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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담정, 와룡암, 그리고 맹륜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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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윤석산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343회   작성일Date 12-09-17 07:06

    본문

     

    지금 한창 천도교 게시판에 핫이슈가 되고 있는, 동학혁명기념과 이윤영 관장님의 글을 읽고 몇 가지 생각이 나서 글을 적습니다. 이윤영 관장께서 제기한 문제인 ‘와룡암 자리가 바로 대신사께서 사시던 집이였으며, 바로 이 집에서 무극대도를 받았다.’는 발언은 매우 중대하고, 또 매우 그 신빙성이 높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윤영 관장이 제기한 바와 같이 대신사께서 기미년(1859년) 10월 용담으로 돌아오셨을 때 이미 용담서사, 곧 오늘의 용담정은 없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은 많은 고려를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따라서 『도원기서』에 나오는 ‘용담정’이라는 표현은 용담 일대라기보다는 ‘용담정’ 그 자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마침 지난 시일(9월 16일) 서울교구 시일식이 끝난 뒤에 제가 대교당에서 강의를 했기 때문에 그 글을 올립니다.


    1. 대신사께서는 무극대도를 받으신 곳은 어디일까.

    근암공은 와룡암이 있던 자리의 집을 고쳐서 다섯 칸 자리 집을 지었고, 계곡의 건너편 기슭을 무니우고 용담서사, 곧 오늘의 용담정을 지었다.

    포덕 전 1년(기미년, 1859년) 10월 용담으로 돌아온 대신사께서는 와룡암 자리에 있는 집에 살면서, 계곡의 건너에 있는 용담정에 들어가시어 불출산외를 굳게 맹세하고 수련에 임하셨다.

    이러한 나날의 보내며 추운 겨울을 지나 이제 새봄을 맞았다. 포덕 원년인 경신년이 되었다. 4월 5일은 장조카 맹륜(孟倫)의 생일이라 초대를 받아 갔다가 그 자리에서 신비한 일을 겪었다. 장조카 맹륜이 살던 집은 지동(芝洞)에 있었다고 한다. ‘지동’은 지금 용담교구가 있는 그 지역이다. 이러한 종교체험 이후 일 년 가까운 시간을 수련을 하며 받은 가르침을 헤아려 보았다.

    다시 말해서 와룡암 자리에 있던 집은 대신사께서 사시던 집이고, 용담정은 대신사께서 수련을 하시던 곳이며, 지동의 맹륜의 집은 경신년 4월 5일 처음 신비체험을 겪은 곳이다. 이렇듯 장조카 최세조의 집, 와룡암 자리인 대신사께서 사시던 집, 그리고 용담정 등, 이 세 장소 중 우리는 흔히 용담정만을 대신사께서 무극대도를 받으신 곳으로 생각을 한다. 그러나 천도교의 여러 교사를 읽어보거나, 『용담유사』, 『동경대전』 등의 경전을 읽어보면, 이 세 장소가 모두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


    2. 『동경대전』에 기록된 대신사의 종교체험

    『동경대전』 중에는 종교체험의 장면이 두 군데 나온다. 「포덕문」과 「논학문」에 나온다. 먼저 「포덕문」의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뜻밖에도 사월에 마음이 선뜻해지고 몸이 떨려서 무슨 병인지 집증할 수고 없고 말로 형상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어떤 신선의 말씀이 있어 문득 귀에 들리므로 놀라 캐어물은 즉 대답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 세상 사람들이 나를 상제라고 이르거늘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시기를 “내 또한 공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사람들에게 이 법을 가르치게 하니 의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라.” 묻기를 “그러면 서도로써 사람들을 가르치리이까.” 대답하시기를 “그렇지 아니하다. 나에게 영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요 그 형상은 태극이요 또 형상은 궁궁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쳐서 나를 위하게 하면 너도 또한 장생하여 덕을 천하에 펴리라.”


    「논학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일일이 들어 말할 수 없으므로 내 또한 두렵게 여겨 다만 늦게 태어난 것을 한탄할 즈음에,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 접령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 강화의 가르침이 있으되 보였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오히려 이상해져서 수심정기하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렇습니까?”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나니라. 너에게 무궁 무궁한 도를 주노니, 이를 닦고 단련하여 그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리라.


