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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에 대한 최초의 관변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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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윤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958회   작성일Date 13-01-08 02:25

    본문


    동학에 대한 최초의 관변기록

    본 글은 ‘고종실록’ 동학관련 내용으로서 동학과 수운 최제우선생님에 대한 부정적인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동학 역사에 있어 최초의 기록내용으로 참고할 가치가 크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특히 대신사에 대한 심문 즉 공초내용이 상당부분 수록되고 있고, 동학-천도교에서 중요히 다루는 영부와 주문에 대한 내용도 있어 역사서뿐만 아니라 연구서로서도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해본다.

    다만 아쉬운 것은 대신사님의 인격과 동학의 바른 이치 등에 대해서 전무한 것은 동학이 유학의 이단이고 동학교조 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을 역적으로 몰기 위한 조작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하며 읽으시면 될 것 같다.

    * 끝으로 본 한글번역 자료1편은[동이서전읽기-조선왕조 고종순종 편]을 옮겼다. 자료2편은[동학참생명-고종실록의 동학관련기사]를 옮겼다. 자료1편에서 필자(송암)가 국어사전등을 인용하여 설명을 보충하였다.] 


    1. 동이서전읽기-조선왕조 고종순종 편(자료1편)

    ○ 고종 즉위년(1863) 12월 20일에 선전관 정운귀가 올린 서계(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을 받은 관리가 처리한 그 일의 전말을 보고한 문서)에 "신이 11월 12일에 공손히 전교(지시)를 받들어 무예별감 양유풍, 장한익, 좌변포도청 군관 이은식 등을 거느리고, 경상도 경주 등지에서 동학(東學)의 괴수(우두머리, 대표)를 자세히 탐문하여 잡아 올릴 목적으로 바삐 성 밖으로 나가 신분을 감추고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조령에서 경주까지는 400여 리가 되고 주군(州郡)이 모두 10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 여인과 산골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위천주(爲天主-동학의 초학주문)'라고 명명하고 또 '시천주(侍天主-동학의 본주문)'라고 명명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한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한지를 이를 통해서 알만합니다. 그것을 전파시킨 자를 염탐해 보니, 모두 말하기를 '최 선생이 혼자서 깨달은 것이며 그의 집은 경주에 있다.'고 하였는데, 만 사람이 떠드는 것이 한 입으로 지껄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경주에 도착하는 날부터 장시(場市-조선 시대, 지방에서 보통 닷새마다 열리던 사설 시장)와 사찰(寺刹-승려가 불상을 모셔 놓고 불도(佛道)를 수행하여 교법을 펴는 장소) 사이에 출몰하면서 나무꾼과 장사치들과 왕래하니, 혹은 묻지도 않는 말을 먼저 꺼내기도 하고 혹은 대답도 하기 전에 상세하게 전해주었습니다.

    ○ 그들이 최 선생이라고 부르는 자는 아명(兒名-아이 때의 이름)이 복술(福述)이고 관명(冠名-관례를 치르고 어른이 되고 나서 새로 지은 이름)이 제우로서, 집은 본주의 견곡면 용담리에 있었는데, 5, 6년 전에 울산으로 이사 가서는 무명(솜을 자아 만든 무명실로 짠 피륙)을 사고팔아 생계를 유지하다가 근년에 다시 본토로 돌아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혹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정성을 다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에서 책 한 권이 떨어지는 것을 얻어서 공부를 하였다.'라고 한답니다.

    ○ 사람들은 본래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알지 못하는데 그가 홀로 '선도(善道-착하고 바른 도리)'라고 한답니다. 대체로 그 도(道)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몸과 입을 깨끗이 하고서야 열세 글자를 전수해 주고, 또 그 다음에 여덟 글자를 전수해 준다고 합니다.(여덟 글자의 강령주문과 열세자의 본주문의 순서가 바뀜-필자견해)

    그것을 배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반드시 화를 면하고 병이 제거되며 신명을 접하게 된다는 등의 말로 속이고 홀리면서 권유하는 바람에 그 말에 빠져들어 가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글자를 모르는 아녀자와 아이들도 미쳐 현혹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약을 먹는 법이 있는데 한 번 그 약을 먹으면 이 학설에 전심하여 다시 깨달으려는 생각이 없으며, 혹 약을 먹는 중에 금기하는 일을 조심하지 않다가는 크게 광증(狂症-정신에 이상이 생긴 병증)이 나서 남의 눈을 빼먹고 그 자신도 스스로 죽고 만다고 합니다.(수운 최제우 대신사님을 이단으로 처형시키려는 강한 의도가 보이는, 너무 부정적인 내용의 보고서라 생각함-필자견해)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돼지를 잡고 과일을 사서 궁벽한 산 속으로 들어가 제단을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글을 외워 귀신이 내려오게 하는데, 지금 이 괴수 최가의 집에서 금년만 해도 여러 차례 모여서 강설(講說-)글의 뜻을 강론하여 설명함)하였다고 합니다.

