의 미래를 어디로 몰고 가고 있는가.? 에 대해서 자문(自問)해본 적이 있는 지가 궁금하다. 젊은 세대들은,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해방공간의 혼란을 건너 5.16군사혁명시대와 산업화 시대를 숨 돌릴 사이 없이, 곁눈질 한 번 할 새 없이, 오로지 가족의 삶을 위해 달려온 우리들 세대처럼 느끼고 있을까? ‘나라를 잃은 백성은 상가(喪家)집에 개와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이며 절실하고 가슴 저리게 느낄까? 하고 매우 궁금해 하는 내가 안쓰럽고 처량해 보인다.
내 나라 내 민족도 아닌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위하여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전사(戰死)한 영혼(靈魂)을 기리기 위한 전국 도처에 세워진 유엔군 참전용사의 충혼비, 위령비, 참전비 앞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했는가? 참괴(慙愧)함을 금할 길이 없다. 유엔군 참전용사의 높은 인류애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이름 모를 차가운 타국 땅에서 산화하여 묻힌 그들의 숭고한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하고 있는가? 이들의 젊음을 바친 애국애족과 인류애를 생각하며, 현충원에 줄지어 선 묘석(墓石)을 보며, 살아 있는 우리들의 뜨거운 울음이 목을 메이게 한다. 살아가기 힘든 지금의 삶이라 할지라도, 한 번 현충원을 찾아 가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국군장병들의 묘비명(墓碑銘)을 살펴보고 그들의 충혼을 위로해 주시기 바란다. 오늘의 나의 삶이 그들의 죽음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 있기 때문이다. 위로(慰勞)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상식(常識)이고 지성(知性)인 것이다.
지식(知識)만 있고 인성(人性)이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나답게, 사람답게 살만한 세상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 진리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애당초 더불어 어우러져 살 생각(同歸一體 또는 共存共榮)이 없고, 자기만의 이익과 명예를 지켜 존경받으면서 잘 살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자기만 잘 살 수 있는 지식은, 교묘(巧妙)한 논리(論理)와 언사(言辭)로 대중을 기만(欺瞞)하여 자기이익을 위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으로 몰아가 붕괴(崩壞)시킬 수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책임감이 없고 거시적(巨視的)인 안목(眼目)도 부족하다 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존엄성도 없다.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省察)과 언행에 대한 반성에 인색하고, 더불어 사는 타인을 함께 살아가야 할 상대로 대등하게 인격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수용하기를 거부하며 타인의 언행에 대해서는 가혹한 비판과 혹평을 서슴지 않는다. 똑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가볍게 비판하지만, 타인일 때는 그럴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만행이라고 혹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아 너와 나의 형평성은 본질적으로 있을 수 없어야 하고, 너와 나는 근본이 다른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비극인 것이다. 적대적 감정으로 투쟁은 있으나 동등한 인간으로 수용할 의사가 없어, 타인과의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이룰 마음이 없다. 또 목전(目前)의 이익이나 유리한 여건과 위치와 조건을 양보하여 미래를 향한 거시적인 합의(合議)를 하려는 긍정적인 미래지향적인 사고는 더 더욱이나 없다. 가혹한 비판은 있어도 상대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마음은 없다.
