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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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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612회   작성일Date 13-03-28 23:23

    본문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4)

    한편 우파 내에서도 신탁통치가 불가피하다고 본 김규식, 안재홍은 반탁에서 찬탁의 입장으로 돌아섰다. 초기에는 신탁통치를 반대했으나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 회의의 결과문을 입수한 김규식은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다. 이후 김규식을 암살하려는 암살단이 조직되었고, 암살단은 김규식의 자택인 삼청장의 담을 넘다가 걸려, 도주하기도 했다. 이후 김규식은 수시로 거처를 옮겨 다녀야 했고, 밤에도 잠자리를 여러 번 옮겨야 했다.

    독립운동가이자 의열단 단장이며 좌파 단체인 민족주의 민주전선에서 활동한 김원봉은 반탁운동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비유하여 비판하였다. 김원봉에 의하면 반탁운동에 대해서 이것을 흥선대원군의 쇄국양이에 비기고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를 격퇴시킨 병인양요(1868년)와 신미양요(1871년)는 그 나름대로 민족적, 국수주의적 견지에서 통쾌한 일이었지만, 그러나 세계 저세에서 살펴보면 민족의 장래를 그르치게 한 어리석은 짓이었다."라는 것이다.

    한편 반탁운동은 해방정국에서 발생한 백의사 등 극우 단체들의 좌파 및 찬탁론자 제거, 테러 및 미수사건을 정당화하는 논거를 제공했다.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과 남조선노동당원들은 지역유지들 외에 신탁통치 반대운동 참가자들을 색출하여 처형하는 일을 주관했다.

    신탁통치를 수행하는 국가를 보통 신탁 통치국 또는 시정국(施政國)이라고 한다. 신탁통치의 기원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안한 '위임통치'이며, UN이 이를 계승·수정하여 신탁통치이사회를 설치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총 11개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신탁통치의 목적은 국제평화와 안전 촉진, 신탁통치지역의 자치와 독립 도모, 인권과 UN 회원국의 평등 보장 등이다. 신탁통치지역의 범위는 ① 종래의 위임통치지역, ②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후 패전국에서 분리된 지역, ③ 자발적으로 신탁통치를 원하는 지역 등 3종류로 구분되는데, 1986년 11월 북마리아나 연방 등 4개 지역이 독립함으로써 현재 남아 있는 신탁통치지역은 없다. 한국의 경우 8·15해방 직후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의로 5년 동안 4개국(미국·영국·중국·소련)에 의한 신탁통치가 결정되었지만 한국인의 반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화사전의 종합 재정리

    註 00; 단정반대(單政反對) - 김구는 1948년 2월10일 『3천만동포에게 읍고(泣告)함』이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반대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마음속의 38선을 무너뜨리고 자주독립의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호소하였다. 분단된 상태의 건국보다는 통일을 우선시 한다, 하여 5·10 제헌 국회의원 선거를 거부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1948년4월19일 남북 협상 차 평양으로 향하였다. 그러나 김일성에 의해 민족 통일 정부수립의 좌절을 안고 1948년5월5일 서울로 돌아 왔다. 서울로 돌아 온 김구 는 건국 실천원 양성소의 일에 주력하면서 구국 통일의 일군들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았으며 서울과 평양에 남•북한 단독 정부가 수립된 이후 민족 분단의 비애를 딛고 민족 통일 운동을 재야에서 전개해 나갔다.

    김구의 단정반대 결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과정을 기술한, 한호석(재미 통일학연구소 소장) 지도자협의회가 후대에 남긴 불멸의 유산에서 보면,

    ‘중절모와 두루마기 차림에 둥글고 검은 안경테가 인상적인 일흔 두 살의 노인이 수행원 두 사람과 함께 나무푯말 앞에 서 있는 오래 된 흑백사진 한 장이 있다. 1948년 4월 19일 북행길에 나선 김구(1876-1949)가 려현에 이르렀을 때, 현장취재를 위해 그곳까지 따라갔던 조선통신사 기자의 요청에 따라 찍은 사진이다. 저녁 6시 45분, 38도선을 넘어 평양으로 향하는 김구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 기자는 이런 글을 남겼다. “기어코 이루어질지어다. 남북회담 성공을 상징하는 희망의 별인가. 김구 씨가 떠난 하늘 아래로 별은 반짝인다.” 남북연석회의에서 ‘희망의 별’을 본 것은 조선통신사 기자의 심정만이 아니라, 단선단정(單選單政)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세우려고 힘쓴 각계각층 대중의 한결같은 심정이었다.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해 전개된 1948년의 거대한 대중운동은, 장차 통일정부를 세우는 날까지 이 나라 정치정세에 변화의 원동력을 끊임없이 보내주는 진보정치운동의 발원지로 남아있을 것이다. 1948년의 대중운동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면, 나라의 통일을 실현해 가는 앞길이 보인다. 남북연석회의라 부르는 사변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정당 및 사회단체의 대표자들이 모인 연석회의와 지도자들이 모인 협의회가 그것이다. 그 사변을 줄곧 남북연석회의라고 불러온 까닭에, 대표자연석회의의 의의는 후대에 전해졌지만 지도자협의회의 의의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전자와 후자를 모두 아우르는 뜻에서 그 사변을 남북정치협상이라 부른다.

