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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2)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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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340회   작성일Date 13-03-28 23:31

    본문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2)

    이승만 기념사업회 김일주 사무총장은, 국내외의 관련 자료들을 좌파의 시각으로 조작 왜곡하여 제작하였기 때문에 “‘백년전쟁’은 좌파유전자를 심어놓으려는 새빨간 선동 거짓말이다.” 라고 비판하면서 고소할 것이라고 했다. 유영익 교수도 ‘백년전쟁’은 좌익의 선동물이라 하면서 “대한민국은 휴화산 위에 앉아 있다. 한국 사회를 갈라놓는 이데올로기 분열은 언제 폭발할지 모른다. 균형 잡힌 현대사 교육을 통해 이걸 진정시켜야 하는데, 집권자들은 이 문제를 너무 가볍게 생각한다.”라고 걱정을 했다. 그리고 좌익 선동집단인 민족문제연구소가 이승만과 박정희를 반역자와 독사로 매도한 '백년전쟁'이라고 평가했다. MBN뉴스에서는 논쟁의 초점을 지적하여,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우리 역사를 이승만 박정희로 대표되는 친일파와 김구 안중근 등 반일파의 대결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 대부분을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을 친일파로 비판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습니다. 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MBN뉴스에 의하면 ‘민주통합당은 논평을 통해 “친일청산운동을 좌파로 매도하는 것이야말로, 명백한 역사 왜곡”이라는 입장을 내놨습니다.’라고 보도를 했다.

    또 조선일보 2013년 3월 23-24일자 토요섹션 B 7 상단, 이선민의 如是我聞(여시아문)에 게재된, '백년전쟁' 문제 본격 제기한 역사학계 원로 이인호 교수는 "백년전쟁은 대한민국 향한 선전포고… 도 넘은 역사 왜곡, 두고 볼 수 없었다."라고 입장을 밝히면서 "터무니없는 악선전이 먹혀드는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학교에서의 역사교육이 전교조 등의 영향으로 좌편향 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역사교육이 전체적으로 세계사적인 시각을 결여하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원인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우리 역사를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넓고 깊게 이해하도록 학생들을 가르치지 못했다. 그 결과 우리 국민의 역사 인식은 역사를 '선(善)'과 '악(惡)'의 이분법적 대결로 보는 매우 단선적인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라고 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에서 피 흘리며 목숨 바쳐 국권을 지키려고 살아온 민족의 항쟁을, 병든 민족주의를 내세워 가면을 쓰고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교묘하게 부정하려는 선동을 하고 있는 ‘좌파의 사회문화 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이라’고 필자는 평가하고 있다.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 온갖 혜택을 받고 살아온 그들이, 국가와 민족의 가슴에 비수를 꽂아 숨통을 끊으려는 것이다. 필자가 이미 천도교의 친일행각에 대한 양심선언에 대한 반대 의견을 내었던 글에, 민족문제연구소에 대한 수상한 태도에 대해 설명하면서 곧 역사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한 바가 있다. 이 민족문제연구소는 노무현 정부의 비호와 지원 아래 친일인명사전을 간행하면서 편파적으로 제작하였다는 반론이 있었던 문제의 연구소이다. 여기에서 민족문제연구소의 민족은 대한민국의 구성원인 순박한 국민이 아니라 미래의 한국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부정하여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하려는 독버섯인 민중과 인민이라는 것이다. 통합진보당의 당기(黨旗)가 북조선의 인공기가 휘날리는 모습이라고 인터넷상에서 진위(眞僞) 논란으로, 극단적인 정면대결을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들이 내세우는 국기(國旗)는,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태극기가 아니라 백색 바탕에 한반도가 청색으로 그려진 기라는 것도 알고 있는가? 국민이 상식에 무지하고, 근, 현대사의 진실과 교훈에 무지한 집단지성이 이런 부류들에게 놀아나게 되면, 독버섯의 독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국가인 대한민국은, 이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천도교가 친일파의 소굴인가?’ 와 ‘친일행위는 신파만 했는가?’/ 2006.04.29.에 게재 또는 ‘지난 10년을 돌아보며(7-4)’ /154(2013)년 1월 25일에 게재를 참조하기 바람.