자신을 숭앙하고 추종한 다수의 대중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독단적(獨斷的)으로 자신의 지지(支持) 세력(勢力)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리고, 자신의 져야 할 책임과 의무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영리한 재주인 것이다. 이렇게 몰상식(沒常識)한 언행을 해도 추종자(追從者)들은 그들의 무지(無知)가, 자신들을 멸시(蔑視)하는 언행(言行)에도 극찬(極讚)을 아끼지 않는 지극히 편향적(偏向的)인 애정을 보낸다. 어떤 말에도 귀기우리지 않으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고 멈출 줄을 몰라 장애물에 부딪쳐 온 몸이 깨어져야 비로소 안다. 왜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아무 생각 없이 버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면서, 내가 싫은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좋은 것만 취하고, 다른 것은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하는가? 이미 균형감각(均衡感覺)을 잃어버려 편향적이 되어버린 자신들을 비난(非難)할 때에는, 짐승의 기운을 느낄 정도로 위압적(威壓的)이고, 공격적(攻擊的)이어서 무서워질 정도이다. 때로는 거친 행동으로 상대를 제압(制壓)하기도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독선(獨善)인데, 소통(疏通)을 말하고 자기의 주장이나 판단에 무조건 인정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몰상식(沒常識)인 것이다. 자신은 그럴듯한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소통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의 주장만 하면서, 남들 보고 소통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도 또한 상식을 크게 벗어난 비정상적(非正常的)인 몰상식인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과 역사관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서, 타인(他人)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들의 어떤 권리와 인권을 찾겠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이 지지(支持)했던 사람이, 지지 세력에게 단 한 마디 상의나 양해 없이 자신의 권리인양 양도(讓渡)하는 것에 대한 불합리(不合理)와 몰상식에 대한 분노(憤怒)를 느끼지도 않는가? 지지 세력들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종속적(從屬的)인 인간들의 군상(群像)일 뿐인가? 그렇게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찾겠다고 하던 주체적(主體的)이며 주도적(主導的)인 인간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대중을 지킬 것처럼 온유(溫柔)한 말과 행동으로 속삭이던(교활하게 감언이설로 첩구교변을 하던)그가, 자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대중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태연히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주(註) 01; 감언이설(甘言利說)과 첩구교변(捷口巧辯)- 감언이설은 남의 비위에 맞도록 꾸며서 하는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꾀는 말을 의미하고, 첩구교변은 거침없는 달변(達辯)으로 재치 있고 그럴듯하게 꾸며내어 하는 교묘한 말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병리현상 중에 하나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하고,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것이, 선거의 전과 후(前後)의 진풍경(珍風景)이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해온 이 나라에서의 모든 선거는 당선자들의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쉽게 변하고, 선거권(選擧權)을 행사했던 국민은 어느 새 지지(支持)에서 반대(反對)로 모두가 변해버려 그 책임을 물을 대상이 없어지는 해괴(駭怪)한 일이 반복되어 재신임을 받은 정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단임(單臨)이라도 성공한 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실패한 정권을 창출한 것은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선거와 성공한 정권을 탄생시켜보려는 마음이 없었던 이 나라 국민인 우리들이라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칼하지 않는가?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코미디가 아닌가? 누가 누구더러 신뢰할 수 정권이라 비아냥거리는가?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기’ 란 속담이 딱 어울리는 세상이다.
