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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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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997회   작성일Date 13-03-28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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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5)

    註 00; 不不과 吾心- 黨名인 불불당(不不黨)과 오심당(吾心黨)의 유래에 대해서는 전해오는 말이 없다. 그러므로 다의 성격으로 미루어 필자는 당명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생각해봤다.

    不不은 論語 卷之一 學而第一 凡十六章에,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만물의 이치에 대하여 배우고, 익히는 것 이것 또한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먼 곳에 있는,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벗이 찾아오면, 이것 또한 기쁘고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화내지 않는다면, 군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子曰 學而時習之不亦說乎 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 人不知而不不亦君子乎 /論語.中庸 PP.36-37.참조. 에서 ‘不不亦君子乎’의 ‘不不’는 아닌 것이 아니다. 또는 그렇다.의 의미이지만 정정당당하다 숨길 것이 없다. 의미일 수도 있다. 흔히 있는 무리들의 이름뿐인 모임이 아니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하나도 숨길 것이 없는 정정당당한 당이라는 뜻이다. 군자란 스스로의 삶에 자족하는 사람이며, 다른 사람과 더부러 함께어우러져 살아가는 사람이므로 군자에게는 군자삼락(君子三樂/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 있다.)이라는 것이 있다. 군자삼락이란, 전국시대에 군자가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전국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는 진심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국 시대, 철인(哲人)으로서 공자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맹자(孟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나 천하에서 임금노릇을 하는 것은 삼락에 들어 있지 않다. 첫 번째의 즐거움은 양부모가 다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요. 두 번째의 즐거움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의 부끄러움이 없고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 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은 것이요(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 세 번째의 즐거움은 천하에서 영재를 얻어서 교육하는 것이다. / 孟子 曰 君子有三樂而王天下 不與存焉 父母俱存 兄弟無故一樂也 仰不傀於天 俯不作於人二樂也 得天下英才而敎育之三樂也. - 孟子 卷之十三 盡心章句上 凡四十六章/20. 孟子.大學. P. 347.

      不不을 사용하는 용어들의 사례를 들어보면, 不不知는 모르는 게 아니다. 다 안다는 뜻이고, 無不不無 不不無不는 없는 것이 아니면 아닌 것이 없고, 아닌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 아닌 것이다.의 의미이다. 지낸 해 대통령 대선 기간 중에 박근혜 후보가 시인인 김지하씨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 후 벗들과 모인 자리에서 박근혜 후보의 불통(不通)에 대한 이야기 중 김지하 시인이 말한 ‘불통이 아니고 보통이 아니다.(不不通 非普通)’란 이야기가 한동안 인터넷 상에서 회자(膾炙)된 적이 있다.

    오심(吾心)은, 동경대전 논학문에 경신년 4월에 대신사께서 천명을 받아 득도하게 되는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시는 글 중에 한울님과 천사문답(天使問答/自問自答) 내용에 (필자의 실험적인 풀이)‘내 몸이 몹시 떨리면서 밖으로부터 접령(接靈)하는 기운이 있고 안으로는 한울님의 가르침이 있었다. 그때, 보았는데 보이지 아니하고 들렸는데 들리지 아니하므로 마음속으로 매우 놀라서 수심정기하고 한울님께 어찌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한울님께서 대답하시기를 「내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 사람이 어찌 이 이치를 알겠는가?. 천지는 알아도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라는 것도 한울님인 나다. 너는 한없이 무궁한 도를 깨달았으니 마음과 몸을 닦고 단련하여 깨달은 도의 내용의 글을 지어 어리석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게 되면 너로 하여금 장생하여 천하에 빛나게 하겠다.」/ 身多戰寒 外有接靈之氣 內有降話之敎 視之不見 聽之不聞 心尙怪訝 修心正氣而問曰 何爲若然也 曰吾心卽汝心也 人何知之 知天地而無知鬼神 鬼神者吾也 及汝無窮無窮之道 修而煉之 制其文敎人 正其法布德則 令汝長生 昭然于天下矣/ 결국 吾心卽汝心이란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라는 뜻으로, 한울님과의 대화에서 한울님의 마음과 인간의 마음이 근본에서 하나이고, 서로 같음을 깨닫게 하는 말이다. 오심당(吾心黨)은 바로 한울님과 내 마음이 하나, 모든 도인은 한울님을 모셨으니 당원 서로간의 마음도 하나라는 이런 하나의 마음으로 모인 당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註 00; 修心正氣- 세속에 물들어 혼란한 마음을 물욕에 흔들지 않도록 갈고 닦아서 바로 잡고, 혼탁(混濁)한 기운을 씻어내어(掃除濁氣) 깨끗하고 맑은 기운(물욕에 흔들지 않는 기운)으로 바로 잡아서(兒養淑氣) 나의 몸과 마음을 한울님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것(吾心卽汝心).

