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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에게나 농락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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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579회   작성일Date 12-08-31 22:39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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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10)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고등교육은 일본 제국주의의 영향을 받아 도입되었다. 이 기간에는 주로 전문학교를 중심으로 고등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엘리트 중심주의와 국가통제주의라는 특성이 형성되었다. 고등교육이 국가의 최고 엘리트를 양성한 것은 근대 이전부터 시작되었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의 엘리트주의는 일제가 고등교육을 억제하고 극히 소수의 조선인에게만 문호를 개방했던 정책에 원인이 있다. 이와 같은 정책은 식민통치 초기에 전문학교를 최고교육기관으로 하고, 수업연한을 12년으로 제한한 정책에서 잘 나타난다.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어 외면적으로 고등교육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이 학교에는 주로 일본인이 다녔고 조선인은 몇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 말기까지 계속되었으며, 고등교육의 기회가 확대되어 엘리트주의를 탈피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이후이다. 1946년 11월 14일에 발족한 '조선교육심의회'의 제8분과 고등교육위원회는 미국식 6-3-3-4제를 기간학제로 하고, 대학을 단과대학·종합대학·사범대학 등으로 구분하는 기초를 마련했다. 이러한 제도적 개편과 함께 일제시대에는 제한되었던 고등교육에 대한 요구가 폭발하여 대학만 하더라도 해방 전에는 1개밖에 없었던 대학이 미군정 3년 동안 27개로 늘어났고, 1992년 현재 145개 대학에 106만 8,159명(1992년도판 〈한국대학연감〉)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등교육이 예전처럼 엘리트 중심이 아니라 점차 대중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며, 고등교육의 대중화는 대학의 자율성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고등교육기관은 전문대학·교육대학과 4년제 대학, 대학원 등 정규 고등교육기관만이 아니라, 특수대학·방송통신대학·개방대학·각종학교 등 다양한 유형의 고등교육기관이 섞여 있어서 국가가 일률적으로 대학을 관리하던 방식은 더이상 효과를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대학입시정책에서 대학의 자율적 선발권이 높아졌고 다양한 대학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정책으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현재 고등교육과정은 교육기관의 특성에 따라 교육연한, 교육내용·자격 등에서 차이가 있다. 전문대학은 전문 기술인력을 단기간에 양성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어서 교육연한이 2~3년으로 짧고(졸업이수학점은 80학점이며 교양교과의 학점은 전체의 20~30%로 규정), 교육대학과 사범대학은 교원양성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교육연한은 일반대학과 마찬가지로 4년이지만 교육과정에서 교직과정이 강조된다. 일반대학의 경우도 수업연한이 대부분 4년이나 의과대학만이 6년으로 되어 있다. 이러한 차이는 학위에서도 볼 수 있는데, 학사학위를 얻기 위해서는 교육대학 이상의 교육기관에서 공부해야 하며, 석사 및 박사 학위는 대학원에 진학하여 논문자격시험과 논문심사를 거쳐 수여된다.

     

    그 밖의 나라들은 영향력 있는 국가의 교육제도를 따라 시행했지만 항상 적절한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문제는 많은 개발도상국들은 이론을 가르치는 대학교보다는 기술을 가르치는 전문학교를 훨씬 더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그런 전문학교라야 그들의 특수한 문제들에 대처할 전문가와 과학자들을 양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언어가 흔히 문제가 된다. 서양에서 개발된 기술 가운데는 자국의 언어에 없는 어휘를 요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목적으로 영어의 독해술이 널리 개발되고 있다.

     

    현대 고등교육의 추세는 세계 각국이 각종 교육제도의 장점을 기꺼이 배우려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북아메리카의 학교들은 유럽의 제도에서 볼 수 있는 중앙관서의 통제를 통해서 마련되는 교육기준의 통일성이 없다는 점이 흔히 문제가 된다. 이 문제점은 자격증을 부여하는 전국적인 통합기구들에 의해 해결되고 있다. 유럽의 대학들은 교과과정의 개발에서 자율화를 계속 유지해 왔으며, 고등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인구의 폭을 넓히기 위한 조치를 취해왔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전의 고등교육통제정책에서 고등교육기관의 자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고등교육에 대한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교육기관과 정원을 늘리는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과 국어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들을 재정리한 것임

     

