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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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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255회   작성일Date 13-09-06 2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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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2)

    ■ 철학사전

    계몽사상(啓蒙思想; Philosophy of the enlightenmnet 독어; Aufklärungsphilosophie) - 계몽이란 현존 사회의 결함을 바로잡고 종래의 도덕ㆍ풍습ㆍ정치 등에 대해 합리적인 입장에서 대처하고 비판하는 태도와 그 보급을 말한다. 유럽사상사에서 계몽사상은 17~18세기의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에서 나타났던 반봉건적ㆍ반가톨릭교회적인 사상운동을 가리킨다. 이 중에서도 부르주아 혁명을 목전에 둔 프랑스에서 이 운동은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최초로 영국의 로크에게서 계몽사상의 단초를 엿 볼 수 있다. 그는 스콜라 학파적인 생득관념을 부정하고 사회계약설과 인민의 저항권, 절대왕정 비판 등을 주장했다. 프랑스에서는 영국의 영향을 받아 절대왕정에 대해 격렬한 비판을 감행하였는데, 그 대표자로서 볼테르, 몽테스키외, 디드로 등 이른바 18세기 프랑스 유물론자들과 콩도르세, 루소 등을 들 수 있다. 디드로 등에 의한 『백과전서』(Encyclopédie)는 프랑스 계몽사상의 기념비적 역할을 담당했으며, 자유평등사상과 이성에 기초한 사회 건설을 주장하였다. 당시 독일은 봉건제 지배 하에서 아직까지 부르주아의 힘이 약하였지만, 영국, 프랑스로부터 자극을 받아 볼프, 레싱, 헤르더 등의 계몽사상이 나타났다. 계몽사상은 공상적 사회주의자와 러시아의 나로드니키에 영향을 주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몽사상 [Philosophy of the enlightenmnet, 啓蒙思想] (철학사전, 2009, 중원문화)

    ■ 계몽사상(啓蒙思想, enlightenment) - 18세기 프랑스 사상의 주류를 이루고, 프랑스혁명에 원리를 제공한 사상. I.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1784)를 저술한 후부터 사상사(思想史)에서의 용어가 되었다. 계몽이란, 아직 미자각상태(未自覺狀態)에서 잠들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理性)의 빛을 던져주고, 편견이나 미망(迷妄)에서 빠져나오게 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또 신학(神學)에 대응되는 의미에서 철학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 경우, 철학이란 좁은 의미의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아니라, 널리 인간세계나 자연 ·인생 등에 관한 지혜와 교양을 나타낸다. 또한 신학이 죽음을 주제로 하는 데 대해서 삶의 실학(實學)을 가리킨다. 따라서 계몽사상에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원의 물음에다가 ‘어떻게 행복해질 것인가’라는 현세(現世)의 과제가 덧붙여진다. 본류(本流)는 몽테스키외, 볼테르, J.J.루소를 비롯한 프랑스의 사상가, 문학가의 여러 저작 ·작품에 있으나, 그 원류(源流)는 T.홉스, J.로크를 비롯하여 17세기의 영국에서 시작된다. 그리하여 T.레싱, J.G.헤르더를 비롯한 독일의 여러 사상가에게까지 미쳤다. 이런 뜻에서는 18세기의 모든 문학운동 ·사상활동의 저류(底流)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각국에 싹트기 시작했던 시민정신의 형상화(形象化)에 있어 매개자의 역할도 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홉스는 프랑스의 R.데카르트와 함께 계몽사상의 원조라 할 수 있으나 고유의 의미에서의 영국 계몽철학은 로크와 D.흄에서 시작된다. 로크는 경험론을 인식론 안에 도입하여, 인간의 자연상태를 자유의 실존이라 규정하였으며, 자유로운 개인이 자유의지에 따라 공동체에 대한 복종을 선택한 이상, 선택은 강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계약에 의한 것이며, 인간의 자유의 지주(支柱)가 사유재산권의 보유에 있는 이상, 국가는 시민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존재요, 국왕은 그 집행기관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1734년에 출판된 볼테르의 《철학서간(哲學書簡)》에서부터 시작된다. 이어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1748)을 지어 삼권분립의 원칙을 밝히고, 절대왕정(絶對王政)에 쐐기를 박았다. 또 D.디드로, J.R.달랑베르, 뷔퐁, E.B.콩디야크, P.H.돌바크 등에 의해서 18세기 중엽부터 《백과전서(百科全書)》가 발간되었으며, 종교나 관습 ·제도의 주술(呪術)에 묶여 있는 인간을 감성적 ·심정적으로 해방시키고, 앞으로 꽃필 과학에 대한 꿈을 고취하며,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 위에 서서 새로운 세계관 ·처세술 ·창조에의 참가를 실현하도록 촉구하였다. 볼테르는 《캉디드 Candide》 《자디그 Zadig》를 통하여, 디드로는 《라모의 조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통해서, 문명의 상식에 등을 돌리고, 태어난 그대로인 자연아(自然兒)로 하여금 현실세계 속을 걷도록 함으로써, 사회와 인간 간의 깊은 상대관계를 알아내려고 하였다. 이 주제는 루소에 의해서 더욱 추구되었으며, 《인간 불평등 기원론》(55) 《신(新) 엘로이스》(61) 《사회계약론》(62) 《에밀》(62) 《고백록》(81 ·88, 사후 출판) 등을 낳는 원동력이 되었다. 계몽사상은 루소에 의해서 인간성의 전가치체계(全價値體系)로 완성되었으며, 18세기뿐만 아니라 널리 근대 시민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루소 뒤에는 G.B.마블리, J.르나르, M.콩도르세 등이 나와서 진보사상을 주창하였으며, 전제정치와 교회에 대해서 공격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계몽사상의 본류는 어느덧 사상을 기술화(技術化)하는 몇 가지 말류(末流)로 갈라졌으며, F.케네, A.R.J.튀르고 등에 의해서 중농주의(重農主義)가 제창되는 한편, 시에예스 등에 의해서 제3신분의 정치론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 계몽 절대주의(啓蒙絶對主義; enlightened absolutism)

