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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경대전.용담유사 독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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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최동환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716회   작성일Date 12-09-13 14:52

    본문

    [독후감]

                                
    동경대전·용담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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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의 주해 자는 윤석산 문학박사이며 시인이다. 대표적인 시집으로 『바다 속의 램프』가 있으며 주해서로는 『주해 동경대전』과 『주해 용담유사』등이 있다.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는 1860년대에 최제우에 의하여 쓰인 경서이면서 국문학사적 차원에서도 매우 가치 있는 책이다. 국문학자의 주해가 아니면 원문으로 읽어 보기는 어려운 책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아니 한반도의 민족이라면 나아가서 세계 인류는 한 번쯤 이 책을 읽어 보았으면 하는 책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최제우선생의 미래 통찰력과 아울러 우리 한민족이 나아갈 길, 그리고 인류가 나아갈 길을 제시한 부분에 대하여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아마도 인류 역사상 사람이 지은 책중 가장 위대한 책중의 하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간다.

     

    최제우는 1824년 경주에서 빈한한 선비의 서자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유교의 경전인 대학, 중용, 불경, 그리스도교 경전 등을 섭렵하였으나 서자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없어 세상을 돌아다니며 장사도 하고 풍속도 읽히고 살피며 서세동점하는 세계정세도 돌아보았으나 새로운 이상향과 자신의 나아갈 길마저 찾지 못하여 절망한 체 35세 되는 1859년 10월 가솔을 이끌고 경주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명상과 기도하며 수행을 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열망을 가슴에 품고 수행에 수행을 정진하던 끝에 1860년 4월 5일 드디어 하느님의 계시를 받는다. 하느님이 최제우에게 “세상 사람들은 나를 상제라고 하는데 너는 나를 모르겠느냐. 바로 네 마음이 내 마음이니라. 내가 너에게 무궁무궁한 도를 주노니 갈고 닦아서 주문을 지어 나를 위하게 하면 너는 영원히 살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과 대화를 하면서 천도를 얻는다. 바로 세상을 건질 도를 얻는 것이다. 그리고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저술하여 사람들에게 도를 전하는 한편, 한편으로는 노비인 하녀 두 명중 한 명은 수양딸로 삼고 한 명은 며느리로 삼는다. 그야말로 링컨이 노예해방을 하였듯이 최제우도 또한 노예를 해방한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모시었으니 사람은 누구나 다 존귀한 존재”라고 하는 그의 깨달음을 그대로 실천한 것이다. 그 당시 양반과 상놈, 적자와 서자의 차별이 심했던 신분제 사회에서 그의 깨달음과 행위는 요원의 불길처럼 민중에게 전파 되었다. 새로운 희망의 빛이었다. 그러나 정부에서는 그를 그대로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유교 봉건체제와 사회질서 체계를 뒤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그가 도를 얻은지 4년이 되는 1864년 3월 10일 참형에 처한다. 그러나 그는 관에 체포 되기 전인 1863년 8월 14일 해월 최시형에게 도를 전하여 후세에 도가 이어지고 펴지도록 하였다.

     