    「포덕문」과 「논학문」에는 대신사께서 어디에서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한울님과 대화를 나누고, 또 가르침을 받았으며, 영부와 주문을 받았다고, 또 무궁 무궁의 도를 주었다고 만 되어 있다.


    3. 교사(敎史)에 기록된 대신사의 종교체험

    ‘천도교사’인 『도원기서』와 『천도교서』, 『천도교교회사 초고』, 그리고 『천도교창건사』 등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원기서』에는 “경신년(庚申年, 1860년) 4월 5일은 곧 장조카 맹륜(孟倫)의 생일이다. 의관을 보내어 오시기를 청하니, 선생께서 그 청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참석하였다. 참석하던 중, 얼마 있지 않아서 몸이 떨리고 추운 기운이 있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라고 되어 있다. 또한 『천도교창건사』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포덕1년 경신년 4월 5일에 조카 맹륜이 거마(車馬)를 보내어 대신사를 청하니 그날이 바로 맹륜의 생일이다. 대신사 그 뜻을 막기 어려워 지동(芝洞) 맹륜의 집에 이르렀더니 문득 마음에 감격한 바 있고 또한 심신이 편안치 못하였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천도교서』나 『천도교회사 초고』에는 대신사께서 조카 집에 갔다는 기록이 없다.


    이와 같이 일부 교사에 대신사께서 경신년 4월 5일이 장조카인 맹륜의 생일이고, 생일에 갔다가 처음 신비한 일을 겪었다고 되어 있다.


    장조카 맹륜이라는 사람은 교사에 여러 번 나오는 인물이다. 교사 나오는 이름인 맹륜은 최세조(崔世祚)의 자(字)이다. 최세조는 근암공이 아들이 없어 동생의 아들인 ‘제환’을 양자로 들였고, 이 제환이라는 사람의 아들이 바로 맹륜이다. 그러니 대신사가 숙부가 된다. 그러나 맹륜이 대신사보다 12살이나 위이다.

    대신사께서 한울님의 명을 받고 친묘(親墓)를 하러 갈 때,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그러나 대신사는 물론 같이 갔던 인마(人馬)도 한 방울 비를 맞지 않았다. 이와 같은 신비한 일을 보고는 맹륜이 도에 들기를 원하여 도에 들었다. 그러니 맹륜은 대신사 사모님 이후에 처음 도에 든 인물이다.

    또한 가정리 일대는 대신사 친척들이 살던 곳인데, 대신사를 대부분 친척들이 비난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이 『용담유사』에 나온다. 「교훈가」에 보면, “향중풍속 다 던지고 이 내 문운(門運) 가련하다. 알도 못한 흉언괴설 남보다가 배나 하며, 육친(六親)이 무삼일고 원수같이 대접하며 살부지수 있었던고 어찌 그리 원수런고.”라고 한탄하는 말씀이 있다.

    이와 같이 대신사를 한결같이 비난하는 친척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신사의 가르침에 따랐고, 훗날까지 지켰던 사람으로 맹륜은 나온다.