    이것이 국민이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유발되는 한 편의 코미디인 것이다. 진실로 우리나라 국민이 근, 현대사의 역사적 진실과 교훈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면, 좌파의 선동이라는 이런 역사의 왜곡이 있을 수는 없는 것이었다. 이러한 좌파의 선동은, 좌파계열의 사람들이, 이 나라 국민이 매우 무지하며 허약한 집단이라고 얕잡아보고 무시해서 하는 경박(輕薄)한행동인 것이다. 국민이 역사에 대한 무지에서 유발되는 일이 집단지성이라는 이름으로 오늘의 현실을 양극화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비난을 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모든 분야에서 극단적인 양극화로 편한 날이 없이 대척(對蹠)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서 우리 교단이 침체하고 있는 현실에 대하여 깊이 반성을 해야 하고, 의암성사께서 당시의 혼란한 국내외의 정세 속에서 지혜롭게 그 당시의 시대정신을 수용하고 그것을 통하여 천도교가 대 사회를 향하여 새로운 시대정신을 확립하여 제시했듯이, 또 좌우의 대립으로 심각한 혼란이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예측할 수 없었던 해방정국 속에서 우리 교단과 지휘부가 ‘天道敎 政治理念’으로 민족과 시대를 향하여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젼을 보여주었듯이, 지금의 우리 교단도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바로 수용하여 천도교단의 시대정신을 국가와 민족 앞에 보여주어야 할 역사적 책무(責務)를 안고 있다고 절실하게 숙고(熟考)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민회(동학 민족통일회)의 활동방향과 궁극적인 목적을 대폭 수정하여야 할 것이다. 만약에 동민회가 통합진보당과 유사한 감상적이고 순진한 통일에 대한 기본적인 시각으로 접근한다면, 찬연한 역사를 창조했던 동학과 천도교 역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민족의 유구한 역사에 오욕(汚辱)의 큰 죄를 짓는 것이 되기 때문에 당장 해체(解體)하는 것이 옳다. 이 해체야 말로 천도교의 종교적 목적인 지상천국 건설에 부응하는 것이며, ‘天道敎 政治理念’ 속에 담겨진 천도교의 시대정신을 실현하는 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동민회에 참여자 중에 극단적인 좌편향에 물이 든 교인들이 있다면, 동민회에서 당장 탈퇴할 것을 권유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천도교의 기본 교의와 부분단체 운동의 근본정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도교는 다른 종교단체와도 다르고, 이 사회의 그 어떤 사회단체와도 다른 것은, 3.1재현운동과 영우회 사건으로 북한에서의 종교활동과 청우당 운동의 실질적인 희생자이고, 천도교 청우당을 노동당의 우당(友黨)으로 악용해온, 북한 정권의 허구성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적확(的確)하게 알고 있는 교단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번에 실시되는 교단 지도부 선거에서 좌편향의 인물들이 교권을 장악한다면, 교단은 교단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역사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교단은 양극화된 교도들의 마음은 피폐(疲弊)해질 것이고, 교단의 조직은 서서히 와해(瓦解)되고 해체(解體)될 것이다. 다만 야심을 갖고 교단을 장악한 지도부는 급여와 포교를 핑계 삼아, 그나마 몇 푼 안 되는 재정의 기반을 무너뜨릴 것이고, 동조하지 않는 교도들을 내팽겨져 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면 겨우 교구 중에는, 교단을 경이원지(敬而遠之)의 심정적(心情的)으로 떠나 독자적(獨自的)으로 운영하던 교구만, 겨우겨우 명맥(命脈)을 이어가게 될 것이다. 그런 교구는 이미 천도교 교구가 아닌 정체불명의 그들만의 교구였다. / ‘남북통일만이 지상과제가 아니다.’/ 2003년 7월 23일에 게재. 참조요망.

    이러한 혼란 속에서 우리의 현실은, 다양한 분야로 분화되어 가는 다원화 사회로 발전의 속도를 내고 있다. 각각의 분야와 관련된 전문서적을 읽어, 한 권이라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은 드문 일이 된다. 그러나 필자는 본디 광범위한 분야의 전문서적들을 다독(多讀)을 하는 편이지만, 제가 공부하고 있는 분야의 필독서(必讀書)라든가 핵심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연구서들은, 때로는 시간이 많이 걸리더라도 제 나름의 독서방법에 따라 철저하게 정독(精讀)을 하여 완벽한 이해를 하려고 했다. 이번에 게재하는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는 필자의 독서방법을 바탕으로 해설을 한 글이다. 여러분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설에 주의를 많이 기우렸다. 이 글을 읽는데 투자(投資)한 시간이 절대로 아깝지 않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께서는 지루할 수 있겠지만, 참고 끝까지 읽으신다면, 이 글과 관련된 수많은 지식을 얻게 될 것이다. 더러는 그 간에 알고 있던 지식이, 잘못된 것을 알고 있었다거나 깊이가 없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특히 교정일치(敎政一致)에 대한 글들은, 개인적인 주의 주장과 의견이 다양하고 편차(偏差)가 많으며, 찬반(贊反)이 극명(克明)하여 객관적이고 일반적인 논리의 전개보다는 매우 주관적(主觀的)이고 독선적(獨善的)인 주의 주장과 의견이 많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광범위한 지식이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는 비교분석 자료인 원본(原本)과 수정본(修訂本) 1, 2로, 문장의 분량(分量)만 200페이지가 넘는 데다 해설과 주(註)를 붙였기 때문이 그 양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의 게재분량(揭載分量)은 원본기준으로 총 71페이지 중 1-18페이지까지입니다.