    1948년 4월 19일 오후 6시에 막이 오른 대표자연석회의는, 전국 각지에서 평양 모란봉극장으로 집결한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한 가운데 4월 21일부터 23일까지 네 차례 열렸다. 그것은 정치회의라기보다 정치집회에 가까웠다. 그에 비하여, 남북정치지도자 15명이 참가한 지도자협의회는 4월 27일과 30일, 5월 2일에 세 차례 열렸다. 남북정치지도자들이 오해와 불신을 씻고 정치문제를 진지하게 협의하고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낸 자리는 사실상 대표자연석회의가 아니라 지도자협의회였다. 지도자협의회를 더 중시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남북정치협상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면 아래와 같은 의의가 돋보인다.

    1. 남북정치협상을 이끈 것은, 김구와 김규식(1881-1950)을 대표로 하는 남북협상파가 아니라 북조선로동당이다. 이것은 아래와 같은 사실로 입증된다.

    1-1) 1947년 11월 16일과 17일에 진행된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0차 전원회의는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정치과업을 결정한 중요한 회의였다. 그 회의의 결정사항은 임시통일헌법을 제정하고, 유엔조선임시위원단 활동을 차단하고,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들을 단선단정반대운동으로 결집하고,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전국 총선거를 준비해나간다는 4개항으로 요약된다. 4개항 가운데서도 가장 시급한 것은 남북의 정당, 사회단체들을 단선단정반대운동으로 결집하는 과업이었다. 그 정치과업은 1947년 12월 23일에 진행된 북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1차 전원회의에서 구체화되었는데, 남측의 근로인민당(백남운, 1897-1979), 민주독립당(홍명희, 1880-1968), 인민공화당(김원봉, 1898-1958), 민주한국독립당(권태석)과 손잡고 단선단정반대운동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1-2) 북로당은 남측의 여러 정당들과 손잡고 벌이는 단선단정반대운동을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추진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미군정청의 감시와 방해가 심하였을 뿐 아니라, 남조선로동당 당권을 장악한 박헌영과 이승엽이 남측의 민족주의정당들과 정치적으로 연대할 필요가 아직 없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남북 정당의 정치연대를 사실상 반대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북로당은 비공개정치활동을 벌일 수밖에 없었는데, 비공개정치활동을 맡길 적임자는 항일운동시기부터 민족주의세력과 친밀한 성시백(1905-1950)이었다. 북측 자료에는 성시백이 1947년 12월에 남측의 민족주의정당들 특히 ‘임정요인들’과 통일전선을 형성하는 임무를 받은 것으로 적혀있다.

    성시백과 친밀한 김구 측근들로는 한국독립당 선전부장 엄항섭(1898-1962), 그리고 항일운동시기부터 김구의 비서로 일해온 안우생(1907-1991, 안중근[1879-1910]의 동생 안공근[1889-1940]의 장남)이 있었다. 그리고 성시백과 친밀한 김규식 측근들로는 권태양과 최석창이 있었다. 민족자주연맹에서 권태양은 상무위원, 상임위원회 총무국 차장, 비서처 총무였고, 최석창은 상무위원 겸 상임위원회 재무위원장이었다. 성시백은 그들을 통해서 김구와 김규식이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하도록 힘썼고, 안우생과 엄항섭은 김구에게 남북정치협상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1948년 2월 10일 김구가 비장한 결의를 담아 발표한 성명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은 엄항섭이 문안을 작성한 것인데, 엄항섭은 그 성명을 쓰기 전에 성시백을 두 차례 만나서 의견을 나누었다. 그 성명에 나오는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도선 이북을 가고 싶다”는 대목은 단선단정을 반대하고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하려는 의사를 드러낸 것이다. 북로당이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할 남측 정당들의 실정을 파악하기 위해서 보낸 대남연락부장 림해가 서울에 도착한 날은 1948년 2월 11일이었다. 림해는 서울에서 백남운, 홍명희, 김원봉을 만났고, 그 다음으로 김구 측근인 엄항섭과 안우생, 김규식 측근인 권태양과 박건웅(중국 혁명음악의 대부 정율성[1914-1976]의 매형)을 만나고 평양으로 돌아갔다.

    남북정치협상을 추진하려는 분위기가 소리 없이 조성되는 가운데, 김규식은 김구를 찾아가 북측에 요인회담을 제안하는 서한을 보내자고 합의하였는데, 그 서한도 엄항섭이 작성하였다. 그 서한이 북로당에 전해진 때는 1948년 2월 16일이다.