    ○ 대개 처음 배울 때에도 예물이란 명목으로 전부 선생에게 바치고, 전도를 받아 깨닫게 되면 재산을 털어 선생한테 주되 조금도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작년에 최가가 잡혀 갇히게 되자 제자 수백 명이 와서 호소하기를, '저희들의 공부가 본래 백성을 해치고 풍속을 파괴시키는 것이 아니니, 저희 선생님을 속히 풀어주소서.'라고 하였답니다.

    진영에서 즉시로 놓아주니, 몰려다니면서 의심할 만한 자취를 보이지 않았고 또한 비상(非常-특별한)한 일을 꾸민다는 말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원근(멀고 가깝고)을 막론하고 공부하러 오는 자는 날마다 늘어난다고 합니다.

    이상과 같이 전해들은 여러 가지 이야기 중에는 황당한 내용이 있어 그대로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달 9일에는 따로 양유풍 등을 곧바로 최복술이 살고 있는 곳으로 보내어서 자세히 염탐해 오게 하였습니다.

    지금 이렇게 따로 사람을 보내어 만나보고 문답한 조목(條目)을 앞서 전해들은 이러저러한 이야기와 비교해 보면, 비록 목격하지 못한 한두 가지 일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은밀히 서로 부합하여 정녕 의심할 것이 없는 것이 또한 많습니다.

    최복술이 동학의 괴수라는 철안(鐵案-쉽게 변하지 않는 결정이나 의견)이 이미 정해졌기 때문에 신은 그날 밤에 장교와 나졸 30명을 동원하여, 그 소굴을 곧바로 들이쳐 최복술을 결박하여 끌어내고 또 제자들 23인도 결박하였습니다." 하였다.

    ○ 3월 29일, 경주의 동학 죄인 최복술 등에 대해서 신문하니, "최복술은 경주 백성으로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의관을 갖추고 행세하는 사람으로서, 양학(서학, 천주교)이 갑자기 퍼지는 것을 차마 보고 앉아 있을 수 없어서,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13자로 된 말을 지어서, 동학(東學)이라고 불렀는데, 동쪽 나라의 학문이라는 뜻에서 취한 것입니다. 양학은 음이고, 동학은 양이기 때문에 양을 가지고 음을 억제할 목적에서 늘 외우고 읽고 하였습니다.

    ○ 먼 데서나 가까운 데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부득이 만나 주었기 때문에 도당(徒黨-불순한 사람들이 떼를 지어 이룬 무리, 반역도당)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 붓을 잡고 귀신이 내리게 했거나,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거나, 돈과 쌀을 토색질한 일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선생이니 제자니 하는 소리도 그가 자칭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간악한 종교와는 달라서 애초에 숨기거나 속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이내겸은 "제 아버지의 병에는 약도 효력이 없기 때문에 최가를 찾아가 보았더니, 13자를 써 주면서 읽으라고 권하여 밤낮으로 외웠으나 병이 차도가 없기 때문에, 그만 걷어치우고 그 자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편지까지 썼습니다. 이른바 그 문서라는 것은 포덕문과 수덕문입니다.(이내겸선생의 진술은, 죽음이라도 면해보고자 하는 의견일수도 있고, 전달인의 악의적인 내용으로도 봄-필자의견)

    최복술이 본래 글씨를 잘 쓴다는 소문이 있어서 거북 귀(龜) 자, 용 룡(龍) 자, 구름 운(雲) 자, 상서로울 상(祥) 자, 의로울 의(義) 자 등의 글자를 써서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러면 그 부형들이 약간의 돈이나 곡식으로 수고를 갚았을 뿐, 실제 토색질(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억지로 달라고 함)을 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강원보는 "저는 풍담(風痰-풍증을 일으키는 담. 또는 풍증으로 인해 생기는 담)으로 집에서 앓고 있다가 그것을 외우기만 하면 다 빠졌던 머리털도 다시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병이 나은 후로는 더 외울 맛이 없어서 그만두었습니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강원보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주문수련이 치병에도 대단한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필자견해)