    目 次/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다.

    一, 天道敎의政治理念과社會的根據 ( 一)

    二, 天道敎의政治思想과理論的根據 ( 五)

    一. 同歸一體說 ( 八)

    二. 事人如天說 ( 九)

    三. 保國安民說 ( 九)

    四. 天職天祿說 (一○)

    五. 萬事知는食一椀說 (一一)

    六. 奴隸解放 (一一)

    七. 政治的實踐運動 (一二)

    八. 殉道精神 (一二)

    九. 後天開闢 (一三)

    十. 사람性自然史觀 (一四)

    十一. 地上天國理想 (一七)

    / 이번에 게재된 내용은, 二, 天道敎의政治思想과理論的根據의 十一. 地上天國理想까지이고, 다음에 게재할 내용은, 다음의 목차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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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 天道敎의政治運動史와 그 意義 (一九)

    甲. 甲午革命運動 (一九)

    乙. 甲辰改革運動 (二五)

    丙. 己未獨立運動 (三一)

    四, 天道敎靑友黨의出現과 그 意義 (三四)

    一. 天道敎靑友黨이생겨진經路 (三五)

    二. 天道敎靑友黨이出現된意義 (三五)

    三. 天道敎靑友黨의運動目標 (三六)

    五, 天道敎의建國理念 (三九)

    甲. 民主政治 (四四)

    乙. 民主經濟 (五一)

    丙. 民主文化 (五七)

    丁. 民主倫理 (六二)

    六, 天道敎靑友黨의復活과 그 政治的進路 (六九)

    끝으로 필자가 ‘天道敎政治理念의 全文과 解題’를 정리하게 된 동기와 게재를 결정한 마음은, 지금 천도교 당면하고 있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절박함에 있다. 천도교 교리와 사상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수많은 신조어(新造語)와 그 단어에 대한 해박하교 명료한 설명에 대한 감동은 평생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해방 전후에 우리 민족이 처해 있었던 역사의 현실과 백의민족의 문화전통의 계승과 각 분야의 상황에 대하여, 광범위한 관련 자료와 국내외 정세를 바탕으로 하여 천도교의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시대감각과 이런 상황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평가하고 있었던 지도자들의 인식과 식견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天道敎政治理念”과 같은 지금의 현실과 미래를 열 수 있는 천도교의 확고한 이념과 사상을 정리하여 발표하고 주장할 수 있을까? 필자는 매우 부정적이다. 지금의 교단은 절대로 해낼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이미 ‘天道敎政治理念을 되새겨 보며’란 필자에 글에서 명확하게 그 이유를 밝혀 놓았다. 단적으로 예를 든다면, 198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말까지 두 번에 걸쳐 발표된 통칭 ‘교단 발전 계획안’ 과 비교해 본 동덕들이라면 필자의 의견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낼 것이다.

    「수운심법」 또는 심학에서 출발하여 「신인철학」과 「인내천 요의」를 거처 「천도교정치이념」에까지 이르는 근대의 한 세기 속에서 이루어진 탁월한 동학과 천도교의 주의와 이념과 사상과 철학이 있고, 이것으로만 보아야 보이는 민족역사와 민족의 전통문화와 5천년의 장구한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의 역사와 전통문화의 계승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한 이 나라 근대사의 주인공이 되었던 동학혁명, 갑진개혁, 기미독립이란 3 대 개벽운동이 있다. 우리만이 우리의 힘으로 일으킨 다시개벽의 근대역사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낼 수 있고, 우리만이 우리의 사상과 철학으로 그 역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확정해 낼 수 있다. 동학과 천도교의 주의와 이념과 사상과 철학이 우리 민족의 과거 현재와 미래를 의미 있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준다. 우주 자연의 무위이화 법칙과 균형과 조화의 순환질서와 인류의 역사의 흐름을 읽어낼 수 있는 수운의 심법이 준 안목이,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인 지상천국이 어떤 세상이며 어떻게 건설할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주었고, 급변하는 현실을 지혜롭게 수용하여, 확신에 찬 다시개벽을 통하여 불확실성의 미래에 대한 명료하고 확실한 희망을 갖게 해주었다.

    2. 해방 전후사에 비친 천도교.