    오늘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여러 가지 갈등 구조 속에는 교육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무시(無視)못할 정도로 가정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크다. 더욱이나 한국사회는 ‘학벌을 크게 중요시 하는 한국 문화의 독특성’을 여러 분야에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사회적 갈등이 더 증폭(增幅)되고 있는 실정이다. 공교육(公敎育)이 앞장서서 교육전반(敎育全般)에서 청소년을 경쟁(競爭)의 희생자(犧牲者)로 추락(墜落)시키고 있다고 항변(抗辯)하기도 하면서, 우리나라의 교육을 맹수(猛獸)를 기르는 동물(動物)사육장(飼育場)인 것처럼, 교육 전문가라는 사람들과 많은 지식인(知識人)들이 강변(强辯)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교육이 ‘아름다운 인간성을 가진 사람’으로 키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면서, 왜 그들의 대다수는 자식들을 외국유학을 보내며, 국내의 우수한 대학을 선호하는가? 많은 사람들은 자식들을 왜 대학을 진학시키려 하며, 대학을 가서 사회가 요구하는 경쟁력(競爭力)을 키우라고 왜 강요(强要)하고 종용(慫慂)하고 있는가? 마치 고가(高價)로 팔릴 우수상품(優秀商品) 또는 명품(名品)을 만들어 시장에서 우수한 경쟁력으로 무장(武裝)하고 경쟁하려 하는가? 왜 우수 기업(企業)과 고급(高級) 공무원(公務員)과 수익성(收益性)이 높은 직종(職種)을 선택(選擇)하고 있는가? 지금의 교육에 대하여 맹공(猛攻)하고 있는 그들은, 혹시 후배(後輩) 경쟁자(競爭者)를 아예 싹을 잘라 없애버리려는 야비(野卑)한 의도(意圖)에서 출발한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이 가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인간의 삶이 적자생존(適者生存)을 통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이라면, 매우 효과적(效果的)이고 강력(强力)한 경쟁력(競爭力)을 키워주는 것이 교육의 목표가 아닐까 한다. 사물(事物)과 역사(歷史)에 대한 정당(正當)한 판단력(判斷力)이 없고 미래(未來)를 내다보는 안목(眼目)이 없으며 매우 나약(懦弱)하고 생존(生存) 능력(能力)이 결여(缺如)되어 인류사회의 국외자(局外者)나 소외자(疏外者)가 되거나 방관자(傍觀者) 또는 탈락자(脫落者)가 되고 있는 젊은 군상(群像)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혹시 기득권(旣得權)을 가진 계층(階層)들이, 경쟁사회에서 아예 내쫓아 버릴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아닌지가 매우 궁금하다. 이런 주장(主張)이 망발(妄發)이라 항변(抗辯)하고 싶다면, 진정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어떻게 개선(改善)하거나 혁신(革新)을 할 것인지에 대한 어떤 구상(構想)을 하고 있는지 현명(賢明)한 답을 주었으면 한다. 인간과 만물이 살고 실존하고 있는 세상은, 생사(生死)와 생장(生長)과 소멸(消滅)의 세계라는 양면성(兩面性) 내지 다양성(多樣性)을 지닌 세계이기 때문에 취사선택(取捨選擇)은, 인간은 물론 만물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필수적(必須的)이며 불가항력적(不可抗力的)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資本主義) 사회의 극단적(極端的)인 병폐(病弊)라고도 하고, 불평등(不平等)의 근원적(根源的)인 원인이라고도 하며, 인간본성(人間本性)의 한 단면(斷面)이라고도 할 수 있는 물질만능주의(物質萬能主義 또는 黃金萬能主義)와 시장만능주의(市場萬能主義), 약육강식(弱肉强食), 승자독식(勝者獨食)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묻고 싶다. 혹시 나는 이것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순박(淳朴)한 인성(人性)을 가진 참다운 인간(眞人)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나는 이 국가와 사회에서 내가 누리고 가질 수 있는 것만 챙기면 되지 내 알 바가 아니다. 국가나 사회의 병리현상에서 촉발(促發)되는 복잡(複雜)하고 손익(損益)이 상반(相反)되는 문제에 대한 해결에 내가 참여할 필요도 없고, 그 고통스러운 해결에 내 인생을 낭비할 수 없다고 항변(抗辯)할 것인가.

     

    주(註) 00-시장만능주의(市場萬能主義); 시장만능주의라는 용어와 이론을 제시한 시장만능주의를 대표하는 학자로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는 “시장만능주의의 이론적 기원”을 저술하였다. 그는 시장을 문명의 진화가 만들어낸 ‘자생적 질서’로 규정하고, 이 자생적 질서가 어떠한 인간의 이성적이고 의도적인 행위의 결과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을 논증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하이에크의 긴 생애가 말해주듯 그의 시장이론은 단순히 경제이론이라기 보다는 철학, 과학이론, 진화론, 나아가 법 이론에 이르기까지 여러분과를 넘나들며 전개된다.『하이에크 해체적 읽기』에서 필자는 일견 논박 불가능해 보이는 하이에크의 이론체계에 대한 비판을 시도한다.

     

    주(註) 00-약육강식(弱肉强食);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지배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약한 자는 강한 자에게 먹히거나 지배된다. 는 뜻.

     

    주(註) 00-승자독식(勝者獨食); 경쟁에서 이긴 자가 모든 것을 차지한다는 뜻.

