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년을 돌아보며(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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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년을 돌아보며(7-4)
다음 글은 천도교가 친일(親日) 행각(行脚)을 하였다고 양심선언을 한데서 촉발(觸發)된 것으로, 필자는 교단의 교역자들이 이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와 주장을 적은 글들입니다. 시대가 흘러 상황이 변하여 지금은, 민족문제 연구소가 진행한 모든 일들이 재평가를 기다리고 있고 그 결과에 따라 역사는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친일행적의 기준이 수정될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제 1차 친일행위자로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될 인물로 발표된, 천도교 인물 27명도 재평가가 필요하게 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떤 종단도 하지 않은 것을, 천도교가 친일 행각을 하였다고 양심선언을 한 것도 반성해야하고, 친일행위자로 판정된 천도교 인물 27명의 선정(善政)에 관여(關與)한 교단의 인물들도 교단이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나 몇 푼의 연구비를 받았거나 원고료를 받아 관련 자료를 제공한 교단의 교역자는 징계를 받아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 일에 관여한 교역자들은 선배 교역자들을 모욕(侮辱)하여 욕(辱)되게 했으며, 해교행위(害敎行爲)를 한 자들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교단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 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천도교가 친일파의 소굴인가? /2006.04.29.
아래에 기록된 인물들은, 천도교 교인들입니다.(신, 구파 구분은 본인이 필요에 따라 교사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냥 평교인들이 아닙니다. 거의 대 다수가 일제의 침략시대에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면서 교단을 이끌고 온 교단의 중심인물들입니다. 지난 2005. 9. 22.에 민족문제 연구소가 제 1차 친일행위자로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될 인물로 발표된 사람 3,095명 중 천도교 인물 27명입니다.
김동수 김병엽 김병제 김종현 남증석 박석홍 백중빈 이군오 이근섭 이돈화 이우영 이인숙 임문호 전의찬 정광조 정용증 조기간 최 린 최안국 하상태 20명.
구파로 분류되는 인물 들 중 중진 교역자.
박 완 손재기 안상덕 이 단 이종린 이종식 최준모 7 명.
한 인간의 삶과 행위를 평가할 때에는, 개인적인 것과 사회 참여적인 것의 다면 평가(多面評價)가 필수적입니다. 다면 평가란 통시적(通時的)으로, 그가 살아온 시대적 상황이 역사적으로 어떤 특수성을 가졌는가와 공시적(共時的)으로, 그가 산 사회와 국가가 어떤 특수한 사회와 국가였는가를 면밀(綿密)히 관찰하여 평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통시적, 공시적인 시각으로 관찰하여 평가를 하지 않고, 다만 선악의 기준을 원론에 바탕을 두거나, 한 시대의 가치기준으로 평가하여 칭송(稱頌) 또는 매도(罵倒)한다면, 역사 앞에 또 하나의 무지(無知)의 범죄(犯罪)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가치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를 막론하고 일관(一貫)되어야 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또 균형(均衡)과 조화(調和)와 형평성(衡平性)이 있어야 합니다. 특이나 동시대(일제 침략이란 특수한 역사적 상황을 가진 시대.)의 삶은 살지 않은 다음 세대가, 전 세대를 단죄(斷罪)하고 심판(審判)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시대적 상황을 원론적으로 평가하고 반성의 기회로 삼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지금 일제시대의 친일이든 항일이든 어떠한 상황을, 단죄하고 심판하는 그들도, 그 시대의 특수한 상황 하에서 살았다면 그들이 무엇을 선택할 수 있었던가가 매우 궁금하고, 이런 부류(部類)들의 도덕성이나 정의를 필자는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양심과 도덕성, 그리고 애국심과 정의가 진정 살아 있었다면, 광복 직후에 단죄하고 심판했어야 옳았습니다. 광복 60년이 지나서야 양심과 도덕성, 애국심과 정의가 왜 갑자기 불같이 살아났는지 매우 의심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런 판단의 기준은, 일관된 삶의 가치도 갖추지 못하고 덩달아 시대적 흐름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질풍노도(疾風怒濤)와 같은 광란(狂亂)의 시대에 동참(同參)하지 못했다는 자괴감(自愧感)에서 벗어나려는 심리적 공황상태(恐惶狀態)에서 출발했다고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험한 세상을 헤쳐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신만의 줏대를 갖추지 못한 불안감 때문에 출발한 비정상적인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수운 대신사님께서 동경대전에서 매 편마다 맨 앞에 전제(前提)하신 자연의 이법(理法), 다른 말로 하면 천리, 천명, 천도, 무극대도를 그렇게 강조하신 것은 대신사님께서 말씀하실 내용을 올바르게 이해시키기 위한 기준을 제시한 것입니다. 