    일본은 한일 합방이후 한국을 식민지 통치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하여 1910년대부터 일종의 국부(國富)조사라 할 수 있는 전 분야에 대한 조사와 총독부의 법령에 따라 통치에 유리하도록 재조정 배치했다. 그 중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민속과 종교에 관한 집중적인 조사 진행하다가 1919년 기미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그 예봉(銳鋒)이 무뎌졌고, 이로 인한 기본정책이 무너지자 문화정책이란 새로운 대안을 내놓아 식민지 통치를 보다 효율적으로 진행시키려 했다. 일본은 기미독립운동이 민족자주정신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간파하고, 민족정신 말살의 시급성을 직감하여, 기존에 진행해오던 민속과 종교에 대한 조사연구를 더욱 강행하여, 그중 모든 종교에 대한 조사한 보고서로 1935(소화 10년)년 9월 10일에 발행한 “朝鮮의 類似宗敎”는 비매품으로 한 차례 발행하여 민족정신 말살책의 자료로 사용하였다. 이후 조선총독부의 악랄한 탄압과 권모술수에 의해, 민속(民俗)은 미신타파란 명목으로 사라지는 운명을 맞았고, 종교계는 수많은 계파로 쪼개져 민족의 저력을 모을 수가 없게 되었다.

    1930년대를 전후로 전국 도처에서 여러 분야의 항일운동이 심화되자, 1936년에 조선 총독부의 제 7대 총독으로 부임한 미나미 지로(南次 郞)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세워 황민화정책(皇民化 政策)에 광분(狂奔)하게 되어 ‘조선 통치의 5 대 지침’을 만들어 식민지 통치를 강화하였다. 이 지침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 國體明徵; 제국 9천만 동포가 거국일치(擧國一致), 상하일심(上下一心)으로 천황(天皇)의 도를 선양하자면 우선 국체관념이 명징(맑고 깨끗이 하는 것/분명히)되어야 한다. 이는 곧 조선통치의 근본이라, 신사참배, 황거요배(皇居遙拜), 국기 국가의 존중과 〈고꾸고〉〈일본어〉의 보급 등으로 실을 거두어야 한다.

    2. 鮮滿一如; 최근 일, 만관계(日滿關係)가 조선이 자치하는 지위는 크니, 일본과 만주가 하나), 선·만일여(조선과 만주가 하나)의 대 방침에 따라서 조선은 만주개발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

    3. 敎學振作; 국민정신의 함양을 기본으로 하고, ‘우리는 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라는 신념과 긍지를 갖도록 교육시켜야 한다.

    4. 農工竝進; 세계정세로 볼 때 일본의 국방력 강화가 요긴(要緊)한 문제이니, 조선의 지리적 자원적 사명에 따라 생산력 증강에 힘쓰라.

    5. 庶政刷新; 행정을 국가의 수요(需要 또는 須要)에 대응하도록 쇄신하여야 한다.

    / 解放前後史의 認識 중 林鐘國의 ‘日帝末 親日群像의 실태’에서(PP.174-175.)

    일본은 위와 같은 조선 총독부의 강력한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여 내선일체(일본과 조선은 같은 나라이고 민족이라는 것)를 위한 창씨개명(創氏改名)에까지 이르렀지만, 항일운동으로 인한 총독부의 고심은 악랄한 식민지 정책의 집행으로 들어났다. 미나미 지로(南次 郞)가 총독으로 부임한지 일 년 뒤인 1937년 7월 7일에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동년 7월 15일에 임시 지사회의를 소집하여, 3 개의 원칙인 즉 시국의 중요성을 인식할 것, 동아 안정세력(東亞 安定勢力)으로서의 일본의 지도적 위치를 확인할 것, 교전 상대국인 중국을 과소, 과대평가하지 말고 정당하게 인식할 것 등의 원칙을 천명하였다.

    ‘이러한 취지를 대중에게 전달하고 또 대중의 각성을 촉하기 위해서 총독부 학무국은 제 1차, 및 제2차의 전국 순회 시국 강연반을 결성했다.’ / ‘日帝末 親日群像의 실태’에서(P.189.) 이 무렵에 한국의 여러 분야에서 친일단체가 속속 결성되어 이에 합류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친일에 앞장 서기 시작하였고, 이런 흐름에 밀려 종교계도 굴복하게 되었다.