    1929년부터는 더욱 활동을 강화하였으며 1935년과 6년에 걸쳐 예상되는 일본의 국제적·정치적 위기가 도래할 기회를 포착하여 대대적인 대중적 독립 운동을 목표로 하였다. 1926년부터 천도교 청년당 중앙간부는 국내의 종교단체 및 유력한 인사들을 주기적으로 방문하여 정세 교환을 시도하였고 오심당은 각 간부들을 소련. 중국. 일본 등에 파견하여 국제정세의 추이를 광범위하게 검토 분석하였고, 당내 중견 간부들을 중심으로 경제. 사회. 또는 공산당. 국민당 등 전공분야별로 맡겨 검토 분석하게 했다. 그리하여 일본이 국제적.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게 될 때를 기하여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게 되었다.

    특히 조기간은 소련에, 김기전은 중국에, 박사직은 일본에 파견하여 국제정세의 추이를 광범하게 검 토분석하여 왔으며, 당내 중견간부들에게는 전문분야를 하나씩 맡아 검토 분석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오심당 당원들은 전 교인 중에서 엄선된 유수한 일꾼들이었고 당원들은 첫째로, 절대로 비밀을 엄수함은 두말할 것도 없고, 둘째로. 1인당 1년에 5원의 운동기금을 부담하였으며 (검거 당시 운동 기금은 2,300 여원이 있었다.) 셋째로. 당을 위하여 대중운동을 다하도록 하였습니다. 또한 당은 모든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매일 암송하도록 하였다. 1. 오심 즉 여심. 2. 육능자 : 스스로 분발할 것, 스스로 새로워질 것, 스스로 활동할 것, 스스로 굳세게 나갈 것, 스스로 판단할 것, 스스로 담당할 것 3. 한울님을 모시고 한울님과 합일하는 신앙생활을 인식하고 체험할 것을 서원한다. 4. 각계 각층의 대중조직을 강행한다. 5. 소속되어 있는 대중조직의 훈련을 담당한다. 6. 궁극적 목표달성을 위해 정진할 것을 잊지 않는다.

    오심당은 강인한 결사적 조직을 하고 비밀리에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그러나 포덕 75년(1934)에 안주(安州)에서 우연히 탄로되어 9월19일부터 21일까지 오심당 당원의 일부인 230명이 일제히 검거되었다. 일본 식민 통치하에서 평남 경찰부는 「나리도미」라는 고등과 과장의 진두지휘로 평양 경찰서의 협력을 받아 형사대를 총동원하여 19일 새벽을 기해 검 에 나섰습니다. 이 때 검거된 당원은 노출된 지방에 한해서 행해졌으며, 서울, 평 양, 강동, 중화, 성천, 순천, 은산, 양덕, 강서, 안주, 맹산, 진남포, 경기지방, 선천, 의주, 정주, 구성, 영변, 곡산 등지에서 검거되었다. 함경도 일대와 기타지방에서는 노출되지 않아 검거되지 않았다. 오심당은 천도교의 비말결사로, 그 조직을 11년이나 유지하는 단단한 결속력을 보인 단체이다. 따라서 이러한 결속으로 천도교 청년당을 이끌어갔으며, 당시 청년당이 펼친 다양한 활동의 배후에서 크게 이바지했다. 이는 3.1독립운동 등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오심당 사건(吾心黨事件)>을 겪으면서 1937년에는 일제 당국에 의해 천도교 청우당이 해체되는 과정을 겪은 것이 그 시기였다.

    오심당 운동의 의의.

    오심당 운동은 경신년(1860년) 동학의 창도 이후 계속된 후천개벽을 위한 동학군의 활동으로서, 일제하의 우리 민족에게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킨 애국 운동의 하나이다. 오심당이 목적하였던 1935년과 1936년에 조선독립 운동을 성취하지는 못하였으나, 그 비밀 조직이 1922년에 발족하여 1934년까지 근 11년간에 걸쳤다는 점에 비추어 보아 비밀 조직이 얼마나 잘 되었는가를 짐작케 한다. 그리고 이들의 핵심이 되어 유년·소년·학생 운동을 비롯하여 청년·여성 운동과 농민 ·노동·상민운동 등을 대대적으로 벌였다는 사실에 비추어 당원활동이 얼마나 활발했으며 앞장섰었는가 를 말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당시 사회단체는 재정 문제에 언제나 곤란을 당한 것이 보통이었으나 오심당은 검거될 때 2,300여원이란 자금이 확보되어 언제 어떠한 일이라도 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당원들의 자발적인 의무도 훌륭했지만 간부들이 죽을 고비를 넘어가며 소련, 중국 등에 비밀히 잠행하여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활동상황을 탐문하는 동시에 국내외에 걸쳐 정세분석에 심혈을 기우려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는 점입니다. /각 종 자료 종합 정리. 구체적인 내용은 안내서 ‘천도교’ PP. 86-88. 비밀결사 오심당 참조.

    天道敎百年略史 下卷 P. 153(?).에서는 오심당 사건에 대하여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3행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교단의 중추적인 인물들이 핵심이 되어 항일운동을 오랜 시간동안 준비하고 실행에 옮기려 했으나 수많은 희생자를 낸 매우 중요한 사건을 가볍게 다루고 있다는 것은, 천도교백년약사를 편찬하여 간행한 천도교사 편찬 위원회가 교사의 경중(輕重)을 모르고 경솔한 행동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달에 靑年黨의 秘密核心體인 五心黨事件이 平安南道 警察部에發覺되어 金起田, 趙基栞, 白重彬, 崔安國, 白世明, 桂淵集, 鄭應琫等 中堅人物 170餘名이 檢擧되어 甚한 拷問과 獄苦를 치루었다./ 이달은 포덕 75(1934)년 12월을 가리킨다./ 天道敎百年略史 下卷 P. 153의 기록.