장구(長久)한 역사의 형성과 흐름(흥망성쇠)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학을 이해하는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자연과 인류의 역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신념을 세우는 일이, 동학의 궁극적인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개인의 공고(鞏固)한 줏대, 즉 주체성 또는 정체성을 맨 먼저 세우는 것이 우선인 것이며,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지표(指標)인 것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치를 생각하지 못하는 그들을 바라보는 저의 심정으로는, 그들의 주장대로 친일이 국가와 민족에 해독(害毒)이었다면, 왜 60 년간은 말 한마디 없다가 이제야 떠드는가? 를 묻고 싶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간의 역사가 <말할 수 없는 시대였다>고 항변하고 싶겠지만, 그 보다 더 심한 <말할 수 없었던 시대>가, 일제의 침략시기이고 이 시대가 바로 역사적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일제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선택과, 지금에 와서 지난 시대를 단죄하고 심판하려는 자들의 해방 후 60 년간의 생존을 위한 선택이 무엇이 다른가를 말해주기 바랍니다. 어떤 면에서는 일제시대 보다는 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의 손쉬운 선택이 아니었을까요? 지금 현대사와 이 시간에도 친일행위보다 다 악랄하게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해치는 집단과 개인이 있다고 믿고 있는 현실이고, 과거 60 년간에 국가와 민족을 향해 친일행위 보다 더 악랄한 죄악을 저지른 자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민족의 이름으로 그런 집단과 사람들을 단죄하고 심판했다고 믿고 있습니까? 민족문제 연구소가 어떤 자료를 가지고 천도교단의 교역자들을 친일파로 단정하는 지는 저는 정확히 모릅니다.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끓어오르는 분노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친일 행위자로 1차로 발표된 3,095 명중 27명은 참혹한 일제시대 속에서 천도교를 이만큼 만이라도 이끌어온 천도교단의 중진 인물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이 천도교단을 떠나, 다시 말하면 교직을 떠나 순수한 개인 자격으로 친일을 했다면 저는 이해하려 합니다. 또 이분들이 저지른 친일행위로 인하여 개인이나 교단에 해를 끼쳤다면 용서하지 않겠습니다. 정확하게 알고, 증거가 될 만한 자료가 있으시면 자유게시판에 올려주십시오. 단순히 이런 저런 일에 이름이 들어 있으니까 친일이라면 저는 친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제시대 수십 만 명의 친일로 인하여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 일에 앞장 선 천도교의 지도자들이었습니까? 이 민족의 누구라도, 친일 행위자라고 알려진 약 4,000 명 정도의 인원 속에 천도교의 교역자가 27명이나 되는 많은 중진 교역자들이 들어 있다는 것을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무슨 평가기준으로 중죄(重罪)에 해당할 수 있는 1차 발표자 명단 속에 이렇게 많이 들어갔습니까? 여러분은 그 진실을 아십니까? 순수한 마음으로 교단만을 생각하여 본다면, 이 분들의 교단 안에서의 역할로 인하여 오늘의 천도교가 있고, 우리가 신앙할 수 있는 천도교의 교당들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남들이 무어라 해도 우리는 천도교가 친일파의 소굴이라고 떠 벌려서는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일제시대의 아픈 치부를 우리 스스로 떠들어서는 이득이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 부끄러운 일 아니더라도 우리의 지금의 모습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지 않습니까? 지금의 있어서의 천도교교단과 천도교인 개개인의 도덕성과 정의가 천도교 발전과 민족의 역사발전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역사창조의 중심도 아니요, 핵심은 더더욱 아닌 우리가 반성하고 참회한다고 무슨 덕이 있으며 이 국가와 민족이 어떤 인정을 해줄까요? 우리만의 부끄러운 잔치일 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천도교는 친일파의 소굴이니 반성하라고 하지도 않았고 국가와 민족에 한없는 해독을 끼친 종교집단이라고 비난하지도 않는 시점에, 친일의 경중의 깊이와 교단의 손익(損益)을 생각하지 않고, 성명서를 생각 없이 내어 바보만 된 꼴이 되었습니다. 천도교가 친일파의 소굴인양 떠벌려서, 성명서를 발표해서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이나 집단이 다 반성하지 않는데, 보기 드물게 정의를 말하는 양심적인 종교단체가 천도교뿐이라고 온 국민이 칭송을 합니까? 민족종단답게 훌륭한 종교집단이라고 칭찬하는 말을 들으신 분 있습니까?