    1937년 7월 15-19일 천도교 청년당 본부는 총독부의 요구에 따를 수밖에 없어, 시국의 중대성에 감하여 헌신보국(獻身報國)에 희생하겠다는 결의를 하고, 천도교 청년당으로 하여금 시국에 동조하는 결의문과 삐라를 작성해 배포토록 했다. 천도교는 동년 7월 20일 천도교 중앙 종리원에서 서울 종로경찰서를 통해 국방헌금 1,000원을 전달한 데 이어 다음날 천도교 청년당 당원대회를 개최해 ‘시국대응에 관한 건’을 논의했다. 이에 앞서 19일 오후 8시 천도교 청년당 본부는 긴급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하여 ‘비상시국에 대처하여 천도교 청년당 결의’를 발표했다.(7월 22일자)

    <동아일보> 8월 30일자 보도에 따르면, “천도교 청년당은 9월 2일 당 창립 4주년을 기회로 ‘시국인식을 갱신하자’는 삐라를 전 조선에 뿌리는 동시에 국내외 2백여 당부를 총동원하여 시국인식에 대한 강연회를 일제히 개최하며 특히 동 당 본부로서는 전 조선 순회 강연대(隊)를 조직하여 제1차로 아래와 같이 순강(巡講)을 한다.”고 보도했다. 제1대(隊) 강사는 백중빈, 제2대 강사는 임문호, 제3대 강사는 김병제, 임문호 두 사람이었다. 각 순회 강사의 일정과 지역을 보자.

    제1대(평남북, 강사 백중빈)

    제2대(함북, 강사 임문호); 종성(9월 5일) / 회령(7일) / 부령(8일) / 청진(9일) / 명천(11일) / 길주(12일) / 성진(13일)

    제3대(한남, 강사 김병제 임문호); 단천(9월 14일) / 이원(15일) / 북청(17일) / 홍원(18일) / 함흥(19일) / 정평(21일) / 영흥922일) / 고원(23일) / 문천(24일) / 원산(25일)

    天道敎 中央 宗理院은 1937년 7월 19일자로 中央 宗理院의 部署 責任者 連名으로(申鏞九는 中央 宗理院의 道領, 林文虎는 觀正.) 道發號外 (1)(2)등 네 건의 時局宣言을 號外傳單으로 配布했다. 한편 이 날짜(동아일보 1937. 8. 30) 신문에서 천도교 중앙 종리원 명의의 삐라도 실려 있다. 총 5개항으로 된 전문은 다음과 같다.

    時局認識을 更新하자.

    一, 1개월 이전에 발생된 北支事變은 支那側의 暴擧非行의 續發로 인하여 드디어 全支事變 으로 化하고 不擴大方針은 다시 膺懲主義로 변하였다. 이제야말로 時局이 重且大하게 된 것을 再認識 하자.

    一, 帝國의 世界的 地位 및 東洋平和에 대한 使命과 支那의 佛領無償한 實情을 徹底히 認識 할 것은 물론이거니와 나아가서는 今回 事變은 상당히 長久한 期間이 繼續될 것을 覺悟 하여 克己的 忍耐와 保國的 精神으로써 時局에 處應하자.

    一, 産業의 急速한 開發과 經濟의 圓滑한 培養을 務導하여 國家의 物質的 元氣를 充實히 하 자

    一, 東洋은 東洋人의 東洋이라는 意識下에 今次 皇軍의 聖戰은 大東洋의 平和的 樂園을 建 設함에 있는 것을 懷得하고 次를 祈願하자.

    一, 非打算的으로 內鮮一體의 精神을 發揮하고 擧國一致의 魄力을 高揚하자.

    소화12년(1937년) 8월 일

    天道敎 中央 宗理院

    -------------------------

    註 00; ‘시국인식(時局認識)을 갱신(更新)하자.’ 의 본문을 모두 한글로 풀어 쓴 것.

    시국인식(時局認識)을 갱신(更新)하자.

    一, 1개월 이전에 발생된 북지사변은 지나측의 폭거비행의 속발로 인하여 북지사변은 드디어 전지사변으로 화하고 불확대방침은 다시 응징주의로 변하였다. 시국은 이제야말로 중차대하게 된 것을 재인식 하자.

    一, 제국의 세계적 지위 및 동양평화에 대한 사명과 지나의 불령무상한 실정을 철저히 인식할 것은 물론이어니와 나아가서는 금회 사변은 상당히 장구한 기간이 계속될 것을 각오하여 극기적 인내와 보국적 정신으로써 시국에 처응하자.

    一, 산업의 급속한 개발과 경제의 원활한 배양을 무도하여 국가의 물질적 원기를 충실히 하자.

    一, 동양는 동양인의 동양이라는 의식하에 금차 황군의 성전은 대동양의 평화적 낙원을 건설함에 있는 것을 회득하고 차를 기원하자.

    一, 비타산적으로 내선일체의 정신을 발휘하고 거국일치의 백력(魄力)을 고양하자.

    소화12년(1937년) 8월 일

    천도교중앙종리원

    註 00; 종교인들의 몰락 - 국민정신 작흥운동과 종교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펴 나간다는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의 방침에 따라

    1. 1937년 2월 26-27일에 조선불교 31본산주지회가 소집되어 총독부 제 1 회의실에서 신도 15만, 本山 31, 사찰 1,338, 승려 7천을 갖는 조선불교를 대동단결시켜서 국민정신 작흥운동의 제 1 선에 나서자는 합의를 했다. 이 모음은 일제 말에 강행된 불교 일본화의 첫걸음이 되었다.