    18세기 후반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등에 나타난 절대주의 군주제의 변형된 형태로, 프랑스에서 전개되었던 계몽사상을, 군주 자신이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해 채택한 것이다. 주로 관료행정의 확충을 통해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하려고 했다. 이 주의의 대표적 군주로는 프리드리히 2세, 조제프 2세 등이 있으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도 초기에 이 그룹에 속했다. 계몽절대주의의 사상적 원류는 프랑스의 중농주의자들이 주창한 '합법적 전제군주'에서 잘 드러난다. 이 말은 군주를 계몽시켜 '자연의 법칙'을 신봉케 하고, 독재 권력보다는 입법 활동을 통한 통치를 존중케 하는 것을 의미했다.

    독일의 바덴 대공 카를 프리드리히(1728~1811)는 이 사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지대를 단일세로 만들었고 대규모 공업 경영의 육성을 꾀했다. "군주는 국가 제일의 종복"이라는 말로 유명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종교적 관용. 교육개혁, 사법제도의 근대화 등 일련의 개혁적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조치의 목적은 무엇보다도 국가적 공리주의에 의해 산업장려와 부국강병을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리드리히 왕은 국영 매뉴팩처의 창설, 어용지 농민의 보호, 소택지의 간척을 행하는 한편, 군 간부인 귀족의 영주권(領主權)에 대해서는 일체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의 조제프 2세도 예수회의 추방, 수도원의 해산, 신교도의 박해금지 등의 정책을 실시해 교회를 국가에 복속시켰다. 아울러 학교교육의 근대화와 국가통제에 온힘을 기울였다. 그는 프리드리히보다 진일보하여, 재정 개혁적 견지에 서 농민해방, 귀족의 면책특권폐지 등 급격한 사회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지역 사정을 무시한 행정획일화의 시도였기 때문에 특권계층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제프의 동생인 토스카나의 레오폴드도 내국관세의 철폐, 농민의 봉건적 부담 폐지 이외에도 지방자치의 육성과 의회제도의 근대화까지도 생각했으나 절대주의의 통치원리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또 이러한 여러 가지 개혁정책이 원래의 의도와는 달리 군주, 관료 정치의 강화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는 당초 프랑스 계몽사상의 강한 영향을 받아 신법전의 편찬 등 '철학적 입법'을 의도했으나 푸가초프 의 난과 프랑스 혁명에 직면해 보수주의로 회귀했고 그 결과 귀족의 특권과 농노제가 강화되었다. 나폴레옹 시대 독일 연방의 개혁행정은 계몽절대주의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총체적으로 볼 때 계몽절대주의는 신시대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채택, 군주제 통치를 합리화하고 보강하려는 것이었다. / 브리태니커

    ■ 한국역사 속에서의 계몽.