자칭 양심과 정의를 부르짖는 부류들이, 천도교가 친일행위를 하여 국가와 민족 앞에 죄를 졌다고 단정하고 규탄하고 반성하고 있다면, 그런 부류들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렇게 당당한 양심과 정의를 가지고 천도교 중앙 집단에 중심이 되어 일했다면, 왜 천도교가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양심도 정의도 천도교를 파멸로 몰아갑니까?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교단을 위해 한 평생을 바친 그 분들을 따뜻한 애정으로 감싸주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시류(時流)에 따라 아무런 기준도 없이 단죄(斷罪)할 일은 더더욱 아닌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평가의 기준은, 이 세상과 이 시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수운 대신사님의 말씀에 따라 우리가 정하는 것임을 잊어서도 안 되고 흔들려서도 안 됩니다.
민족문제 연구소가 발표한 우리 교인들의 친일 행위내용을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었거나 자료를 자발적으로 제공했거나, 개별적으로 연구하여 그 결과물을 공개 또는 민족문제 연구소에 제공하여 친일 행위자로 판단하게 한 자를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본인은 여러 자료들과 풍문으로 대충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 교인들이 잘못된 자료와 확인에 의하여 잘못된 것이 밝혀지면 모든 자료들을 세밀하게 분석하여 친일 행각의 경중(輕重)을 따져 재점검하고 작성하여, 중죄(重罪)에 해당하는 1차 발표의 잘못을 지적하고, 형평에 맞도록 평가받기 위하여 여러 동덕님들의 서명을 받아 항의를 하고, 친일행위자 명단에서 삭제하도록 할 것입니다. 동덕 여러분들이 공론(公論)에 부쳐 깊이 생각하고 의견을 내어주시기를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註00; 지금까지 단 한 명의 참여자가 없다. 개별적인 의견을 제시한 것은 아래의 모음 글에 있지만, 교단이 아무런 의사를 표명하지 않은 것은, 교단 전체가 무기력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는 교단으로 추락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다시 읽기를 권하는 글.
1. 과거사반성, 천도교의 공식입장을 촉구한다. /이희관-천도교 홈. 포덕 146년 8. 31. 2. 친일청산에 대한 소고. /이희관 -천도교 홈. 포덕146년. 9. 1. 3. 과거사반성, '개인의견'으로 밝혀져. /이희관-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1. 4. 천도교단의 과거사 반성에 대하여. /김호성 -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2. 5.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발표장을 다녀와서. /임순화 -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2. 6. 친일행적 참회관련 편파적 비판은 부당함. /천덕산. -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5. 7. 천도교측 친일 인사명단은 누가 조정했나? /김호성 -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5. 8. 그대가,만약 일제강점기에 교단의 지도자였다면/임순화 천도교 홈. 포덕146년 9. 6.
9. 천도교단의 친일문제에 대하여. /김호성 -천도교 홈-포덕 146년 11 5.10. 성명서; 아래 글 참조 천도교의 과거 친일행적을 참회하며, 민족운동의 전통을 이으려 한다!
오늘 우리 천도교인들은 미완의 광복을 완성하고 통일의 민족사를 밝게 열기 위해 일제시대 말기에 천도교단과 일부 천도교인들의 친일행위를 민족 앞에 참회한다. 일제말기, 침략전쟁에 혈안이 된 일제의 강압 속에 최 린, 이종린 등 일부 천도교인들은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정책과 침략정책에 동원되고, 나아가 협력하며 민족사에 큰 잘못을 저질렀다. 이제 그 잘못을 참회하는 것은 오늘 우리 천도교인들의 책임임을 분명히 하면서, 역사의 정당한 평가를 달게 받으려 한다.
천도교는 1860년 창도된 이래 후천개벽을 이루어 보국안민과 포덕천하, 광제창생의 큰 뜻을 실현하고자 신명을 다해왔다. 1894년 제폭구민 보국안민과 척 왜양 창의의 깃발 아래 전개된 반봉건 반외세의 동학혁명은 근대 민족운동의 시원이 되었다. 이후 천도교는 자주적인 근대화를 위한 갑진 혁신운동, 민족계몽을 위한 근대식 교육운동, 일제 무단통치에 저항한 3·1독립운동, 민족문화 창달을 통한 자주독립운동, 멸왜 기도운동 등으로 끊임없이 민족운동을 전개해 왔다.