    2. 유교는 1937년 8월 15일에 경학원, 명륜학원의 직원과 강사 및 재경 유학생들이 모여서 매 1일과 15일에 전선 각처의 文廟에서 時局宣言文을 誓告하기로 결의하였다.

    3. 시천교(侍天敎)는 1938년 11월 28일에 구한말 一進會의 再版인 大東一進會를 결성하여 친일행각에 앞장섰다.

    4. 1938년 4월 25일에 기독, 장로, 감리교의 대표자들이, 서대문 경찰서 2 층 강당에 모여 신사참배는 물론 총후 보국강조주간의 행사에도 참가할 것을 결의하고, 일본적 기독교에 입각하여 황도정신을 발양하겠다는 요지의 선언문을 작성 발표했다. 5 월 8일에는 경성 기독교 연합회를 결성하고 7월 7일에는 조선 기독교 연합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으로 황국신민으로서 보국에 誠과 熱을 다하는 친일행위에 앞장섰다.

    5. 천주교, 장로교는 1937년 8월 15일에 서울의 종현 천주교 청년회가 일본제국의 국위선양 평화 미사를 가진 것을 시작으로 1938년 5월 12일에 괴산의 천주교와 감리교의 지도자들이 모여 황도선양연맹을 결성하였다. 이로 인하여 1938년 9월 10-15일에 제 27회 장로교 총회를 개최하여 황국신민으로서 赤誠을 다하기로 결의 하여 일본에 굴복했다.

    / 林鐘國의 ‘日帝末 親日群像의 실태’에서(PP.202-208.) 요약 정리함.

    註 00; 황국신민선서(皇國臣民誓詞, 일본어: 皇国臣民ノ誓詞 ‘황국 신민의 맹세) - 1930년대 후반 중일전쟁이 시작되면서 민족말살정책의 하나로 내선일체(內鮮一體),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등을 강요하면서 일본제국주의가 조선인들에게 외우기를 강요한 맹세의 글이다.

    1937년 10월에 총독부 학무국에서 교학쇄신(敎學刷新), 국민정신함양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황국신민의 서사를 기획하였다. 학무국 촉탁으로 있던, 직업적 친일파인 이각종이 문안을 만들었고, 학무국 사회교육과장 김대우가 관련 업무를 집행하였다. 이에 따라 1937년 10월 2일 미나미 지로(南次郞) 총독이 결재함으로써 공식화되었고, 일제는 이를 모든 조선인들에게 외우기를 강요하였다. 학교, 관공서, 은행, 회사, 공장, 상점 등의 모든 직장의 조례와 각종 집회 의식에서 제창 낭송하도록 강요되었으며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연맹의 실천요강에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황국신민서사를 낭송하라고 권장하고 있다. 보급을 위해 아동용 100만 부, 일반용 20만 부를 인쇄 배포했으며 신문, 잡지 등에 싣는 한편, 영화로 제작하여 상영하고 라디오로도 방송 선전했다. 그리고 모든 출판물에 이를 게재하도록 하였다 황국신민서사는 아동과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용, 일반(성인)용의 2종류가 있다. 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성인용

    1.우리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이다. 충성으로서 군국(君國)에 보답하자.

    2.우리 황국신민은 신애협력(信愛協力)하여 단결을 굳게 하자.

    3.우리 황국신민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여 힘을 길러 황도를 선양하자.

    아동용

    1.우리들은 대일본 제국의 신민(臣民)입니다.

    2.우리들은 마음을 합하여 천황 폐하에게 충의를 다합니다.

    3.우리들은 인고단련(忍苦鍛鍊)하고 훌륭하고 강한 국민이 되겠습니다.

    註 00; 신사참배(神社參拜)-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에 일제가 조선을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기만적인 내선일체(內鮮一體), 황민화(皇民化) 정책을 실시하면서 강력하게 추진한 일의 하나로, 특히 일제가 우리의 종교와 사상, 자유를 억압하기 위하여 곳곳에 신사를 세우고 참배할 것을 강요하던 일. 일제 천황제(天皇制)의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 위한 상징조작에서 나온 국민의식을 통제하려는 강압적인 정책.

