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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사와 동아시아론 - 이병한 (프레시안에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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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교무관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2,572회   작성일Date 13-03-05 11:13

    본문

    동아시아사와 동아시아론

    새해 첫 달, 서울에 다녀왔다. 1년 반 만이었다. 대선 직후라 울적한 기운이 가시지 않았다. 날씨 또한 혹한이었다. 그럼에도 미처 주목하지 못한 경사도 있었다. 지난해, 고등학교 (선택 과목) 교과서로 <동아시아사>가 발간된 것이다. 마침내 세계사와 국사의 기형적 구도를 탈피했다.

    일본풍이 물씬한 '동양사'를 털어 낸 점도 반갑다. 세계사는 유럽풍이 농후하고, 국사는 신채호 이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으로 심란했다. 중원도, 열도도, 북방도 오로지 투쟁하는 남이었다. 이웃에 대한 무지를 제도적으로 조장하고 적대감을 양성했던 것이다. 그 자발적 자폐 속에서 내재적 발전이니 자본주의 맹아니, 유럽을 복제했다.

    탈아입구는 일본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도 못지않았다. 따라서 <동아시아사> 교과서의 발간을 이웃들과 해후하는 반전의 이정표로 삼고 싶다. 소란했던 2012년의 작은 기념비로 세운다.

    때를 맞춤하여 민간에서도 동아시아 근현대사가 출현했다. 동아시아론 20년의 축적이 통사 쓰기로 진전하니, 이 또한 기쁜 일이다. 먼저 국내 필자 세 명이 집필한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박태균·유용태·박진우 지음, 창비 펴냄)이다. 장장 5년이 걸렸다. 침략과 저항을 대신한 연관과 비교라는 접근 방식이 미덥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20세기 초반은 일본 편향이 심하다. 냉전기 또한 미국 중심이 약여하다. 20세기 이후 중국은 망명 상태다. 신해혁명마저 없음은 치명적이다. 그리하여 근현대를 통괄하는 일이관지가 부족하다. 세 전공자가 화학 작용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함께 썼다'고 하기가 힘들다. 각자 쓰고, 합친 것에 가깝다. 나라별로 동떨어진 사학계의 분단 체제 극복이 얼마나 지난한지 실감한다.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한중일3국공동역사편찬위원회 지음, 휴마니스트 펴냄)는 스케일이 더욱 크다. 한·중·일 21명의 학자가 협동한 결실이다. 6년, 그 고단했을 여정이 넉넉히 짐작된다.

    국제 관계의 구조적 변동을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전통적 국제 질서,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중국의 민족 운동이 일어난 20세기 전반기 그리고 동아시아 냉전 체제의 형성과 변용 과정이다. 20세기 전반기는 상대적으로 균형이 잡혔다. 반해 냉전 체제 이해가 여전히 미달이다.

    동아시아 냉전은 유럽과 매우 다르다. 구도 면에서 미-소가 아니라 미-중이다. 이념과 체제 대결만도 아니다. 그래서는 동아시아의 현재가 설명되지 않는다. 기실 '냉전'이라는 단어를 고수해야 하는지조차 미심쩍다. 국공 내전-한국 전쟁-베트남 전쟁의 30년은 격렬한 열전의 시기였다.

    그 중에서도 '죽의 장막' 너머 (동)아시아 사회주의권에 대한 설명은 현저히 부족하다. <함께 읽는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서술 자체가 부재하고, <한중일이 함께 쓴 동아시아 근현대사>은 중소 분쟁에 주목한다. 지역적 동학보다는 사회주의 진영에 방점을 두는 것이다. 즉 동아시아사에 동아시아적 시각이 미흡하다.

    동서 냉전, 중소 분쟁, 북조선

    '냉전 속의 냉전', 그래서 기어이 동서 냉전 자체를 허문 중소 분쟁이란 무엇이었나. 일단 동서 냉전을 세계 냉전으로 전화시킨 사건이 국공 내전이었음을 분명히 해두자. 공산당이 국민당을 누르지 않았다면, 동서 냉전은 유럽의 에피소드에 그쳤을 것이다. 또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도 쉬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개석이 중원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김일성과 호치민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법하다. 즉 세계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중국이 적화됨으로써, 비로소 냉전은 세계화된 것이다.

