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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멸의 천도교인3. 주옥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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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윤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3,006회   작성일Date 13-02-05 20:17

    본문


    수의당 주옥경 선생은 한국 여성운동의 선구자요, 천도교 여성운동의 지도자이시다. 또한 여성의 인권과 조국해방의 어머니로 한국역사에서 뺄 수 없는 여성 영웅이시다. 동학-천도교 3세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님 내수도(아내)로서 당시 한국최대종단 교조의 부인은 물론 여성운동의 대모(大母)로서 역사에  길이 빛날 인물이기도 한다. 이러한 수의당님의 신분이 기녀였다는 것은 과히 천지개벽할 일이다는 것이다. 동학 천도교의 사상이 아니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언론을 통해 들어보기로 한다.  
    송암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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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기녀에서 '천도교의 어머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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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교조의 아내로, 천도교 여성회원들의 어머니로, 한국여성 운동의 선구자로 헌신적 삶을 산 수의당(守義堂) 주옥경(1894∼1982)의 생애가 이 시대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으며 다시 주목받고 있다.

    최근 간행된 전기 ‘수의당 주옥경’(천도교여성회본부 펴냄)에는 남편인 한말 천도교 지도자 의암(義菴) 손병희(1861∼1922) 선생의 그늘에 가려 있던 그의 업적과 인간적 진실이 밝혀져 민족의 웅혼이 숨쉬는 역사 현장으로 빨려들게 한다.

    평남 숙천에서 주병규·김여경 사이에 무남독녀로 태어난 주옥경은 8세 때 평양기생학교에 입학했다. 전기는 주옥경과 주변인들의 회고담, 당시 신문 기사와 기고문 등이 참고가 됐는데, 전기를 저술한 김응조 천도교 교서편찬위원은 조선의 개화와 나라를 빼앗기는 혼돈의 시대에 여염집 딸들의 기생 진출은 크게 허물이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옥경은 1912년 19세 때 서울 세종로에 있던 유명한 한식집 명월관으로 진출해 ‘산월’이라는 기명을 갖는다. 산월은 ‘가무음곡의 빼어난 솜씨에 몸에 밴 예절로 서도기생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무엇보다 지조를 굳게 지켰고 기생들을 규합해 조합 우두머리(향수)를 맡는 등 풍모가 범상치 않았다.

    1914년 ‘매일신보’는 ‘예단일백인(藝壇一百人)’이라는 기획기사를 게재하는데, 주산월을 두 번째로 소개한 것을 봐도 그의 위상을 짐작케 한다. 주산월이 명월관에서 의암을 만난 것은 그의 나이 22세 때였다. 당시 명월관에는 ‘의친왕 이강공과 민병석 박영효 등 대한제국 고관을 역임한 사람들, 이완용 송병준 등 친일파 거물들’이 드나들었다. 조선 최대 종단인 천도교 지도자 의암도 영국 왕실에서나 볼 수 있는 쌍두마차와 우리나라 자가용 승용차 제1호인 포드 자동차를 타고 명월관을 출입했다.

    명월관 출입이 세인에게 일탈된 행동으로 비칠 수 있지만, 의암은 개의치 않았다. 이것은 ‘국권 회복을 위한 정치적 투쟁을 포기한 것처럼 위장해 일제의 감시를 누그러뜨리기’ 위함이었고, 일본인에게 위축되지 않겠다는 민족적 자존심을 과시하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실제 의암은 검소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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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옥경 종법사가 최시영 여성회장의 예방을 받고 담소하고 있다.

    주산월이 33세나 연하였지만, 그의 됨됨이를 눈여겨본 의암은 ‘천도교의 어머니’로 낙점하기에 이른다. 의암 나이 56세, 주산월이 23세 때인 1915년 두 사람은 백년가약을 맺었다. 주옥경은 기녀 생활을 청산하고 의암의 사저로 들어갔지만, 인후하고 활달한 성격 탓에 집안에는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주옥경의 달콤한 신혼은 잠시. 의암의 집에는 항상 독립운동가들이 들락거렸고, 주옥경은 그때마다 왜경들의 감시를 살피며 지혜롭게 잘 따돌려야 했다. 1919년 의암이 3·1운동 주도자로 서대문감옥에 투옥되면서 주옥경의 삶과 지혜는 더욱 연단됐다. 의암은 1년여 옥살이를 하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투병생활 끝에 1922년 61세로 생을 마감했는데, 4년여 동안 주옥경의 옥바라지와 병구완이 어찌나 극진했던지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했다.

    주옥경이 의암을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산 기간은 불과 8년. 28세에 홀로 된 주옥경은 천도교 최초의 여성단체인 천도교 내수단(천도교여성회 전신)을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되었다. 당시 천도교 여성운동은 한국 여성의 지위 향상을 촉발했다. 주옥경은 33세에 일본 유학(정칙학교 영문과) 길에 올랐는데, “조선 사회를 위해 내 한 몸을 바치겠다”는 신념에 불타 있었다.

    그는 80세까지 좀체 쉬지 않았다. 천도교 경도관정, 독립헌금실행단 이사, 경운학원 원장, 의암손병희선생기념사업회의 의암동상 건립 참여, 민족대표 33인 유족회 회장, 광복회 부회장 등을 맡아 가파른 근현대사의 질곡을 헤쳐 나오며 의암의 정신을 드높였다. 주옥경이 있어 의암의 빈 자리는 한치도 틈이 없었다. 그의 당호 수의당도 의암의 뜻을 지킨다는 결의가 담겨 있다.

    천도교중앙총부는 1971년 주옥경의 업적을 기려 천도교 최고 예우직인 종법사로 추대하기에 이른다. 주옥경 여사는 72세와 75세 두 차례 3·1절 기념식장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해 주위를 놀라게 하기도 했다.

    근현대사에서 ‘여성 영웅’으로 살다간 주옥경의 일대기는 가려진 역사를 복원해 내면서 많은 교훈과 친밀감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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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한 번 나라 생각을, 1969년 대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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