    1-3) 이승만(1875-1965)이 추진한 남조선단정수립에 동의해오던 김구가 갑자기 단독정부수립반대로 돌아선 때는 1947년 12월 중순이었다. 1947년 12월 23일 김구는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그가 갑자기 남조선단정수립을 반대하기 시작한 까닭은, 1947년 12월 2일 장덕수(1894-1947)가 암살된 직후 이승만과 심한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한국민주당 외교부장 장덕수는 한민당 요인들 가운데서 이승만과 가장 가까웠으며, 사실상 미군정청-이승만-한민당을 연결하는 고리역할을 맡아왔으니, 이승만이 암살사건을 보고 화가 치민 것은 당연하였다. 장덕수 암살사건에 한국독립당 중앙위원 김석황(1894-1950)이 깊이 연관되었다는 정보를 들은 이승만은 김구를 배후조종자로 의심하였다. 수도경찰청장 장택상(1893-1969)은 수배를 받고 도피 중이던 김석황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핵심당원들을 줄줄이 연행하고, 1948년 1월 16일 특별성명을 발표하면서 김구를 암살사건 주범으로 몰아갔다. 이에 분개한 김구는 마지막 항에 “남북요인 지도자회의를 소집함을 요구한다”는 내용을 집어넣은 6개항 의견서를 1948년 1월 29일에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반대쪽에 서게 되었다. 이처럼 김구의 남북요인회담 구상은 반 이승만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의 반 이승만 운동은 단독정부수립 반대-남북요인회담 구상-남조선단독선거 불참으로 전개되었다.

    1-4) 김구는 자기가 이끄는 한독당이 남북정치협상을 반대할 것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정당대표자회의가 아니라 요인회담을 구상하였다. 그가 말한 요인이라는 개념에는 정당의 대표성이 들어있지 않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요인회담 구상은 한독당의 의사가 아니라 김구 개인의 결심이었다. 위에서 논하였지만, 김구가 요인회담을 추진하기로 결심하기까지, 북로당이 성시백과 김구 측근들을 통하여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하도록 김구를 설득하였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북로당이 남북정치협상에 참가할 정당 관계자들을 은밀히 접촉하고 있음을 알지 못한 김구는 자신과 김규식의 공동명의로 북측에 보낸 요인회담 제의에 응답이 오지 않자, 1948년 3월 8일 자신의 비서 안우생을 비공개로 평양에 보냈다. 김구는 평양에 다녀온 안우생을 통하여 남북정치협상에 대한 북측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처음에 남북정치협상에 대해 반신반의하던 김구는 안우생의 방북보고를 듣고 나서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1-5) 다른 한편, 안우생을 통하여 김구의 의사를 파악한 북로당은, 1948년 3월 20일과 24일에 중앙위원회 특별전원회의를 진행하였다. 바로 그 회의에서 남북정치협상에 관한 구체적인 결정이 나왔다. 결성사항 가운데서 가장 돋보이는 내용은, 대표자연석회의와 지도자협의회를 함께 진행하는 것이다. 대표자연석회의는 단선단정반대운동의 출발점으로, 지도자협의회는 통일정부수립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북로당의 결정사항은 북조선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민전)에 전달되었다. 북조선 민전은 이튿날인 3월 25일 평양방송을 통해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하면서, 지도자협의회에 관한 내용은 밝히지 않았다. 그 까닭은, 지도자협의회 개최방침까지 언론에 공개할 경우, 미군정청을 자극하여 방해공작이 심해질 것을 의식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2. 남북지도자협의회 제1차 회의는 4월 27일 오후 2시 평양시 인민위원회 회의실에서 15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 역사적인 회의에 참가한 남측 지도자 12인은 한국독립당의 김구, 조소앙(1887-1958), 조완구(1881-1952), 엄항섭, 민족자주연맹의 김규식, 김붕준(1888-1950), 민주독립당의 홍명희, 건민회의 이극로(1897-1982), 남조선로동당의 허헌(1885-1951), 박헌영(1900-1955), 근로인민당의 백남운, 인민공화당의 김원봉이었고, 북측 지도자 3인은 북조선로동당의 김일성(1912-1994), 김두봉(1890-?), 조선민주당의 최용건(1900-1976)이었다.

    남북지도자협의회 제1차 회의를 시작하면서 김일성(당시 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은 “연석회의의 성과를 더욱 다지고, 미소양군 철수 후에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방도를 무릎을 맞대고 토의, 합의하여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그 회의에 주어진 역사적 임무를 밝혔다. 그에 따라 지도자협의회에서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기 위한 방도를 논의한 끝에 이 나라의 앞길을 밝혀준 불멸의 통일강령을 담은 문서를 작성하였으니, 그것이 1948년 4월 30일 남북연석회의 마지막 회의에서 채택, 발표된 ‘전조선 제 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이다. 지도자협의회가 작성하고, 대표자연석회의에 참가한 정당과 사회단체가 서명하고, 지도자협의회 이름으로 발표한 공동성명서가 후대에 전해주는 것은 세 개의 원칙과 한 개의 경로이다. 제1원칙은 주한미국군 철군을 요구하는 자주의 원칙이다. “미국은, 자기 군대를 남조선으로부터 철퇴시킴으로써 조선독립을 실제로 허여하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제2원칙은 동족끼리 전쟁을 반대하는 평화의 원칙이다.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내전이 발생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였다고 밝혔다. 제3원칙은 단선반대 원칙이다. “남조선단독선거는 설사 실시된다 하여도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 공동성명서는 통일정부를 세우는 경로가 전국정치회의 개최-민주주의임시정부 수립-입법기관 선거-통일헌법 제정-통일적 민주정부 수립으로 이어질 것임을 밝혔다.