오직 남아 떠돌아 다는 것은, 당선자를 지지한 자신의 책임은 없고 네 탓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정치권(政治權)이라 매도(罵倒)하고 있다. 그런 정치판을 누가 뽑아서 만든 정치판이냐고 누구 하나 묻는 사람도 없다. 대한민국에는 당선자는 있는데 선출한 선거권자는 없는 유령(幽靈)사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답한 당선자는 다음 선거에서 탈락을 시켜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높은 수준에 있는 민중의 역할(役割)이고 소명(召命)일 텐데, 재선(再選)이상을 시켜 주어 당선자들은 무서울 것이 없는 당당한 당선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도 내심(內心)으로 쾌재(快哉)를 부르면서, 어제까지 높은 수준에 있는 민중이라고 속삭이던 다정한 마음은 어디로 가고, 대중이 매우 어리석다고 웃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의도나 추구하는 목표를 모를 뿐만 아니라 의심하지도 않는 순박(醇朴)한 마음으로 메시아처럼 숭앙(崇仰)하기 때문에, 교활(狡猾)한 그들의 교언영색(巧言令色)과 미사여구(美辭麗句)에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또 이 사회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성폭행자의 신상공개와 고지는 재범과 그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국가가 평등하게 보호해야 할 인권을 포기한 것이다. 성폭행자의 신상공개와 고지는, 법이 정한 바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거주이전을 위한 선택의 자유와 인권보호를 법이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법의 형평성을 위하여 성폭력보다 더한 국가와 민족에게 자해행위를 하는 반사회적, 반국가적인 행위자를 국가가 인권보호라는 명분으로 성폭행자의 신상공개와 고지와 같은 법을 집행하지 않는 것은 법의 형평성에 위배되는 것이며, 정치범이나 사상범 또는 불법적인 시위자는 치외법권적인 법에 준하는 혜택을 받아야 할 특권계층인가? 생계형 범법자나, 성폭행자에 적용되는 법은 차등적(差等的)인 법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가가 궁금하다. 국가가 보호할 필요가 없는 범법자인 사회를 문란하게 하는 다양한 범법자들은, 국가가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이 법의 형평성에 맞는 집행인 것이다. 악의적으로 국가와 사회를 혼란하게 하여 국가의 장래를 위태롭게 한 범법자는 성폭행자와 같이 신상공개와 고지를 반드시 해야 형평성에 맞는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해결의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점은 사형제도 폐지의 기본정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범법자에 대한 응분(應分)의 처벌은 있어야겠지만 생사를 결정할 정도의 중벌(重罰)이 되면, 재범(再犯)과 흉악범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범법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사회여건의 조성이 되어야 하고, 올바른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학력이 아닌 경력과 재능이 대접받고 적성에 맞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는 사회의 기반조성이 되어야 하고, 안정된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야할 타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가치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사회의 주체들이 많이 생겨야 안정된 사회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動力)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선행(先行) 되어야 할 것은, 올바르고 정확한 지식과 극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식과 정상적인 언행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각자가 현상 속에 깔린 내재적 요인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과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퇴행적(退行的)인 역사관을 갖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거시적 안목과 사관을 갖추는데 최선을 다하는 국민이 되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에서 10위를 넘나드는 경제 대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병리현상의 여러 측면은 매우 걱정을 넘어 위태로움을 느낄 정도이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민주주의 정체를 가진 세계의 여러 나라보다 일상생활에서 유달리 정치적 관심과 논리가 논쟁의 핵심이 되는 나라는 드물다. 그런데 그런 논쟁의 기초 이론과 지식에는 우려할 정도의 표피적(表皮的)이거나 무지(無知)에 가까워 논쟁의 핵심이 사라져 버린, 진흙탕 싸움일 뿐이라는 점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진실(眞實)과 허상(虛想)에서 헤매는 우리의 상식이,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여러 여건을 갖추었는데도 모든 사회적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피상적(皮相的)인 지식과 무지에서 오는 비판과 갈구(渴求)가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국민총생산인 GNP가 4만 달러 전후인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사회복지를, 이제야 2만 달러를 겨우 넘은 국가의 국민이, 4만 달러 전후인 국가와 대등한 사회복지를 요구한다면 누가 이것을 상식적이며, 정상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나라가 한국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회민주주의가 핵심인 국가에서 사회복지의 기본정책이 성공한 서유럽 국가에서는 의료비와 대학까지의 교육비가 무료인 나라들이 있다. 