    오심당 사건으로 인하여 교단의위기가 다가왔다. 일제가 만주를 유린하고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하여 우리 민족에게 더욱 가혹한 식민통치를 심화시켜 나가던 1930년대에 이르러 3.1독립운동을 주도한 천도교는 일제의 패망과 우리나라의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운동과 동시에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무인 멸왜 기도운동(戊寅滅倭祈禱運動) 또는 무인 멸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춘암상사는 포덕 77년(1936)년 8월 14일 지일기념을 기해서 교내의 주요간부들을 불러 민족정신의 회복과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운동을 전개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춘암상사는 간부들에게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 온다는 것을 말하면서 경전의 기르침을 인용하여 "무궁한 내 조화로 개같은 왜적놈을 일야간(一夜間)에 멸하고서 한울님께 조화받아 한(汗)의 원수까지 갚겠습니다."라는 내용으로 아침. 저녁 정성껏 기도하라고 밀영을 내린 것이다. 그러던 중 포덕 79년(1938)년 무인년 2월 17일에 이 사실이 황해도 신천경찰서에 적발되어 전국적으로 교역자 수 백 명이 체포 투옥 당했다.-중략-

    이 무인독립운동은 널리 알려지지 않고 역사의 그늘에 가리어 있었으나, 우리나라 독립운동 역사상 가장 혹독했던 민족수난기에 우리의 민족혼을 되살리고 불굴의 독립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구체적인 내용은 안내서 ‘천도교’ PP. 89-91. 무인멸왜기도운동 참조.

    註 00; 신구파의 갈등에 대한 구체적인 전말과 교단의 난맥상을 이해하시려면 필자가 포덕 145 (2004)년 10월 21일에 ‘종문심법(宗門心法)이란 무엇인가.’와 포덕 147(2008)년 1월 24일에 ‘친일행위는 신파만 했는가?’ 그리고 포덕 150(2009)년 1월 22일 게시판에 게재한 ‘正 水月執義春이란 무엇인가?’ 를 참고하시기 바람.

    대구 효성 카돌릭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박승길 교수의 ‘미군정의 종교 정책과 기독교의 헤게머니 형성(사회과학연구 5호/ 1998)’에서 ‘1947년 10월 9일, 미군의 군정장관 대리였던 헬맥은 초대 교황청 사절 환영식에서 "건국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야"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하는 것은, 바로 그의 군 위계상 직속상관인 맥아더 사령관의 군정 지배 이념을 그대로 관철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기독교회를 미군정의 종교 정책의 분명한 기조로 삼았기에, 군정청에 개신교 목사들이 포진하고 1945년 12월에는 형목제도(刑牧制度)를 만들어 개신교 목사가 전국 18개 형무소의 교무과장직에 임명되는 등의 사회 제도와 체제에서 기독교화를 추진하고, GHQ(general headquarters/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의 민간정보교육국에서 세운 案을 따라, 한국에서도 선교사들을 조속히 복귀시켜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이상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는데 힘쓰도록 함은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을 것이다.’ 라고 전제한 다음에, 해방정국의 미군정하에서의 천도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註 00; 連合国軍最高司令官総司令部((Supreme Commander of the Allied Powers, SCAP / General Headquarters, GHQ,)-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종결되고, 일본은 패망했다. 남한에는 3년간 미군정이 들어섰고, 일본에는 6년간 GHQ(연합국 총사령관 총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945년 10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6년 반 동안 일본에 있었던 연합군의 사령부이다.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사령부는 천황제 일본을 평화헌법체제 일본으로 탈바꿈시키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실험에 돌입한다.

    당시 일본에서 SCAP은 GHQ라고도 불렸다. 초기에는 미국이 단독으로 일본을 점령, 통치하였으나 1946년 2월 26일에 11개국으로 구성된 극동위원회가 발족한 이후로는 이 위원회에서 일본 관리에 대한 기본정책을 결정하였다. 최고 사령관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으로 미국이 실질적인 일본점령의 실권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 중 몇몇이 일본의 새 헌법 초안을 기안하였고, 새 헌법은 나중에 몇 군데 수정을 거쳐 일본국 헌법으로 채택되었다. 통치방식은 일본의 통치기구를 이용한 간접통치방식을 취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연합국이 포츠담 선언 및 항복문서에 입각한 대일점령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1945년 8월 일본 요코하마(橫浜)에 처음으로 연합국 최고사령부 기관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 1945년 9월 15일 GHQ는 본부를 도쿄(東京) 히비야(日比谷)로 옮겼다.