    이러한 맹륜에 관하여 경주 최씨 족보를 확인한 결과 생일이 (음)4월 5일로 되어 있다. 그러니 천도교역사에 나오는, ‘장조카 맹륜이 생일이라 초대를 해서 생일에 갔다가 갑자기 뛰놀고 넘어지고 해서 집으로 모시고 갔다.’는 기록은 매우 신빙성이 있는 기록이다. 즉 맹륜의 집에서 처음 종교체험의 징후를 느꼈음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맹륜의 집에서는 이러한 징후만 느꼈고, 이내 마음이 안정이 되지를 않아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고 되어 있다. 이는 『도원기서』나 『천도교창건사』 모두에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다. 『도원기서』에 보면, “경신년 4월 5일은 곧 장조카 맹륜(孟倫)의 생일이다. 의관을 보내어 오시기를 청하니, 선생께서 그 청을 이기지 못해 억지로 참석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서 몸이 떨리고 추운 기운이 있고,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 이내 일어나 돌아왔다.(庚申四月初五日 卽長侄孟倫之生辰也 送其冠服請來 先生不負其情 强參會中也 未幾身有戰寒之氣 未得安心 仍爲起來)”라고 되어 있다. 또한 『천도교창건사』에는 구체적으로 ‘집으로 돌아왔다.’라고 되어 있다. 즉 지동의 맹륜의 집에서 이상한 징후가 있어 와룡암 자리에 있던 대신사 집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집으로 돌아오신 이후, 『도원기서』에는, 정신이 혼미하고 미친 것 같기도 하고, 술에 취한 것 같기도 하여, 엎어지고 넘어지고, 마룻바닥을 치며 몸이 저절로 뛰어오르고 기(氣)가 뛰놀아 병의 증상을 알 수 없으며, 말로 형용하기도 어려울 즈음에, 공중으로부터 완연한 소리가 있어 자주 귀 근처로 들려오는데,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었다. 공중을 향해 묻기를, “공중에서 들리는 소리는 누구입니까?” 하니, 상제(上帝)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바로 상제이다. 너는 상제를 모르느냐? 너는 곧 백지(白紙)를 펴고 나의 부도(符圖)를 받아라.” 곧 백지를 펴니, 종이 위에 완연하게 비추어 실려 있었다. 선생께서 아들을 불러 이를 보이니, 아들이 말하기를, “저는 그 모양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하니, 상제 말씀하기를, “우매한 인생이다. 너는 붓으로 이를 써서 깨끗한 그릇에 담아 태워서 냉수로 마시도록 하라.” 선생께서 즉시 한 장을 그려서 이를 태워 마시니, 처음 시도할 때에는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었다. 이가 바로 그 특징이었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나를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해라.” 선생께서 공경스럽게 가르침을 받아 아버지라고 불렀다. 상제 말씀하시기를, “너의 정성이 가히 아름답구나. 부(符)는 곧 삼신산(三神山) 불사약(不死藥)이다. 네가 이것을 어찌 알겠느냐?” 라는 경험을 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천도교창건사』에도, 집으로 돌아온 즉 때는 이미 사시(巳時, 오전 11시)가 되었는데, 청에 오르자, 문득 몸과 마음이 한가지로 떨리며 병이라 하여도 집증하기 어렵고, 말로도 형상키 어려울 황홀한 지경에 문득 공중으로부터 외치는 소리가 있어서 서로 문답을 하고 ‘영부와 주문’을 받았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보아 조카인 맹륜의 집에서는 다만 징후만 느꼈고, 이후 집으로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한울님과 대화를 하며 ‘영부와 주문’을 받았음을 알 수가 있다.


    4. 『용담유사』에 기록된 대신사의 종교체험

    다음은 『용담유사』의 구절에 나오는 대신사의 종교체험 당시의 상황에 대한 기록이다.