    ○ 박응환은 "제가 병 때문에 최가를 찾아갔더니, 그가 말하기를,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삼강오륜을 숭상하면 병도 나을 수 있다. 아침이 되면 수학(受學-학문을 배움, 도인의 공부하는 자세)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각기 잠자리로 돌아가자던 중에 붙들려 왔으므로 다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김의갑은 "저는 최복술과 같은 동리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실정을 속이겠습니까? 최복술의 아들 최인득은 늘 나무칼을 가지고 뛰거나 춤을 추면서 '용천이검(龍泉利劍)'이라는 노래를 불렀기 때문에 미치광이로 알고 절대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김이갑 선생의 증언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심리적 상태로 봐 이해가 가는 내용이고, 또한 보고자의 악의적 사심이 반영된 내용이라 봄-필자의견)

    각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적어도 30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뒷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병이 낫게 해주기를 빌었으나 끝내 효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 등지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최가의 행동이 황당해서 밤에 어디를 가노라고 횃불을 찾으면 온 동리가 비웃고 꾸짖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최인득은 "제가 사실 칼춤을 추었지만 본심에서 한 짓이 아니라 미친병이 갑자기 발작해서였습니다. 나무칼을 들고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노래는 '때로구나 때로구나'라고 하는 곡입니다. 이것을 익히기 위하여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본 증언들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심리적 상태로 봐 이해가 가는 내용이고, 또한 보고자의 악의적 사심이 반영된 내용이라 봄-필자의견)

    ○ 최복술의 두 번째 공초에 "제가 경신년(1860,철종11년) 경에 듣건대, 양인이 먼저 중국을 점령하고 다음에 우리나라로 오면 그 변을 장차 헤아릴 수 없다고 하기 때문에, 13자로 된 주문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쳐서 양인을 제어하기 위함입니다.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은 정성을 다하면 이롭지 않은 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인의 책은 반드시 규로 이름을 달았는데 그 글자는 '궁(弓)'자의 밑에 두 점을 찍은 것입니다. 그것을 불태워 마셔서 액운을 없애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그 공부를 시작할 때에 몸이 떨리면서 귀신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천신(天神)이 내려와 가르치기를, '요사이 바다 위에 배로 오고 가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양인인데 칼춤이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검가(劍歌) 한 편을 주었습니다. 문(文-글)을 짓고 부(賦-장중하고 열정적이며 명상적인 장문의 서정시)를 지어 불렀는데 과연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이단의 사설(邪說-그릇되고 바르지 않은 말)이 사람들의 마음을 잘못된 길로 빠져들게 하고 있으니 실로 교화가 밝지 못함을 탄식하게 된다. 이번 경상도 옥에 갇힌 여러 죄수로 말한다면, 지극히 어리석고 지극히 우둔하여 더 말할 여지조차 없고, 이단이란 죄목도 과분하다.

    '죄를 다스리는 데만 치우치지 말고 불쌍히 여기라.'는 훈계는 바로 이런 무리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미쳐서 몰려다닌 행적에 대해서는 뭇사람을 각성시키기 위한 조치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다.(대왕대비의 전교를 보면, 관리의 보고문서 내용들은 공을 세우려는 조작의 흔적들과, 없던 사실들을 꾸며내 동학을 이단으로, 수운 대신사님을 역적으로 몰고 가는 과정들이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필자의견)

    ○ 3월 2일에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이번에 동학이라고 일컫는 것은 서양의 사술(邪術)을 전부 답습하고 특별히 명목만 바꿔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현혹하게 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조기에 천토(天討-하늘이 악인을 친다는 뜻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 하늘을 대신하여 악한 자들을 쳐서 없앰을 이르는 말.)를 행하여 나라의 법으로 처결하지 않는다면 결국에 중국의 황건적이나 백련교라는 도적들처럼 되지 않을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 최복술이 그들의 두목이라는 것은 자기 자백과 사실 조사를 통한 단안이 있으니, 효수(梟首-목이 베여 높은 곳에 매달리다)하여 뭇사람들을 경각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강원보 등 12명은 분등(分等)하여 형배하고, 그 나머지의 여러 죄수들은 참작하여 처리하게 할 것입니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대왕대비의 덕을 받들어 억지로 차등을 두었습니다." 하니, 윤허(허락함)하였다. 끝

    ......................................