    신사참배의 유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에 의해 천황제의 국가로 확립시킨 일본은 초기 신도(神道) 국교정책을 거쳐 1882년부터는 제사와 종교를 분리하는 국가신도 비종교정책을 추진했다. 즉 천황제 국가 이데올로기아래에, 전 국민을 통합하기 위해, 종교로서 출발한 국가신도에서 종교적 색채를 제거하고 이를 전 국민적인 보편이념으로 정착시키기 위한 정책을 추진했다. 이를 위해 국가신도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국가제사를 주관하는 신관(神官)을, 국민을 계도(啓導)하는 관료로서 국가기구 내에 포섭하고 이들이 종교로서 신도행사에 관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한편, 국가신도의 모든 시설과 모든 국가신도 종사자들의 활동을 제사집행에 한정했다. 이는 1889년의 제국헌법에 의해 명문화되었다. 이에 따라 1890년 교육칙어가 공포되고, 1891년에는 교육칙어 낭독, 신사참배가 소학교의 행사로서 제도화되었다. 나아가 러일전쟁을 계기로 신사의 통폐합, 제사의 획일화, 신직제도(神職制度)의 정비가 이루어지면서 국가통합이념으로서의 신사제도가 확립되어,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닌 국가의 정치원리, 국민통합 이데올로기를 상징하는 행사로 정착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점령하게 되자 일본인 거류민을 대상으로 국내에 처음 들어온 신사제도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면서 한국인들에게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는 기반으로 확대되었다. 총독부는 1915년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과 1917년 '신사에 관한 건'을 잇달아 공포하여 한국에 들어온 모든 신사의 정비와 증대를 꾀했다. 이를 기반으로 1925년에는 조선신사가 조선신궁(朝鮮神宮)으로 개칭되었다.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위기에 직면한 일본경제는 그 탈출구로 대륙진출을 꾀하면서 1931년에는 만주를 침략했고, 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감행했다. 이런 대륙침략정책이 추진되면서 이를 밑받침하기 위해 내선일체를 표방한 황민화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신사참배는 그중 가장 기본적인 정책이었다. 1930년대 중반부터 국민의 사상통제가 본격화되어, 신사 중심으로 애국반이 편성되고 신사 참배, 궁성요배, 국기게양,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 근로봉사의 월례행사가 강요되었다. 또한 각 가정에 신붕(神棚) 설치, 신궁의 부적 배포가 강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경찰 안에 감시대를 조직하고 애국반 안에 밀정조직을 만들어 이를 감시하게 했다. 한편 1936년 8월 신사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이 발표되어 황민화정책의 상징으로서 신사제도가 행정구역별로 재정비·신설되었다. 이에 따라 1936년에 524개였던 신사가 1945년에는 1,062개로 급증했다.

    신사참배 강요(神社參拜强要)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 곳곳에 신사를 세운 뒤 조선인에게 참배하도록 강제한 정책을 가리킨다. 신사참배는 신토의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 의식이다. 종교의 교리가 신사참배와 충돌하는 기독교 신자들은 신사참배 강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저항하다가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력히 추진하자, 처음에는 이에 반대했던 종교단체들도 일제에 굴복하기 시작했다. 1938년 2월 6일 전국에서 가장 교세가 큰 장로교 평북노회가 일제에 굴복하여 신사참배할 것을 결의했다(개신교). 같은 달 이승만계의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일제에 구속된 윤치호(尹致昊) 등도 석방의 대가로 기독교를 통해 내선일체의 실시에 힘을 다할 것을 서약하고, 조선 기독교청년회(YMCA)의 일본 YMCA로의 통합, 조선감리교회의 일본감리교회로의 합동을 결의했다. 7월에는 신사참배에 협력한 각 교회와 단체들의 전국대회가 개최되었고, 9월 장로교 총회에서는 전국 23노회 중 17노회의 찬성으로 신사참배와 국민정신총동원운동에의 적극 참여를 결의했다. 같은 달 감리교도 총리사 양주삼(梁柱三)의 명의로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이를 전후하여 기독교계열 각종 연합단체의 해산, 세계조직에서의 탈퇴, 조선기독교의 일본기독교로의 통합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황민화정책과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도 거세게 일어났다.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평양신학교학생들이 노회의 결정을 거부하고 집단적으로 신사참배반대운동을 벌여, 9월 20일 학교가 무기 휴교되는 사태로 발전했다.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반대운동이 전개되었는데, 평안남도의 주기철(朱基徹), 평안북도의 이기선(李基善)·이주원(李朱元), 경상남도의 한상동(韓尙東) 등이 중심적으로 활동했다. 그들은 신사참배에 굴복한 노회로부터의 탈퇴, 신노회 결성, 참배 불참자들 간의 상호부조와 이들을 중심으로 가정예배와 기도회 확산운동 등을 전개했으며, 1940년 2월에는 각 지역의 참배반대 운동가들을 모아 신사참배불참운동자연합회를 결성하여 적극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6월부터 주기철 목사 등 운동 관련자들을 대규모 검거하여 운동을 무력화시켰다. 그러나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은 비록 소규모적이고 분산적이나마 계속되었다.