이런 사회복지정책을 쓸 수 있는 나라는, 우리보다 담세율(擔稅率)이 두 배 가까이 되고 면세자(免稅者)가 훨씬 적다. 그러므로 사회복지 재정이 확보될 수 있는 여건이 오랜 시간동안에 확보되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담세율이 매우 낮고, 납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국민인, 면세자가 약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면세자 비율이 50%가 넘는 다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결격사유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세계에서 10위를 넘나드는 경제 대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경재정책의 잘, 잘못을 떠나 기적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유럽과 같은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우리의 경제현실에서 특별한 재정확보가 확정될 수 없는 여건에서의 서유럽 수준의 사회복지 혜택을 요구한 다면, 서유럽 수준의 담세율(擔稅率)과 약 20% 미만의 면세자(免稅者)가 확보되어야 하는 데, 이것은 정부의 몫이 아니라 세금을 부담해야 할 국민의 몫인 것이다. 이것이 진실인데도 막무가내 식으로 사회복지와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여론에 밀려, 재정확보 없이 장기적인 대안이 없이, 사회복지와 반값 등록금을 정당정치를 핵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정당이 정권유지 또는 교체를 위하여 정상적인 논리와 상식을 벗어나 인기영합주의로 국민에게 약속한다면 정당과 국민이 공멸(共滅)하는 망발(妄發)이며, 창피스러운 탐욕(貪慾)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로 나라의 발전을 막는 다면 GNP 4만 달러는 언제 달성하겠다는 것인가? 다수의 국민들이 서유럽 수준의 담세율(擔稅率)과 약 20% 미만의 면세자(免稅者)로 축소하는데 동의하며, 자발적으로 복지재정확보에 협력하겠다고 당당히 약속하여 자진납세하고, 서유럽 수준의 사회복지를 요구하는 것이 상식이고 정상이며 이로 인하여 국가와 국민 간에, 사회와 대척(對蹠)하고 있는 국민간의 갈등은 자연히 해소되어, 사람답게 대접받으며 ‘품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미래의 나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지금 한국사회가 앓고 있는 병리현상들을, 천도교는 어떻게 이해하며 어떤 해결책이 있는지 깊이 생각하여, 도탄(塗炭)에 빠져 생사를 헤매고 있는 함지사지 출생(陷之死地 出生)들을 지상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주체적인 새 인간이 되었으면 한다.
주(註) 02; 국민총생산(國民總生産; Gross National Product, 줄여서 GNP)- 일정 기간에 한 나라의 국민경제 내에서 농업·공업·서비스업 등 생산물(서비스를 포함)을 그 때의 시장가격으로 합계한 것이다. 결국 한 나라가 일정 기간에 생산하고 분배하고 지출한 재화 및 서비스의 총액이 국민총생산이다.
오늘날 국민총생산은 한 나라의 경제활동수준을 가늠하는 데 가장 알맞은 지표로 사용되고 있다. 보통은 1년을 단위로 하지만, 분기별로 3개월 또는 6개월 단위의 단기 GNP를 작성하기도 한다. 곧 (빵의 가격×빵의 수량)+(사과의 가격×사과의 수량)+……와 같이 모든 최종 생산물의 수량에 그 가격을 곱하여 합산한 것이다. 최종 생산물은 빵, 사과 같은 재화나 이발, 수송 등의 용역 또는 서비스를 가리킨다. 이중계산을 피하기 위해 중간투입액(원료비, 반 제품비, 보조 원료비) 등은 계상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 나라의 국민이 일정기간에 산출한 재화와 용역을 시장가격으로 계상한 총액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우리 국민이 외국에서 단기간 일하여 생산한 것은 우리나라의 GNP에 포함되고, 외국인이 우리나라에서 단기간 일하여 생산한 것은 우리의 GNP에 포함되지 않는다. 시장가격으로 평가된 이 GNP가 명목 국민 총생산이며, 시장가격은 매년 변동하기 때문에 다른 해와 비교하기 위해 물가변동을 감안한 디플레이터(이 경우는 물가지수)로 수정하여 실질 국민 총생산을 산정하게 된다. 재화, 서비스의 생산액은 한번만 계상(計上)해야 하는데 2중으로 계산될 우려가 있다. 이와 같은 최종 제품에 포함되는 원자재비 등 중간 생산물은 제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국민총생산에서 실질자본의 감가 상각액을 공제한 것이 국민 순생산(NNP; net national product)에 해당한다. 이것은 새로 생산된 가치, 결국 부가가치의 합계와 대등하다. 신문 등 매스컴에서 국민순생산보다도 국민총생산이 많이 쓰인다. 이것은 국민총생산이 객관적인 시장가격 평가보다 정확한 산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국민총생산은 일국의 경제 규모를 재는 척도라 할 수 있다./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종합.