    2. 고종실록의 동학관련기사(자료2편)

    고종 001 00/12/20(임진) / 선전관 정운귀가 최제우와 동학에 대해 보고하다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가 서면으로 보고를 올렸다. “11월 12일에 신이 공손히 지시를 받은 다음에 경상도(慶尙道) 경주(慶州) 등지에서 동학(東學)의 괴수 노릇을 하는 자를 찾아내어 잡아들일 목적으로 무예 별감(武藝別監) 양유풍(梁有豊), 장한익(張漢翼)과 좌변 포도청 군관(左邊捕盜廳軍官) 이은식(李殷植) 등을 거느리고 바삐 성 밖으로 나와 신분을 감추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조령(鳥嶺)으로부터 경주(慶州)까지 400여리나 되고 그 중간을 거쳐서 지나가는 고을 만도 십여 개나 되는데 거의 어느 하루도 동학(東學)에 대한 이야기가 귀에 들리지 않는 날이 없었으며 주막집의 여인들이나 산골의 아이들까지 그 글을 외우지 못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름을 지어서 부르기를 ‘위천주(爲天主)’또는 ‘시천주(侍天主)’라고 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또 숨기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오염되고 번성해졌는가 하는 것을 이를 통해서도 알만 합니다. 그것을 전파시킨 자를 슬며시 알아보니 모두들 하는 말이 ‘최선생(崔先生)이 혼자서 깨달아낸 것이고 그의 집은 경주에 있다.’고 하는데 만사람이 떠드는 것이 한입으로 지껄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은 경주(慶州)에 도착하는 날로부터 장시(場市)나 사찰(寺刹) 같은 곳에도 돌아다니고 나무꾼이나 장사치들과 같은 사람들과도 휩쓸려 보았는데 혹은 묻지도 않는 말을 먼저 꺼내기도 하고 혹은 대답도 하기 전에 상세하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들이 최 선생(崔先生)이라고 부르는 자는 아명(兒名)이 복술(福述)이고 관명(冠名)이 제우(濟愚)로서 집은 본 고을의 견곡면(見谷面) 용담리(龍潭里)에 있었으며 5, 6년 전에 울산(蔚山)으로 이사를 간 다음 무명[白木]을 팔아서 살다가 근년에 이르러 다시 본 고을로 돌아왔답니다.

    그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나는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치성을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공중으로부터 책 한권이 떨어지는 것을 얻어서 공부를 하였다.’라고 한답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 책이 어떤 내용인지 알 까닭도 없지만 자기 혼자서 하는 말은 ‘선도(善道)’라고 한답니다.

    대체로 그 도(道)를 배우기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몸과 입을 깨끗이 해야하며 그런 다음에 13글자【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로 된 것을 일러주고 또 그 다음에 8글자【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 를 일러준답니다. 그것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으레 화를 면한다느니 병이 나아진다느니 귀신을 접하게 된다느니 하는 등의 말로 속이고 홀리면서 자꾸 권유하는 바람에 그만 거기에 빠져들어가기 쉽답니다. 때문에 글자를 모르는 까막눈의 여인이나 아이들이라 하더라도 미친듯이 날뛰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는답니다.

    또 약을 먹는 법도 있는데 한 번 그 약을 먹기만 하면 전적으로 거기에 빠져 다시는 벗어져 나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며 혹 약을 먹는 중에 하지 말라는 일을 조심하지 않다가는 그만 광증(狂症)이 나서 남의 눈을 빼먹고 그 자신도 스스로 죽고 만다고 합니다. 매달 초하루 보름에 돼지를 잡고 과일을 사가지고 궁벽한 산 속으로 들어가 제단을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글을 외워 귀신을 내리게 하는데 지금 이 괴수인 최가의 집에서 금년만도 여러 차례 모여서 강론(講論)을 하였답니다.

    대개 처음 배우려고 할 때에도 예물이란 명목으로 가지고 가는 물건을 전부 최가한테 바칠 뿐 아니라 급기야 전도를 받아 깨닫게 되는 날에는 재산을 털어서 선생한테 주면서 조금도 후회하거나 아까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여러 명이 모여서 도(道)를 강론(講論)하는 자리에서는 최가가 글을 외워 귀신을 내리게 하고 나서 손에 나무칼을 쥔 채로 처음에는 무릎을 꿇고 있다가 일어나고 나중에는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한 길도 넘게 뛰어올랐다가 한참만에야 내려오는 것을 제눈으로 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작년에 최가가 잡혀 진영(鎭營)에 갇히게 되자 제자라는 수백 명이 와서 신소하기를, ‘저희들의 공부란 것이 애초에 백성을 해롭게 하거나 풍속을 파괴시키는 것도 아니니 속히 놓아주기를 원한다.’고 하였답니다. 진영(鎭營)에서는 그 즉시로 놓아주었더니 몰려다니면서 의심스럽게 보이는 점도 없었고 은밀한 속에서 음모를 꾸민다는 말도 들리지 않으나 먼 곳으로부터 가까운 데 이르기까지 공부하러 오는 자는 날을 따라 늘어난답니다.

