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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7)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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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415회   작성일Date 13-03-28 23:20

    본문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7)

    天道敎 政治理念 原本

    /天道敎政治理念의 原本 全體가 縱書

    表紙 部分

    --------------------------------------------------------------------

    天道敎總本部 知道觀 編纂

    天道敎政治理念

    普成社出版部 刊行

    --------------------------------------------------------------------

    아래의 ‘發刊에 際하여’가 落張됨

    發刊에 際하여

    이 작은 冊子는 비록 簡單하나마 天道敎의 政治思想의 社會的 起因과 理論的 根據를 밝힌 同時에 天道敎의 政治運動에 對한 史實을 들어 그의 理念路線롸 및 鬪爭對象이 무엇이었던 것을 例證하고 아울러 解放 後 新朝鮮 建設에 對한 大體要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집을 짓는 데에 기둥, 들보, 석가래 等 材木될 만한 것을 골라 놓은데 不過할 뿐이요 아직 먹줄을 치고 대패를 놓고 골을 파고 자구로 깎아서 사개를 맞추게 되지는 못함과 같이 具體的인 理論的 體系와 現實的 政策을 完全히 내세우지는 못하였다.

    앞으로 靑友黨의 理念 路線과 現段階의 政綱 政策을 具全한 冊子가 續刊될 것 前提로 하고 于先 이것은 發刊하면서 讀者諸賢의 諒察을 바란다.

    布德 八十八年 三月 三十一日

    天道敎總本部 知道觀

    金 秉 濟

    “天道敎政治理念”은 布德 八十八年 四月 三日에 普成社에서 인쇄, 동년 四月 五日에 天道敎總本部 知道觀 이 編輯하여 普成社 出版部에서 발행한 小冊子로 포켓용 크기이다. 가로 9.8cm X 세로 14.4cm로 된 본문이 총 71페이지의 매우 엷은 灰色의 再生紙로 된 漢主國從體(國漢文 混用體)의 全體가 縱書(右에서 左로)로 된 冊子이다. 별도로 表紙와 發刊辭 版權 所有標示의 3페이지가 있으므로 총 74 페이지라고 하기도 한다.

    目 次/ 띄어쓰기가 되어 있지 않다.

    一, 天道敎의政治理念과社會的根據 ( 一)

    二, 天道敎의政治思想과理論的根據 ( 五)

    一. 同歸一體說 ( 八)

    二. 事人如天說 ( 九)

    三. 保國安民說 ( 九)

    四. 天職天祿說 (一○)

    五. 萬事知는食一椀說 (一一)

    六. 奴隸解放 (一一)

    七. 政治的實踐運動 (一二)

    八. 殉道精神 (一二)

    九. 後天開闢 (一三)

    十. 사람性自然史觀 (一四)

    十一. 地上天國理想 (一七)

    三, 天道敎의政治運動史와 그 意義 (一九)

    甲. 甲午革命運動 (一九)

    乙. 甲辰改革運動 (二五)

    丙. 己未獨立運動 (三一)

    四, 天道敎靑友黨의出現과 그 意義 (三四)

    一. 天道敎靑友黨이생겨진經路 (三五)

    二. 天道敎靑友黨이出現된意義 (三五)

    三. 天道敎靑友黨의運動目標 (三六)

    五, 天道敎의建國理念 (三九)

    甲. 民主政治 (四四)

    乙. 民主經濟 (五一)

    丙. 民主文化 (五七)

    丁. 民主倫理 (六二)

    六, 天道敎靑友黨의復活과 그 政治的進路 (六九)

    수정본 1은 목차가 없고, 수정본 2는 목차의 제목은 같으나 제목의 수사(數詞)가 다음과 같이 다르다. ( )에 들어 있는 수사가 수정본 2.이다. 수정본 2.의 큰 제목(一 ∼ 六)은 행간(行間)을 한 행정도 띄었다.