    “동경대전”중 “포덕문”에서는 “중국이 서양세력에 의하여 멸망하면 조선 국가를 도우며 백성을 편하게 할 계책이 어디에서 나올 것인가”라고 걱정한다. 과연 오늘날 한반도는 어떠한가. 남북으로 분단되어 같은 민족끼리 미사일을 겨누고 있으며, 중국은 중국대로 팽창정책을 쓰고 있으며, 일본은 우경화가 극심해져서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또 하나의 침략을 시도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한반도의 미래를 용담유사중 “안심가”에서 “기험하다 기험하다 우리나라 운수가 기험하다”라고 하여 우리민족이 처한 세계가 매우 험난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는 “서로 자기만을 위해서는 안 된다. 서로 위하는 마음으로 살아라.”라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서로 이해하고 자기의 학문과 기술을 연마하며 적재적소에서 자기의 본분을 다하며 사회·국가적으로는 서로 위하는 마음으로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여 나가지 않는다면 좋은 사회, 강건한 국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기본적으로 탈세를 하지 말고 세금을 잘 내야하며, 국방의무를 충실히 하고,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말아야 하며, 정부와 기업은 일자리를 창출하여 모든 국민이 성실히 일할 수 있도록 노력하며, 빈부의 차이를 좁히려고 노력하여야 하며, 남과 북이 평화공존하며 서로 교류하여 동질성을 회복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그는 또한 “용담유사”중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고 말하였고, “안심가”에서는 “무병지란(無兵之亂) 지낸 후에 살아나는 인생들은 한울님께서 복록(福祿)을 정하여 주어서 살 수 있으나 목숨만은 나의 말을 믿고 천도에 의하여 살아야 살아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이상의 말은 앞으로 군사로 전쟁하는 난리가 아닌 “환경재난 또는 자원고갈난리”를 지칭하는 의미로 파악되는데 지금은 전 세계가 자원을 물 쓰듯 써서 자원은 고갈되고, 에너지원도 고갈되어 가고 있다. 환경은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 지구 온난화가 가속화 되어 지구에 재앙이 펼쳐지고 있다. 폭우와 강풍, 폭설과 폭염, 그리고 공기 오염, 수질 오염 등으로 편안히 믿고 숨 쉴 곳도 마실 물도 식량도 부족하거나 없어서 인류는 그야말로 몇 십 년 후를 편안히 바라보기가 어렵게 되었다. 지금 세계환경회의가 이 재난을 막으려고 하지만 현 세계 경제체제 다시 말하면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체제로는 이 난국을 극복하기가 매우 어렵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순환의 구조를 깨고 전 인류가 온전히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었다는 말이다. 어디에서부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어떻게 노력하여야 할 것인지 참으로 난감하다. 이 문제에 대하여 최제우는 모든 존재의 존귀함을 깨닫고 모든 존재를 하느님을 모신 존재로 바라보는 시각으로 이기심으로 살지 말고 이타심으로 살아야 할 것 즉 전 세계인류가 하나로 돌아가 도덕심을 회복하여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동귀일체(同歸一體)로 살아가야 한다고 하였다. 이런 면에서 보면 최제우의 예지력과 통찰력은 감히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확하고 예리하다. 지금 시대 상황으로 보면 한 나라만 잘하여서 그 나라만 잘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그야말로 전 인류가 각성을 하지 않고는 자원고갈난도 에너지원의 고갈난도, 식량난도, 환경난도 극복할 수 없는 어려운 초비상 사태에 직면한 지구가 되었고, 인류는 그 해법을 차지 못한 체 갈팡질팡하고 있는 형국이다. 전 인류의 새로운 각성만이 이 난국을 점차적으로 극복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간다. 그렇게 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그는 “용담유사”중 “흥비가”에서 이렇게 말무리를 짓는다. “글도 역시 무궁하고 말도 역시 무궁이라. 무궁히 살펴내어 무궁히 알았으면 무궁한 이울 속에 무궁한 내가 아닌가.” 바로 무궁한 지혜를 짜내어 그 지혜로 살고, 무궁한 실재로 사는 새로운 사람으로서 살아 갈 것을 주문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은 OECD국가 중 매년 1만5천여 명이 자살을 하는 자살률 1등국가가 되어버렸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볼 문제이다. 생명 특히 사람이 하느님을 모신 존재로서의 무궁성을 얻지 못하고 산다면 필경 사람들은 환경의 영향을 극복하지 못 할 것이고 환경에 따라 살다보면 그의 정신세계는 항상 주어진 환경에 따라 일희일비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병 즉 자살의 길로 떨어질 것이다. 이러한 사회분위기여서는 안될 것이다. 생존경쟁이 치열하면 할수록 낙오자는 살아도 죽음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고, 결국은 자살의 길을 택하게 될 것이다. 정치·경제·문화·환경·과학 등의 세계지도자들은 과도한 적자생존체계를 뜯어 고치는 문명 대전환의 틀을 다시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더불어 이해하며 서로 믿고 돕는 새로운 영원한 생명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데 인색해서는 우리의 미래 세대의 장래는 암담할 것이다.

     

    이 글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읽어보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각성과 편안함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간다.

     

    “무궁한 이 울 속에 무궁한 내가 아닌가”

     

     

    포덕153(2012). 9. 13./ 해원 최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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