    이상과 같이 전해들은 여러 가지의 이야기 가운데는 황당한 내용도 있어 그대로 믿기가 어렵기 때문에 이달 9일에는 따로 양유풍(梁有豊) 등을 곧바로 최복술(崔福述)이 살고 있은 곳으로 보내서 자세히 염탐해오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돌아와서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최복술(崔福述)에게 가서 공부하고 싶다고 간절히 청하자 최복술은 조금도 비밀스럽게 숨기는 것이 없이 혼쾌히 허락하였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공부하겠다고 청하면서 배우는 글을 소리내어 읽지 않고 속으로 읽으면 어떻겠느냐고 하니 최복술이 하는 말이 읽지 않고 속으로 읽으려거든 애초에 배우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꺼릴 일이 있어서 소리내어 읽을 수는 없다고 하자 최복술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배우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요. 내 공부가 이루어진 다음에는 오직 하늘 밖에 무서운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벽에도 써붙여 놓은 글이 많은데 모두 범서(梵書)와 같아서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그 뜻은 전혀 알 수 없으나 아마 그 자가 공부라고 하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글씨를 하나 써달라고 하니 끝끝내 들어주지 않기 때문에 이튿날에 다시 오겠노라고 약속하면서 하루 이틀 사이에 배울 수 있는 글을 얻었으면 매우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최복술이 말하기를, 이런 것은 아마 촤자원(崔子元)이나 이내겸(李乃兼)에게 가서 물으면 저절로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최자원과 이내겸은 경주(慶州) 남문(南門) 밖에서 사는 자들로서 최복술의 수제자(首弟子)라고 합니다.

    지금 이렇게 따로 사람을 보내어 만나도 보고 문답도 한 내용을 앞서 전해들은 이러저러한 이야기와 맞추어보면 눈으로 목격해 보지 못한 한두 가지 사실이 없지 않지만 대체로 서로 부합되어 의심할 여지가 없는 점도 또한 많습니다. 최복술(崔福述)이 동학(東學)의 괴수라는 확고한 단안이 서기 때문에 신은 그날 밤으로 비밀리에 본 진영(鎭營)의 군교(軍校)와 군사(軍士) 30명을 동원시켜 양유풍(梁有豊) 등에게 거느리라고 하고는 밤중에 그 자들의 소굴을 곧바로 들이쳐 최복술을 결박하여 끌어냈으며 제자들 23명도 결박하여 데려왔습니다.

    신은 곧 신분을 밝히고 본 부(府)에 나가 앉아서 최복술(崔福述)의 생김새와 특징을 받아올린 다음 격식에 맞게 단단히 가두어 놓고 제자 등도 부의 옥에 엄격히 가두어 놓고서 공손히 지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른바 최자원(崔子元)과 이내겸(李乃兼)이라는 두 놈에 대해서도 본 부(府)에 비밀공문을 띄워 잡아가두게 했으나 최자원이 먼저 눈치채고 도망을 쳤기 때문에 본 부에 엄격히 일러서 기어코 체포하게 하였습니다. 이내겸은 얼마 안가서 곧 체포되었으니 역시 생김새와 특징을 받아올린 다음 격식에 맞게 단단히 가두었다가 최복술과 함께 압송해 올려보내겠습니다.

    압수한 문서라든지 편지라든지 그런 것들은 하나하나 단단히 봉하고 서첩으로 만들어 이은식(李殷植)에게 인계하였는데 그 문서 중에 《논학(論學)》이란 한 권의 책에는 최복술이 동학의 큰 괴수로 된다는 근거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은 이제 올라가서 경과를 직접 보고하였으면 합니다.” 지시하기를, “묘당(廟堂)에서 제의하여 처결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종 001 00/12/21(계사) / 비변사에서 정운귀가 보고한 경주의 동학의 정형을 다시 조사할 것을 제의하다

    비변사(備邊司)에서 제의하기를, “선전관(宣傳官) 정운귀(鄭雲龜)가 서면으로 보고한 경주(慶州)의 동학(東學) 죄인 최복술(崔福述) 등의 사건에 대하여 묘당(廟堂)에서 제의하여 처결하게 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최가가 비록 두목이라고 하더라도 도당(徒黨)이 이미 번성해졌으니 응당 속속들이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거의 천 리나 되는 거리에서 염탐하고 체포하는 등의 일이 계속 이어지면 연도가 소란스럽게 될 것이니 가히 딱합니다. 최복술(崔福述) 등 두 놈을 포청(捕廳)을 시켜 본 도(道)의 감영(監營)으로 압송하게 하고 경주에 가두어둔 죄인들과 함께 하나 하나 그 내력과 소행을 다 따져본 다음 경중을 갈라서 다시 보고하도록 공문을 띄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승인하였다.  