    남조선 단독선거가 강행되어 제3원칙은 효력을 잃었으나, 제1원칙과 제2원칙은 60년이 지난 오늘도 여전히 나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 지켜야 할 불멸의 통일강령이다. 놀라운 것은, 이미 60년 전에 자주적 통일정부를 세우는 경로를 밝혔다는 사실이다. 통일정부를 세우는 기본경로는 60년 전이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나, 그 경로에 담긴 개념들은 그 이후 정치정세가 변화하면서 다른 용어로 바뀌기도 하고 새로운 내용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전국정치회의를 개최하는 첫 단계에 새로 추가된 것은 통일협의기구 결성이다. 전국정치회의를 열고 통일협의기구를 결성하는 전망을 열어준 정치적 합의는 10.4 선언에 들어있다.

    1948년 5월 13일 김구는 유엔조선임시위원단 성원을 만난 자리에서 “국민의 진정한 의사는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아니라 통일정부 수립”이므로 “모든 문제의 최후결정은 전국정치회의에서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국정치회의를 열어 통일정부 수립방안을 합의하자고 결정한 것, 이것이 남북지도자협의회가 후대에 남긴 불멸의 유산이다. / ⓒ 통일뉴스(http://www.tongilnews.com)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종합 재정리

    ‘解放前後史의 認識’ 中 李鐘燻의 ‘美軍政經濟의 역사적 성격’에서 맥아더 사령부의 대한점령 정책의 기본방침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아무튼 점령 초기에 있어서 미국의 대한점령 정책의 기본방침은 맥아더포고가 그것이었으나 10월 이후에 있어서는 3성조정위원회의 대한초기기본지령이 기본방침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미국정부의 대한점령 정책에 관한 기본방침의 大綱을 처음으로 천명한 것이었던 만큼 중요성이 있는 것이라 생각되어진다. 이 대한초기기본지령은 연합국에 의한 신탁통치가 성립될 때까지의 초기의 미군정청의 기본정책-주로 정치, 경제, 재정- 및 미점령군 사령관의 권한에 것을 규정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미군의 대한 점령목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이 지적되었다.

    즉 미국의 대한점령 정책의 궁극적인 목적은 한국이 유엔의 책임있는 구성원으로서 손색이 없고 견실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조건을 조성하는데 있다. 이에 대한 당면과제로서는 일본의 항복조건이 한국에서 엄격히 이행되어야 할 것이며, 조선군의 항복접수 그리고 건전한 한국경제의 발전에 기하는데 있다. 고 한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것은 대한점령 정책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경제체제 및 경제체제에 대하여 명백히 태도를 표명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한국의 장래에 대하여 그 전망을 명백히 하면서도 종래의 식민지 통치기구, 인원, 법령 등을 그대로 답습하였다고 하는데 미국의 대한점령 정책의 한계성이 있는 것이다. ‘본관이 일본의 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현재로서는 아주 효과적인 행정운영의 방편이기 때문’이라고 하아지 사령관은 언명하였지만 이것이야말로 미국의 대한점령의 기본정책(견실한 독립국가를 건설 및 건전한 한국경제의 확립)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군사적인 현상유지를 중요한 전제로 하고 있었음을 설명하여 주는 것이다.’

    / (PP.455-456.)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되자, 일제의 식민지기간과 분단국가가 된 남한만의 맥아더 사령부관할에 의한 군정기간에 대한 논의가, 학계에서는 解放前後史의 구분과 의미에 대하여 1980년대까지는 합의된 내용은 없으나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에 대하여 수긍하고 있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金光植은 ‘8.15직후 정치지도자들의 노선비교’(解放前後史의 認識 2. 中)의 머리말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 8.15의 의미를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에 대한 합의는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다. 8.15 직후부터 쓰인 ‘광복’ 또는 ‘해방’이란 단어가 그동안 8.15를 설명하는 용어로 되어왔지만, 이에 대한 엄밀한 검토가 아쉬운 실정이다. 사실 최근의 연구들은 8.15후 3년간의 역사를 통해 남북한에 상이한 성격의 체제를 갖는 분단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점에서 ‘해방’ 40년의 역사를 흔히 ‘분단시대’라 이름 붙이고 있으며, ‘해방’ 삼 년사(三年史)는 ‘분단국가 형성기’로 파악하고 있다. 따라서 8.15후 삼 년의 역사를 살필 경우 문제의식은 분단구조화의 원인과 의미에 대한 과학적인 해명에 모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의 해명을 위해서는 당시의 세계체제적 성격과 국내의 계급구조, 식민통치권력의 철수로 인해 형성된 일정한 ‘해방공간’ 에서의 정치세력의 활동과 군정의 정책을 포괄적으로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중략- 한편 8.15후 삼 년사를 규명하는데 있어서는 분단의 회피를 위한 노력들이 아울러 조명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록 그것이 실패로 끝났다고 할지라도 분단과정의 정치세력의 힘은 그 양과 질에 있어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정도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의 저지에 실패했다는 점에서 8.15 직후 모든 정치세력은 분단에 대한 공동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그렇지만 분단구조의 해명이란 과제의 실체는, 분단에 의해 규정된 오늘의 문제를 극복해나가려고 할 때만 생생하고 균형있게 포착될 수 있응 것이다. 따라서 분단구조의 과학적 해명은 분단 극복의 필연성과 상호 관련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PP.19-20.)