    조직은 인사·정보·작전·후방 4개부로 이루어진 참모부(소위 G 1·2·3·4 각부)와 민정국·천연자원국·경제과학국·민간정보국 등으로 이루어진 특별부문을 근간으로 하며 극동국제군사재판소도 그 관할하에 있었다. 연합국의 대일정책결정기관으로서 워싱턴에 극동위원회, 도쿄에 GHQ 자문기관으로서 대일이사회가 설치되어 있었지만, 연합군 선발 부대가 아쓰기(厚木) 공항에 도착하기에 앞서서 트루먼 미국 대통령이 대일단독통치를 언명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실질적으로 GHQ는 미국의 기관이며 미국이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연합국인 미국이 GHQ 지령을 일본정부에 하달하고 일본정부가 이를 실천에 옮기는 간접통치방식이 채택되었다. 이 기관은 1952년 4월 28일 대일강화조약의 발효와 함께 폐지되었다.

    해방 시점에서 상대적으로 많은 신도 수를 보유하면서 중앙집권적인 교회적 행정조직이나 인맥 중심의 연원 조직 등 조직적 측면에서도 천도교는, 해방공간에서 기독교의 주도권 장악에 가장 경쟁력을 갖출 수도 있는 종교집단이었다. 그러나 1945년 10월 25일 전국임시대회를 서울에서 개최하여 교회측에서는 三院一觀制의 조직정비를 하고 주요한 교단 수입원이었던 북한 지역 성도의 年月誠米 수납을 위해 이듬해 1월에는 북한 지역에 평양과 함흥에 각각 西鮮, 北鮮 연락소를 두는 등 체제 정비와 함께 각 지방에서도 활발한 교회 재건운동을 전개하는 것 자체가 남북분단 현실을 외면한 교회 재건운동이었다. 동시에 교회 전위조직으로 남북 양측에서 청우당이 재조직되고 개벽사를 부활시키고 출판사로 보성사를 설립하는 등 출판과 경전 보급에도 나섬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동원력을 강화시켜 신도의 증가, 특히 북한지역에서의 급격한 교세 성장을 기록하나, 대신 남한에서는 최린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한 신파의 교권 장악에 대항한 갈등으로 1946년 4월 이후 천도교 총부는 신파의 ‘천도교 총본부’와 구파의 ‘천도교 총부’로 갈라서게 된다. 그에 따라 그 전위조직인 청우당도 신파의 청우당과 구파의 輔國黨으로 분열한다 한편, 북한 지역에서는 천도교 교회의 조직 재건과 함께, 親蘇냐 반외세냐에 따라 분열의 양상을 보인다. 1946년 4월에 정식 발족한 천도교 청우당도 김달현 등 친소 세력에 의해 장악되고, 1947년 2월 11일에는 평양에서 천도교 북조선 종무원을 구성하고 총무원장에 李根燮이 취임한다. 그러나 이러한 친미 내지는 친소로의 교회조직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독실한 천도교 신자들은 대체로 淵源조직이라는 교회의 행정조직과는 다른 인맥을 통한 정신적 교화조직을 중심으로 결집되어 성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천도교의 군정기에서의 특징적 활동은 교회 중심의 교단 재건보다는 연원조직과 같은 인맥중심의 재건운동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교회가 ①의 측면에서는 분열로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하고, ②의 측면에서도 실질적인 권력 핵심에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만 ③의 측면에서도 신교육과는 거리가 조직의 활성화를 통해 해방정국의 흐름과는 거리가 먼 활동에 인재가 동원되는 겅우임을 말한다. 淵源會는 언제나 교회조직과는 다른 강력한 비밀결사적 조직체로서 해방공간에서도 분단 이후에도 교회조직과는 별도로 남북을 연결하는 신앙결사체를 유지시킬 수 있는 실질적 교단조직중 하나였다.이 연원회는 북조선 종무원이 결성되면서 다시 조직되어 회장에 李敦化, 부회장에 金光浩, 이근섭이 취임한다. 그러면서 천도교는 이 연원회를 중심으로 남북한 각각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 수립을 지향하는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여기서 ①의 측면에서 완전히 군정의 지배 이념과는 거리를 두게 된다. 아무튼 그 발단은 1948년 초 서울에서 천도교 중앙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광호의 발의로 이뤄진다. 이 모임에서 1948년 3월 1일을 기해 남북분열저지를 위한 이른바 3.1재현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북한에 박현희 등을 파견하여 남북한의 천도교를 중심으로 3월 1일 거사를 일으킬 것을 모의한다. 그러나 그 거사 계획은 사전에 탄로되어 그 주모자 상당수가 북한 당국에 체포되었으나, 평북 연변에서는 盧景植의 연원조직을 중심으로 수천 명이 집결한 가운데 시위를 거행하여 이 운동으로 북한에서 체포된 교인 수만 해도 1만 여명에 달했고, 그 주요 인사 80여명에게는 사형 등의 중형이 내려져 6.25 전란때 거의가 학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남한 지역에서는 어떠한 시위도, 사전에 그 모의에 참여한 사람들의 희생도 뒤따르지 않았다. 그것은 최린을 중심으로 한 친일세력이 재빨리 미국의 현실 안정 정책에 편승함으로써, 사실상 집단적 통일운동을 포기하려한 행동에서 나온 결과이었다. 동시에 그것은 천도교가 남한의 반공이념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재정립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북한 내 연원조직을 동원한 천도교의 외세배격 남북통일운동은 영우회라는 비밀조직 결성운동을 통해 다시 나타난다. 1948년 5월, 7인 조직으로 부터 시작된 이 운동은 1950년 4월. 북한 당국에 의해 발각되어 수백 명이 체포되기 직전인 3월에 그 조직원이 325,002명으로 집계될 정도로 방대한 조직으로 결성되어 당시 북한 내 전체 교인수 2,866,342명의 11.34%에 해당될 정도로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외세적 통일운동은 남한 내에서는 활성화되고 있지 않았다. 아무튼 이러한 천도교의 반외세적 통일운동은 근본적으로 군정기의 지배이념의 범주에서 볼 때, 어느 범주에서도 환영받기 어려운 측면임을 보여주면서, 위 ①의 기준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 까닭에 천도교의 해방공간에서의 사회적 위상이 결코 순탄치 못할 것임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북한지역의 연원조직을 중심으로 한 이 통일운동은 천도교의 종교활동이 얼마나 세속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 깊은 영향을 입었는가를 잘 보여주며, 동시에 이들이 反帝-反共이라는 양분법적 구분에서 민족의 자주 통일이라는 명분이 차지하는 좁은 입지로 인해 결국은 교세 약화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음도 보여준다 하겠다. 특히 이러한 교세의 약화는 그 주요 세력 기반이었던 북한 지역 내에서도 3.1재현운동과 영우회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외세적 통일운동을 주도했던 세력이 철저히 제거되고, 남한 지역에서는 현실안정 정책에 따라 어떠한 집단적 운동도 자진 포기함에 따라, 천도교를 역사적으로 민중 속에서 활성화시켜 주었던 역동적 힘 역시 약화된 결과였다./ 東學革命百周年紀念論叢 下 오익제, "민족의 광복과 천도교", PP.648-659.와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 PP.136-165.의 當時의 諸般情勢 참조.

