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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 사발통문의 사료가치연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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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이윤영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037회   작성일Date 13-07-11 01:47

    본문

                                    
                                             사발통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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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혁명, 사발통문의 사료가치연구

    * 본 연구의 글은 동학혁명의 전개과정이나, 역사에 있어 전반적인 연구의 글이 아니라, 1893년 11월, 결의 작성되어 각 마을의 집강에게 보내졌다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의 내용과 사발통문의 진위논란 등, 사발통문자체의 사료가치와 역사성에 대한 연구의 글임을 먼저 밝힌다.

    1. 사발통문의 사료가치로서 중요성

    1894년 갑오동학농민혁명(이하, ‘동학혁명’이라 칭함)의 사료와 유물의 중요성에 있어, 그 상징성의 첫 번째로 1893년 결의 작성되어 각리집강에게 보내졌다고 전해지고 있는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들 수 있다. 1894년 1월 10일, 동학혁명의 본격시작을 알리는 거사가 바로 고부봉기라는 역사의 중요성에 있어, 사발통문의 역할은 동학혁명의 도화선으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는 이유이다.

    사발통문의 작성은 1893년 11월, 전봉준접주를 위시하여 동학도인 20명이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 집에 모여 숙의한 끝에, 봉기의 거사계획과 내용을 정하여 작성된 사발통문을 각 마을의 집강(執綱)들에게 보내졌다. 둥그런 사발의 원형으로 서명한 명단은 다음과 같다. [전봉준, 송두호, 정종혁, 송대화, 김도삼, 송주옥, 송주성, 황홍모, 최흥열, 이봉근, 황찬오, 김응칠, 황채오, 이문형, 송국섭, 이성하, 손여옥, 최경선 임노홍, 송인호]

    이와 같이 동학접주, 도인 20명이 모여 서명하고 결의하여 격문을 작성하였다. 결의내용의 중요한 부분을 살펴보면, ‘이대로 지내면 살아남을 사람이 없을 것이니, 지금이 일어설 시기임을 강조하며, 고부성을 격파하고 조병갑의 목을 베어 죽일 것 등 전주성을 함락하고 서울로 진격한다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사발통문은 동학혁명을 들불에 비유할 때, 처음 불을 지른 역할로서 손색이 없기에 사발통문의 사료가치는 높게 평가할 수 있다.

    2. 사발통문의 성격과 결의 내용

    * 사발통문의 성격이 담긴 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각리 리집강 좌하-
    (좌하-座下: 편지에서, 상대방을 높여 이름 아래 쓰는 말)

    우(右)와 같이 격문을 사방에 빠르게 전하니 여론이 물끊듯 하였다. 매일같이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부르던 민중들은 곳곳에 모여서 말하되 ‘났네 났어 난리가 났어 에이 참 잘되었지, 그냥 이대로 지나서야 백성이 한사람이라도 어디 남아있겠냐’하며 그날이 오기만 기다리더라. 이때 도인들은 먼저 할 것과 나중에 할 것의 대책을 논의 결정하기 위하여, 고부 서부면 죽산리 송두호집에 도소를 정하고 매일 구름같이 모여 순서를 정하니 그 결의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조병갑을 목 베어 죽일 것
    -. 군기창과 화약고를 점령할 것
    -. 군수에게 아첨하여 백성(인민)을 괴롭힌 탐관오리를 엄하게 징벌할 것
    -. 전주성을 함락하고 경사(서울)로 직행할 것
    * 우(右)와 같이 결의가 되고 따라서 군략에 능하고 세상에 민활한 영도자가 될 장...(먹물과 글이 겹쳐 이하 판독불능)

    이와같이 살펴 본대로 결의문 내용은 사발통문의 성격을 그대로 말해준다. 이는 단순한 농민봉기의 민란성격이 아니라, 당시 동학조직의 접주들이 대거 참여했고, 조선정부의 반란에 해당되는 군수의 목을 밴다는 내용과 전주성함락과 서울까지 점령하려 했던 그야말로 혁명운동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당시 남접으로 대변되던 호남중심의 동학지도부들은 변혁지향세력으로서, 동학혁명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교조시원운동의 학습을 거치며 강력한 집단세력은 물론 국가를 개혁하고 외세를 몰아내는데 자신감이 충만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3. 사발통문의 진위여부 논란