주(註) 03; 국내 총생산(國內總生産, Gross Domestic Product ; GDP)은 일정 기간 동안 한 국가에서 생산된 재화와 용역의 시장 가치를 합한 것을 의미하며 보통 1년을 기준으로 측정한다. 1980년대까지는 한 나라의 경제규모 등을 나타내는 국민소득의 지표로 국민 총생산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국내에 거주하는 국민의 실제적인 복지를 측정하는 데에는 GDP가 더 적합하다는 의식하에 지금은 GDP가 널리 쓰이고 있다. 국내 총생산은 소득이 소비(저축은 예비소비)량이나 생산량과 같다는 국민 소득 삼면 등가의 법칙에 입각하여 구한다. GDP를 구하는 데에는 다음 세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1. 최종 생산물의 가치의 합: 모든 최종 생산물의 가치를 합한 것으로 중간재의 가치는 고려하지 않는다.
2. 부가 가치의 총액의 합: 각 생산단계별로 얻을 수 있는 부가가치의 합을 구하는 방법이다.
3. 총 생산물의 가치의 합 - 중간재 가치의 합: 거의 쓰이지 않는다.
한계국내 총생산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갖게 된다.
시장을 통하지 않고 거래되는 재화와 용역(마약 등의 지하 경제)은 국내 총생산 계산에서 제외된다.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파괴나 재해 등은 고려하지 못하며, 총량 개념이기 때문에 소득 분배 상황을 보여 주지 못하고 수요를 고려하지 않은 초과 생산 등으로 수치가 부풀려질 수 있다. /위키 백과사전 종합.
주(註) 04; 국민 총소득(Gross National Income; GNI)은 생산 활동을 통해 획득한 소득의 실질구매력을 반영하는 소득지표이다. 이를 구하기 위해서는 국내 총소득에 국외에서 순수하게 벌어들인 소득을 더하면 된다. 경제여건의 변화로 생산을 통해 벌어들인 소득의 구매력도 급변하므로 한 나라의 경제력을 측정하기 위해서는 생산측면뿐만 아니라 교역조건을 감안한 구매력도 따로 산정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도입됐다. /위키 백과사전 종합.
주(註) 05; 도탄(塗炭)- 진구렁이나 활활 타는 숯불위에 올라선 것처럼, 삶이 매우 힘들고 고통스러운 상태와 세상을 의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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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註) 06; 함지사지 출생(陷之死地 出生)- 죽을 것 같은 혼란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 도저히 살아날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킴.
2.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의 진실(眞實)과 허상(虛像).
상식(常識; common sense./ practical sense,/ mother wit)이란, 국어사전에 기술한 내용에 따르면 ‘일반적인 사람이 다 가지고 있거나 가지고 있어야 할 지식이나 판단력’이라 명시(明示)하고 있다. 위키 백과사전에서는 ‘사회의 구성원이 공유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가치관, 지식, 판단력’을 말한다. 하고 대의어(對意語/反對語)는 비상식(非常識)으로, 사회에 따라서 상식이 다르기 때문에, 어느 사회의 상식이 다른 사회의 비상식이 되는 경우도 있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외에도 사회적 현상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역사적 흐름에 따라, 상식이 비상식이 되는 경우와 비상식이 상식이 되는 경우가 흔히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사회적 가치의 변동은, 상위문화가 하위문화로 전이(轉移)하거나 동, 서양의 문화가 시공을 초월하여 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문화지체(文化遲滯)가 원인이 되어 변동할 수도 있고, 변화가 지체될 수도 있다. 비상식이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는 2012년의 한국에서는 가치의 충돌과 혼란이 미래를 망칠 수 있다는 우려를 갖게 하고 있다.