     

     

    하지만 시장만능주의를 주장하면서 개방화 세계화를 추구하는 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구시대(舊時代)의 인간성 상실, 가정파괴와 해체, 국가혼란, 세계의 여러 나라의 분열과 같은 혼돈(混沌)을 극복하고 인간존중, 우호협력등의 윤리로 신질서를 확립하여야 할 일이 시급한 것이다. 21세기가 당면하고 있는 인류의 불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견해들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영국의 경험주의(經驗主義) 철학의 비조(鼻祖)였던 프란시스 베이컨은 4대 우상론(偶像論), 즉 극장(劇場)의 우상, 시장(市場)의 우상. 종족(種族)의 우상, 동굴(洞窟)의 우상이 그가 주장한 내용이다. 이 우상론에서의 우상(偶像)이란 실상(實像)이 아닌 허상(虛像)을 의미하는 것으로. 객관적인 보편성에서 벗어난 자기 주관(主觀)이라고 하는 선입견(先入見)이나 편견(偏見)이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상이라는 말은 철학에서 말하는 사이비(似而非)라는 말과 일맥상통(一脈相通)하기도 한다. 가짜일수록 더 한층 진짜처럼 행동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간첩이 간첩을 위장(僞裝)하기 위해서는 애국자(愛國者)인척 해야 하듯이 말이다. 위선(僞善)이라는 가면(假面)의 탈을 쓴 인간은, 야누스(Janus)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참다운 자아(自我)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매너리즘의 동굴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날마다 자신의 삶에 활력소를 자생(自生)할 수 있는 각오와 원동력이 내면에서 솟구쳐야만 한다.

    오늘의 현대인들은 물질이라는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물질(物質)이 현상(現象)이라면 정신(精神)은 본질(本質)이다. 황금만능주의(黃金萬能主義)나 배금주의(拜金主義)는 인간의 정신을 부패(腐敗)시킬 수 있는 필요악(必要惡)일 수도 있다. 문제는 이러한 양자(兩者)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이 중시(重視)되어야하는 것은, 바로 아는데 있다. 흔히 실적주의(實績主義)로 흐르다 보면 과대보고(過大報告) 내지는 급기야 허위보고(虛僞報告)도 자행(自行)하게 된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의 행위(To do)라는 현상적 결과 보다는 사람이라는 인간 자체(To be)가 더 본질임에도 불구하고 실적지상주의로 치닫게 되다가 보면 본의(本意) 아니게 부작용이 나타나고 때로는 발전에 암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단체나 기업 또는 국가도 결국은 나름대로의 궁극적인 목표와 목적이 있게 마련이다. 아무리 목적이 좋아도 수단과 방법이 나쁘면 온전한 뜻을 이룰 수가 없다.

     

    한 사람의 생각이나 독단적인 판단에 의한 결정과 실행은 일방통행(一方通行)에 지나지 않는다. 21세기는 획일적(劃一的), 패쇠성(敗衰性)사회가 아니고 개방성(開放性)과 투명성(透明性)이란 다양성(多樣性)의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원활(圓滑)한 의사소통(意思疏通)으로 인한 쌍방통행(雙方通行)이야말로 진정한 심정공동체(心情共同體)라고 말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통합(統合)의 시너지효과가 아무리 클지라도 그것이 기대치(期待値)에 미치지 못하였을 때 발전을 위한 새로운 분산(分散)으로 갈 때에는 몇 십 배의 노력과 수고가 있어도 원상복구를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헤겔은 사물의 발전법칙을 정반합(正反合)에 의한 변증법(辨證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통일사상에서는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정분합(正分合)에 의한 수수법(授受法)을 주장하고 있다. 변증법 가운데 <양적증대의 질적 전환의 법칙>이라는 것이 있는데 사물이 처음에는 양적으로 증대할 때는 점차적(漸次的), 순차적(順次的)으로 발전하지만 질적으로 전환할 때는 돌발적(突發的) 파국적(破局的)으로 급변한다는 법칙이다. 이것의 목적은 공산주의 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합의 또는 통일사상에서는 이것에 대한 대안으로 <성상(질)과 형상(양)의 동시 균형적 발전의 법칙>을 제시하고 있다. 모순과 대립의 법칙이 아니라 조화와 상응의 법칙이라는 것이다. 통합(統合)의 목적은 질적 성장에 있고 분산의 목적은 양적인 성장에 있다고 본다면 통합과 분산의 적정선을 이루고 조화와 균형을 이룸이 진정한 성장의 동력(動力)일 것이라고 본다. 검증되지 아니한 이론과 주장이 일방적으로 자행될 때 침묵하는 다수는 통증(痛症)을 느끼기도 하고 우려(憂慮)를 금치 못하게 된다. 결과에 대한 응분의 책임을 질 줄 아는 그가 진정한 지도자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고 하고 있다.