    目 次

    一 天道敎의 政治理念과 社會的 根據

    二 天道敎의 政治思想과 理論的 根據

    一. 同歸一體說

    二. 事人如天說

    三. 保國安民說

    四. 天職天祿說

    五. 萬事知는 食一椀說

    六. 奴隸解放

    七. 政治的 實踐運動

    八. 殉道精神

    九. 後天開闢

    十. 사람性 自然史觀

    十一. 地上天國理想

    三 天道敎의 政治運動史와 그 意義

    甲(一). 甲午革命運動

    乙(二). 甲辰改革運動

    丙(三). 己未獨立運動

    四 天道敎靑友黨의 出現과 그 意義

    一. 天道敎靑友黨이 생겨진 經路

    二. 天道敎靑友黨이 出現된 意義

    三. 天道敎靑友黨의 運動目標

    五 天道敎의 建國理念

    甲(一). 民主政治

    乙(二). 民主經濟

    丙(三). 民主文化

    丁(四). 民主倫理

    六 天道敎靑友黨의 復活과 그 政治的 進路

    이 글의 비교분석은 원문의 단락을 따라야 하지만, 원문의 문장이 장문으로 단락의 길이기 길어 원문을 기준으로 하지 않고, 이해하기 쉽도록 수정본 1의 단락으로 나누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잘못된 것과 오자(誤字)와 탈자(脫字)를, 수정(修正)하고 보완(補完)하여 정본(正本)을 따로 만들었다.

    ====================================================================

    “天道敎政治理念”은 布德 八十八年 四月 三日에 普成社에서 인쇄, 동년 四月 五日에 天道敎總本部 知道觀 이 編輯하여 普成社 出版部에서 발행한 小冊子로 포켓용 크기이다. 가로 9.8cm X 세로 14.4cm로 된 본문이 총 71페이지의 매우 엷은 灰色의 再生紙로 된 漢主國從體(國漢文 混用體)의 全體가 縱書(右에서 左로)로 된 冊子이다. 별도로 表紙와 發刊辭 版權 所有標示의 3페이지가 있으므로 총 74 페이지라고 하기도 한다.

    “天道敎政治理念”의 수정본 1인 “南北分裂沮止(鬪爭 / 三一再顯運動誌”는 新人間社에서布德 110(1969)년 3월 20일에 초판을 간행하였고, 布德 122(1981)년 3月 1日에 再版을 天道敎中央總部 出版部에서 했다.

    “天道敎 政治理念” 수정본 2 는 포덕 131(1990)년 9월 25일에 창간호로 동학 선양회에서 간행된 “東學” 제 1집의 附錄 자료(PP. 278 - 319)에 원본에서 한문부분을 현대어에 맞게 수정된 수정본(修訂本)이 게재되어 있다.

    “天道敎政治理念”의 원본과 수정본 1, 2를 비교분석함에 있어 간행순으로 해야 되나 수정본 2가 원본에 가깝고, 수정본 1은 첨삭(添削)이 심하여 간행순(刊行順)으로 하면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되어 원본(원본), 수정본 2(수2), 수정본 1(수1)의 순서로 비교분석하여 해설하였다. 특기사항으로는 수정본 1은 편의상 임의로 소(小) 문단으로 나누거나 행(行)갈이를 하고 있다.

    5. 天道敎政治理念 全文의 比較分析과 解說.

    天道敎政治理念

    原本; 一. 天道敎의政治思想과社會的 根據.

    修 2; 一. 天道敎의 政治思想과 社會的 根據.

    修 1; 一. 天道敎의 政治思想과 社會的 與件. 原 題目에서 天道敎의政治理念과社會的根據을 天道敎의 政治思想과 社會的 與件으로 고치고 띄어쓰기를 했다.

    原本; 天道敎의 政治思想은 崔水雲先生으로부터 當時의 國內政勢와 國際情勢를 批判的으로 觀察하야 그의對策을講究한대서 起因되었다.

    修 2; 天道敎의 政治思想은 崔水雲先生으로부터 當時의 國內政勢와 國際情勢를 批判的으로 觀察하여 그 對策을 講究한데서 起因되었다.