주(註) 00; 문화지체(文化遲滯; cultural lag)또는 문화낙후(文化落後) - 미국의 사회학자 오그번(William Fielding Ogburn)이 “사회변동론; Social Change. 1922)”에서 오그번은 문화를 급속히 발전하는 기술을 포함한 물질문화(material culture)와 비교적 완만하게 변하는가치관, 신념, 규범, 제도 및 사회적 상호 작용 양식 등을 포함하는 비물질적인 적응적 문화(adaptive culture)로 구분하고, 기술 변화의 급속도와 양적인 누적으로 인하여 비물질 문화의 변화와 적응은 항상 물질문화의 변화의 변동속도의 차이에서 생겨나는 사회적 부조화 현상을, 또는 발달의 속도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문화지체라 하였다. 그리고 현존하는 여러 문화요소들을 새롭게 결합하는 것이 문화발전의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화요소들의 결합은 문화의 한 측면에 직접 영향을 미치지만 또다시 다른 문화영역에의 적응이 필요하게 된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적응이 지연되는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문화지체라는 용어를 도입했다. 역사의 장기적 과정에서는 문화지체현상이 파악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지만, 특정 시기에는 사회를 완전히 붕괴시킬 정도로 심각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도 했다. 예를 들면 산업생산과정의 중요한 혁신이 경제·정부, 그리고 한 국가의 사회철학을 혼란에 빠뜨릴 수 있으며, 이러한 혼란으로부터 새로운 균형이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에는 물질적인 것과 비물질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데, 문화변동의 속도와 관련해서 본다면 이 2가지 영역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함께 변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나, 실제로는 물질적인 영역에서의 변화가 앞서기 때문에 정치·경제·종교·윤리·행동양식 등 이와 관련된 여러 가지 제도나 가치관의 변화가 이를 따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빗물질 문화가 물질문화의 변동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 심각한 사회적 부조화현상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문화란 지식, 신앙, 예술, 도덕, 법률, 관습, 기타 사회 성원으로서의 인간에 의하여 획득된 모든 능력이나 습성의 복합적 전체이다. 문화는 역사적으로 동시대를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커뮤니케이션을 가능하게 만드는 집합적 기억을 의미한다. 문화가 사회적 집단에 의해 실현되는 생활양식이라면 문화는 사회에서 살고 있는 개인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세상을 인식하느냐 하는 것을 교시한다. 따라서 개인은 문화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개인은 문화의 전달성에 의하여 성장하며 사회의 문화를 습득하지만 개인은 문화를 습득함과 동시에 문화를 변동시키고 문화를 이끌어 가기도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시시각각 변하는 사회이다.
문화지체 또는 문화낙후는 상위문화가 하위문화에로 전이(轉移)되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문화의 전이는 동, 서양의 지역 간에, 국가와 국가간에, 사회와 사회 간에, 개인과 개인 간에, 시공(時空)을 초월(超越)하여 항시(恒時) 일어나는 문화현상이라 할 수 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기타 자료에서 보완정리.
주(註) 00; 다노미(danomi) - 다문화와 아노미(anomie, 무질서, 혼란)의 합성어로 다문화 사회가 진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와 인식이 그에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 현상을 말한다.