    계몽운동 [啓蒙運動] - 1905~10년 개화파의 부르주아적 개혁론을 계승한 문명개화론자 들의 국권회복운동(→ 색인 : 민족해방운동). 애국 계몽운동이라고도 한다. 1905년 을사조약 후 전개된 계몽운동은 국권회복과 근대국가 건설을 위해 애국의 기치 하에 결집하여 실력을 양성하도록 국민을 계몽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주로 개화파를 계승한 지식층, 대한제국의 관료, 개명유학자들이었다. / 브리태니커

    애국 계몽운동 [愛國啓蒙運動] - 국권 회복과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애국의 기치 하에 결집하여 실력을 양성하도록 국민을 계몽하자는 운동으로, 국권 회복과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해 애국의 기치 하에 결집하여 실력을 양성하도록 국민을 계몽하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은 주로 개화파를 계승한 지식층, 대한 제국의 관료, 개명 유학자들이었다. 계몽 단체 활동은 1904년 보안회의 황무지 개척 반대 운동에서 비롯되었다. 이 활동은 일제의 탄압으로 곧 해산되었고, 의회 제도의 실현을 목표로 한 헌정 연구회 역시 정치 결사라는 이유로 해체되었다. 이후 대한 자강회, 대한 협회, 기호 흥학회 등 여러 단체가 결성되어 활발히 활동했으나 일제가 보안법을 공포하는 등 탄압을 가하자 합법적인 활동이 어려워졌다. 이에 계몽 운동은 자연히 비밀 결사화 했는데, 그 결과 조직된 단체가 신민회였다. 그러나 계몽 운동은 대중 속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면서 국권 회복 운동으로서는 일정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고등 한국사 <근대 국가 수립 운동과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일제의 국권 침탈과 국권 수호 운동 / 브리태니커

    농촌계몽운동 [農村啓蒙運動] - 일제강점기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한 농민·농촌 계발운동.

    이 운동은 한말 계몽운동에 역사적 맥락을 두고 있다. 한말 문명개화론자 들이 중심이 된 식산과 교육을 통한 실력양성운동, 문화운동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방안으로 계승되었다. 농촌계몽운동은 특히 3·1운동 후 일제의 문화정책(민족분열정책) 실시와 더불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농촌피폐의 원인으로 자연재해로 인한 한발, 홍수, 일제의 농업정책의 오류로 인해 발생된 곡가폭락, 공과금 부담의 과중, 농자금의 핍박, 고리대, 소작제도의 모순, 농촌지도자의 결핍, 농민들의 사치풍조, 음주 등을 들었다. 이러한 분석에 입각해 당시 사회주의자들이 주장했던 토지혁명과 같은 것은 '공상론' 이라 규정하고, 현실적으로 가능한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농촌문제의 대책을 우리 스스로가 해결할 것과 위정당국자가 해결할 것으로 나누고, 위정자가 해결해야 할 근본문제는 토지분배문제로 이는 논의조차 할 수 없으므로 고식적인 현상유지책이나마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들의 농촌구제대책은 농민교화, 민풍개량, 소비조합 경영, 위생상태 개선 등으로 요약되며, 농촌교화·농민계몽의 주도층을 학생·청년층 또는 인텔리겐치아 층으로 설정하여 실시했다.

    농촌 계몽운동은 일제강점기 조선 농촌사회의 현실적 문제점과 폐해, 그리고 농민의식의 향상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 민족주의 계열의 농촌운동이었다. 주로 협동조합운동·농촌교육활동 등을 통한 농촌경제의 향상과 농민사상의 계몽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민족교육운동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부터 농업공황 타개책의 하나였던 일제의 관제운동인 농촌진흥운동의 실시와 일제의 탄압으로 일체의 합법적인 농촌계몽운동 조직의 활동은 중단되고 말았다. / 브리태니커