     

    사회복지에 성공한 사례로, 스웨덴의 복지의 전모를 알아보기 위하여 위키 백과사전의 기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스웨덴은 북유럽 복지 모델의 전형으로서, 높은 수준의 복지와, 사회적 평등을 동시에 달성한 성공적 사례로 인용되어 왔다. 스웨덴 복지모델은 보편적 복지제도, 협력적 노사관계 및 성장주의적 경제정책으로 특징지어진다. 스웨덴은 높은 복지와 함께 높은 세금 부담률이 특징이며 학교, 보육, 건강, 연금, 노인 복지, 사회복지 사업 등을 국가가 거의 무상 제공하고 있다. 스웨덴의 사회 민주당은 이러한 아이디어를 사회주의(socialism)로부터 빌렸다고 한다. 하지만 최근의 스웨덴 경제가 고성장 시대를 끝냄에 따라, 재정이 압박받고 있으며 심각하고 구조적인 문제를 겪고 있다. 이에 따라 스웨덴 복지 제도도 변화를 재촉 받고 있다.

    스웨덴이 복지국가로 발달할 수 있었던 배경은 첫째로 외부 침략 같은 국방에 대한 위협이 없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은 지리적으로 유럽의 북부 변경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과 지배로부터 자국을 방어할 수 있는 지정학적 이점이 있었다. 스웨덴은 수백 년간 자국의 영토가 전쟁에 개입된 적 없는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안정적인 나라였으며 무장 중립 노선을 유지해 유럽이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전쟁에 휩쓸리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 특수기에 스웨덴 경제의 붐을 가져왔으며 이때에 쌓인 경제력이 스웨덴을 복지를 가능하게 하였다. 둘째로 인구가 적은 단일민족이었기 때문에 전 국민 복지가 가능했으며 정부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 스웨덴은 역사적으로 봉건제가 없었고 정부는 인기 영합적인 정책을 시행하는 것을 말리지 않았다. 정부는 외부의 적에 대한 침략보다 국민을 더 신경 쓸 수가 있었다. 셋째로 프로테스탄트 종교적 문화로 열심히 일하는 사회 분위기가 있었으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높은 생산성으로 나타났다.

     

    註 00; 사회복지(社會福祉; social welfare)란 국민의 생활 안정 및 공중위생, 사회 보장 제도 등 복리(福利)를 향상시키기 위해 힘쓰는 일이나 그와 관련된 정책 등을 통틀어 이르는 말. 생활 보호법, 아동 복지법, 사회 복지 사업법 따위의 법률에 기초를 둔다. 복지(福祉: welfare)는 좋은 건강, 윤택한 생활, 안락한 환경들이 어우러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사회복지학에서는 높은 삶의 질이 보장되는 것을 뜻한다. 구빈정책(救貧政策), 노동자 권익 보호와 같은 특정 집단에 대한 지원뿐만 아니라 국민 일반에게 사회 복지를 제공하는 것을 체제의 가장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로 삼는 국가를 복지국가라고 한다. 국가가 여러 제도와 기구를 통해 국민의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하는 활동을 사회보장 제도라고 한다. 대표적인 사회보장 제도에는 건강보험 제도와 같은 사회 보험과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와 같은 공공부조가 있다 이 외에 노인, 어린이, 여성, 노동자, 빈민 등 특정한 대상에 대한 복지 정책들이 있다. / 각종 백과사전과 국어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에서 발췌 요약 정리함.

     

    스웨덴은 1860년대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였다. 그러나 그 후 친시장적 개혁을 통해 자유경제, 자유기업, 그리고 자유 무역과 제한된 정부를 제도화했다. 1890년대의 스웨덴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성장률을 보인 나라였다. 이때 스웨덴의 세금 부담은 유럽 평균보다 낮았다.[6]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착실한 경제 성장을 이루어 이 시기에 완전고용 수준의 고용률에 근접함에 따라 생활수준이 크게 상승하였고, 여가시간도 증대하여 스웨덴의 황금시대라고도 불린다. 그 결과, 1950년에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하나로 성장하였다. 1950년대 중반부터 현재의 스웨덴식 복지라고 부르는 복지 모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50년대 이후 스웨덴은 고도의 복지수준을 향유하기 위해서 필요한 재원의 확보를 위해 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유도하였다. 기업에 대한 우대세제 적용, 기업집중 유도, 합병의 촉진 등 이 시기에는 산업의 경쟁력 강화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결과 1950∼60년 사이에 평균 3.4%, 1960∼70년 사이에는 4.6%의 성장을 유지하였는데 이것은 같은 기간의 미국과 영국보다 더 높은 실질 성장률이었다. 이 처럼 스웨덴의 복지는 고도성장을 바탕으로 성장의 파이를 크게 하여 그 과실을 가지고 사회복지비의 지출을 크게 하는 정책으로 특징 지워진다.