    소련과 중국은 왜 갈등했던가.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모순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허나 부분적인 설명에 그친다. 자유 진영도 예외가 아니다. 미일, 한일 관계가 늘 봄날은 아니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의 모순이라고도 한다. 국제의 수평성과 당제(黨際)의 위계성이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견해이다. 모스크바를 세계 혁명의 수도로 삼고 공산주의 운동을 지도하는 인터내셔널은 계서제적 성격이 농후했다. 그래서 소련의 탱크가 헝가리, 폴란드, 체코를 점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또한 소련-동유럽에 더 합당한 설명이다. 왜 중소는 파국으로 치달았는지 설명이 충분치가 않다.

    시공간의 좌표축을 재설정할 필요가 있다. 유라시아 단위의 접근이다. 너무 광범하다면 중원과 북방의 갈등으로 폭을 좁힐 수도 있다. 소련은 러시아 제국의 후신이다. 신중국은 대청 제국의 후신이다. 러시아 제국과 대청 제국은 대몽골 제국의 후예이다. 러시아와 만주 사이에는 드넓은 몽골 대초원이 있다.

    몽골의 발자국을 되밟으며 동진해 왔던 것이 러시아이고, 그 길을 답습하여 서진했던 것이 만주족이다. 그래서 러시아 제국과 대청 제국은 매우 이른 시기에 근대적인 '조약'도 맺는다. 이는 외몽골이 소련의 위성 국가로 재편되고, 내몽골은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된 20세기의 분단 체제와도 직결된다.

    그러자면 소련-중국의 갈등 또한 중원 제국을 위협했던 북방 제국과의 오래된 갈등의 새 국면이었음이 또렷해진다. 즉 중소 분쟁은 만리장성을 축으로 중국의 역사적 정체성을 형성했던 북방과의 갈등과 길항의 연속이다. 이념과 체제라는 냉전적 시각에 편중되어, 중원-북방의 역동성을 망각한 것이다. 혹은 중국 중심주의와 서구 중심주의(소련)가 착종되어 북방을 간과한 탓에 중소 분쟁의 핵심을 꿰뚫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북조선과도 깊이 연동된다. 본디 북방 민족과 중원 한족, 반도조선족은 유동적이고 중층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흉노, 말갈, 거란, 여진, 몽골, 만주 등 북방의 동향은 반도의 역사와 직결되었다. 따지고 보면 임진왜란이야말로 예외적이다. 바다로 격절된 남방 민족은 중원을 차지한 바가 전혀 없다. 20세기 중일 전쟁마저 그러했다.

    반면 초원으로 열린 북방 민족들은 수차례 중원을 차지하고 정복 왕조를 실현했다. 즉 소련은 요-금-원-청의 유산을 부분적으로 계승한 20세기형 북방 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중소 국경 충돌 또한 서북이 아니라 동북 지역이었다.

    소련은 어떤 북방 제국보다 한반도에 영향력이 컸다고도 할 수 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탄생 자체가 소련군의 점령 아래 진행된 것이다. 다만 오래 가지는 못했다. 북방을 제치고 중원의 영향력이 다시 커지게 된 계기가 바로 한국 전쟁이다. 중국인민지원군이 직접 참전했던 것이다.

    이로써 일본과 소련을 대체하여 근 반세기 만에 영향력을 회복한다. '중화 사회주의권'에 편입된 것이다. 더 내치면 중소 분쟁으로 말미암은 주체 사상 또한 명청 교체와 소중화 의식에 빗대어 살펴볼 수도 있다. 그만큼 냉전기 북방 3각 관계의 굴절 또한 중원과 북방, 반도 사이의 오래된 역사적 맥락과 깊이 결부되어 있던 것이다. 즉 동아시아사의 이해에 북방의 시점은 불가결이다.

    이는 당장의 현실적 과제와도 접목된다. 북핵 문제란 누천년 동북아 갈등의 요람이었던 북방 문제의 지속인 탓이다. 그 전선이 동북에서 북조선으로 하강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두 편의 동아시아 근현대사는 북조선 문제가 매우 소략하다. 북핵 문제 20년. 이미 동아시아 지각 변동의 주축이 되고 있음에도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다.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염원한다면 북조선은 응당 중심적 화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를 자꾸 한반도 중심주의나 민족주의의 확대라고 곡해하는 경우가 있다. 트집이다. 투정이다. 장소에서 탈구된 관념의 유희이다. 자발적 소외로 무중력의 낭설을 남발하는 것이다. 이 또한 북방 감각을 상실한 이후의 사태이다. 평양을 방문하고, 흥남에 여행 가고, 신의주를 목도한다면 그런 말을 담을 수 없을 것이다. 반도의 반쪽으로 오그라든 협애한 안목의 소산이다. 따라서 갈라진 한반도를 직시하고 북방을 향해 온몸으로 온몸을 다해 밀고나가자. 그래야 '장소의 혼'이 깃든 새로운 동아시아사와 동아시아론을 길어 올릴 수 있다.