그 과정에서 30여 만 명의 교인이 희생되는 등 천도교단이 당한 수난과 고통은 헤아릴 수 없이 깊고 컸다. 그러므로 오늘날 천도교인으로서 독립유공자로 서훈된 의암 손병희 선생 이하 수백 명의 독립투사는 오히려 빙산의 일각이며, 이제 곧 공식적인 명예회복이 될 수십만 동학군과 아직 제자리에 모시지 못한 수만 명의 천도교 독립유공자들을 발굴하는 것은 우리 교단만의 과업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천도교 민족운동의 전통이 높고 빛날수록, 일제 말기에 교단의 일부 지도자들이 저지른 친일행적은 비록 그것이 일제의 강압이라는 불가항력적 요인에 기인한다 하더라도 보국안민을 이념으로 하는 교단의 본질과는 배치되는 것이며, 이를 순도 순국선열들에게 사죄하지 않을 수 없다.
1930년대 말 이후 천도교의 일부 지도자들은 일제의 강압에 굴복하여, 그들이 전시체제의 총력지원을 위해 정책적으로 추진했던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 ‘국민총력천도교연맹’ 같은 친일단체를 결성하고, 일제의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협력하는 과오를 저질렀다.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에 물자를 동원하고, 민족의 젊은 동량을 전쟁터로 보내는 일에 앞장선 교역자도 있었다. 그 자신의 과거 항일독립운동의 경력마저도 무위로 돌리며 친일의 굴레를 뒤집어썼다. 그 기간 동안 천도교의 기관지는 대다수 천도교인들의 민족의식과 항일투쟁을 외면하면서 일제의 정책을 선전하고 정당화하는데 동원되었다. 물론 이것은 그 당시 발행되던 모든 국내 정기간행물이 예외 없이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다.
해방 후 반민특위 법정에서 최 린은 “나를 광화문 네 거리에서 처형해 매국의 교훈으로 삼아 달라”며 민족 앞에 고백하고 속죄의 눈물을 흘렸다. 그 심정이 바로 오늘 천도교인의 심정이다. 지난날 역사의 바른길을 오판하여 저지른 친일행적으로 인하여, 천도교는 민족사에 하나의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따라서 왜곡된 민족사의 광정과 올바른 민족정기의 확립이라는 오늘날의 전민족적 과업에 우리는 능동적으로 협력하고 동참하여 후천개벽의 천도교 전통을 다시금 확립해 나갈 것이다.
앞으로 펼쳐질 역사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우리는 지난 과오를 용서받고 빛나는 천도교 민족운동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재삼재사 노력하려 한다. 따라서 우리의 참회는 오늘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와 아울러 민족이 계승하고 자랑해야 할 천도교 민족운동의 전통 또한 동학 천도교 역사에 기록하여 다시는 어떠한 외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 정기와 천도교 본연의 이념을 지켜나갈 것이다.
오늘 우리의 반성을 한울님과 스승님, 그리고 순도 순국선열들의 성령에 고하면서, 민족 성원 모두의 용서와 질정을 바랄 뿐이다.
포덕 146(2005)년 8월 29일.
천도교 동학 민족 통일회. 천도교 여성회 본부. 천도교 청년회 중앙 본부.
========================================= (사)동학 민족 통일회/ 110-775 서울시 종로구 경운동 88. 수운회관 911호 전화 02-742-5541 / 팩스 02-732-5402.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자우게시판에 2006년 1월 24일에 게재된 것을 옮김.
친일행위는 신파만 했는가? / 2006.04.29.
아래에 기록된 인물들은, 천도교 교인들입니다.(신, 구파 구분은 본인이 필요에 따라, 교사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그냥 교인들이 아닙니다. 거의 대 다수가 일제의 침략시대에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면서 교단을 이끌고 온 교단의 중심인물들입니다. 지난 2005. 9. 22.에 민족문제 연구소가 제 1차 친일행위자로 친일 인명사전에 수록될 인물로 발표된 사람 3,095명 중 천도교 인물 27명입니다.