    한국 근현대사 사전

    국민 계몽운동[國民啓蒙運動] - 1960년 6월 10일 서울대 학생회의 결의를 시발로 추진된 학생운동 차원의 대국민 계몽운동으로, 서울 문리대의 <농촌으로 가기운동> 연세대의 <지역사회 개발대> 활동 등도 이 범주에 속한다. 4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학생들은 이승만 독재정권의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근본적으로 국민의 무지 때문이라고 판단, 이를 계몽하기로 결의하고 7월 6일 서울대 국민계몽대를 결성하여 8일부터 11일 사이에 7천여 명을 전국 각지로 파견했다. 국민계몽대는 △ 4월 혁명정신의 보급 △ 국민 정치의식과 주권의식의 고양 △ 경제복지의 추구 △ 신생활체제의 수립 △ 민족문화의 창조를 강령으로 하고, 「조국과 민족의 복지달성의 근본은 신생활, 신 도덕에 있으며…조국과 민족의 장래가 영원히 빈곤과 무지의 심해 속에 버림받지 않으려면 그 근본방책이 4월 혁명정신의 완수와 국민계몽에 있음을 확인하고 여기에 국면계몽대를 조직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열의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농촌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데다 <국민일반의 정치의식을 고양>하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도 없이 의욕만 앞선 나머지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했다. 국민 계몽운동은 당시 학생운동 주체의 의식적 한계를 보여주는 것으로서, 이들은 혁명의 사후처리를 과도정부에 맡긴 채, 국민 계몽운동을 혁명의 연장으로 생각하고 이에 뛰어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국민계몽운동 [國民啓蒙運動] (한국근현대사사전, 2005.9.10, 가람기획)

    ■ 계몽편(啓蒙篇) - 편찬자(編纂者) 미상(未詳)의 우리나라 옛 시대(時代) 초학 교재(敎材)로, 天(천)ㆍ地(지)ㆍ物(물)ㆍ人(인)의 4개편으로 논리정연하게 구성되어 있어 어린이들이 한문 문장을 쉽게 익힐 수 있는 입문서로서 널리 쓰였음 / 브리태니커

    ■ 역학계몽(易學啓蒙) -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주희(朱熹 : 1130~1200)가 초학자를 위해 지은 〈주역〉의 해설서로 4권으로 되어 있다. 1186년에 완성했다. 내용은 4부분으로 나뉜다. 〈본도서 本圖書〉는 〈하도낙서 河圖洛書〉에 대한 수리적인 설명이다. 〈원괘화 原卦畵〉는 태극·양의(兩儀)·사상(四象)·팔괘(八卦)에 대한 설명이며 〈명시책 明蓍策〉은 서법(筮法), 〈고변점 考變占〉은 각 괘에 관한 설명이다. 주희는 〈주역본의〉 12권을 통해 점서와 의리를 융합하여 〈주역〉의 본의를 밝히려 했으며, 〈역학계몽〉에서는 역의 도식, 점서에 대한 수리적 설명에 주력했다. 이 책은 조선에서도 일찍이 간행되어 유학자들 사이에 널리 읽히고 연구되었으며 역대 왕들이 강독했다. 본래 주희의 책은 상당히 난해하여 여러 종류의 해석서가 편찬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송나라 학자 호방평(胡方平)이 지은 〈역학계몽통석 易學啓蒙通釋〉과 명나라 때 편찬된 〈역학계몽부주 易學啓蒙附註〉가 있다. 한국에서도 1465년(세조 11) 세조가 최항(崔恒) 등에게 명하여 편찬한 〈역학계몽요해 易學啓蒙要解〉가 선구적인 것이며, 1557년(명종 12) 이황(李滉)이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해설한 〈계몽전의 啓蒙傳疑〉가 있다. 1772년(영조 48)에는 당시 세손이던 정조가 서명응(徐命應)에게 명하여 편찬한 〈역학계몽집전 易學啓蒙集箋〉(4권 2책, 목활자본)이 간행되었다. 이것은 〈역학계몽요해〉·〈역학계몽전의〉의 체제가 서로 달라, 보기가 불편하다 하여 두 책의 내용을 검토하여 합편한 것이다. 또한 부주는 문의(文義)를 주로하고 의상(意象)은 생략했으며 이하 선유(先儒)의 설을 뽑아 주석을 만들고 그 아래 고이(考異)를 붙였다. 당대에는 이 책이 가장 정교한 요해로 평가되었다. 이외 편자 미상의 〈역학계몽단석 易學啓蒙段釋〉(4책, 필사본)·〈역학계몽복역 易學啓蒙覆繹〉(6권 4책, 목판본)이 전한다. 〈역학계몽복역〉은 김해(金楷)가 편찬한 것으로 9대손 찬규(瓚圭)가 1899년에 간행했다. 이는 중국과 한국학자들의 설을 인용하고 저자의 의견도 가미하여 해설한 책이나 미완성 본으로 〈고점 考占〉 편이 빠져 있다. / 브리태니커