    修 1; 天道敎의 政治思想은 崔水雲 先生으로부터 當時의 國內政勢와 國際情勢를 비판적으로 관찰하여 그 대책을 강구한데서 비롯된 것이다./ 수정본 1은, 원문의 한자를 한글화 하는 과정에서 수정자가 일정한 원칙이 없이 편의대로 전환하고 있다.

    解說; 천도교의 정치사상은 최수운(崔水雲)선생께서 재세(在世) 당시의 국내정세와 국제정세를 비판적으로 관찰하여, 우리나라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깊이 궁리하여 찾아내려고 한데서서 비롯된(시작된) 것이다.

    正本; 天道敎의 政治思想은 崔水雲先生으로부터 當時의 國內政勢와 國際情勢를 批判的으로 觀察하여 그 對策을 講究한데서 起因되었다.

    原本; 當時의 朝鮮社會는 封建制度의 末期로서 온갓 弊害가 俱生한 때이다. 위로 庸君暗主들은 特權階級에 操縱되어 虛位를 지킬뿐이었고 政府大官들은 各自의 位權名利를 圖할뿐 國家民生의 安危는 念頭에도 없었으며

    修 2; 當時의 朝鮮社會는 封建制度의 末期로서 온갖 弊害가 俱生한 때이다. 위로 庸君暗主들은 特權階級에 操縱되어 虛位를 지킬 뿐이었고 政府大官들은 各自의 位權 名利를 圖할 뿐 國家民生의 安危는 念頭에도 없었으며

    修 1; 當時의 朝鮮社會는 봉건제도의 末期로서위로 세상 물정에 어두운 君主는 特權階級에 조종되어 虛位를 지킬 뿐이었고 政府大官들은 각자의 地位와 名利를 탐내어 國家民生의 安危는 돌보지 않을뿐 아니라 수백년래의 黨爭은 政敵打倒에만 열중하여 國家에 장차 大禍가 생길 것은 그들의 염두에도 없었던 것이다. / 전 문장을 첨삭하였다. 첨삭 정도와 내용을 비교하기 바람

    解說; 그때의 조선사회는 봉건제도의 말기로서 위로는 세상 물정에 어두운 왕(君主)이 특권계급인 세력 있는 당파에 조종되어 실질적인 힘이 없는 왕의 자리(虛位)를 지킬 뿐이었고 나라의 주요한 자리에 있는 신하(堂上官/正 三品이상)들은 각자의 지위와 권세(權勢) 그리고 명성(名聲)과 이득(利得)만을 탐내어 국가와 민생의 안위(安危)는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싸워온 당쟁은 정적(政敵)을 타도하는 데만 열중하여, 이로 인하여 국가에 장차 커다란 화근(大禍)이 생기리라는 것은 그들의 마음의 속(念頭)에는 아예 없었던 것이다.

    正本; 當時의 朝鮮社會는 封建制度의 末期로서 온갖 弊害가 俱生한 때이다. 위로 庸君暗主들은 特權階級에 操縱되어 虛位를 지킬 뿐이었고 政府大官들은 各自의 位權名利를 圖할 뿐 國家民生의 安危는 念頭에도 없었으며

    原本; 더욱이 數百年來의 黨爭은 自黨擁護 政敵打倒에만 彼此熱中하기 때문에 國家에 將次 大禍가 생길 것은 全然沒覺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瓜牙인 貪官汚吏輩는 民衆의 膏血을 搾取하는 一事에 專念하였었고 地方土豪는 亦是貧賤大衆에게 使役討索, 私刑을 恣行하되 此를 當然視하였었으며 國家風敎에 主導的地位를 가진 儒林이 또한 그들의 本務인 講學明倫은 名色뿐이요 土豪 地主輩와 三角同盟이 되어가지고 一般民衆을 抑壓 搾取하였었으며,