    포덕 88년1947년(1947년) 4월 5일에 천도교와 청우당의 해방공간에 있어서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 “天道敎政治理念”을 발행한 후 1948년 1월 8일에 美, 英, 蘇의 모스크바 三相會議에서 합의된 미소 양국의 5개년간의 신탁통치(信託統治)을 위한 준비를 위하여 韓委 一行이 서울에 도착하자, 이에 반대하여 교단 원로회의(동년 1월 8일부터 20일까지)에서 결의된 대로, 1948년 천도교인들이 3·1절을 계기로 남북한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벌인 운동으로. 1947년 10월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소련이 북한에 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발족시키는 등 남북분단이 기정사실화되자 김광호(金光浩), 이응진(李應辰), 최단봉(崔丹鳳), 최린(崔麟) 등의 당시 천도교 원로들은 남북한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북한에서 평화적으로 삼일재현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채택하고, 5개항의 공약을 내세웠다.

    宣言文

    우리는 지금 變轉을 거듭하는 內外情勢가 날로 尋常치 않아감에 비추어 本來 期約한바 完全自主獨立達成의 길이 결코 順坦치 못할 것을 覺悟하고 이 難局을 突破하기 위하여 二千萬同胞의 一致된 團結로서 救國運動을 展開하여하여 正道를 그르치는 外勢의 軋轢과 不純勢力의 跋扈를 指摘하는 同時에 우리 民族의 如一한 念願과 참된 意思를 世界萬邦에 闡明하여 後世에 遺恨없는 建國大業을 完遂코자 한다.

    回顧컨대 우리는 美蘇兩軍을 우리 民族解放의 使徒로서 疆土內에 歡迎하였고 이 兩軍의 南北分駐를 軍事的인 戰後收拾措處로 믿어 이를 姑息에 돌렸으며 또 여기에 따르는 軍政實施를 不可避한 過渡的인 現象이라고 여겨 甘受하였던 것이다.

    註 00; 천명(闡明)과 고식(姑息)- 천명은 개인이나 단체의 의지나 각오 따위를 드러내어 분명하게 밝히는 것을 의미하고, 고식은 잠시 숨을 쉰다는 뜻으로,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임시로 둘러맞춰 처리하여 당장에는 탈이 없고 편안함(일시적 또는 임시적인 방편)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이러한 계책을 고식지계(姑息之計; 임시방편으로 당장 편한 것을 택하는 꾀나 방법)라 한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韓民族의 自主力量을 蔑視한 「모스크바」三相會議의 信託統治提唱이 있었는가 하면 美蘇共同委員會마저 反託을 主張하는 政黨社會團體를 排除하는 等 蘇聯의 一方的인 固執으로 結局 本論인 韓國의 獨立節次에 대한 實質的인 問題는 다루어 보지도 못하고 決裂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렇듯 暗澹한 雰圍氣를 一擧에 佛式하는 우리를 雀躍케 한 사실이 있으니 韓國에 統一獨立政府를 樹立키 위하여 「유엔」總會의 決議로 「유엔」監視下에 南北 總選擧를 實施코자 「유엔」 韓國委員團이 來韓하게 된 것이다.