    ■ 역학계몽요해(易學啓蒙要解) - 1465년(세조 11) 문신 최항(崔恒)·한계희(韓繼禧)가 주희(朱熹)의 〈역학계몽〉을 왕명으로 교정·해설한 책으로 4권 2책. 목활자본. 권두에는 세조와 주희의 서문이, 권말에는 최항의 발문이 있다. 발문에는 이 책을 〈주역 周易〉을 배우는 초보자를 위해 만들었다는 저작경위를 밝혔다. 권1은 본도서(本圖書), 권2는 원괘(原卦), 권3은 명시책(明蓍策), 권4는 고변점(考變占), 부도로 옥제호씨통석부도(玉齊胡氏通釋附圖)·복희칙하도이작역도(伏羲則河圖以作易圖)·대우칙낙서이작범도(大禹則洛書以作範圖) 등과 부록인 서의(筮儀)가 실려 있다. 해설은 원문에다 대주(大註)와 소주(小註) 및 보해(補解)를 이용해 붙였다. 내용은 사물체제를 설명하는 오행의 원리와 〈하도낙서 河圖落書〉에서 유래한 유교의 수리(數理) 및 각 괘의 원리를 설명한 것이다. 〈서의〉에는 시점(蓍占)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실었다. 또한 〈옥제호씨통석부도〉는 〈성리대전〉을 편찬한 명(明)의 호광(胡廣)이 해설한 그림이며, 그밖에 소옹(邵雍)·주희 등의 자연에 대한 이해를 알 수 있는 천지사상도(天地四象圖)도 실었다. 이 책은 세조대의 여러 학문적인 정리작업과정의 소산이며, 이황(李滉) 등에 영향을 주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 브리태니커

    ■ 계몽도설(啓蒙圖說) - 조선 후기의 학자 서명응(徐命膺:1716~87)이 주희(朱熹)의 〈역학계몽 易學啓蒙〉을 그림으로 알기 쉽게 해설한 책으로, 6권 3책. 목판본. 1772년(영조 48)에 간행되었다. 정조가 왕세손(王世孫)으로 있을 때 저자가 〈역학계몽〉을 강의했는데, 여러 번 물음을 받게 되자 틈 나는 대로 〈역학계몽〉을 부연하여 89도(圖)를 만들고 해설을 붙여서 정조가 역학을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하도선모진체도 河圖旋毛眞體圖〉에서는 하도의 기본수의 위치, 수(數), 생성원리를 밝히고 〈선천사도 先天四圖〉에서는 음양·오행·사상(四象)과 팔괘(八卦)의 변화를 설명하면서 법(法)·상(象)·이(理)·수(數)의 근원을 밝혔다. 〈방위내외사정도 方位內外四正圖〉에서는 64괘의 방위를 배치하고 64괘가 사방에 차지하는 비중을 상세히 설명하였다. 〈선천변위후천도 先天變爲後天圖〉에서는 복희(伏羲)씨 때 만들어진 팔괘의 방위가 주나라 문왕 때 바뀌는 과정과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책은 역학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있어서 오늘날에도 역학을 연구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 브리태니커

    ■ 계몽전의(啓蒙傳疑) -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인 이황(1501~70)이 주희(朱熹)의 〈역학계몽 易學啓蒙〉에 해석을 붙인 책으로, 1책. 목판본. 이 책만으로는 편찬연대를 알 수 없으나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도서해제 朝鮮圖書解題〉에 따르면 1557년(명종 12)에 책이 완성되어 1600년(선조 33)에 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저자는 자서(自序)에 "수리(修理)에 관한 학문은 오묘하여 쉽게 연구할 수 없으나 은오(隱奧)한 뜻에 가서는 밝히지 않을 수 없고 전인(傳印)의 잘못에 대해서도 바로잡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생각하다가 맞아 떨어지는 것이 있고 옛 것을 상고하여 증거 있는 것은 그대로 적어서 고열(考閱)의 편리를 도모했다"고 하였다. 본문에서는 〈역학계몽〉과 한방기(韓邦奇)의 〈계몽의견 啓蒙意見〉에서 각자의 설(說)을 먼저 싣고 자기 의견을 덧붙였다. 규장각·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브리태니커