    무정세월 여류파라 칠팔삭 지내나니

    사월이라 초오일에 꿈일런가 잠일런가

    천지가 아득해서 정신수습 못할러라

    공중에서 외는 소리 천지가 진동할 때

    집안사람 거동보소 경황실색 하는 말이

    애고애고 내 팔자야 무삼이로 이러한고

    애고애고 사람들이 약도사 못해볼까

    침침칠야 저문 밤에 눌로 대해 이 말할꼬

    경항실색 우는 자식 구석마다 끼어 있고

    댁의 거동 볼작시면 자방머리 행주치마

    엎어지며 자빠지며 종종걸음 한창 할 때

    공중에서 외는 소리 물구물공 하였어라

    호천금궐 상제님을 네가 어찌 알까 보냐

    초야에 묻힌 인생 이리 될 줄 알았던가

    개벽시 국초일에 만지장서 나리시고

    십이제국 다 버리고 아국운수 먼저 하네

    그럭저럭 창황실색 정신수습 되었더라

    그럭저럭 장등달야 백지 펴라 분부하네

    창황실색 할 길 없어 백지 펴고 붓을 드니

    생전 못 본 물형부가 종이 위에 완연터라

    내 역시 정신없어 처자 불러 묻는 말이

    이 웬 일고 이 웬 일고 저런 부 더러 본가

    자식의 하는 말이 아버님 이 웬 일고

    정신수습 하옵소서. 백지 펴고 붓을 드니

    물형부 있단 말씀 그도 또한 혼미로다

    애고애고 어머님아 우리 신명 이 웬 일고

    아버님 거동 보소 저런 말씀 어디 있노

    모자가 마주 앉아 수파통곡 한창 할 때

    한울님 하신 말씀 지각없는 안생들아

    삼신산 불사약을 사람마다 볼까 보냐

    미련한 이 인생아 네가 다시 그려내서

    그릇 안에 살라두고 냉수 일 배 떠다가서

    일장탄복 하였어라.


    이와 같은 『용담유사』 ․ 「안심가」에서는 대신사께서 와룡암 자리인 집에서, 본격적으로 한울님과의 문답을 통해 가르침을 받은 사실을 매우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신사께서 한울님과 대화를 하는 모습을 보고 “애고애고 내 팔자야 무삼이로 이러한고 / 애고애고 사람들이 약도사 못해볼까 / 침침칠야 저문 밤에 눌로 대해 이 말할꼬.”라고 사모님이 걱정을 하고 있다. 또 대신사의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아들들은 놀랐고, 사모님 역시 놀라 허둥이는 모습은 “경항실색 우는 자식 구석마다 끼어 있고 / 댁의 거동 볼작시면 자방머리 행주치마 / 엎어지며 자빠지며 종종걸음 한창 할 때” 라고 표현하고 있다. 또한 영부를 받는 모습을 보고는 “자식의 하는 말이 아버님 이 웬 일고 / 정신수습 하옵소서. 백지 펴고 붓을 드니 / 물형부 있단 말씀 그도 또한 혼미로다 / 애고애고 어머님아 우리 신명 이 웬 일고 / 아버님 거동 보소 저런 말씀 어디 있노. / 모자가 마주 앉아 수파통곡 한창 할 때”와 같이 대신사 아드님과 사모님이 놀라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이러한 『용담유사』 ․ 「안심가」의 내용은 다름 아닌 대신사께서 맹륜의 집에서 돌아온 이후, 와룡암 터에 있는 대신사 집에서 이와 같은 일을 겪었다는 그 증거가 된다. 사모님과 아드님이 다 함께 있는 집에서의 일임이 분명하다. 

    즉 대신사께서 맹륜의 집에서 어떠한 증상을 느끼시고, 집으로 돌아온 이후 집에서 보다 본격적으로 한울님과 문답을 하였고, 또 영부 등을 받는 종교체험을 했다고 하겠다.


    5. 일년 가까이 수련에 임하며 이를 헤아렸다.(幾至一歲 修而度之)

    경신년 4월 5일의 종교체험 이후에 대신사께서는 일년 가까운 시간을 수이탁지 하셨다. 『동경대전』 ․ 「논학문」에 다음과 같이 기록이 되어 있다.


    내 또한 거의 한 해를 닦고 헤아려 본즉, 또한 자연의 이치 아님이 없다. 그런 까닭에 한편으로는 주문을 짓고 한편으로는 강령의 법을 짓고 한편으로는 잊지 않는 글을 지으니, 절차와 도법이 오직 이십일 자뿐이었다.


    또한 『도원기서』에도 이와 같은 기록이 나온다.