우리가 상식에 대하여 착각(錯覺)하고 있는 이유도, 위와 같은 시공간적(視空間的)으로 그 때 그 때 의미와 내용이 변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상식이 진리처럼 원래부터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믿고 있는 잘못된 시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지금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것들의 대부분은, 그 어느 사회나 시대에서는 비상식이었던 것을 누군가의 노력과 희생으로 상식이 된 것이며, 지금의 비상식도 위와 같이 상식이 될 수도 있으며 지금의 상식도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 비상식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그리고 나의 상식은 그들에겐 비상식일 수 있고, 그들의 상식이 나에겐 비상식일 뿐만 아니라 그들은 비정상적인 인간일 수도 있다. 상식과 비상식은 항상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는 점을 생각해 함부로 타인의 평가기준으로 잣대를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매우 자의적(恣意的)이며 몰상식한 망발(妄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논리의 선상에서 ‘인간이 평등하다’는 명언(名言)도 우리 사회에서는 상식이지만, 1, 2세기만 되돌아가도 평등할 수가 없는 상하(上下)가 있는 세상이었다. 지금도 상당부분에서 평등이 아닌 것이다. 인생이란 근원적으로 불평등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혈통인 가문에서부터, 성공한 집안, 명예로운 집안, 존경받는 집안, 학력이 높은 집안, 인맥이 좋은 집안 등등에서 불평등하다. 그래서 더 평등하고 싶은 것이다. 생존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어려워 평등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개개인의 능력의 차이와 경쟁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평등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양에서는 18세기 말엽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설파(說破)한 토머스 페인의 “상식(常識; common sense.)”이라는 책을 1776년 1월 10일에 발간한 이후부터 어떤 것이 상식이며 상식적인 가치관이 무엇인가를 서구사회로부터 논의되었고, “상식”이란 책이 발간된 날을 상식이 세상에 선포된 날로 오래도록 기억되어 오고 있다.
앞에서도 지적하여 설명하였던 상식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요약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의 상식의 상당 부분은 과거 어느 시대에는 비상식었던 것들이며, 지금에 상식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들은 시간이 흘러 미래의 어느 시기에는 비상식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정말 상식이 진리인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상식과 원칙이 통하는 사회’ 라는 절규에 가까운 희망이라 할지라도 더러는 일시적으로는 이루어질 수 있으나 내용과 주제에 따라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허망한 꿈일 수 있는 희망이라 할 수 있다. 상반된 주장을 갖고 극단적으로 상호 공박(攻駁)을 하며 생사(生死)를 거는 개인이나 집단에서의 주장들은, 어느 쪽이 상식이고 비상식인가? 명쾌(明快)하게 결판을 낼 수 있는 이론적 배경이 있을 수 있을까? 란 물음에 대한 답은 없다. 이다. 서로가 주장하고 얻고 싶은 입장에서, 서로는 상식이고 비상식인 것이다. 상황에 따라 선택자의 자의(恣意)에 던져진 가치(價値)의 혼란(混亂)일 뿐이다.
가치의 혼란이라는 것은, 사회와 역사 현실의 변동으로 상식과 비상식은 항상 변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당수의 사람들은 급격한 사회변동 속에서 만물(萬物)의 가치가 유동적(流動的)이어서 그 가치가 혼동될 때 상식과 비상식을 잘못 파악하여 삶의 방향 설정에 혼란을 자초하는 것이 일반적인 논리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가치판단을 잘못하여 선택한 삶은 불행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창조론(創造論)과 진화론(進化論), 천동설(天動說)과 지동설(地動說), 상투(上頭)와 단발(斷髮), 테러리스트(terrorist)와 독립투사(獨立鬪士), 마녀재판(魔女裁判) 등이 상식과 비상식의 싸움으로 각각의 흐름으로 상식과 비상식으로 전환(轉換)된 대표적인 사례(事例)들이라 할 수 있다. 상식이 영원불변하는 진리일 수 있을까? 에 대한 답은, 여러분의 지식과 상식의 정도와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마음속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수많은 병리현상(病理現狀) 중에서, 국가의 장래가 매우 걱정되는 현상의 하나는, 어떤 현상을 부정(否定)하고 비난(非難)하면서 자신의 의도(意圖)를 철저히 감춘 채, 대중들의 관심사들을 선정(選定)하여, 다른 병리현상을 미사여구(美辭麗句)와 정교(精巧)한 논리로 교묘(巧妙)하게 제시(提示)하고 설명한다는 점이다. 