김동수 김병엽 김병제 김종현 남증석 박석홍 백중빈 이군오 이근섭 이돈화 이우영 이인숙 임문호 전의찬 정광조 정용증 조기간 최 린 최안국 하상태 20 명.
구파로 분류되는 인물 들 중 중진 교역자. 박 완 손재기 안상덕 이 단 이종린 이종식 최준모 7 명.
수 년 전부터 천도교 홈 자유게시판과 천도교와 관련된 여러 게시판에, 현 천도교 중앙 총부가 친일파 후예들과 추종자들이 운영하는 한심한 집단이고 꼭 없어져야 하는 집단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친일은 신파만 했고, 구파에선 친일 행위를 한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이 항일 투쟁만 하였다는 것인가를 묻고 싶습니다. 신, 구파의 기록인 각종 교단사 어디를 봐도 일제시대의 40여 년 동안 신파가 교단을 독점적으로 운영했다는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1920년대 중반부터 신, 구 갈등으로 인한 여러 차례의 분립(分立)과 합동(合同)으로 얼룩져 있음은 인정하지만, 신파가 친일행각을 해서 교단을 붕괴시켰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교단의 발전이 지체되고 어렵게된 것은, 어느 한편의 전적(全的)인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라 신, 구 양쪽이 다 책임을 져야 할 몫이 있습니다. 이번에 발표된 친일 행위자 중 7명(정광조 원로는 구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교역자이지만 제외함.)이 구파의 원로 교역자들로서 일제시대의 일정기간 교단을 책임지고 이끌고 온 거목(巨木)들입니다. 그들도 친일을 앞장 서 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시한 교사기록들을 보면 신, 구파 어느 한 쪽이 친일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시기엔 신, 구파 지도자의 상당수가 친일 행위를 했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 분들은 적어도 친일로 인하여 교단에 깊은 상처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 분들은 신, 구 갈등만 아니었다면, 신, 구파를 막론하고 교인들 가슴속 깊이 숭앙(崇仰)해야 할 교단의 훌륭한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옳고 그른 것으로 나누어 평가할 일도 아니며, 우리가 비난하고 배척할 일도 아닌 것입니다. 잘못된 시대에 태어나 억울하게 살다간 비운의 희생자들입니다. 해방이후 신, 구파가 통합되었어도 어려운 점이 많이 있었으나 포덕 103년 이후에는 신, 구 계열에 소속되어 있는 다수의 교역자들이 뒤섞여 교단을 책임지고 운영해 왔고, 지금도 엄격히 분류하면 구파의 지도자들의 후손들 여러 명이 교단운영에 중책을 맡아 참여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현 천도교 중앙 총부는 신파의 친일행위자 후손들과 그 추종자들만이 운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이나 신, 구파를 자세히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 신, 구파와는 어느 쪽 연원에도 속해 있지 않으며, 친일행위자와는 만난 적도 없기 때문에, 신, 구파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 교단운영에 많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도 이런 사람들 중에 하나(無派, 無淵源으로 어느 곳에도 속해 있지 않았습니다.)로 중앙 교단에서 10여 년의 고락를 같이 했었습니다. 아래의 교사는 <동학. 천도교 약사.-천도교사 포덕 103(1962)년 판의 개, 수정본(1990년. 구파기록)> pp.120-152.까지의 내용을 요약한 것을, 김 완수(金 洙) 편저(1993년 9월 간행; 구파기록). <동학 천도교사.>pp. 501-542.의 내용과 <동학, 천도교 약사.-김 완수 편저.>(2003년 7월 간행; 구파기록) pp. 192-349.의 내용과 천도교 정통 연원회에서 편찬한 <천도교 정통 연원 약사-1992년 8월 간행; 구파기록.>pp. 179-243.의 내용을 대조하였습니다.
<천도교사-부 총서.(1962년. 구파 기록)>는 다른 기록의 하나인 구파에서 집필된, 천도교사(天道敎史 附 叢書)는 1930년경에 최 준모(崔俊模) 정 광조(鄭廣朝) 이 종린(李鍾隣)등이 중심이 되여, 이 돈화(李敦化) 이 인교(李仁敎-이인숙의 잘못인 듯.) 기타 여러 사람들의 자료 제공으로 편찬된 것이나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희귀(稀貴)해져, 1962년에 그 당시 신, 구파 통합을 위한 수습위원장이셨던 해암(海菴) 이 종해(李鍾海)원로께서 다시 편찬 간행한 것이 있는데, 이 책은 필경(등사)본 총 276페이지로 되었습니다. 이 교사는 1930년 이후의 역사를 첨가했는데 한 순회(韓順會)장로의 자료 제공으로 1961년까지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책 또한 귀해져서 1990년에, 현재 수원교구 중심으로 이루어진 용담연원 이름으로 동학 천도교 약사 부 총서(東學 天道敎略史 附 叢書)라는 활자 인쇄본이 간행되었습니다. 이 책의 단점은, 개, 수정의 원본자료를 밝히지 않아 신빙성이 약하다는 것입니다.