    고종 001 01/02/29(경자) / 경상 감사 서헌순이 경주의 동학의 정형을 보고하다

    경상 감사(慶尙監司) 서헌순(徐憲淳)이 보고하였다. “동학(東學)을 하는 경주(慶州)의 죄인 최복술(崔福述) 등에 대해서 그 전말을 밝혀 경중을 정하여 대안을 작성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내렸습니다. 죄인 심리에 참여하는 관리들이 상주 목사(尙州牧使) 조영화(趙永和), 지례 현감(知禮縣監) 정기화(鄭夔和), 산청 현감(山淸縣監) 이기(李沂)가 신문해야 할 사람들을 함께 엄격히 신문하였습니다.

    최복술(崔福述)은 이렇게 공술하였습니다. ‘경주(慶州) 백성으로서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삼아 왔습니다. 그런데 양학(洋學)이 나왔다는 말을 듣자 의관(衣冠)을 갖추고 행세하는 사람으로서 양학이 갑자기 퍼지는 것을 차마 보고 앉아 있을 수 없어서 하늘을 공경하고 하늘의 의사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위천주고아정영세불망만사의(爲天主顧我情永世不忘萬事宜)」라는 13자로 된 말을 지어서 동학(東學)이라고 불렀는데 동쪽 나라의 학문이라는 뜻을 취한 것입니다. 양학은 음(陰)이고 동학은 양(陽)이기 때문에 양을 가지고 음을 억제할 목적에서 늘 외우고 읽고 하였습니다.

    저의 아들이 간질병에 걸렸다가 이것을 외워서 저절로 완쾌되었고 병든 자는 그것이 풍병(風病)이든 간질병이든 관계없이 이것을 외우기만 하면 병이 곧 나았습니다. 글씨를 좀 쓸 줄 아는데 누가 혹시 써달라고 할 때면 언제나 거북 귀(龜) 자와 용 룡(龍) 자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써주었습니다. 병을 치료하려는 사람이 있는 경우에는 산 속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냈지만 소를 잡은 적은 없습니다. 여러 가지 병을 앓는 사람들에게는 궁(弓)자를 쓴 종이를 불에 태워 그 재를 물에 타서 먹였는데 그러면 그만 병이 나았습니다.

    먼데서나 가까운 데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부득이 거접시켰기 때문에 당(堂)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지 붓을 잡고 귀신이 내리게 했거나 칼춤을 추면서 공중으로 솟아올랐거나 돈과 쌀을 토색질한 일은 애초에 없었습니다. 선생이니 제자니 하는 소리도 제 자신이 그렇게 자칭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간악한 종교와는 달라서 애초에 숨기거나 속이지 않았습니다.’

    은퇴한 아전(衙前)인 이내겸(李乃謙)은 공술하기를, ‘저의 아버지의 병에는 약도 효력이 없기 때문에 최가를 찾아가 보았더니 13자를 써주면서 읽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밤낮으로 외우고 읽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병이 차도가 없기 때문에 그만 걷어치우고 그 자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편지까지 썼습니다.