이런 행위의 가치기준(價値基準)을, 우리 사회와 인간들을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으로 구분하여 상식에서 명분(名分)을 찾는다는 점으로 매우 위험한 발상(發想)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사회는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이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구분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단순한 사회가 아니라, 다양한 현상들이 각각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 다원화 사회인 것이다. 이 가치들은 우열(優劣)이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가치일 뿐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은, 다양한 가치를 내포한 다원화 사회라는 매우 복잡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어 다양한 가치의 충돌로 인하여 사회의 혼란을 자초할 위험성이 있을 수 있다는 데는 이의가 없을 것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예로 들기에 매우 적합한, 다양한 성격의 종교들이 공존과 배척하는 현상, 여기에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내재되어 있는 민속 또는 무속신앙) 사회에서 현실의 병리현상들을 ‘상식(常識)과 비상식(非常識)’이라는 이분법적(二分法的) 구분방법으로 해석(解釋)하는 지성(知性)이 있어 이런 논리가 집단지성(集團知性)이 되어 사회현상을 개혁(改革), 혁신(革新)하려 한다면, 매우 무모한 행동으로 우리의 미래는 암담(暗澹)해질 것이 분명하다고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왜냐하면 다원화(多元化) 사회를 이해하지 못한 다중 성격자(多重性格者 또는 人格者)들의 반사회성 인격장애(反社會性 人格障碍; antisocial personality disorder)를 드러내는 내재(內在)된 싸이코 패스(psychopath)의 하나의 현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언행의 저변에 깔려있는 사상적 배경에는 유전적(遺傳的)이며, 문화적(文化的)이고 전형적(典型的)인 한 현상이라 분류할 수 있을 수 있는 ‘흑백논리(黑白論理)와 극단적(極端的)인 판단(判斷)과 선택(選擇)과 언행(言行)’이라는 특이한 사고방식이 있다. 세상만사(世上萬事)를 선악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수용하며, ‘좋아서 죽겠다. 미워서 죽겠다.’ ‘배불러 죽겠다, 배고파 죽겠다,’ ‘더워서 죽겠다. 추워서 죽겠다,’ ‘너 그냥 안 둬, 너 죽어, 죽여 버리겠어,’ 등의 상반된 현상에 대하여 ‘죽겠다’ ‘죽이겠다.’ 는 극단적인 판단과 선택과 언행이, 문제의 실상(實相)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오류(誤謬)를 범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다원화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병리현상 중에 하나가 타인(他人/ 남)과 사회(社會)와의 단절(斷絶)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을 배려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생존(生存), 또는 이익만을 추구하기 때문에 기피인물(忌避人物)이 된 왕따의 대상(對象)이 되는 인물들이다. 선악(善惡)의 이분법적 사고(二分法的 思考)에서 벗어나지 못한 비이성적(非理性的)인 인간은, 다원주의의 사상에서 생성(生成)되고 있는 다원화 사회(多元化 社會)라는 매우 복잡(複雜)한 성격(性格)을 지닌 구조적(構造的) 사회(社會)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양(多樣)한 가치(價値)는 우열(優劣)이 없이 대등한 가치라는 것과 선악(善惡)의 개념(槪念)으로는 이해될 수 없으며, 만사(萬事)의 판단기준(判斷基準)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과 자기와 밀접한 관계로 맺어진 혈족(血族)만이(최소 단위는 가족, 또는 門中), 사회에서는 작게는 자기가 소속된 부서(部署), 확대하여 회사(會社) 중심이 되어 자신들만의 생존(生存), 또는 이익(利益)만을 추구(追求)하기 위하여, 이해가 상반되는 개인이나 집단과 더불어 어우러져 살아가야 한다는 공존공영(共存共營)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국외자(局外者)나 이탈자(離脫者) 또는 소속감(所屬感)이 없는 방관자(傍觀者)가 되어 사회(社會)와 단절(斷絶)된다. 일부(一部)는 자신들만의 생존(生存), 또는 이익만을 추구하기 위하여 타인(他人)과 사회와의 소통(疏通)을 거부(拒否)하여 단절(斷絶)을 자초(自招)하기도 한다.
/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1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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