    선생께서 비로소 수백 장을 그려 연이어 탄복(呑服)하니, 일고여덟 달이 지난 후에 몸이 부드러워지며 윤택해졌고, 용모가 아주 좋은 모양으로 바뀌게 되었다. 시(詩) 한 구를 짓기를, “황하(黃河)의 물이 맑아지고 봉황이 우는 것을 누가 능히 알겠는가, 운(運)이 어느 곳에서부터 오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노라.(河淸鳳鳴熟能知 運自何方吾不知)” 라고 하였다. 상제께서 또 가르쳐 말씀하기를, “너는 백의(白衣)의 재상(宰相)을 제수(除授) 받겠는가?” 선생께서 대답하기를, “상제의 아들로서 어찌 백의의 재상이 되겠습니까?” 상제 말씀하기를, “그렇지 않으면, 나의 조화(造化)를 받아라. 이제 나의 조화를 보도록 하라.” 선생께서 가르침을 받아 이를 시험해 보니 모두 세상에 있는 조화였다. 선생께서 응(應)하지 않으니, 또 다시 말씀하기를 “이 조화를 행한 이후에 저 조화를 행하도록 하라.” 선생께서 즉시 이를 행하여 보니, 이 조화 저 조화 모두 역시 세상에 있는 조화였다. 만약 이 조화로써 사람들을 가르치게 되면 반드시 사람들을 잘못 이끄는 것이 되기 때문에 영원히 거행하지 않기로 결심을 했다. 상제께서 다른 조화를 보이며 말씀하기를, “이 조화는 진실로 행해야 할 조화이다.” 선생께서 힘들여 이 조화를 행해 보니, 이것 역시 먼저의 조화와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 그 후 비록 명교(命敎)가 있어도 이를 거행하지 않기로 맹세하고, 열하루 동안을 음식을 먹지 아니했다. 음식을 끊은 이후 상제께서 단 한마디의 가르침도 내리지 않다가, 거의 한 달 가까이 이르러 하고(下敎)하여 말씀하기를, “아름답구나, 너의 절개여. 너에게 사용할 수 있는 무궁(無窮)의 조화를 내려서 포덕천하(布德天下)하게 하리라.” 선생께서 비로소 음식을 들게 되고, 이후로부터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했다. 거의 한 해 동안 수련(修煉)을 하고 연마를 하니, 스스로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이 없게 되었다. 이어서 용담가(龍潭歌)를 짓고, 또 처사가(處士歌)를 짓고 교훈가(敎訓歌)와 안심가(安心歌)를 한가지로 짓게 되었다. 또한 주문(呪文) 두 건(件)을 지으니, 한 건의 주문은 선생이 읽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아들과 조카에게 전수(傳授)하는 것이다. 또 강령(降靈) 주문을 짓고, 나아가 검결(劍訣)을 짓고, 고자주문(告字呪文)을 지으니, 그 내용이 <백의동(白衣童) 청의동(靑衣童)>하는 것이 된다.


    또한 『천도교회사 초고』와 『천도교창건사』에도 이와 같은 부분이 기록되어 있다.


    大神師 修煉한지 一歲에 自然의 理 없지 아님으로 遂히 敎訓歌, 安心歌, 龍潭歌를 作하시고 呪文 二度를 作하야 一은 自誦하시고 一은 徒弟에 授하시고 降靈呪文, 劍訣, 懺悔文을 作하시다.   『천도교회사 초고』


    天師問答은 庚申年 四月五日부터 仝年 九月 二十日까지의 일이니 그 사이 여러 問答이 많이 잇는 중에 … <중략> … 大神師 修煉의 結果로 人乃天의 宗旨를 大覺하시고 이에 布德코저 하야 呪文과 懺悔文을 지으시다.   『천도교창건사』


    이와 같이 『동경대전』과 교사의 기록들은 대신사께서 경신년 4월 5일 종교체험 이후 거의 1년의 가까운 시간을 수련으로 보내셨고, 이 기간 동안 한울님으로부터 시험을 받았으며, 또한 ‘주문’ 등을 지었다고 되어 있다.

    『동경대전』과 『천도교회사 초고』에는 각기 ‘일년 가까운 시간을 수련을 하며 보냈다.’ 라고 되어 있고, 『도원기서』에는 ‘일고여덟 달이 지난 후 몸이 윤택해지고, 또 시를 짓고 시험 등을 받았다.’ 라고 되어 있다. 이에 비하여 『천도교창건사』에는 ‘경신년 4월 5일부터 9월 20일까지 천사문답을 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대신사께서 이와 같이 일년 가까운 시간을 수련을 하며 한울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곳은 어디인가. 이곳은 대신사께서 기미년 10월 용담으로 돌아와서 수련을 시작은 오늘의 용담정이라고 생각된다.