    註 00; 작약(雀躍)- 몹시 기뻐서 날뛰며 좋아함을 나타내는 말로, 유사어로, 환호작약(歡呼雀躍; 기뻐서 크게 소리를 치며 날뜀). 광희작약(狂喜雀躍; 미친 듯이 기뻐하며 날뜀). 흔희작약(欣喜雀躍; 너무 좋아서 뛰며 기뻐함)이 있다.

    擧族的으로 歡迎하여야할 이 盛事에 蘇聯 및 北韓에서는 同委員團의 入北을 拒否할 뿐만아니라 對蘇 阿附勢力이 主軸이 되어 재빨리 共産體制를 强化하는 한편 造作된 民意로써 金日成政權의 樹立을 促進하는 支持暑名(連判)運動을 展開하는 等 國土의 分斷과 民族의 分裂을 일삼고 있으며 또 南은 南대로 一部 指導層의 躁急한 速斷에 의하여 統一政府樹立에 대한 希望을 抛棄하고 單政樹立에 應할 態勢를 갖춤에 이르렀다.

    우리 二千萬 民族의 如一한 念願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아무리 大勢의 推移가 그렇다 하더라도 北은 北대로 共産政權을 세우는 것을 그대로 버려두고 南은 南대로 單政樹立을 서두를 수도 없다.

    비록 日帝에 主權을 侵略當하여 恥辱의 歷史를 半世紀에 물들이기는 하였을망정 찬란한 文化의 傳統을 이어 받은 單一民族으로서 半萬年 自主繁榮의 矜持를 中外에 떨쳐 온 民族이 아니었던가

    美蘇兩國은 自利만의 打算을 위하여 他의 犧牲을 策動하거나 黙過하지 말고 좀더 「유엔」의 責務를 誠實히 履行하라.

    註 00; 책동(策動)과 묵과(黙過)- 책동은 좋지 않은 일을 몰래 꾸며서 행하거나, 어떠한 일을 하도록 꾀어 부추기는 것을 의미하고, 묵과는 보고도 못 본 채 그대로 넘겨버림을 의미하는 말로,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자신의 손익(損益)을 계산하여 모른척하는 소극적이며 비겁한 태도를 말한다.

    그리하여 韓民族의 眞正한 意思를 그대로 받아들여 自主統一의 民主主義政府樹立에 이바지 하며 遷延없이 군대(軍隊)를 철수(撤收)하라. 그리고 南·北의 政治指導者는 目前의 執權慾에서 벗어나 毅然히 久遠한 經國大道에 앞장서라.

    註 00; 천연(遷延)과 의연(毅然)- 천연은 일이나 날짜 등을 오래 끌어 미루어 감을 말하고, 의연은 의지가 강하고 굳세어 끄떡없는 모습이나 태도를 말한다.

    註 00; 경국대도(經國大道)- 나라를 다스는 기본적 또는 원칙적인 대안이나 방법. 대도는 궁극적인 최고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대도는 노자(老子) 18장 속박(俗薄)에서 비롯된 말이다. “무위자연의 큰 도가 없어지자 어질다느니 옳다느니 하는 인위적 분별이 생겼고, 거짓은 이른바 지혜라는 것이 나온 다음에 나타났다. 효도라느니 자애라 하는 것도 가족 사이에 자연스러운 화목이 깨어진 다음에 생긴 것이고, 나라가 혼미한 후에야 충신이 나타난다. / “大道廢有仁義 智慧出有大僞 六親不和有孝慈 國家昏亂有忠臣).” 大道廢焉有仁義의 의미는, 큰 도가 무너지자 인이니 의이니 하는 것이 생겼다. 는 것으로 사회적 가치 기준을 지나치게 강조하여 자연스런 개인의 사고나 행동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무너진 대도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인(仁)과 의(義)를 세우려 하기 때문에, 사람의 본성인 자유로운 또는 천리에 맞는 사유(思惟)나 행동을 제약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대도란, 올바른 도리나 정도(正道)를 의미하지만. 大道廢有仁義를 해설한 주해(註解)에서는 ‘대도는 무위자연의 도. 감산은 다음같이 풀었다. 「대도는 남을 사랑하겠다는 의식을 갖지 않지만 모든 것이 저마다 잘 자라게 마련이다. 인의의 도덕은 남을 사랑하겠다는 의식을 가지면서 친소의 구별을 세운다. 따라서 대도가 폐함으로써 인의가 있다고 한다.」/ 大道無心愛物 而物物各得其所 仁義則有心愛物 卽有親疎區別之分 故曰 大道廢 有仁義. 大道는 무위(無爲)이고 仁義는 유위(有爲)이다. 대도는 자연이고 인의는 조작이다. 노자老子) 38장에서는 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라 했다./ 老子 莊子 P.68.// 老子 莊子; 世界思想全集 3. 三省出版社. 1982.

