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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자료_천도교, 동학농민혁명기록물 9건 세계기록유산 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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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영희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2,608회   작성일Date 23-07-20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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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도교, 동학농민혁명기록물 9건 세계기록유산 등재

    -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역사 담긴 기록물로서의 가치 인정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주요 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Memory of the World)으로 지정됐다.

    천도교에 따르면 유네스코는 지난 달 18일(현지시간) 파리에서 열린 집행이사회에서 한국이 신청한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UNESCO Memory of the World)으로 최종 등재 승인되었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한국 사회의 근대적 전환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았으며, 이번에 오른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총 185건으로 이중 천도교중앙총부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은 모두 9건이고 목록은 다음과 같다.

     

    ①나동환 교장 임명장, ②정순경 교장 임명장, ③이승룡 교수 임명장, ④홍재인 대정 임명장, ⑤오세용 부참모장 임명장, ⑥양언남 봉헌 임명장, ⑦이수방 접주 임명장, ⑧최운용표, ⑨무장 포고문 필사본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 신사는 1884년부터 교장, 교수, 도집, 집강, 대정, 중정의 육임제를 실시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천도교의 교역자 제도의 효시이다. 1885년부터는 각 지방에서도 육임제를 확장하면서 동학의 교세가 크게 늘어났다. 교장은 ‘자질이 알차고 덕망이 두터운 사람’에게 수여된 직책이었고, 교수는 ‘성심으로 수도하여 가히 교리를 전할 수 있는 사람’, 대정은 ‘공평하며 부지런하고 중후한 사람’에게 수여된 직책이었다.

    위 세계기록유산은 위 육임제의 직책에 따라 각각 수여한 임명장으로 나동환, 정순경에게 교장을, 이승룡에게 교수를, 홍재인에게 대정의 임명장을 수여했다는 증서인 것이다.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동학군은 총사령관, 대장, 참모장, 부참모장의 직책으로 나뉘었는데, 위 오세용 부참모장 임명장은 오세용을 수성 부참모장으로 임명하는 사료이며 양언남 봉헌 임명장은 갑오년(1894년) 8월에 해월 최시형이 양언남에게 봉헌이라는 직책을 수여한 임명장인데, 봉헌은 오늘날로 하면 비서의 직책이다.

    또 이수방 접주 임명장에서 ‘접주’란 동학교도 약50가구를 맡아 이끄는 지도자를 부르는 말이었으며, 이수방의 경우는 여러 개의 접을 합친 대접주로 사료를 보건대 오늘날 정읍시 태인면의 대접주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한편 최운용표는 경주최씨인 최운용에게 미도인표(동학교도가 아니다)라는 확인표를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동학교도 체포령이 내린 상태에서 체포당하지 않기 위해 가지고 있던 확인표로 결성현(오늘날의 충남 홍성)에서 발행한 확인표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번에 등재된 185건중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기록물은 30건인데 이중 18개의 생산자가 해월신사이다. 즉 동학혁명의 최고지도자가 해월신사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무장포고문은 1894년 3월 21일 동학의 대접주인 손화중과 접주인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전북 고창군 무장읍 동음치에서 ‘동학이 하늘을 대신하여 세상을 다스려 나라를 보호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우리는 살상과 약탈을 하지 않을 것이나 오직 탐관오리만은 처벌할 것이다’라는 기치로 만천하에 재봉기할 것을 선언한 발표문이다.

     

    동학농민혁명기록물 역사적 의의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도층에 저항하고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며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이다. 운동 과정에서 동학군은 집강소라는 민-관 협력 거버넌스 체제를 설치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를 통해 그들은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았다. 이러한 형태의 거버넌스는 신선한 민주주의 실험으로, 19세기 당시까지 이와유사한 제도는 세계 어디에도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은 한국이 번영한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발판을 놓았으며, 외국의 반제국주의, 민족주의, 근대주의 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은 중국군과 일본군의 조선으로의 군대 파병, 이로 인한 청일전쟁 촉발과 이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이어져,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질서 해체를 촉발시켰다. 이 기록물들은 어떻게 민중이 주체가 되어 역사를 보편적 가치, 즉 평등, 자유, 인권, 정의의 방향으로 전진시켜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기억의 저장소이다.

     

    천도교는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에 이어 2대 교주 최시형, 그리고 3대 교주 의암 손병희가 개칭한 민족종교로서 3.1운동의 기틀을 세운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다. 천도교는 동학농민혁명의 사상적 토대로서 오늘날까지도 신분철폐, 조세개혁, 자주독립에 이르기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거대한 물줄기로 흘러왔다.

     

    동학농민혁명 기록물은 동학농민군, 정부, 관료, 진압군, 민간지식인 등 여러 주체가 직접 생산한 종합적인 역사 기록이다. 이 기록물에는 동학농민군이 작성한 문서, 정부 보고서, 개인 일기와 문집, 각종 임명장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자료들을 통해 다양한 관점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진행 과정과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시간과 장소를 초월하여 인간의 권리와 평등, 식민주의에 대한 반대 등을 다양한 시각에서 종합적으로 보여주는 기록물로서 희귀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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