    이른바 그 문서라는 것은 포덕문(布德文)과 수덕문(修德文)입니다. 주문(呪文)으로서는 「지기금지원위대강(至氣今至願爲大降)」이라고 하는 것과 또한 「위천주고아정영세불망만사지(爲天主顧我情永世不忘萬事知)」라고 하는 것이 있으며 칼노래로는 「날이 퍼런 용천검을 쓰지 않고 무엇하리」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돼지고기, 국수, 떡, 과일을 가지고 산에 들어가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은 병을 치료하자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최복술(崔福述)이 본래 글씨를 잘 쓴다는 칭찬을 들어오기 때문에 거북 귀(龜) 자, 용 룡(龍) 자, 구름 운(雲) 자, 상서로울 상(祥) 자, 의로울 의(義) 자 등의 글자를 써서 글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는데 그러면 그 부형들이 약간의 돈이나 곡식으로 수고를 갚았지 사실 토색질을 한 적은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지상(紙商) 강원보(姜元甫)는 공술하기를, ‘저는 풍(風)과 담(痰)으로 집에서 앓고 있다가 그것을 외우기만 하면 다 빠졌던 머리털도 다시 나온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갔습니다. 병이 나은 후로는 더 외울 맛이 없어서 그만두었습니다. 더 이상 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박응환(朴應煥)은 공술하기를, ‘제가 병때문에 최가를 찾아갔더니 그의 말이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늘을 공경하고 윤리에 힘쓰면 병도 나을 수 있다. 아침에 공부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각기 잠자리로 돌아가 자던 중에 붙들려 왔으므로 다른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몽(童蒙) 김의갑(金義甲)은 공술하기를, ‘최복술(崔福述)과 같은 동리에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감히 사실을 속이겠습니까. 최복술(崔福述)의 아들 최인득(崔仁得)은 늘 나무칼을 가지고 뛰거나 춤을 추면서 「날이 퍼런 용천이검(龍泉利劍)의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미치광이로 알고 절대로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각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이 적은 경우에도 30명 아래로 내려가지 않았는데 뒷산에 올라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병이 낫게 해주기를 빌었으나 끝내 효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 등지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 최가의 행동이 황당해서 밤에 어디를 가노라고 횃불을 찾으면 온 동리가 비웃고 꾸짖곤 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정화(李正華)는 공술하기를, ‘고질로 된 병이 있기 때문에 최가에게 가보았더니 「위천주(爲天主)」등의 13자를 가르쳐 주면서 그 운(韻)자에 맞추어 부(賦)문체의 글을 지으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날 밤에 함께 붙들렸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몽(童蒙) 최인득(崔仁得)은 공술하기를, ‘제가 사실 칼춤을 추었지만 본심에서 한 짓이 아니라 미친 병이 갑자기 발작해서였습니다. 나무칼을 들고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하였는데 그 노래는 「때로구나 때로구나」라고 하는 곡입니다. 이것을 익히기 위하여 먼저 하늘에 제사를 지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최복술(崔福述)이 두 번째로 공술하기를, ‘제가 경신년(庚申年) 경에 듣자니 양인(洋人)이 먼저 중국을 점령하고 다음에 우리 나라로 들어오는 날이면 이루 말할 수 없는 변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기 때문에 13자로 된 주문(呪文)을 지어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양인을 제어하자는 것으로써 하늘에 대하여 정성껏 제사를 지내면 안될 일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양인의 책은 반드시 규( )로 이름을 달았는데 그 글자는 「궁(弓)」자의 밑에 두 점을 찍은 것입니다. 그것을 불태워 마셔서 액운을 없애자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그 공부를 시작할 때에 몸이 떨리면서 귀신을 접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귀신이 내려와 가르치기를, 「요사이 바다위에 배로 오고 가고 하는 것들은 모두 양인(洋人)인데 칼춤이 아니고는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검가(劍歌) 1편을 주었습니다. 부(賦)체의 글을 지어 불렀는데 과연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내겸(李乃兼)이 두 번째로 공술하기를, ‘최복술이 이른바 검가(劍歌)라고 하는 것은 「때로구나, 때로구나, 이야말로 내 때로구나. 날이 퍼런 용천이검(龍天利劍)을 쓰지 않고 무엇하리. 만대에 한 번 태어난 장부요, 5만년에 한 번 만난 때로구나. 날이 퍼런 용천검을 쓰지 않고 무엇하리. 춤추는 소매가 달린 장삼을 떨쳐입고 이 칼, 저 칼 바로 잡고 호호망망 넓은 천지에 한 몸을 기대고 서서 검가(劍歌) 한 곡조를 부르노라. 때로구나 때로구나, 날이 퍼런 용천이검을 노래하니 해와 달에 번쩍이구나. 휘늘어진 소매가 달린 장삼으로 우주를 덮으리. 예로부터 이름난 장수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장부가 앞에 나서니 장사도 소용없구나. 때로구나 때로구나, 좋구나, 이야말로 내 때로구나. 좋구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약이라고 하는 것은 「궁(穹)」자에서 그 글자 반쪽의 뜻을 취한 것으로서 종이 위에 둥그런 원을 그려놓고 그옆에 「궁(弓)」자 2자를 써넣은 것인데 해석하기를, 「그 이름은 태극(太極)이라고도 하고 또 궁궁(弓弓)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른바 크게 내린다는 내용을 담은 8자라는 그것만 외우면 몸이 떨려 난답니다. 들은 것을 다 고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조상빈(趙相彬)은 공술하기를, ‘제가 최복술(崔福述)을 만나보니 그가 하는 말이 「하늘 귀신이 내려와서 분명히 나에게 가르치기를 금년 2월과 5월 사이에 양인(洋人)이 의주(義州)로부터 들어올 것이라고 하였는데 내 통고문을 가지고 일제히 따라가라. 이 춤을 익히는 자가 앞으로 나라를 보전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공훈을 세우면 내가 높은 관리로 되고 너희들은 각기 다음 자리의 벼슬들을 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정화(李正華)가 다시 공술하기를, ‘최복술(崔福述)이 제사를 지낼 때에 저는 귀신을 내리게 하는 글을 외우고 최복술은 칼을 휘둘렀습니다.