    修 2; 더욱이 數百年來의 黨爭은 自黨擁護 政敵打倒에만 彼此 熱中하기 때문에 國家에 將次 大禍가 생길 것은 全然 沒覺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瓜牙인 貪官汚吏輩는 民衆의 膏血을 搾取하는 一事에 專念하였었고 地方土豪는 亦是 貧賤大衆에게 使役討索, 私刑을 恣行하되 此를 當然視하였었으며 國家風敎에 主導的 地位를 가진 儒林이 또한 그들의 本務인 講學明倫은 名色뿐이요 土豪 地主輩와 三角同盟이 되어 가지고 一般民衆을 抑壓 搾取하였으며,

    修 1; 그들 貪官汚吏輩는 민중의 고혈을 착취하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을뿐 국가 정치에 주도적 지의를 가진 儒林들은 學究와 社會질서 확립에 기여함이 없이 土豪 地主輩와 三角으로 손을 잡고 일반 민중을 억압 搾取하였던 것이다. / 전 문장을 첨삭하였다. 첨삭 정도와 내용을 비교하기 바람

    解說; 더욱이 수백 년 동안 싸워온 당쟁은 자신들의 당파(自黨)만을 옹호하고, 나아가 서로간의 정적(政敵)을 타도하는 데만 열중하였기 때문에, 이로 인하여 국가에 장차 커다란 화근(大禍)이 생기리라는 것을 완전히 아주 잊고 무시해 버리(沒却)고 있었으며 그들의 수족(手足)으로 착취자(瓜牙/조와)인 탐관 오리배(貪官汚吏輩)는 민중들이 몹시 고생하여 얻은 재물(膏血)을 착취하는 오로지 그 일에만 전념하였었고 지방의 토호(土豪)는 역시 가난하고 천(貧賤)한 대중에게 사역(使役)과 토색질(討索), 사형(私刑)을 자행(恣行)하되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었으며 국가의 풍교(風敎)에 주도적 지위를 가진 유림(儒林)이 또한 그들의 본래의 임무인 강학(講學)과 명륜(明倫)은 이름(名色)뿐이요 토호와 지주배(地主輩)와 삼각(三角)으로 동맹이 되어 가지고 일반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였으며,

    註 00; 사역(使役)과 토색질(討索)-사역은 국가나 공공 단체가 특정한 공익사업을 위해 국민에게 의무적으로 지우는 노역(勞役) 또는 국민이 지는 공역(公役/賦役)을  토호와 지주배(地主輩)들이 사적인 일을 제 마음대로 억지로 시키는 것이며, 토색질[討索]은 돈이나 물건을 강제로 빼앗거나 억지로 달라고 하는 것을 말함.

    註 00; 자행(恣行)-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거나 일을 저지름. 또는 그 행동이나 일.

    註 00; 풍교(風敎)-교육이나 정치를 잘하여 세상의 풍습을 잘 교화시는 것. 또는 국풍(國風)을 세우는 일.

    註 00; 강학(講學)과 명륜(明倫)- 강학은 유학의 학문을 갈고 닦고 연구하는 것이고, 명륜은 유학의 사상이나 윤리를 밝히고 가르치는 일. 

    註 00; 명색(名色)-내용이나 실속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지만, 그러한 부류에 속한다고 내세우는 이름이나 지위. 실속은 없고 이름뿐인 것. 빛 좋은 개살구.

    註 00; 토호(土豪) -지방에서, 재력과 세력을 바탕으로 양반 행세를 할 정도로 힘을 과시하는 사람.

    註 00; 조아(瓜牙) - 순자(荀子)의 권학문(勸學文)에 있는 말로, 손톱이나 발톱과 날카로운 이와 같이 동물들이 자신을 지키기 위하여 가진 기관(器官)을 말한다. 다른 의미로는 병기(兵器). 무기(武器). 또는 자신을 도와 지키는 것을 말한다. 例; 조갑 [爪甲]-손톱 또는 발톱. 오조룡 [五爪龍]-발톱이 다섯 개가 있다는 용. 조흔[爪痕]-손톱이나 발톱으로 할퀸 자국. 거조[巨爪]-[의학] 손톱이나 발톱이 병적으로 지나치게 두꺼워지고 커지는 일.