    탈중화와 재중화

    내 나름으로 20세기 동아시아를 읽는 독법은 '탈중화와 재중화의 길항'이다. 엉성하게 만들어 본 서구의 국제 질서와 동아시아 지역 질서의 길항 구도는 아래와 같다.


    국제법은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출발한다. 국가만으로 이루어진 단순계이다. 동시대 동아시아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을 수습하고 번부/조공/호시/조약의 복합계로 작동하는 중화 질서를 구축한다. 그리고 유럽은 냉전이 종식되는 1991년까지 항상적인 전시 상태에 있었다. '국민 국가'란 그 끝없는 전쟁에 신민을 더 효율적으로 동원하기 위해 고안된 정치 체제이다.

    제1차 세계 대전과 러시아 혁명은 국제연맹으로 귀결했다. 그러나 동아시아는 어긋났다. 국민당은 북벌로, 일본은 동북 진출로 현상을 타개했다. 남경동경 모두 북경으로 향했다. 이 중원의 쟁탈전이 곧 중일 전쟁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대동아 전쟁이다. 대동아는 대중화의 왜곡된 모방이었음을 언급한 바 있다. 즉 '국제 질서'에 대한 저항과 초극의 지향에서 대동아는 속 깊이 대중화와 내통했다. 유사 중화 질서의 복원을 (무/의식적으로) 꾀한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등장한 것은 국제연합이다. 아울러 동서 냉전도 시작된다. 이번에는 중국공산당이 저항의 전위에 섰다. 중간 지대론, 제3세계론 등 미/소가 평화 공존(=분할 지배)하는 냉전 체제에 도전해간 것이다. 그리하여 1950~60년대의 중국은 1930~40년대의 일본과 다른 듯 닮았다.

    '세계사의 철학'과 '근대의 초극'에 깔린 논리와 심리는 반미/반제, 반소/반수정주의의 '문화 대혁명'에 기묘하게 변주된다. 이처럼 동아시아는 소박한 동양 평화론이든, 대동아의 우편향이든, 또 문화 대혁명의 좌편향이든 지속적으로 국제 질서의 대안을 지향하고 모색했다. 그 기저에는 (명시적으로 표방하지는 않더라도) 중화 질서의 기억과 유산이 있었다 할 것이다. 1990년대 탈냉전으로 촉발된 세계화에 동아시아 공동체를 마주 세웠던 비판적 지역주의 또한 크게 다르지는 않을법하다.

    물론 중화 질서의 유산은 이중적이다. 근대 질서에 저항하는 비판의 동력인 동시에 내부 갈등의 원천이기도 했다. 북조선의 주체 사상과 중국-베트남 국경 분쟁이 그러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 '중화 사회주의권'의 양상이 소련-동유럽 위성국이나 미국-아시아 동맹국의 수직적 위계와는 퍽이나 달랐다는 점이다. 북조선과 베트남은 중국과 공동 투쟁을 하면서도 자주와 주체를 확보할 수 있었다. 자유/공산 진영의 위계와는 결이 다른 이 역동성 또한 중화 질서의 유산이 아닐지. 도래할 2050년을 염두에 둔다면, 차라리 20세기란 중화 질서의 근대적 변용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이제는 '근대'라는 강박을 떨쳐내고 중화 세계의 공진화 과정으로 20세기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19~21세기를 일이관지, 일목요연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100년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 1000년은 또 너무 과소평가했다. 균형 감각을 회복할 일이다.

    1894 : 동학과 서학

    동아시아사를 왜 쓰는가? 두 편 모두 일치한다. 동아시아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이다. 헌데 실천적 과제로 제시한 대목이 눈에 밟힌다. 민주주의, 시민적 리더십, 그리고 역사 화해이다.

    역사 화해부터 짚자. 절실한 과제이다. 헌데 본말이 전도되었다. 국가 간 역사 화해는 차라리 피상적이고 표면적인 것이다. 역사 분쟁을 낳는 패러다임 자체를 전환해야 한다. 즉 중세나 봉건이라 참칭했던 동아시아의 과거와 해후하고 따듯하게 포옹하는 것이 우선이다. 그것이 진짜 '역사와의 화해'이다.