    ■ 국어국문학 자료사전

    계몽사상[啓蒙思想; philosophy of the enlightenment] -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알고, 현존질서를 타파하여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문화운동으로, 계몽주의라고도 한다. 18세기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영국, 독일 등지에서 일어났다. 계몽이란 민중의 몽매함을 이성에 따라 깨우친다는 의미이고, 그 본질적 성격은 비판적 정신과 회의와 부정의 정신에서 찾을 수 있으며, 가르친다는 것보다 그 원인이 되는 것을 철저히 비판 · 파괴하는 것이 곧 진리의 길로 통한다는 생각이 프랑스의 계몽사상가에게 특히 강했다. P. H. 돌바흐로 대표되는 종교비판, E. B. 콩디야크의 형이상학비판, 디드로와 루소의 강렬한 사회비판 등 기존체제와 고정적인 관념을 가차 없이 비판하고 유동화하며 상대화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유물론 · 감각론 등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계몽사상 [philosophy of the enlightenment, 啓蒙思想]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 계몽시대(啓蒙時代; age of Enlightenment) - 프랑스 혁명을 지도했던 지적인 동요의 시기인데, 이것은 사상과 사회적 조직의 전통적 양식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특징되며, 사회적 관행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이성을 유일하게 신뢰함으로써 그것들을 절대시하고자 했다. 많은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이러한 발전과 연결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볼테르(Voltaire, 1694~1778), 몽테스키외(Montesquieu), 홀바하(Holbach, 1723~89), 엘베티우스(Helvétius, 1715~71), 디드로(Diderot, 1715~71), 루소(Rousseau) 등이 있다. 이 운동은 단순히 프랑스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수많은 해외의 다른 사상가들을 포함했는데, 아담 퍼거슨(Adam Ferguson)과 존 밀러(John Millar)와 같은 스코틀랜드 계몽사상가들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들의 저작은 특히 사회학적이다. 인간사에 있어서의 이성의 중요성에 대해 일반적으로 견해가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사상가들 간에는 주요한 견해차가 존재한다. 볼테르는 자연권이라는 영국의 자유주의적 교의를 대중화했다. 홀바하와 엘베티우스는 이 교의를 받아들여 더욱더 공리주의와 대의정부를 주장했다. 한편 루소의 사회계약개념은 프랑스 혁명에서 실현되어 국가와 사회에 대한 총체론적 개념으로 이끌었다. 대체로 많은 계몽사상들은 피상적이며 적절한 경험적 연구의 기초가 부족한 것으로 보이나, 무엇보다도 인간의 진보와 이성의 궁극적인 승리에 대한 과신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계몽시대는 전통사상과 근대사상 사이에, 그리고 전통적 사회조직형태와 근대적 사회조직형태 사이의 과도적 단계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 출처; 사회학사전, 고영복 편, 2000.10.30, 사회문화연구소 / [네이버 지식백과] 계몽시대 [age of Enlightenment] (사회학사전, 2000.10.30, 사회문화연구소)

    ■ 계몽주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계몽주의(啓蒙主義)란 17, 18세기에 유럽과 신세계를 휩쓴 정치, 사회, 철학, 과학 이론 등에서 광범하게 일어난 사회 진보적, 지적 사상운동으로, 계몽사상이라고도 부른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미신적인 면과 독단적인 해석에 대해 반란하였다. 대신 실제적인 도덕을 지향하였으며 형이상학보다는 상식, 경험, 과학을, 권위주의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특권보다는 평등한 권리와 교육을 지향하였다. 이 계몽주의는 1760년경 이후 강력히 대두되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은 이성으로 적법성을 판단할 수 있으며, 이성은 권위의 요소이자 권위를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주장했다. 이 이성은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원리나 자명한 법칙을 발견할 수 있게 했으며 진보를 확신토록 했다.