    鍥而舍之, 朽木不折, 鍥而不舍, 金石可鏤, 螾無瓜牙之利, 筋骨之强, 上食埃土, 下飮黃泉, 用心一也. 蟹八蛫而二螯, 非蛇蟺之穴, 無可寄託者, 用心躁也. 是故無冥冥之志者, 無昭昭之明, 無惛惛之事者, 無赫赫之功.

    / 깎기를 중도에 포기하면 썩은 나무도 쪼갤 수 없지만, 깎기를 쉬지 않으면 금석이라도 새길 수 있다. 지렁이가 발톱과 이빨이 날카롭지는 않지만 힘살이 강하게 하여 , 위로는 진흙을 먹고 아래로는 황천의 물을 마시는 것은 그 마음 씀씀이가 한결 같기 때문이다. 게는 여덟(여섯이 아님)개의 발과 2개의 집게를 가졌기에 뱀과 지렁이의 굴과 같은 것이 없이 의탁할 수 없기에 마음 씀씀이가 항시 조급하다. 따라서 묵묵(黙黙)한 의도도 없고, 명철(明哲)함도 없고 보이지 않는 노력도 없고, 혁혁(赫赫)한 공도 없는 것이다.

    註 00; 三角同盟-부패하구 부정을 저지르는 儒林과 土豪 그리고 地主輩가 일반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하여 서로 손을 잡고 악행을 저지는 것.

    正本; 더욱이 數百年來의 黨爭은 自黨擁護 政敵打倒에만 彼此 熱中하기 때문에 國家에 將次 大禍가 생길 것은 全然 沒覺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瓜牙인 貪官汚吏輩는 民衆의 膏血을 搾取하는 一事에 專念하였었고 地方土豪는 亦是 貧賤大衆에게 使役討索, 私刑을 恣行하되 此를 當然視하였었으며 國家風敎에 主導的 地位를 가진 儒林이 또한 그들의 本務인 講學明倫은 名色뿐이요 土豪 地主輩와 三角同盟이 되어 가지고 一般民衆을 抑壓 搾取하였으며,

    原本; 그때의經濟狀態는 原始的인農業과 手工業으로서 特히 土地制度는 封建的이었기 때문에 絶代多數의 農民은거의全部가 小作人으로서 地主의 搾取는勿論이요 그身分까지 地主에게 從屬된 奴隸生活을 하였었고 小數의 自作農家가 있다할지라도 그門閥이 만일 兩班階級에 屬치못한 사람이면 土豪의 魚肉됨을 免치못하였었으며,

    修 2; 그때의 經濟狀態는 原始的인 (農業과 가 삭제됨)手工業으로서 特히 土地制度는 封建的이었기 때문에 絶代多數의 農民은 거의 全部가 小作人으로서 地主의 搾取는 勿論이요 그 身分까지 地主에게 從屬된 奴隸生活을 하였었고 小數의 自作農家가 있다 할지라도 그 門閥이 만일 兩班階級에 屬치 못한 사람이면 土豪의 魚肉됨을 免치 못하였으며,

    修 1; 그 때의 經濟狀態는 原始的인 手工業으로서 특히 토지제도는 封建的이었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농민은 거의 전부가 小作人으로서 地主의 착취는 물론이오 그 신분까지 地主에게 從屬된 奴隸생활을 하였었고 간혹 小數의 自作農家가 있다 할지라도 그 문벌이 만일 兩班階級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면 土豪의 魚肉됨을 免치 못하였다./ 전 문장을 첨삭하였다. 첨삭 정도와 내용을 비교하기 바람

    解說; 그때의 경제 상태는 원시적인 수공업(手工業)으로서 특히 토지제도는 봉건적이었기 때문에 절대 다수의 농민은 거의 전부가 소작인(小作人)으로서 지주의 착취는 물론이요 그들의 신분까지 지주에게 종속(從屬)된 노예생활을 하였었고 간혹 소수의 자작농가(自作農家)가 있다 할지라도 그 문벌(門閥)이 만일 양반계급에 속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토호(土豪)의 어육(魚肉)됨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註 00; 종속(從屬)- 주체(主體)가 되거나 강한 힘을 가진 것에 딸려 있거나 좌우되는 관계에 있는 것 또는 강력한 것이나 주체적인 것에 딸려 있게 되거나 좌우되는 관계에 있는 것을 말한다.