포덕 66(1925)년 8월 19일 교회의 분열상태를 조정하기 위하여 구파의 모임인 통일기성회 조직위원으로 이종린(李鍾麟), 최준모(崔俊模), 손재기(孫在基) 등 100여명이 모여 이종린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포덕 68(1927)년 12월 22일에 제 1회 정기 총회에서 이종린, 최준모는 상무 종법사의 일원으로 선임했다.
포덕 69(1928)년 10월에 박래홍이 피살되자 천도교 총동맹 대표대리에 박 완이 선임됐다.
포덕 71(1930)년 12월 23일 신, 구 합동대회에서, 대령에 정광조(鄭廣朝), 부대령에 최준모가 선임됐고, 천도교 청년 총동맹과 천도교 청년단이 합동하여 천도교 청우당으로 발족하고 손재기를 당 대표 위원장으로 선임했다.
포덕 73(1932)년 4월 2일 정기총회에서 4세 법통을 인정하지 않아 종문을 문란케 하였다 하여 이종린이 대회 부의장의 자격으로, 의장을 대리하여 대령 정광조를 출교처분 결의를 했다. 또 이 대회에서 대령에 권동진(權東鎭), 부대령에 최준모(성도관장 겸임), 경도관장에 이 종린(지도관장 겸임.)으로 선임했다.
포덕 73(1932)년 4월 3일에 신, 구파가 재 분열되었습니다. <신파>란 포덕 73년 4월 2일 정기총회에서 4세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권동진외 187명이 이탈하여 최 린을 추대한, 최 린파를 지칭하고, 춘암상사를 4세 법통으로 인정하는 법통파를 <구파>라고 합니다.
포덕 77(1936)년 10월 5일에 박 완은 현기원 종무원으로 선임됐다.
포덕 81(1940)년 4월 4일 신 구파 분열된 지 8년 만에 합동대회를 하여 교령에 이종린, 부교령에 최안국(崔安國), 교화관장에 조기간(趙基 ), 교무관장에 박석홍(朴錫洪), 경리관장에 전의찬(全義贊), 감사원장에 손재기. 상임선도사에, 최준모, 정광조. 이돈화(李敦化)를 선임했다.
포덕 83(1942)년 4월 3일 중앙 대교당에서 총회를 열어 교령에 정광조, 부교령에 최준모로 개편되고, 교화관장에 조기간, 교무관장에 박석홍, 경리관장에 전의찬, 감사원장에 손재기. 상임선도사에, 이인숙(李仁淑), 이종린 이돈화를 선임했다.
포덕 85(1944)년 4월 3일 중앙 대교당에서 정기총회를 열어 교령에 이종린, 부교령에 조기간로 개편되고, 교화관장에 조기간 겸임, 교무관장에 박석홍-정통연원사엔 박성홍으로 잘못 기록됨, 경리관장에 전의명(全義明-전의찬의 잘못.), 감사원장에 손재기. 신인간 사장엔 박 완, 상임선도사에, 최준모, 정광조 , 이돈화를 선임했다.
포덕 86(1945)년 10월 25일에 천도교 전국 임시대회를 개최하여 최 린을 출교 처분하고 3원 1관제(3 院 1 觀制)를 채택하고 교화원장에 백세명(白世明), 교무원장에 이 단(李團). 경리원장에 홍순의(洪淳義), 감사관장에 안상덕(安商悳)을 선임했다.
포덕 87(1946)년 5월 23일 오전 10시 30분에 구파 대표 최준모와 신파대표 이군오의 합의하에, 신구파가 분립(分立)하기로 하고, 양측에서 3인씩 대표를 내기로 합의했다. 24일에 구파인 천도교 총부는 한순회(韓順會), 손재기(孫在基), 이종식(李宗植)을 대표로 내고, 신파는 천도교 본부라고 하고 전의찬(全義讚), 임문호(林文虎) 이우영(李宇英)을 대표로 했다. 26일에 각 파 대표들이 모여 재정과 집기를 반분하여 교문을 달리하여 한 건물에 두 개의 간판이 걸리게 되었다. 동년 7월엔 구파는 보국당(輔國黨)을 창당하여 손재기를 당수로 선임하였다.