    解放前後史의 認識 2. 중에서 朴玄採는 ‘남북분단의 민족경제사적 위치’란 글에서 미 군정하에서의 우리 역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미군정이 민족사의 역사적 계기 속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것이 일본 제국주의하 36년간의 식민지 종속의 후속이고, 이것을 전기로 하여 낡은 식민지 유제를 청산하고 새로운 자주적 근대화에의 자주적인 민족적 힘을 조성해야 하는 역사적 시기에 해당한다는 데서 주어진다. 우리의 역사는 조선조말 봉건사회에서 자주적 근대화로의 역사적 계기를 봉건제의 수취체계 밖에서 형성된 중간층과 부분적인 매뉴팩처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광범한 농민층의 반란에서 가져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계기는 밀어닥친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자주적 대응능력의 취약성,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간에 야합 앞에 현실화되지 못하고 조선을 미성숙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략한다.(P.212.)

    註 00; 박현채는 한국의 자본화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PP.212-213.)

    ‘자본제화에로의 계기를 식민지화에서 갖는 한국 자본주의는 자본주의 발전 유형에서 식민지 종속형의 전형이 되었다. 그것은 자본제화과정에서 식민지 종속성이 갖는 몇 개의 주요기준 즉, 1. 시민혁명의 결여. 2. 식민지 졍제구조와 이중구조. 3. 강요된 희화적 근대화. 4. 식민지 수탈을 위한 상품경제에의 편입. 5. 경제외적인 것의 자본의 주요 축적계기로서의 등장에 의해 식민지 반봉건적인 것이 되었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자본주의 전개는 크게는 일본자본의 운동양식에 의해 규정되면서 이루어진다. 자본의 본원적 축적기(1905-1918), 산업자본단계(1919-1929), 금융자본단계(1929-1945)로 이어지는 일본자본의 운동과정에서 식민지하 한국 자본주의는 식민지 자본주의와 반봉건적 지주, 소작관계를 두 개의 지주로 하면서 식민지 반봉건성을 유지해 왔다.’

    任軒永은 解放前後史의 認識 2. 중 ‘해방직후 지식인의 민족현실 인식’이란 글에서,

    ‘비판적 기능을 가진 지식인들이 8.15 직후의 격변기에 민족의 독립과 통일, 민주, 민중 국가 건설의 역사적 과업 수행을 위하여 어떤 견해와 이론을 폈으며, 그 결과는 무엇이고, 또 이를 통하여 오늘의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인가를 밝혀보려는 것이 이 글의 노리는 바다. 결과론적으로 말한다면 강대국의 패권주의적 세계전략과 외세를 민족분단과 집권목적으로 연계시킨 현실정치의 냉혹성 아래서 창백한 지식인들의 민족적 이상은 박해와 탄압과 좌절로 그 제 1 막을 내려버린 역사적 금렵구역으로 마치 신화처럼 전해올 뿐이다. 언듯 보면, 새삼 지난날의 먹물이 아닌 붉은 피로 가장 원색적인 온갖 설전을 치열하게 전개했던 시절을 되돌아볼 가치가 없는 것인 양, 생각할 수도 있으나 다음 몇 가지 사실 때문에 우리는 감히 이 시대 지식인들의 고뇌를 충분히 되새겨볼 임무와 가치가 있다고 본다.

    첫째, 8.15 이후의 현대 민족사를 우리의 주체적 관점에서 재점검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성행한 강대국 정책중심의 연구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역사적 매듭을 풀려고 무엇을 어떻게 노력했던가를 깊이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비록 좌절당한 민족의 이상이긴 했으나 이를 현실 정치적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강대국 중심의 외세결정론 내지 외세의존사관 혹은 식민지사관에 대한 반성과정치지도자나 정당, 정파, 민중사의사관의 정립을 위해서 이 작업은 필요하다.

    둘째, 그 동안 민족주체사관에 의한 현대사의 조명과 연구가 놀랄 만한 성과를 올렸으나 당대적 정치지도자 중심이거나 정당, 정파 중심의 연구가 압도적이었고, 이와 병행해서 노동자, 농민계급의 민중적 수난사에도 초점이 강하게 모아져왔으나 정작 지식인의 역사적 입장에 대한 연구는 별로 없었다. 정치지도자나 정당, 정파의 이론적 공급원은 바로 지식인이었으며, 또 민중적 고난에 대한 가장 깊은 동정자도 지식인이었음을 감안한다면 지식인의 주장에 대한 연구가 없는 정치지도자나 정당, 정파, 민중사의 연구는 편견화 될 소지가 전연 없지 않다. 물론 이와 반대 방법으로 지식인의 주장을 정치지도자나 정당, 정파, 민중사에 투영할 수도 있으며, 또 그런 각도에서의 연구 업적이 상당수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지성사적 내지 민족주체사적 입장에서 볼 때 역시 지식인들의 이론적 성숙도를 별도로 점검하는 작업이 그리 헛된 일이 아닐 것 같다.