    먼저 「안심가」에서 대신사께서 “가련하다 우리 부친 구미산정(龜尾山亭) 지을 때에 날 주려고 지었는가.” 라고 노래하였다. 이때 근암공이 지었다는 ‘구미산정(龜尾山亭)’은 용담정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교훈가」 중에 한울님이 대신사에게 하신 말씀인 “구미용담 일정각에 불출산외 하는 뜻은 알다가도 모를러라.” 라는 구절 중 ‘대신사께서 불출산외를 맹세하고 수련에 임했던 구미용담 일정각’은 역시 용담서사, 곧 오늘의 용담정을 말씀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곧 대신사께서 아버지 근암공을 회상하는 「용담가」 중에서, “구미산하 일정각(一亭閣)을 용담이라 이름하고 산림처사 일포의로 후세에 전탄말가.” 라는 구절이나, 「수덕문」 중 “정자의 이름을 용담이라고 함은 제갈량을 사모하는 마음이 아니겠는가.(亭號龍潭 豈非慕葛之心)” 라는 구절 등을 보아 알 수가 있다.


    또한 『도원기서』에 의하면, 대신사께서 기미년 10월 용담으로 돌아오셨다는 기사에 이 해 10월 용담으로 돌아오게 되니, 용담은 바로 산림공이 거처하면 글을 가르치던 서재이다. 이곳으로 온 이후 의관을 벗어던지고 문밖으로 나가지 아니할 것을 깊이 맹세했다.(十月還施龍潭 龍潭卽山林公講習之書齋也 自是由來 罷脫衣冠 心盟不出)“라고 되어 있다. 즉 대신사께서 기미년 10월 용담으로 돌아와 근암공이 거처하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용담서사, 곧 오늘의 용담정에서 수련을 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이다.

    『도원기서』에 대신사께서 한울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부분에 한울님이 대신사에게 이르는 말씀 중 “네가 이 정자에 들어앉아 자호를 고치고 산 밖으로 나가지 아니하며(汝入此亭 改字號 不出山外)”라는 부분이 있다. 대신사께서 ‘이 정자(此亭)’에 들어왔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즉 대신사께서는 기미년 10월 가족과 함께 용담으로 돌아와서, 가족들과 함께 와룡암을 개축하여 새로 지은 집에 살면서, 계곡 건너편에 있는 용담서사 자리, 곧 오늘의 용담정에 들어 수련에 임하셨고, 또 이곳 용담정에서 경신년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 이후 거의 일년의 가까운 시간을 수이탁지(修而度之)한 것으로 생각이 된다.


    6. 세 장소가 지닌 의미

    장조카 최세조의 집

    와룡암 자리에 지은 대신사께서 사는 집

    용담서사가 있던 자리인 오늘의 용담정


    1) 장조카 최세조(맹륜)의 집

    경신년 4월 5일 처음 종교체험의 징후를 느낀 장소이다.


    2) 와룡암 자리에 지은 대신사 살던 집

    장조카 맹륜의 집에서 돌아온 이후 한울님과 대화를 하고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영부(靈符)와 주문(呪文)을 받고, 또 무궁 무궁의 도를 받은 곳이다.


    3) 용담서사가 있던 오늘의 용담정

    결정적인 종교체험 이후 일 년의 가까운 시절을 수이탁지(修而度之)하며, 한울님으로부터 시험도 받고, 이 시험을 통해 더욱 마음을 굳건히 했으며, 한울님으로부터 받은 주문을 강화(降話)로써 외우고(『천도교창건사』의 기록), 이를 바탕으로 선생님이 읽는 주문과 제자가 읽는 주문 등 두 건의 주문을 짓고, 또 검결, 용담가 등의 경전을 지은 곳이다. 

      <추신>
      오늘 우리는 용담정의 성지로서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성지 용담정과 함께 대신사께서 사셨고 또 무극대도를 받는다는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하신 와룡암 터인 대신사 사시던 집에 관하여서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봅니다. 지금 용담정 가는 다리인 용담교 못 가서 오른쪽 산 기슭이 바로 이 자리임을 많은 분들이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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