포덕 88(1947)년 4월 2일에 정기대회를 열어 교화원장에 정환석(鄭煥奭), 교무원장에 이 단, 경리원장에 홍순의, 감사에 안상덕, 장로에 오세창(吳世昌), 나인협(羅仁協), 최준모, 정광조, 이종린, 상임 선도사에 한순회. 민석현(閔奭鉉)을 선임했다.
포덕 89(1948)년 4월 4일 에 신, 구파가 무조건 합동을 요청하여 합동대회를 개최하여 교화원장에 정환석, 교무원장에 계연집(桂淵集), 경리원장에 황생주(黃生周), 감사관장에 이동락(李東洛)이 선임되었다.
포덕 95(1954)년까지는 구파의 핵심 인물들이었던 이종린, 최준모 원로와 신파의 정광조 원로 등 세 분이 환원하시고, 최 린은 1950년 7월 14일에 북괴에 의해 북으로 피랍(被拉)되어 가셨기 때문에 신, 구의 갈등이 해소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천도교 교단의 신, 구파 친일문제의 논쟁에 대한 선택은, 천도를 꿰뚫어 보는 넓은 안목을 가지신 여러분의 냉철한 양심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나 위의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올바른 결정을 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소망입니다.
다시 읽기를 권하는 글.
1. 과거사반성, 천도교의 공식입장을 촉구한다. 이희관-천도교 홈. 포덕 146년 8. 31. 2. 친일청산에 대한 소고. 이희관 -천도교 홈. 포덕146년. 9. 1. 3. 과거사반성, '개인의견'으로 밝혀져. 이희관-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1. 4. 천도교단의 과거사 반성에 대하여. 김호성 -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2. 5.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발표장을 다녀와서. 임순화 -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2. 6. 친일행적 참회관련 편파적 비판은 부당함. 천덕산. -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5. 7. 천도교측 친일 인사명단은 누가 조정했나? 김호성 -천도교 홈. 포덕 146년 9. 5. 8. 그대가, 만약 일제 강점기에 교단의 지도자였다면. 임순화 위의홈.포덕 146년 9. 6.
9. 천도교단의 친일문제에 대하여. 김호성 -천도교 홈-포덕 146년 11 5.10. 성명서.-대 국민 성명서로 친일행위에 대한 천도교의 반성과 각오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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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천도교는 침묵하는 교단이 되어 가는가? / 2007.06.23 정 성민 동덕의 "동학 농민 운동과 농민 운동의 차이점?"이란 질문에 붙여. 천도 게시판 연 번호 1726호(포덕 148년 6월 1일)로, 정 성민 동덕의 "동학 농민 운동과 농민 운동의 차이점?" 이란 질문을 본 사람이 현재로 86 명이나 되지만, 이에 대한 답을 주어야 할 해당 기관이나 친절하고 정확하게 답을 해줄 동덕이 없다는 현실에 절망감을 느낍니다. 그런데 더 참담하게 하는 것은, 이 놀라운 후천의 세상에서 듣도 보도 못하고 비교할 데도 없는 최상의 천도교 교단이 기초적인 교리, 교사에 대한 질문에 아예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종교 교단의 최우선의 일은, 포덕 교화에 있고 그 종교를 단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용어에 대한 확실한 정의를 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래야 교리, 교사가 확연하게 정리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분들이 다 정확하게 동학혁명과 농민전쟁에 대한 차이점을 아는데 왜 당신만 모르느냐? 하고 침묵하는 것인지 매우 궁금합니다. 천도교 홈 게시판이 개설된 때부터 지금까지 살펴 본 저의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이것이 천도교의 참모습인가? 제가 천도교를 신앙하거나 동학과 천도교에 깊은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 지금 상당부분 왜곡되어 있는 천도교의 교리와 교사를 올바르게 이해하여 연구하고 신앙하는 데 조금의 도움이 될까 해서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카페(http://cafe.daum.net/oamdonghak)를 개설하여, 모을 수 있는 자료들을 다 모아 여러분에게 공개해 왔습니다 이것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고, 당면한 문제들을 기초부터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근 반세기를 처절하게 근근히 연명해온 교단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는 입장에서 추측을 해 보건 데, 동학혁명에 대한 새로운 평가와 명칭에 대한 변동과정과 학계의 입장을 정확히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는 분은 극히 소수라고 생각됩니다. 