    본 사발통문은 1968년 11월 신태인읍 평화동에 사는 송기태가 처음으로 세상에 알렸다. 송기태는 통문 서명자 송국섭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당시 사발통문발견은 학계와 연구가들에게 비상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뜻밖의 귀중한 자료출현으로 동학혁명의 전반적인 재정립이라는 큰 혼란에 부닥쳤다. 그 여파로 후에 동학혁명의 고부봉기에 대한 성격규명 등 찬반논란이 가중되기도 했다. 당시 외솔회(1970년 국어학자 외솔 최현배의 애국애족의 뜻을 이어받아 국어교육과 국어운동으로 사회에 기여하고자 만든 문화학술·친목단체)는 사발통문의 진척된 연구들을 모아 1974년 나라사랑15집을‘녹두장군 전봉준특집호’로 제작, 사발통문을 사료적 가치로 공식 인정하기도 했다.

    본 사발통문에 대해 김용덕, 신용하, 장영민 교수 등은 논문과 연구서를 통해 진위여부에 대해 각자 다른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김용덕 교수는 반신반의의 문건이라 했고, 신용하 교수는 고부민란의 사발통문 논문에서, 당시의 원본이 아닌 것 같고, 고부민란회고록의 일부를 필사한 것이라 주장했다. 장영민 교수는 고부민요연구서에서 사발통문의 본 내용이 1893년 11월~12월에 있었던 정소(呈訴-소장(訴狀)을 관청에 냄)와 관련된 문건이라는 의견을 밝혔다. 다시 말해 사발통문의 서명자 20명의 명단과 결의사항, 발견시기 정확한 경위 등 많은 문제점이 부각되었다는 학자와, 사발통문의 긍정적인 견해의 학자들도 있었다.

    동학역사연구대가로 알려졌던 표영삼선생은, 구체적으로 사발통문에 대해 문제가 분명 있다고 지적했다. [첫째-동학의 통문과 서식이 다르다. 둘째-공개적인 통문인데도 모이라는 장소와 날짜가 없다. 셋째-사발모양의 서명은 주모자를 모르게 하는 것인데, 전봉준은 이미 관에서 지목한 알려진 주동자였다. 넷째-통문의 내용이 신문기사나 보고서의 문장으로 이루어졌다.]등이다. 이상 표영삼 선생의 문제제기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필자도 내용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문장이 과거, 현재, 미래의 혼합문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동학혁명에 있어 분명 사발통문의 중요성을 인정하지만 또한 문제점도 발견됨을 알아야 한다.

    4. 사발통문의 역사적 의미

    현재 일반국민들과 학생들은 동학혁명의 상징성을 말하라면, 첫 번째로 사발통문을 예로들 정도, 이미 사발통문은 진위의 논란을 벗어나 역사상식에 있어 동학혁명의 대표적인 유물자료로 위치를 굳히고 있다. 전주동학혁명백주년기념관 전시실을 방문하는 많은 분들도, 동학혁명에 있어서 첫 번째 관심사로 사발통문을 찾는 것을 쉽게 본다. 필자는 사발통문진위여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의견을 제시해본다.

    첫째-1894년 1월 10일, 동학혁명고부봉기의 도화선으로 평가되고 있는 사발통문은, 1893년 11월 당시 통문의 원본을 필사하여 전해오면서 약간의 오류내용이 생긴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둘째-내용으로 봐, 관청에 낼 소장(訴狀)으로서, 차후 보완 수정하여 거사계획의 통문형식문장으로 재정립된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셋째-후대에 동학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건이라고 단정하기 보다는, 동학혁명의 시작과정에서 있었던 사발통문의 원본들이 유실됨에 따라, 후에 역사의 기록문서 가치의 중요성에 의한 필사본이 전해졌다는 짐작을 해본다.

    끝으로, 사발통문이 비록 내용에 있어 여러 가지 허술한 점이 있다손 치더라도 당시 목숨을 담보로 혁명을 일으켜야 하는 정황을 감안한다면, 현재 전해지고 있는 사발통문의 원본이 진본이라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면서 글을 마칠까 한다.

    포덕 154년(2013) 7월 10일
    동학혁명기념관장 송암심고


    -참고문헌 및 국역인용

    * 표영삼(동학2-통나무), 표영삼선생의 사발통문강의 내용
    * 이병규(사발통문봉기계획-녹두꽃 2013년 여름호)
    * 신순철. 이진영(실록 동학농민혁명사-서경문화사)
    * 조광환(발로 찾아 쓴 동학농민혁명-살림터)
    * 성주현(사발통문의 재검토와 고부기포-동학혁명119주년기념 학술대회


     
      새야 새야 파랑새야 / 국립합창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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