    셋째, 가장 중요한 점으로 8.15 이후 지식인들의 각종 이론과 주장은 비록 현실 정치적 상황 때문에 진공화 내지 화석화된 채 밀폐된 박물관에 비공개로 사장되어 있으나 그 여러 쟁점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절실하며, 그 논의나 이론의 수준에서 오히려 오늘을 능가하는 부분도 있기에 충분히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급격히 뜨거워지고 있는 민중주체사관에 의한 현대사의 조명이 새로운 이론이나 주장에 너무 열중하고 있지 않나 하는 반성과 아울러 이미 우리 보다 한 세대 앞선 지식인들이 한 번씩 다 거친 고뇌를 우리가 미처 알자도 못한 채 역사의 원점에서 방황하는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이 작업이 필요하다. 요컨대 8.15 직후의 지식인들이 전개했던 이론과 주장은 우리 민족 근대사 이래 가장 높은 강도의 현실대응책으로부터 극한 대립과 실천을 통한 이론의 전개라는 점에서 분단극복을 위한 역사적 원점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환기를 살고 있는 지식인의 역사적 임무와 기능에 대한 간접적인 해답을 구하는데도 얼마간의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본다. - 중략 - 8.15 이후의 지식인이란 자의든 타의든 직간접으로 거의가 어떤 정파에 속해 있었고, 설사 초월적 위치에 있었다 할지라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그 어떤 정파나 지도자의 이익에 도움을 주었거나 아니면 반대로 해를 끼칠 수밖에 없었던 게 사실이다.’ (PP.405-407)

    라고 하여 8.15 이후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은 각종 이론과 주장을 내세워, 비록 현실 정치적 상황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거나 수용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8.15 이후 미군정에 대한 지식인들의 평가는 다양하게 나타나 군정에 대한 찬반의 주장이 여러 분야에서 제기되었다. 이 중 천도교 교단내외에서 국내외 정세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이론을 갖추었던 이응진(李應辰)은, 해방 후 복간된(1946년 1월 1일 복간 신년호 통권 73호 - 1949년 3월 25일 신춘호 통권 81호로 폐간) 개벽 통권 79호(1948년 8월호) ‘美蘇兩國에 對한 公開狀’(PP.11-14)에서

    ‘민주화를 시행한다고 선전하면서 우리 민족의 양풍미속을 (대부분) 봉건적이라는 말로 써 배격하고 오만한 양풍괴속을 우리에게 강권하고 -중략- 일제의 학정 36년간에도 지금과 같은 무질서, 비도덕, 기아 등 세기말적 생활을 체험해 본 일은 없다.’고 하면서 군정이 강권하고 있는 양풍괴속을,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도덕적 관점에서 비판하고 강도 높게 군정의 폐단을 공개적으로 비난을 했다. / 解放前後史의 認識 2. 중 任軒永의 ‘해방직후 지식인의 민족현실 인식’ P. 429.참조

    註 00; 李應辰 / 復刊 開闢 誌에 6篇의 글이 실려 있다.

    통권 73호 - 1946년 1월

    통권 74호 - 1946년 4월/ 信託統治와 解放運動’(PP.68-73)

    통권 75호 - 1947년 8월

    통권 76호 - 1948년 1월/ 協助의 길을 찾는 世界(國際情勢)(PP.42-46)

    통권 77호 - 1948년 3월/ 國際情勢의 展望(PP.19-23)

    통권 78호 - 1948년 5월

    통권 79호 - 1948년 8월/ 美蘇兩國에 對한 公開狀(PP.11-14)

    통권 80호 - 1948년 12월/ 內亂에 呻吟하는 中國(PP.13-16)

    통권 81호 - 1949년 3월/ 亞細亞의 受難과 保國安民之方略(PP.30-33)

    이러한 미군정과의 사회문화적인 차이는 미군정의 기본목적에서 출발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군정 요원으로 전남지역에서 근무했던 그란트 미드(E, Grant Meade)는 “韓國現代史의 재조명” 중 ‘美軍政의 정치경제적 인식’에서 미군정의 기본적 목적과 태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前略 - 한국과 관련하여 국무성은 1946년 8월 “점령정책의 기본 목적은 /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바탕 위에 / 정치생활을 궁극적으로 재건하는데 있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명확히, 한국과의 관계는 미국사회의 안정을 높일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기대와 미국 자신의 사회질서의 자세가 반영되어 있다. 국무성이 미국 전후 점령정책의 초석이라고 언급한 대서양헌장조차 미국 외교정책의 기본 신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미국 국제외교의 궁극 목적 뿐만 아니라 미국이 유지하려고 하는 정치, 사회, 경제질서를 나타내주고 있다. 대부분의 민정관들은 헌장의 일반취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P.61)