교단 홈 게시판에는 그 동안 이런 저런 글들이 많이 게재되고, 각자의 의견이 수없이 리풀이 달려 돌아가고 있지만, 어느 누구도 정 성민 동덕의 질문에 대한 시원한 답을 해준 분도 없고, 의문을 해소할 안내도 없고, 추가 또는 보충의 질문도 없는 것으로 보아 관심도 없고, 답하는 사람도 없는 이 놀라운 현상이, 단적으로 천도교가 처한 처절한 현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동학 또는 천도교 사상의 기반을 구성하고 있는 30-50여 개의 단어들에 대한 구체적인 질문만 하면, 교단의 원, 주직에 임해 있거나 교인들을 지도 교화해야할 위치에 있는 원로들이나 지식인들이, 해답을 해주어야할 의무와 책임을 회피하는 교단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천도교의 기본적인 질문마저 조금의 부끄러움도 없이 묵살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지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다양한 논의와 의견 제시가 없는 <침묵하는 교단>이 되어 간다면, 어떻게 천도교가 중흥 발전할 수 있으며, 중흥 발전을 위한 어떤 논의를 할 수 있으며, 현재의 참담한 현실을 극복하고 중흥할 수 있다고 자부할 수 있겠습니까?
"동학 농민 운동과 농민 운동의 차이점?"을 교단의 원, 주직에 임해 있거나 교인들을 지도 교화해야할 위치에 있는 원로들이나 지식인들이 정확히 알고도 알려주지 않고 침묵했다면, 그것은 지독한 배타적인 교만으로 가득 찬 인간이며, 천도교의 교리 교사에 무지, 무식한 사람과 유식한 사람이 있다고 임의적인 기준으로 판정하고, 서로는 영원히 상종을 못할 무리들이라고 철저히 믿고 있는 소인배이며, 평범한 사람들 머리 위에 올라서서 보잘 것 없는 지식으로 무장하고 우월감과 자만심으로 가득 찬 인간일 것입니다. 만약 모르면서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알아서 알려줄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침묵했다면, 얼마나 냉담한 인간들이며, 인간적인 인성과 따뜻한 교우애가 없는 무리들이 되는 셈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사람을 한울님처럼 우러러 모신다.>는 수운의 제자라 할 수 있겠는가 자문해 봅니다. 정말로 천도교가 어떤 종교인가를 확실히 알고 신앙하고 있는 독실한 신앙자인지 궁금합니다. 이런 불성실하고 교만한 사람들은 참된 천도교인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대인답고 현인답고 가장 인간적이며, 도인답고 존경의 대상으로 추앙을 받을 만 하고 실제로도 존경을 받고 있겠지만, 내면을 드려다 보거나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언행을 보면 <사람을 사람답게 우러러 대하는 품성>은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수운의 한울을 모신 사람다운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 자유게시판에 게시한 "동학혁명이냐, 갑오농민전쟁이냐,"(6월 말일 17;00.까지 게시하고 그 이후는 학술자료 읽기 난으로 옮기오니 계속해서 활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를 읽으시면 질의하신 내용에 충분한 답이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확실한 자료에 의한 보완적 내용이 필요하신 분은, 본 연구소 학술자료 읽기 중 "동학에 관하여 궁금했던 다섯 가지 질문."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더 구체적인 자료를 읽고 싶은 분은 2002년에 동학학회가 출간한 <동학 학보> 통권 3 호 특집 "동학혁명인가, 농민전쟁인가?"중에서
동학혁명의 전개와 근대성-이현희.동학이란, 동학혁명, 농민전쟁.-박성수.동학혁명론; 동학혁명인가, 갑오농민전쟁인가.-김창수.동학혁명인가, 농민전쟁인가.-황선희 교수 등의 글을 숙독하시기 바랍니다.
또 더 많은 자료를 원하시면 오암 동학사상 연구소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본 연구소가 정리 중에 있는 <분야별 문헌자료 목록-제 1차 분>과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사업회가 간행한 "동학혁명 100주년 기념논총 상, 하권(1994년 간행.)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정리된 <동학 농민혁명 주제별 논문목록>을 공개할 수 있습니다.
/ 지난 10년을 돌아보며(7-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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