    노자老子) 38장 논덕(論德)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이런 이유로 도(道)를 잃은 뒤에 덕(德)을 말하고(찾고), 덕을 잃은 뒤에 인(仁)을 말하며(찾으며), 인을 잃은 뒤에 의(義)를 말하고(찾고), 의를 잃은 뒤에 예(禮)를 말한다.(찾는다). 무릇 예(禮)란 충(忠)과 신(信)이 두텁지 못하여 어지러움의 머리가 된다.(진실한 믿음이 얇은 것이어서 혼란의 시초이다). 먼저 안다는 자는 도(道)의 꽃(드러남)이며, 어리석음의 머리(시작이)가 된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도의 두터움에 머물고, 도의 얇음에 머물지 않으며, 도의 근원(열매/숨겨짐, 實)에 머물고 도의 꽃(드러남, 虛)에 머물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저것(꽃)을 버리고 이것(열매)을 취한다. / 故失道而後德, 失德而後仁, 失仁而後義, 失義而後禮. 夫禮者, 忠信之薄, 而亂之首. 前識者, 道之華, 而愚之始. 是以大丈夫, 處其厚, 不居其薄, 處其實, 不居其華. 故去彼取此.

    註 00; 무극대도(無極大道)- 무극은 우주의 본체(本體)이자 근원(根源)이다. 천도교의 진리가 우주의 본체이자 근원을 바탕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궁극적인 최고의 가르침이 동학이라는 의미에서 수운이 한 말이다.

    우리는 우리 民族의 自意에 依據치 않은 어떤 形態의 政治體制도, 어떤 形態의 經濟構造도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또 아무리 影響力이 强하더라도 大義에 어긋난 外勢에는 一步나마 이에 追從할 수 없다.

    바야흐로 國運은 興亡을 左右할 百尺竿頭에 臨하였다. 同胞여, 總蹶起하자! 때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 救國隊列의 再整備를 二千萬 同胞의 忠情에 呼訴하면서 下記 公約을 宣言하는 바이다.

    公 約

    一, 우리의 自由意思에 依據치 않은 어떠한 政治體制, 經濟構造도 斷乎히 이를 排擊한다.

    二, 우리는 國內外를 莫論하고 國土統一과 民族團結을 沮害하는 모든 勢力의 蠢動을 封鎖한다. / 준동(蠢動)-

    三, 우리는 「유엔」의 決議를 誠實히 遵守하며 「유엔」韓國臨時委員團 入國을 歡迎한다.

    四, 우리는 南北統一政府가 樹立되기 最後 一刻까지 이 運動을 繼續한다.

    五, 우리는 이 運動을 非暴力 無抵抗主義로 一貫한다.

    檀紀四二八一年 三月 一日(西紀 一九四八年)

    天道敎中央總部 天道敎靑友黨本部

    /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 PP.13-16.에서

    이 때 북한의 천도교 교역자들은 남북 분열을 저지하기 위하여 3·1정신을 계승한 제 2의 3·1운동을 전개할 것을 여러 차례 서울의 천도교 중앙총부에 호소하였다. 이리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는 포덕 89년(1948년) 1월초부터 동 20일경까지 원로 간부들이 모여 몇 차례의 밀의를 거듭한 끝에 3·1절을 계기로 북한의 3 백만 명에 가까운 교도와 55여만 명 천도교 청우당과 일반대중이 합세하여 통일 선언과 시위운동을 전개 하도록 지령을 내리기로 결의하고 이를 서두르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도교 중앙총부는 「통일 선언문」과 거사의 비밀 지령 문서를 북한 천도교에 전달할 밀사를 북송하게 되었습니다. 밀사로 박현화와 유은덕 두 사람이 2월 7일 각기 길을 달리하여 서울을 떠나 평양으로 향했다. 두 밀사 중 박현화는 2월 14일 평양에 도착하여 김일대(당시 청우당 평남 도당 위원장)를 거쳐 김덕린(金德麟; 당시 북한 천도교 연원회 상무)에게 밀서를 전달하였다. 이러한 내용을 전달받은 북한 천도교 및 천도교 청우당 측은 시일이 촉박하여 대중시위가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천도교 간부 가운데 김덕린과 김일대는 2월 15일 강동 수도원에서 천도교 수뇌급 주요 간부들이 회동한 자리에서 서울의 지령에 따른 거사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북한 천도교 청우당 대표 김달현(金達鉉)이 이를 반대하므로 표면상 거사를 중단키로 하였으나 김덕린과 김일대는 따로 모임을 가지고 천도교 청우당이 모르게 별도로 천도교 연원 조직을 통해 거사하기로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김명희(북조선 종무원 신도부장)와 함께 각 도별 지방 연원을 움직일 수 있는 박용완, 주명득, 배의찬, 지성률 등 두목들이 각 지방에 급파되어 각 시군별로 거사 동원 체제를 펴나갔다. 이처럼 북한의 전체 천도교 연원을 동원하여 총궐기 하려던 극비의 거사 계획은 끝내 북한 공산 당국에 탐지되어 2월 24일 밤부터 1만7천여 명의 간부급 교역자가 체포 투옥당하여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되었다. 당시 밀사 가문데 유은덕은 해주에서 체포당하여 희생되고 수많은 검거자 중에 서 주모자 87명은 평양 감옥으로 압송당하여 터무니없는 죄를 씌워 최고 사형에서 최하 4년형까지 중형을 받았고, 천도교 간부 가운데 한 사람인 김덕린(金德麟)은 이 계획을 강행하려다가 발각되어 북한 전역의 천도교 간부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이 가운데 김덕린, 유은덕(劉恩德), 주명득(朱明得)은 사형되었다. 그 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에 관련된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 거사로 인하여 당시 북한에서는 3·1절 행사가 전면 중지되고 군중집회는 완전히 봉쇄당하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영변(寧邊), 구장(球場), 개천(价川) 등지에서는 당국의 발포·제지에도 불구하고 상당 한 규모의 민중 시위가 전개되었다. 이 운동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하였으나 통일 운동으로서의 큰 의의를 지닌 것이었다. /브리태니커와 관련자료 종합정리. 이 운동의 구체적인 내용은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中 李應辰의 ‘第三章 緖說 三一再顯運動의 淵源과 그 經緯.’ (PP.25-32) 참조.