    해방이 자력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외부 즉 미국이 일본을 항복케 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이 어려웠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金奎植헌 박사의 비서실장이었던 송남헌은 “解放 三年史 Ⅰ”에서 해방직후의 정치상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9월 17일 미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은 자신이 한국사정에 어두우므로 광범한 민족적 여론을 들어보겠다고 하여 국내 각 정치 단체의 지도자들과 주 2회의 정례 회견을 할 것을 발표하였다. 그 발표에 의하면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2시간 동안 각 단체 대표 1명에 5분간 면담이 허락될 것이므로 참가하고자 하는 자는 정당 명칭, 조직, 정강 등을 서면으로 하여 제출토록 발표하였다. 이 발표가 있은 후 우후죽순처럼 정당이 발생하였다. 당초 하지 중장이 서울에 입경할 때만 해도 8, 9개 정도의 정당과 단체가 있을 뿐이었으나 한 달 후에는 70여 개로, 11월 1일에는 미 군정청에 등록된 수가 2백 50여 개에 달하였다. 이러한 정당과 단체의 난립은 헛되이 정국의 혼돈만 가져 왔을 뿐 하등 건국에 기여할 수 없었다. 이러한 불건전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한 행동통일 운동이 정가 일각에서 제창되었으나 특기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것은 당시의 부화뇌동적인 군소 정당과 단체의 성격으로 보아 당연한 것이기도 하였다.’(P.225)라고 평가하고 있다. /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하신 분은 포덕 153(2012)년 3월 30에 게재한 필자의. ‘天道敎政治理念을 되새겨 보며’를 참조.

    3. 해방 전후 상황 속에서 천도교의 대응(對應).

    3·1운동이후 천도교는 합법적인 여러 가지 운동을 통해 일제에 저항하는 하편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완전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도 겸하여 왔다. 대표적으로 6.10만세운동, 오심당(吾心黨) 비밀결사 운동과 춘암상사(春菴上師 朴寅浩)의 멸왜(滅倭)기도운동을 들 수 있다. 오심당은 포덕 70(1929)년에 천도교청년당원 중에서도 핵심인물을 위주로 조직한 비밀결사이며 일본이 국제적으로 위기를 맞을 포덕 76-77(1935-1936)년에 조선독립운동을 벌일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포덕 75(1934)년 12월에 평남 경찰부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했다./ 天道敎靑年會八十年史 PP. 545-555.참조

    註 00; 6·10 만세운동(六十萬歲運動)- 이 운동은 1926년 6월 10일 조선 및 대한제국의 마지막 임금 순종의 장례식을 기해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다. 6·10 만세운동은 3·1 운동을 잇는 전국적·전민중적인 항일운동으로,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3·1운동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철저한 경계 태세를 갖추었고, 경성부에는 7000여 명의 육·해군을 집결시켰으며, 부산·인천에는 함대를 정박시켰다. 주동자는 사회주의계의 권오설, 김단야, 이지탁, 인쇄직공 민창식, 이용재, 연희전문의 이병립, 박하균, 중앙고보의 이광호, 경성대학의 이천진, 천도교청년동맹의 박내원, 권동진, 손재기 등으로, 이들은 10만장에 달하는 격문을 준비하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를 지날 때 일제히 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살포, 수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했다. 격문의 내용은 "일본제국주의 타도," "토지는 농민에게," "8시간 노동제 채택," "우리의 교육은 우리들 손에" 등이었다. 6월 10일 순종의 인산에 참가한 학생은 2만 4000여 명이었다. 군중의 호응으로 시위가 확대되었으나 조직 사이의 유대 결여와 민족진영의 조직약화, 노총계 사회주의계열의 사전체포 등으로 일본 경찰에 저지당하여 6·10 만세운동은 실패하였다. / 여러 포털사이트 종합 정리./ 안내서 천도교 PP.82-83. 6·10 만세와 천도교 참조.

    해방 전후부터 6,25사변 때까지의 교인 수에 대한 통계는, 종교문화와 신앙. 그리고 종교와 종교인구의 변동에 관한 연구를 한 학자들에 의해 공개되었다. 이들이 공개한 자료들에 의하면, 해방 전후시기의 천도교의 교인 수는 150-170 여만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동학혁명이란 처절한 싸움에서 살아남아, 매우 열악한 가운데에서 어렵게 출발한 천도교가, 20여년(1905-1925)간에 이룩해 놓은 300 여만 명의 교단을, 자파의 이익을 위한 교파간의 갈등으로 15년(1925-1940) 사이에 반 토막이 났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교단의 퇴행에 대하여 신, 구 또는 직간접으로 패거리를 만들어 교단의 단합과 발전을 저해한 원로와 지도자들 중에, 그 누구도 자신의 책임이라고 공개 참회한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지도자들의 사고와 처신이 천도교 교단을 더 이상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이, 퇴행(退行)의 중요한 요인이라고 단정해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일제식민지 시대라는, 특수한 역사성을 감안하더라도 이 시대의 교단과 교단지도자들의 공과의 책임을 묵과할 수 없다. 그들은 자신이나 자파의 단결과 상대에 대한 처절한 싸움에 모든 지혜와 힘을 쏟았을 뿐이다. 교단의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註 00; 천도교 교단의 교인 수 변동(1905-2009년의 100여 간의 변동)과 그 과정 속에서 교단의 활동과 교단 지도자들의 공과에 대한 연구는, 사회변동을 깊이 다루고 있는 사회학의 방법으로 종교라는 특수성을 감안한 종교사회학적 입장에서 새로이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연구는 시급성을 요하는 것이며 이 연구의 결과는, 지금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것과 천도교의 미래를 어떻게 창조할 것이며 그 창조를 위하여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대안을 마련해 줄 것이라는, 최소한 이 두 가지의 확신을 갖고 있다