    스웨덴 식 복지의 성공요인은 경쟁력이 있는 산업을 육성하고 안정적인 성장률을 바탕으로 과실을 고루 분배한 것이다. 스웨덴의 경제 정책은 자유주의를 바탕으로 산업을 경쟁에 개방 노출시켜 저생산 부문을 도태시킴으로써 산업의 효율화를 이루었다. 이러한 개방 정책 이외에도 도태된 분야의 기업과 노동자들을 적극적인 고용정책으로 발전가능성과 생산성이 높은 산업으로 이동시켜 실업 불안을 제거했다. 인구가 적어서 국내 시장이 협소했기 때문에 기업들의 적극적인 해외 진출을 장려했다. 더불어 기술혁신에도 적극적어서 산업부문의 자동화 전환 비율도 높았다. 이는 노사관계가 협조적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막대한 연구개발비로 창의적인 발명이 이루어져 스웨덴의 공업 발전을 뒷받침했다.

     

    스웨덴에서는 나라가 빈곤층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광범위하고 세심한 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적 배려를 한다. 노동쟁의에서도 노사분쟁사항은 국가의 개입함이 없이 노동조합과 회사의 자율적 협의에 의해 해결토록 하고, 노동자를 경영의 동반자로 존중하는 공동경영을 도입함으로써 사회적 안정을 도모한다. 이러한 공동경영은 노동자가 경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때문에 경영의 투명성에 기여하기도 한다. 또 기업의 성장촉진을 위한 낮은 법인세 정책과 노동자의 고용증대를 위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을 추진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촉진하고 있다. 스웨덴의 복지정책의 분야는 기본 연금, 노후 연금, 장애자 연금, 의료 보장, 실업 보험에 집중되어 있다. 우리의 현실과 매우 멀다. 충분한 준비도 없고 재정확보도 어려운 시점에서 여론에 밀려 인기영합주의에 족쇄로 무상 사회복지라는 정책을 남발하고 있어 그로인한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발생되고 있는 엔트로피(entropy)로 사회의 기반과 시대정신을 왜곡시켜 사회전반의 아노미(anomy)현상이 일어나고 이로 인한 사회 붕괴를 초래하고 있어 사회의 기저(基底)와 중심 가치를 붕괴(崩壞)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註 00; 아노미(anomy. 프랑스어로는 anomie)- 아노미란 한 사회에 있어서 공통된 가치관이 붕괴되고 목적의식이나 이상이 상실됨에 따라 사회 병리학의 기본 개념 가운데 하나로, 신경증, 비행, 범죄, 자살 등 사회나 개인에게 나타나는 불안정 또는 사회적 무질서(혼돈 상태)를 의미한다. 이 말은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자살 연구에서 유래한다. anomi 라고도 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행동을 규제하는 사회적 기준의 붕괴로 인해 나타나는 자살의 한 형태, 곧 아노미적 자살이 있다고 믿었다. 한 사회체제가 아노미 상태에 있을 때는 공통의 가치관과 의미가 더 이상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더구나 새로운 가치관이나 의미도 나타나지 않는 상태에서 대다수 사회구성원들은 무기력, 목적의식의 결여, 감정의 공허함과 절망 등을 경험하게 된다. 따라서 무엇이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기준이 없어지게 되므로 열심히 일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기까지 한다. 또 뒤르켐은 아노미현상을 사회 병리학의 기본 개념 가운데 하나로 보아, 신경증, 비행(非行), 범죄, 자살 등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또 전통적인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가정의 기능이 약화되자 아노미 현상이 사회 전반에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다. 심리적으로는 불안, 자기 상실감, 무력감 등으로 인한 부적응 현상이 일어나 직장에서 쫓겨나면서 특히 대인 관계에서 심한 아노미 현상을 보이게 된다.

    미국의 로버트 K. 머턴은 아노미(무질서 상태)의 원인을 연구했는데, 그에 의하면 이러한 현상은 자신의 문화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정당한 방법을 갖고 있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장 심각하게 나타난다고 하였다. 목적달성이 매우 중요해졌기 때문에 그 사회의 기준에 의해서 받아들여지는 제도화된 방법, 수단들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면 그들은 비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게 된다. 이와 같이 수단보다 목적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사회통제구조를 붕괴시키는 아노미현상이 일어난다. 고 했다. 예를 들면 사회는 사회구성원들에게 부를 획득하도록 강요하고 이를 위한 부당한 방식들을 제공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규범을 무시하게 된다.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는 구성원 자신의 이익추구와 자신에게 가해지는 제재에 대한 공포가 유일한 통제기제가 된다. 따라서 사회적 행동은 예측할 수 없게 되며 이러한 아노미 현상으로 인해 비행, 범죄, 자살이 나타난다. 고 해석하고 있다.