    이 삼일재현운동으로 인하여 북한 정권으로부터 조직적인 탄압을 받았는데 그래도 많은 교도들은 영우회(靈友會)라는 이름 아래 국토통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50년 6·25동란이 일어나자, 북한에서는 100여만의 교도들이 남쪽으로 피난하였다. 3·1재현운동이 좌절되고 많은 교역자가 체포, 투옥당하자 남은 천도교인들은 당초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재거사(再擧事)의 기회를 대비하기 위하여 「영우회(靈友會)」라는 비밀 결사를 조직 착수하였다. 이 명칭은 포덕 89(1948)년 6윌 상순경에 초기 명칭인 3.1保國團을 玉文學의 강화지교(降話之敎)의해 영우회(靈友會)」가 되었다. 이 조직은 포덕 89년(1948) 5월 1일 평양에서 7인의 조직이 기초가 되어 북한 전 지역에 파급 확대되어 수십만의 조직망을 확보하였으나 포덕 91년(1950년) 4윌 경 북한 공산당국에 그 비밀이 탄로되어 무수한 교인들이 희생당하였다./ 영우회 명칭에 관한 것은, 靈友會秘史 PP.76-77.의 ‘靈友會 名稱의 由來’ 참조 이 때 평양 감옥에서 주모자급이 165명 처형당하고 해주 감옥에 47인, 수안에 44인, 곡산에 74인, 양덕에 48인, 성천에 79인, 순천에 37인, 중화에 21인 그리고 동평양, 대동, 강동, 맹산, 안주, 태천, 운산, 삼등, 연천, 이천, 평강, 원산, 함흥, 정평, 혜산 기타 여러 지방에서 그 수와 전모를 자세히 알 길이 없으나 무수한 교인들이 처참하게 학살당하였다. 이 영우회 조직 활동은 주모자 165인에 대한 처형 판결문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3·1재현운동의 연속이었고, 「남북의 통일정부가 수립되기 최후의 일각까지 이 운동을 계속한다」는 그 정신은 계속 살아서 오늘의 통일 문화 창조의 의지로 이어지고 있다. 근대적 민족 사상 백여 년의 민족사적 시련 과정에 가장 심각한 민족적 위기인 남북 분단과 민족분열 위기에 항거하여 궐기를 했던 북한 천도교인들의 3·1재현운동과 영우회(靈友會)사건은 통일 운동으로서의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브리태니커와 관련자료 종합정리. / 구체적인 내용은, 靈友會秘史 第二編 靈友會의 秘密組織 PP. 59-92.참조.

     

    註 00; 靈友會 秘密結社-8 . 15 해방 후 포덕 88년(1947) 유엔 제 3차 총회에서 "남.북한 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결의가 있자, 소련의 사주를 받는 북한에서는 이 결의를 무시하고 북한의 모든 국민이 유엔 결의를 반대하는 것처럼 허위 선전을 하면서 유엔 한국위원단의 북한 입북을 거부하였다. 남북 분열을 염려하던 한국 민족주의의 정통 주류인 천도교에서는 포덕 89년(1948) 3월 1일을 기하여 200여만 북한 교도들과 함께 통일선언과 시위운동을 일으키려 던 "3.1재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천도교는 재거사의 기회를 대비하기 위하여 조직을 재정비 "영우회 (靈友會)"라는 비밀 결사를 통하여 수십만의 조직망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포덕 91년(1950) 4월경 비밀이 탄로되어 평양 감옥에서는 165명(입수된 재판기록 에 의함)이 처형되고, 해주 감옥에서 47명, 수안 감옥에서 44명, 등 확인된 것만 각지에서 515명이 처형되는 등 북한 전역에서 수만 명의 무참한 희생을 내었습니다. 165명에 대한 처형 판결문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운동은 3.1재현 운동의 연속이었습니다. / 靈友會秘史 참조.

    靈友會秘史; 영우회비사편찬위원회 / 동학영우회 / 서울. 1989.

    目次 (소제목은 생략함)

    發刊史/15.

    推薦史/17.

    獻詩/19.

    序文/21.

    第一篇. 靈友會의 思想的 淵源/25.

    第二篇. 靈友會의 秘密組織/59.

    第三篇. 靈友會 活動秘話/93

    第四篇. 靈友會 會員錄/227.

    第五篇. 資料編/251.

    編輯後記/273.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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