    교단의 중심세력이 30년대 이후부터 북한지역으로 이동 확대되었고, 북한에서의 교단운영과 교인들의 신앙지도와 교육은, 구파에서 말하는 기준으로 한다면, 전부 신파계열의 지도자들에 의해 육성되었다. 해방 전후의 천도교 교인 수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학계나 교단내외에서 언급되어온 것을 바탕으로 말한다면, 신, 구 교인의 비율은 85% 대 15%에서 80% 대 20%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교인 수에 대한 연, 월성납부라는 구체적인 자료로 한다면 비율은 달라져, 신파계열의 교인 수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주장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자료가 있다. 1950년 중엽까지 연, 월성을 납부하고 있는 북한만의 교인 수는,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 법도(法道)부장으로 재직했던 문 재경(文再慶)이 6, 25동란 중에, 휴대하여 가지고 온 자료에 의하면, 북한 6개도(평남, 북, 함남, 북. 황해. 강원.)별 통계와 총계에 의하면, 2백 86만 6천 3백 42명이다. 여기에다 3.1 재현 운동을 정리 기록한 자료에 의하면, 박 연수(朴延壽)는 북한 천도교 청우당의 당원 수는 55만 여명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6,25동란시기에는 당원 수가 더 증가되었으므로, 상당한 당원수를 가진 청우당이었다. 청우당의 당원의 대다수는 천도교인이었지만 당원 자격기준으로 천도교인만 가입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비교인 수가 상당 수 있었을 것으로 미루어 보면, 천도교인과 청우당 당원의 총수는 300여만 명이 되었으리라 추정된다. 불과 5년(1945-1950)만에 교도 300여 만 명의 대 교단으로 다시 복귀한 놀라운 성장을 가져왔다. 이러한 놀라운 성장에 대해 어느 누구도 평가 절하하는 평가와 북한에서의 천도교의 종교 활동과 청우당 활동의 결과에 대하여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비난하거나 묵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천도교가 대 교단으로 성장한 이 기간 동안에 남한에서의 교인 수는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남한의 교인수를 최대 비율로 계산해도 30만 명을 넘을 수가 없다. 이 기간 동안 연, 월성 수납에 따른 자료가 공개된 적도, 교호 수나 교인 수를 공식적으로 발표한 적이 없기 때문에 실제로는 20 만 명 이하일 것이라 추측된다. 경, 충, 전, 강(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등의 4개 지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구파의 교인 수는 10 만 명도 안 되었을 것이다. 1961년 천도교 총부 수습 위원회가 구성되었을 때 신파계열인 경상도를 합쳐서 10만 명이 안 되었다. 이것은 연, 월성을 납부한 교인만의 통계이지만, 구파계열 중에 총부에 연, 월성을 납부한 교인은 극소수였다. 그렇다고 수습위원회 납부한 구파 계열의 교인 수는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지만, 그 때 정황으로 미루어보아 1 만 명도 안 되었다. / 구체적인 자료에 대한 설명은 포덕 150(2009)년 1월 22일에 게재한 필자의 ‘천도교 임시본부 는 어떤 단체인가 (상)’을 참조.

    1920년대 후반부터 천도교 청년당은 대중 속에 파고들기 위하여 7부문운동을 전개하였다. 개벽지를 통한 「언론활동」과 「소년회운동」을 계속하는 한편 1924년 3월에는 여성단체인 「내성단」을, 1924년 6월에는「천도교 학생회」를, 1925년 10월에는「조선농민사」를, 1931년 5월에는 「조선노동사」를 조직하였다. 1928년 4월에는「천도교 청년회」를 조직하였다. 한편 천도교 청년당은 우리의 독립 운동을 위하여 1922년 가을에 김기전(金起田), 박사직(朴思稷), 박내홍(朴來弘), 조기간(趙基栞) 등 6명(2명 미상)이 중심이 되어 의논하여 전국적인 비밀결사조직인 불불당(不不黨)을 1923년 6월경에 조직하였다. 1926년 말에 이르러 국내외 사정이 급변하기 시작하게 되자, 포덕 70(1929)년 평양을 중심으로 결성된 오심당과 연합을 하여 열성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오심당(吾心黨)이라 개칭하고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1932년에는 500호를 1포(包)로 하고 포의 구성을 5단계의 세포 조직으로 하는 등 교회조직을 강화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는 당원을 각 군에서 지도력이 있는 청년당원 중에서 엄선하였다.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4)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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