    뒤르켐의 아노미 개념이 사회나 사회집단의 상대적인 무규범 상황을 의미하고 있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 개념을 개인 수준의 상태에까지 적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심리학적인 적용을 통해서 아노미는 기준, 일관성, 의무감 상실 및 모든 사회적 연대를 거부하는 개인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개인은 사회의 지도자가 자신들의 요구에는 관심이 없으며, 사회는 기본적으로 예측할 수 없고 질서가 상실되어 있으며, 목적은 실현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면 그들은 무력감을 느끼며 동료들조차 자신들이 의지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고 설명하고 있다. / 각종 대백과사전과 국어사전을 바탕으로 관련 자료에서 발췌 요약 종합 정리함.

     

    註 00; 패닉(pan·ic)- 국어와 영어사전에 의하면. 패닉의 의미는, 공황상태(恐慌狀態), 공포, 허둥대기, 매우 당황함, 제정신을 잃게 하는 상황 또는 분위기를 말한다고 했다. 유의어(類義語) cf. TERROR.

     

    註 00; 엔트로피(entropy)- 경제 사회적 용어로 에너지의 재활용은 할 수 없다는 의미로 모든 정책에서 발생되는 쓸모없으며, 해독을 가져오는 결과를 말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국어사전에서는 물리학 용어로, 열역학(熱力學) 제 2법칙에서, 물질의 상태를 나타내는 양의 한 가지 또는 물질을 구성하는 입자의 배열이나 질서의 정도를 나타낸다. 하고 정보 이론에서는 정보의 불확실성을 야기하는 무작위성(無作爲性) 또는 무조직성(無組織性)을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일은 질서로부터 얻어지기 때문에 엔트로피의 양은 그 계의 무질서나 무작위의 정도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떤 물리계 내에서 일하는 데 사용할 수 없는 에너지를 나타내는 하나의 척도이기도 하다. 다른 설명에 의하면 열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것이며, 우주의 모든 것은 질서로부터 무질서로 향해 간다는 것이다. 엔트로피(entropy)는 다른 측면에서 시간의 개념으로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으로, 시간의 흐름을 정지시킬 수는 없어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은 화학과 물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열역학 제2법칙’, 즉 ‘엔트로피(Entropy) 법칙’ 때문이다. 이는 모든 변화는 반드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쪽으로 진행된다는 법칙이다. 열은 반드시 높은 온도에서 낮은 온도로 흘러야만 된다. 엔트로피라는 개념은 1850년에 독일의 물리학자인 루돌프 클라우지우스에 의해서 처음 제안되었는데 때때로 열역학 제2법칙의 형태로 표현된다. 이 법칙에 따르면 고온과 저온의 기체가 저절로 혼합될 때나 기체가 진공내로 확산하여 갈 때 또는 연료가 연소할 때와 같은 비가역 과정에서는 엔트로피는 증가한다. 모든 자발적인 반응은 비가역적이다. 따라서 우주의 엔트로피는 증가하고 있다. 즉 역학적인 일로 변환할 수 있는 에너지가 점차 감소하고 있는데 이 때문에 우주가 '쇠퇴하고 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회는 양극화현상이 더 심해지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의 부의 편중과 경제력 집중은 엔트로피 법칙을 무시하고 진행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부질없는 탐욕에서 비롯한 것으로 사실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옛날의 봉건사회로 부터 오늘의 민주사회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온 것이다. 사실 국가가 높은 세금을 거두어 완벽한 복지 정책을 수행하려면 거두어들이고 나누어 주는 일에 부수적인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또한 공정성의 시비도 생긴다. 세금을 내는 사람은 부담스럽고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도 고마움을 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좀 더 가진 사람이 못 가진 사람에게 자발적으로 직접 나눈다면 나누는 기쁨과 받는 감사가 동시에 생기게 되며, 그런 사회는 사랑과 행복이 넘칠 것이다.

    에너지의 총량은 엔탈피(enthalpy / 熱含量)와 엔트로피의 합으로 나타나며 닫힌 세계에서는 이 값은 일정하다. 이것을 에너지 보존법칙이라고 한다. 엔탈피(enthalpy)는 물리학 용어로, 열역학에서 사용하는 물리량의 하나. 계 밖에서 가해진 압력과 그것에 의하여 변화한 부피의 곱을, 계의 내부 에너지에 보탠 양으로 기호는 H이다. 흔히 엔트로피는 에너지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엔트로피도 엄연한 에너지입니다. 어려운 이론을 피하여 쉽게 설명하자면 우선 엔탈피는 현상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효에너지인 반면, 엔트로피는 현상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무효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이 차이는 근본적으로 에너지 단위의 크기 차이에 기인된다고 볼 수 있다. 즉 엔트로피의 경우 현상계에 영향을 미칠 수 없을 정도로 작아진 에너지(에너지 밀도가 낮아진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이기 때문에 총 에너지에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것은 현상계에 영향을 미치는(즉, 질서를 유지시키는) 엔탈피의 감소이기 때문에 현상적으로 무질서도가 증가하게 된다.