    註 00; 신토(Shinto / 일본어: 神道 (しんとう))는 일본의 민속 신앙 체계로, 일본 고유의 다신교 종교이다. 일본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발생된 전통적인 민속 신앙 및 자연 신앙을 기반으로 하여 호족층이 다스리던 중앙 및 지방 정치체제와 관련되면서 서서히 성립되었다. 신토는 다른 종교와 달리 명확한 교리나 경전이 없으며, '고지키(古事記 고사기)', '니혼쇼키(日本書紀 일본서기)', '고고슈이(古語拾遺 고어습유)', '센묘(宣命 선명)' 등의 '신전(神典)'이라 불리는 고전들을 그 규범으로 삼는다. 삼라만상에 신이 머문다 생각하여, 다카아마하라(高天原)에 있거나 거기에서 내려온 아마쯔카미(天津神 천진신), 땅에서 생겨난(혹은 땅에 내려온 아마쯔카미에게서 태어난) 구니쯔카미(国津神 국률신), 선조의 영혼으로 사후 오랜 시간이 지나 생전의 모습을 잃었거나 그 집합체로서 존재하는 조령(祖靈) 등을 모시며 제사를 중시한다. 현대의 신토는 헤이안(平安) 중기에 편찬된 율령의 실행세칙인 엔기식(延喜式 연희식)을 기준으로 옛날부터 야마토 왕권에서 제를 지내던 신들을 중심으로 재편하고, 불교 및 지방의 신들(조상신들 등)도 합쳐 본종을 이세 진구(伊勢神宮 이세신궁)로 하여 진자혼쵸(神社本庁 신사본청[*])에서 전국적인 네트워크로 관리한다.

    일본 내부에서 많이 알려지고, 해외로도 많이 알려진 음양사[陰陽師-おんみょうじ]는 신토의 제사 진행자 이다 - 남성은 음양사로 불리고, 여성은 무녀[巫女ーみこ]로 불린다. 일본인이 아닌 외부인이 볼 때에는 음양사와 스님의 경계는 애매모호하다, 그것은 이유가 불교사찰이 신토의 제사를 지내는 곳이 많은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스님이 음양사의 역할도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의 사찰 중에서도 상당수가 신궁인 경우가 있다. 사찰 건립자는 스님이지만, 정작 사용 용도는 신토의 제사 구역으로 쓰이는 경우가 흔히 있다.

    식민지에 신토 강요

    신토는 조선에 1876년 개항 이래 문화 침략의 일환으로 도입되었으며,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에는 조선총독부의 보호 아래 동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급되었다. 특히 1930년대에 일본 제국이 중국 침략을 계획하면서 점차 강제적인 정책으로 변화했다. 일본 천황 신격화와 강제 신사참배는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함으로써 효율적인 식민 통치와 전쟁체제의 구축을 노린 것이었다. 일제는 각지에 신사를 세우고 학교와 가정에도 소형 신사를 설치하도록 하여 황민화 정책을 추진했다. 그러나 주로 기독교 계열의 사립학교를 중심으로 이 같은 정책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조선에는 개화기 이래 선교사들이 세운 기독교 학교들이 다수 있었고, 우상 숭배를 명시적으로 금시하는 기독교의 교리는 신사 앞에서 절하는 신사참배 의식과 충돌을 낳았다. 기독교계는 신사참배에 참여하지 않고 있다가 1935년을 기점으로 조선총독부의 강경책에 신사참배 용인파와 반대파로 분열되면서 큰 갈등이 시작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 무렵부터는 조선총독부가 일부 학교를 폐교시키면서까지 신사참배 강행 의지를 보여 문을 닫지 않은 학교들은 신사참배를 실시해야 했다.

    조선총독부는 기독교계 학교에 보급된 신사참배를 교회로까지 확장시키기 위하여 압력을 행사했고, 1938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를 계기로 각 교파의 목회자들이 솔선해 신사참배에 나서면서 급격히 황민화 정책에 동조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반대파의 강경론자인 주기철이 옥사하는 등 희생자도 발생했다. 신사참배에는 기독교뿐 아니라 불교 등 다른 종교 성직자와 신자들도 참여해야 했으나, 상대적으로 마찰은 적었다. 신사참배에 기독교계 전체가 공식적으로 동원된 것은 그 후유증이 상당히 컸다. 일제 패망 후 며칠 만에 신사를 불태워 버렸을 만큼 신사참배 강요에 대한 조선인의 반감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신사참배에 앞장선 이들이 법적 책임을 지는 과거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문제가 잠복해 있었다. 후에 이로 인한 상처를 씻기 위해 공산주의를 사탄으로 삼는 지나친 반공주의와 보수주의적 흐름이 나타났을 정도로 한국 기독교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있다.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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