    동아시아사가 출간한 2012년은 공교롭게도 동아시아의 민주/진보 진영이 잇따라 선거에서 패배한 해였다. 민진당, 민주당, 진보당 국적불문이다. 헌데 찬찬히 따져보면 우연만도 아닌 것 같다. 진보사관에 입각해 동아시아의 민주를 견인해왔던 세력들이 그 임계점에 달한 것이다.

    그런즉슨 산업화와 민주화, 곧 근대화의 논리에 비판적 성찰 없이 이를 승인하고 추인하는 동아시아사 서술이 못내 불만이다. '민주'와 '시민'이라는 상투어 또한 마땅치가 않다. 너무 안이하게, 혹은 교조적으로 민주주의를 접근하는 것 아닐까. 천주(天主)를 대체하고 천하(天下)를 해체한 민주(民主)가 여전히 21세기의 등불인지 나는 몹시 주저된다.

    탈아입구 130년, 3·11의 폐허는 과연 '민주'와 영판 무관한 것일까? 도리어 '깨시민'이라는 경멸과 조롱에 민주의 민낯을 겨눈 비수가 있지 않을까? 혹 민주는 천주와 천하 앞에 엎드려 절하고, 경거망동을 자숙하고 겸손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외람되게도 동아시아사는 전면적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여긴다. 재차 김수영을 빌자면, "선생님, 그건 옛날 얘기지요."

    단서만 풀어둔다. 지역 질서의 변동이 탈중화와 재중화의 길항이라면, 사상적 분투는 동학과 서학의 길항으로 포착할 수 있다. 요즘 1894년을 복기 중이다. 동학 운동이 있었고, 갑오개혁이 있었고, 청일 전쟁이 있었다. 가히 흥미로운 해이다. 바로 여기가 조선은 물론 동아시아에서 서학이 동학에 승리한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허겁지겁, 허둥지둥 20세기를 지배한 개화파와 계몽파, 개혁파와 혁명파의 출발인 것이다. 헌데 동학을 누르고 갑오개혁을 추진한 핵심 기구 이름이 놀랍다. "군국"(軍國)기무처이다. 새 나라의 국명은 또 "대한"(大韓)이다. 그것도 모자라 "제국"(帝國)도 곁들였다. 연호는 더욱 가관이다. "광무"(光武)이다. 군국, 대한, 제국, 광무. 창과 칼이 동공을 후벼 판다.

    20세기가 한눈에 잡힌다. 문(文)에서 무(武)로의 (비)극적인 전환. 박정희와 김일성이 왜 남북의 챔피언이었는지 문득 알 듯도 하다. 그들은 무인(武人)이었다. 장개석과 모택동 역시 군인(軍人)이었다. 혹 동아시아의 '민주화'란 그 내실에서 무에 대한 문의 회복 과정은 아니었을까? 문무(文武)의 길항으로 20세기를 독해할 수는 없을까?



    조선은 지극한 문치(文治)주의 나라였다. 문치란 요즘말로 '지식 기반 사회'이다. 그래서 낮에는 밭을 갈지언정 밤에는 책을 볼 것(晝耕夜讀)을 장려했다. 건국 이념인 유학이 특권 계급에 한정되지 않고 일상화, 민중화, 민주화되고 있던 것이다. 혹 그 귀결로 등장한 것이 동학(東學)은 아니었을까?

    동학은 개화파의 서학에 굴복하지도, 위정척사의 유학을 고수하지도 않았다. 유학의 조선화, 유학의 민주화, 유학의 '내재적 발전'으로 동학을 탐구해볼 수 있지 않을까? 혹 여기에서 갈 곳이 막힌 '민주주의(democracy)'의 출로를 궁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남과 북의 재회 또한 그 내재적 경로의 복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북과 남은 각각 좌/우의 서학으로 내달렸다. 그러자면 남북 통일은 동학을 헌정으로 삼는 동국(東國)으로의 반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새해부터 머금고 있는, 그러나 답을 찾지 못한 물음이다.

    마침 내년(2014)은 1894년으로부터 꼬박 120년이다. 환갑에 회갑을 지난다. 천수(天壽), 즉 타고난 수명을 다했다. 의미가 심장하다. 그리하여 근대 적응 운운은 철지난 말이다. 천명(天命)을 갈아엎는 역성 혁명 전야이다. 박근혜 정부의 민주적인 출범을 착잡하게 지켜보면서, 1894년의 갈림길을 '타는 목마름으로' 돌아본다. 

       /이병한 UCLA 한국학센터 연구원
    (pressian.com에서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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