    註 00; 어육(魚肉)- 생선과 짐승의 살코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토호나 지주배들에게 짓밟히어서 결딴이 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正本; 그때의 經濟狀態는 原始的인 手工業으로서 特히 土地制度는 封建的이었기 때문에 絶代多數의 農民은 거의 全部가 小作人으로서 地主의 搾取는 勿論이요 그 身分까지 地主에게 從屬된 奴隸生活을 하였었고 小數의 自作農家가 있다 할지라도 그 門閥이 만일 兩班階級에 屬치 못한 사람이면 土豪의 魚肉됨을 免치 못하였으며,

    原本; 또는 그때의 倫理道德은 儒敎國是이니만큼 封建的典型道德인 五倫三綱의 名目이 있기는있었으나 그나마 儒敎의 本旨인 王道의 愛國愛民의 紀綱과 敎化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였을뿐 아니라 도리어 特權階級의 民衆搾取에對한 利用道具가 되고말았다.

    修 2; 또는 그 때의 倫理道德은 儒敎國是이니만큼 封建的 典型道德인 五倫三綱의 名目이 있기는 있었으나 그나마 儒敎의 本旨인 王道의 愛國愛民인 紀綱과 敎化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였을뿐 아니라 도리어 特權階級의 民衆搾取에 對한 利用道具가 되고 말았다.

    修 1; 또한 그 때의 倫理道德은 儒敎가 國是이니만큼 封建的 儒敎의 倫理인 三綱五倫의 名目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나마 儒敎의 本旨인 王道의 愛國愛民인 紀綱과 敎化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特權階級의 民衆搾取에 대한 이용 도구가 되고 말았다./ 전 문장을 첨삭하였다. 첨삭 정도와 내용을 비교하기 바람

    解說; 또한 그때의 倫理道德은 儒敎가 國是이니만큼 封建的 儒敎의 典型的인 倫理道德으로이름뿐인 三綱五倫이 있기는 하였으나 그나마 儒敎의 本旨인 王道의 愛國愛民인 紀綱과 敎化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特權階級이 民衆을 搾取를 하기 위한 이용의 도구가 되고 말았다.

    註 00; 名目-겉으로 내세우는 형식상의 구실이나 근거 또는 겉으로 내세우는 이름

    正本; 또는 그 때의 倫理道德은 儒敎國是이니만큼 封建的 典型道德인 五倫三綱의 名目이 있기는 있었으나 그나마 儒敎의 本旨인 王道의 愛國愛民인 紀綱과 敎化를 바르게 세우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도리어 特權階級의 民衆搾取에 대한 利用道具가 되고 말았다.

    原本; 이와같이 政治는 腐敗하고 經濟는 貧弱하고 倫理는 頹廢하여 國家는 날로 敗亡의 域으로 기울어지고 民生은 날로 塗炭의 坑에서 헤매이게 되었다. 이에 貧賤大衆은 행여 살아날길을 얻을까하여 直接 執權者에게 反抗하는 民擾가到處에서 蜂起하였고 或은外來의 勢力에 依存하고자하여 天主敎에 歸依하는者도 있으며, 或은 在來의 秘訣에 의하여 十勝之地와 眞人出現을 期待하는等 各種의 可憐한 光景을 呈하였었다.

    修 2; 이와 같이 政治는 腐敗하고 經濟는 貧弱하고 倫理는 頹廢하여 國家는 날로 敗亡의 域으로 기울어지고 民生은 날로 塗炭의 坑에서 헤매이게 되었다. 이에 貧賤大衆은 행여 살아날 길을 얻을까 하여 直接 執權者에게 反抗하는 民擾가 到處에서 蜂起하였고 或은 外來의 勢力에 依存하고자 하여 天主敎에 歸依하는 者도 있으며, 或은 在來의 秘訣에 依하여 十勝之地와 眞人出現을 期待하는 等 各種의 可憐한 光景을 呈하였었다.