     

    현대 물리학의 일각에서는 에너지와 물질이 별개의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밀도에 따라 구분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즉, 에너지의 밀도가 가장 낮은 것이 엔트로피 상태이며, 다음으로 엔탈피 상태, 그리고 에너지 밀도가 높아진 상태가 물질이라고 보는 것이다. / 국어사전과 백과사전 그리고 관련 자료들을 재정리함.

     

    지금 우리 사회는 각 당의 무상 사회복지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초등학교 전면 무상급식, 유아 무상의료, 반값 등록금, 취학전 아동의 무상보육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을 무시한 국민의 여론에 밀려 인기영합주의의 정책인 것이다. 사회복지를 위한 재정확보가 현실적으로 어려울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 지출의 우선순위로 결정될 수 없는 정책이기도 하다. 이런 정책에 소요되는 수십조 원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은 국민의 담세율을 크게 높이고 면세자를 축소시키며 세원을 넓혀야 가능한 정책인데 위의 정책을 요구한 그 국민이 수십조 원의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을 전면에서 극렬하게 반대하는 조세저항에 빠질 것이다.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비논리적인 태도이다. 재원을 확보하는 데는 참여하지 않고 정말 무상으로 사회복지 혜택을 받겠다는 정말 창피스러운 탐욕인 것이다. 복지를 의미하는 welfare가 전쟁이라는 warfare에서 출발했다는 것은 인류가 전쟁을 통하여 받은 극심한 피해를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이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지구상에서 사회복지 제도가 잘 되었다는 서유럽 여러 나라의 담세율과 소수의 면세자의 구조와 사회복지의 현상과 기저(基底)를 알고 있고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들의 GNP는 4 만 달러 전후인 사회민주주의의 정체를 가진 나라들이다. 우리는 2 만 달러를 겨우 넘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체를 가진 국가가, GNP가 4 만 달러 전후인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사회복지 제도의 혜택을 요구한다는 것은 망발(妄發)인 것이며,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이며, 비논리적인 탐욕인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기 위해선 우선적으로 해결해야할 것이 있다. 이미 과잉 학력자가 되어 취업이 어려운 상황에 진입하고 있는데도 지나친 대졸에 대한 열망, 그리고 고졸자에 대한 교육이념과 목적을 무시한 사회적 편견을 하루 빨리 벗어나야한다. 그 다음에 고졸자가 사회에 쉽게 진입할 수 있도록 기반조성이 필요하고, 수요를 감안한 대학의 입시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국가의 재정지원으로 겨우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부실운영 대학(전문대학 등)을 과감히 폐쇄 정리하고, 유사한 단과 대학과 과를 통폐합하고, 미래사회를 감안하여, 불필요한 과를 폐과할 것이며 필요한 과를 신설하여야 하고 산학(産學) 공동체를 구성하여, 고교와 대학에서 교육의 이념과 목적에 맞는 각 자의 역할을 충실이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대학의 정원을 대폭 축소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수학생을 위한 질(質)과 폭(幅)을 넓혀 선진국형 장학제도를 과감하게 시행하여, 공부를 열심히 하여 국가와 민족과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해야하고, 대학 교육을 수학할 수 없는 학력을 가진 학생들이 공짜로 공부하겠다는 사욕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하고 학력이 모자라는 학생에 대한 졸업을 제한하는 제도를 실시해야 한다. 입학은 쉬우나 졸업은 어렵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의 안정을 가져올 수 있고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가 될 수 있다. 근자에 우리 사회에서는 단지 등록금에 시달리는 대학생들을 ‘사회적 약자’라고 지칭(指稱)하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의문이 가는 것은 대학생이 사회적 약자이면 고졸이하의 학력을 가진 계층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다. 세계의 어느 나라이든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학생은 ‘잠재적 강자’이며 미래에 이 나라와 민족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갈 중견이상의 지도자이며 역사의 주체인 것이다. 대학생을 제외하고도 이 나라에는 사회적 약자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미국과 서구에서 대학 등록금은 GNP 대비로 비교한다면, 우리나라보다 훨씬 비싸다는 것을 유학을 하거나 그 가정, 그리고 교육 분야에 관련자들은 다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여론에 밀려 사실을 은폐하고 있다. 아무리 장학제도가 선진국 수준이라 하더라도 대학교육을 원하는 자는 수익자 부담원칙에 따라 불평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 왜 자신의 삶의 목표에 따라 대학을 진학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이다.