    글씨를 잘 써서 병을 빨리 낫게 하였는데 「염병 귀신은 달아나고 학질 귀신은 내빼라」는 주문(呪文)도 읽었습니다. 이른바 약이라고 하는 두 개의 궁(弓)자는 혹 불태워 마시기도 하고 혹 씹어서 삼키기도 하는데 최복술이 그 뜻을 해석하기를, 「옛날 임진년(壬辰年)이나 임신년(壬申年)에는 이(利)가 송송(松松) 자에 있다고 하고 가가(家家)에 있다고 하였지만 갑자년(甲子年)에는 이가 궁궁(弓弓)에 있기 때문에 활이라는 궁자를 불태워서 마시면 제어하기에 충분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최복술(崔福述)이 세 번째로 공술한 것은 이러합니다. ‘양인(洋人)이 들어온다는 소리는 간사한 마귀에 속은 것이고 갑자년(甲子年)에는 이(利)가 궁궁(弓弓)에 있다는 소리는 전해내려 오는 말입니다. 마귀라는 것이 분명히 와서 이르기를, 「계해년(癸亥年) 12월 19일에는 양인이 들어올 것이고 갑자년(甲子年) 정월(正月)에는 응당 들려오는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계해년 10월에는 네가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되고 12월에는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될 것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검무(劍舞)도 마귀가 시킨 노릇입니다. 글씨를 쓰는 것도 귀신을 접한 이후 더욱 기묘해져서 써달라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종종 써주었습니다. 하루에 몇 백 리를 걷는다는 설에 대해서는 본래부터 걸음이 느려서 몇십 리만 걸어도 발이 부르틀 지경입니다. 가마를 타고 다닌다는 설은 과연 지난 해에 신영(新寧)과 영천(永川) 땅에 갔다온 일이 있습니다. 일월산(日月山)에서 소동을 일으켰다는 설은 어떤 다른 사람이 그 산에 들어가서 제사를 지냈다고들 합니다. 제가 들어갔던 것은 아닙니다. 더는 고할 말이 없습니다.’

    이내겸(李乃兼)이 세 번째로 공술하기를, ‘일월산(日月山)에 대한 설은 영양(英陽)과 진보(眞寶)에 사는 사람들이 산밑에 임시 거처를 만들어 놓고 모여서 공부한 것이라고들 합니다. 최복술(崔福述)이 산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동몽(童蒙) 성일규(成一奎)는 공술하기를, ‘제가 시험삼아 검무(劍舞)를 배울 초기에는 몸이 떨리는 듯했으나 끝끝내 공중으로 솟아오르게 된 일은 없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최복술(崔福述)이 네 번째로 공술하길, ‘옥편(玉篇)과 같은 책에서 「규」자를 도교(道敎)의 경서(經書)라고 해석하였으니 서학(西學)도 도교의 경서와 같은 종류인 것 같습니다. 억측으로 생각건대 이(利)가 궁궁(弓弓)에 있다고 한 것은 「규」자 밑의 두 개의 점이 바로 궁궁으로 되는 것을 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계해년(癸亥年) 12월 19일 이라는 기한이 되었는데도 아무런 소식이 없기 때문에 학도들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정할까봐 다시 갑자년(甲子年) 10월 11일이라고 하였으며 만약에 이 달도 그냥 지나면 다시는 공부를 하지 말자는 뜻으로 서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돈이요, 양곡이요, 갑옷이요, 병기요 하는 등의 문제에 대해서는 양국도적이 들어오더라도 주문을 외우고 칼춤을 추어서 도적을 막을 것이고 하늘 귀신의 도움을 받을 것인데 그런 준비는 해서 무엇하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강원보(姜元甫)가 다시 공술하기를, ‘최복술(崔福述)이 하는 말이 「이 도적들은 불로 하는 공격을 잘하므로 무력으로 막을 바가 아니다. 오직 동학(東學)이라야 그 무리를 모두 섬멸할 수 있다.」라는 것이었으며 또 하는 말이 「양인(洋人)이 일본(日本)에 들어가서 천주당(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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