    修 1; 이와 같이 政治는 腐敗하고 倫理는 퇴폐하여 民生은 날로 塗炭에 헤매이게 되자 貧賤大衆은 행여 살아날 길을 얻을까 하여 직접 執權層에 反抗하는 民擾가 到處에서 蜂起하였고 혹은 外來의 勢力에 依存하고자 하여 天主敎에 歸依하는 者도 있으며 혹자는 재래의 비결에 의하여 十勝之地와 眞人出現을 期待하는 등 그 可憐한 모습은 목불인견이었다./ 전 문장을 첨삭하였다. 첨삭 정도와 내용을 비교하기 바람

    解說; 이와 같이 정치는 부패하고 윤리는 퇴폐하여 民生은 날로 塗炭에 헤매게 되자 貧賤한 사람들은 행여나 살아날 길을 얻을 수 있을까 하여, 직접 집권층에 반항하는 民擾가 여러 곳에서 民衆이 蜂起를 하였고 혹은 外來의 세력에 의존하고자 하여 天主敎에 歸依하는 사람도 있으며 더러는 在來의 秘訣에 의하여 十勝之地와 眞人出現을 기대하는 등 그 불쌍한 모습은, 차마 눈을 뜨고 바라다 볼 수 없는 처참한 정경(情景)이었다.

    註 00; 貧賤大衆-빈천이란 불척척어빈천 불급급어부귀(不戚戚於貧賤 不汲汲於富貴)에서 온 말로, 자신이 가난하게 살더라도 걱정하지 않으며, 부귀를 얻기 위해 조급해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주어진 삶과 조건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의 자세를 비유하는 말이다. 가난하고 사회적인 위치가 낮은 소시민 또는 일반 국민을 의미한다.

    註 00; 外來의 勢力-나라 밖의 여러 나라에서 들어오는 사상이나 문물 또는 침략행위.

    註 00; 十勝之地와 眞人出現 - 十勝之地는 십승지(十勝地)라고도 한다. 이에 대한 기록은 정감록(鄭鑑錄),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責),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체적으로 공통되는 十勝之地의 장소는 다음과 같다.

    영월의 정동(正東) 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동북쪽,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雲峯)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단양(丹陽)의 영춘(永春), 무주(茂朱)의 무풍(茂風) 북동쪽 등이다. 이중에서 위치를 현재의 지명으로 확실하게 파악할 수 없는 곳은 운봉의 동점촌, 무풍의 북동쪽, 부안의 호암, 가야산의 만수동이다. 한편 영월 정동 쪽 상류는 오늘날의 영월군 상동읍 연하리 일대, 풍기의 금계촌은 영주군 풍기읍의 금계동·욕금동·삼가동 일대, 공주의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는 말 그대로 공주군 유구면과 마곡면을 각각 흐르고 있는 유구천과 마곡천 사이의 지역, 예천 금당동 동북쪽은 예천군 용문면 죽림동의 금당실(金塘室) 지역, 보은의 증항 근처는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경계인 시루봉 아래 안부(鞍部) 지역, 안동의 화곡은 봉화군 내성면 지역, 단양의 영춘은 단양군 영춘면 남천리 부근 등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들 지역은 모두 남한에 편중되어 있고 교통이 매우 불편하여 접근하기 힘든 오지이다. 그러나 十勝之地는 북한지역은 없고 남한지역에 편중되어 있기 때문에 南方이 吉하다고 생각하는 南朝鮮信仰 또는 南方思想에서 연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곳이 선호된 것은 전통사회에서 전쟁이나 난리가 났을 때 백성들이 취할 수 있는 방도란 난리가 미치지 않을 만한 곳으로 피난하여 보신하는 것뿐이었기 때문이다. 십승지지에 대한 열망은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에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으며, 6·25전쟁 때에도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그러나 십승지지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피란·보신의 소극성은 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이상세계를 대망하는 적극성과 연결되어 있다.