    선진국의 국민들은, 학생 당사자는 물론 학부모가 아동의 장래에 대한 다양한 방법으로 측정되는 결과에 대하여 대부분 흡족히 수용하고 있어 대학의 진학여부는 일찍 결정되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어 일반화 되어 있다. 한국처럼 교육열의 필요에 따라 대학교육을 수학할 수 없는 학력수준이 부족한 학생을 대학에 진학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의 하나는, 한국과는 달리 선진국 대부분이 학력사회가 아니고 경력사회이기 때문이다. 또 대학교육은 그 교육을 받은 자들이 그 사회와 국민, 세계의 인류를 위하여 새 역사창조에 공헌하고, 인류문화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양성에 있다. 대학등록금에 대한 논의는 경제적 논리로 해석하고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기반유무에 따른 사회문제인 것이다. 등록금의 과다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사회에 진입하는 젊은이들이 취업하기 쉽고 직업의 귀천이 없다는 사회적 통념이 일반화되어 아무런 갈등 없이 진입할 수 있는 사회기반조성이 문제 해결의 첩경인 것이다. 대학교육은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도 똑같이 신분을 상승할 수 있는 빠른 길이며, 기회이고, 학력에 따른 이상과 삶의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경제적 논리로 해석한다면 미래에 대한 값싼 투자인 것이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 중에 매우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매사를 정면으로 직시(直視)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가치관의 확립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현상에 대하여 이해하고 해석하는 가치기준에 있어 자주적인 판단이 아니고 서구문화에 종속적이라는 것이다. 상당수의 지식층이나 국민들은 선진국을 상위문화권이라 생각하고 우리나라를 하위문화권이라고 생각하는 사회적인 통념이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해외유학파와 학위자격증의 우대는, 그 나라의 특수하거나 우리나라와는 다른 교육제도나 과정을 무시하고 단순 비교로 스스로를 비하하고 있다. 순화된 우리국어의 사용보다는 외국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지식층으로, 또는 교양이 있는 사람으로 대접하는 것도 우리문화를 하위문화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주 5000년 또는 반만년의 찬란한 전통문화를 자랑하고 세계화해야한다고 이중적인 잣대를 가진 난해(難解)한 민족이 되어가고 있다. 더 비극적인 것은 선진국의 바람직하지 못한 문화와 가치 그리고 낙후(落後)한 것과 폐단(弊端)을 감추고 말하지 않으면서, 자신이나 집단의 이익만을 위하여 선진국의 선례를 악용한다는 점이다.

    지금의 우리 사회의 폐단으로 잘못된 것은, 단편적이고 표피적인 지식으로 편협한 사고로 가치와 현상의 다양성과 공존의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간편성과 편의성, 속전속결의 문제해결, 과정의 중요성보다 유익한 결과만을 추구함으로써 인간 상호간, 또는 조직의 구성원 간에 협동과 의존을 통한 공존공영을 기피함으로써 조직과 개인의 장래가 불확실해지거나 붕괴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원만한 인성을 갖추지 못하여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행동은 사회와 조직의 이탈자로 나타나게 된다. 인간이 그 사회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그 사회와 민족에게 통용되는 필수적인 전통문화와 사상과 규범, 그리고 삶의 기준가치가 반드시 필요한 데 훈련되지 않고 습득하지 못한 사람은 사회성의 부족으로, 또는 부적응으로 탈락되거나 이탈을 자초하게 된다. 그러므로 한 인간이 사회에 진입하는 과정에서 탈락률(脫落率)보다는 사회의 구조의 몰이해와 조직문화와 업무의 부적응으로, 조직을 스스로 떠날 수밖에 없는 이직률(離職率) 또는 다른 조직으로 자주 옮겨 다니는 이직률(移職率)이 더 문제이고, 이러한 현상이 사회의 새로운 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이런 결과를 초래하는 원인 중에 하나는 외국문화의 장단점을 깊이 연구하지 않고 무조건 필요에 따라 상위문화로 판단하고 수용하여, 보존(保存)하고 유지(維持)하여야 할 자국(自國)의 전통적문화를 경시(輕視)하여 하위문화로 여겨 배척하거나 전통문화에 적응하지 못하여 이탈하거나 국외자가 되어 낙오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반문화적이거나 바부스(babus)가 되어 소속되어야 할 사회에서 중심에 서지 못하고, 항상 어울리지 못하여 변두리에서 겉돈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의식주에서는 남부럽지 않을 런지는 몰라도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삶의 패배자가 되는 것이다.

     

    註 00; 바부스(babus)- babu의 복수형이다. babu는 인도에서 Sir, Mr. 또는 Esquire에 해당하는 존칭이기도 하며, 인도에서는 직위(職位)로 하급 관리인 서기(書記)를 ‘바부’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보통 영어를 약간 알아 영국물이 든 인도인을 경멸하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영국의 식민지 시대에 영국에서 교육받은 지식인들 중에 영국인도 아니고, 인도인도 아닌 얼치기 문화인으로 반문화적인 사람을 가리켜 ‘바부’라 하여 멸시하고 바보 취급을 한데서 유래되었다. 바부스는 두 개의 문화를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다문화 얼치기들’ 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옳다. / 영영사전과 인도역사 관련 자료에서 발췌 재정리함.

                                                       / 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12-10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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