    眞人出現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 민중들 사이에 널리 퍼졌던 이상세계를 大望하는 민간 신앙인 정감록신앙에서, 삼절 운수설(三絶運數說), 계룡산 천도설(鷄龍山遷都說), 정성진인 출현설(鄭姓眞人出現說)로 요약할 수 있으며, 그 형성시기가 대체로 조선 후기라는 점에서 남조선신앙과 일치한다. 兩者가 다 같이 미래국토의 大望信仰이라는 점에서 민중의식의 未分化된 觀念의 複合이라고 볼 수 있다. 남조선신앙은 적어도 참위설(讖緯說),·감결(鑑訣) 등이 流布되는 가운데 定着되어갔고, 따라서 정감록신앙이 형성되는 가운데 파생되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한 증거로서 정감록에 열거되는 십승지지(十勝之地)가 모두 우리나라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들 수가 있다. 십승지지란 피난·은둔의 최적지를 말하는데, 정감록신앙이 널리 퍼졌던 때가 병자호란 이후라고 볼 때 이 십승지지가 북쪽에서 밀려오는 병화(兵禍)를 피하는 데 가장 알맞은 장소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조선신앙은 당초에 현실적 질곡(桎梏), 무엇보다도 병화(兵禍)에 대한 소극적인 대처로서의 보신책(保身策)이 점차 낙원동경의 사상과 결부되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따라서 이상향을 스스로 쟁취하겠다는 적극적 관념 형성이 미흡한 실정에서 오랜 국난의 체험으로 보아 북쪽으로부터 밀려 내려오는 이민족의 침략세력에 대응하는 수단은, 사적인 자기보존의 방책이었다고 생각할 때, 남조선신앙이 민간신앙의 수준으로 발전해간 것으로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소박한 생각은 점차 조선 후기로 내려올수록 사회적·경제적인 변수(變數)와 함께 적극적인 미래국토의 실현이라는 주술적인 원망과 불가피하게 결부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남조선신앙에 정감록신앙의 반(反)왕조적인 진인출현설이나 계룡산도읍설의 생생한 대망은 남조선신앙의 미래국토 대망을 한층 현실적 가능성으로 부각시켰다. 그러므로 당시 남조선신앙과 정감록신앙은 어디까지나 관념복합으로서 일체를 이루는 것이며, 남조선신앙이 민중의 마음속에 표류하는 미래 이상국토의 소박한 대망사상이라면, 정감록신앙은 적어도 이것을 바탕으로 한 참위설·풍수설 등에 의하여 논리적으로 재구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초역사적인 원초(原初)의 소박한 관념이 정감록신앙의 참위설·풍수설·진인출현설과 결부되면서 역사적인 모습으로 구체화하여 조선 후기의 민중운동과 결부되었다. 정성진인 출현설(鄭姓眞人出現說)이란 병란(兵亂)과 같은 재난(災難)을 구원해줄 훌륭한 인물이 등장하여 나라를 구원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의미한다. 정감록에서는 그 진인이 여러 성씨 중에서 정씨이며, 또 몇몇 정씨 중에서 정씨(鄭氏) 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구체적으로 예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관련 자료에서 정리함.

    註 00; 목불인견(目不忍見)- 차마 눈을 뜨고 바라다 볼 수 없는 처참한 정경(情景).

    正本; 이와 같이 政治는 腐敗하고 經濟는 貧弱하고 倫理는 頹廢하여 國家는 날로 敗亡의 域으로 기울어지고 民生은 날로 塗炭의 坑에서 헤매게 되었다. 이에 貧賤大衆은 행여 살아날 길을 얻을까 하여 直接 執權者에게 反抗하는 民擾가 到處에서 蜂起하였고 或은 外來의 勢力에 依存하고자 하여 天主敎에 歸依하는 者도 있으며, 或은 在來의 秘訣에 依하여 十勝之地와 眞人出現을 期待하는 等 各種의 可憐한 光景을 呈하였었다.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13-7)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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