    독일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등지에서 계몽주의 운동이 거의 동시에 이런 움직임이 일어났지만, 대서양 주변 국가에서 일어난 각종 혁명을 통해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러시아,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런 움직임을 따랐으며, 라틴 아메리카 역시 아이티 혁명을 통해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미국 독립 선언과 미국 권리 장전, 프랑스 인권 선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제정한 1791년 5월 3일 헌법은 계몽사상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졌다.

    "계몽주의" 또는 "계몽주의 시대"라는 용어는 어떤 하나의 운동이나 사상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에 속하는 사상가들은 서로 충돌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고,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계몽주의는 어떤 사상의 집합체라기보다는 가치의 집합체에 더 가까웠다. 전통적 관습, 의례, 도덕에 대한 비판적 사고가 계몽주의의 핵심이었다. 따라서 여러 대립하는 철학 사이에도 비슷한 부분이 상당했다. 심지어 계몽주의에 반대했던 철학자들까지 계몽주의의 일부로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이성의 시기"는 보통 계몽주의 사상의 전주곡으로 여겨진다.

    계몽주의는 영어; Enlightenment, 프랑스어: Lumières, 독일어: Aufklärung)를 번역한 한자어 계몽(啓蒙)이란 인간의 어리석음을 깨우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Enlightenment 사상의 다만 한 부분을 대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자어 번역이 대개 그렇 듯, 이 번역은 한국어로 뚜렷한 뜻을 전달해 주고 있지는 않다. 한편, 칸트는 인간이 미성숙으로부터 벗어나 타인의 지도없이 이성적으로 사는 것 또는 미완성 상태에서 완성태로 나아가는 것을 계몽이라 했다

    17,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이른바 계몽사상은 인간이 이룩한 문화와 문명에 고취되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을 바탕으로 문화와 문명을 진보, 발달시키려는 사상 또는 그러한 행동을 포함하는 적극적인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성 혹은 이성의 힘으로 자연과 인간관계, 사회와 정치문제를 객관적으로 관찰해서 명료하고 자명한 보편적 진리를 발견하고 낙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시대정신이라고 볼 수 있다. 계몽사상은 이와 같은 정신으로 인간의 존엄과 평등, 자유권을 강조함으로써 유럽의 중세 시대를 지배한 전제군주와 종교와 신학의 독단 교시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교회와 국가를 비판함으로써 지나친 권위를 상당부분 낮추었다. 신학자들이 신성을 수정한 것과 같이 정치가들도 국민과 정부의 관계에 대한 생각을 바꾸었다.

    계몽사상의 의의는 국가·정부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바꾸었다. 정부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라 국민의 권리를 보장하고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는 민중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인간의 권리와 행복을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는 당연히 국민의 동의를 받지 않고는 존재할 수없다. 국가가 그 책임을 다하지 않고 민의를 배반한다면 민중은 혁명적인 저항권을 발동해 국가를 교체, 폐지할 수 있다. 이런 연유로 계몽사상은 17, 18세기 시민혁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것이다. 이 노력의 첫 장을 연 철학자로는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 존 로크를 손꼽을 수 있다. 이후 계몽주의는 프랑스와 독일에서 백과전서파 (디드로, 볼테르),루소와 칸트에 영향을 주어 이후 사상들의 출현에 기여했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계몽주의(啓蒙主義 /(英) enlightenment / (프) Siècle de Lumières (독) Aufklärung.)란 철학 용어로, 일반적으로는 지식수준이 낮거나 의식이 덜 깬 사람들을 깨우쳐 인류의 보편적 진보를 꾀하려 한 이념의 하나이다. 17세기 후반에 시작되어 18세기 프랑스에서 전성기를 이루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신이나 교회의 권위에 바탕을 둔 특권이나 제도에 반대하고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제창하였다. 계몽주의는 교회의 권위와 구시대의 권위에 반대하여 일어났다. 17·18세기 유럽의 지적(知的) 운동으로, 신(神)·이성(理性)·자연·인간 등의 개념을 하나의 세계관으로 통합한 사상운동으로서 사람들 사이에서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예술·철학·정치에 혁명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계몽주의의 핵심은 이성중심이며, 이성의 힘에 의해 인간은 우주를 이해하고 자신의 상황을 개선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지식·자유·행복이 합리적 인간의 목표라고 보았다. 이성중심 사상을 맨 처음 탐구한 사람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로서, 그들은 자연의 질서정연한 규칙성에 지적인 정신이 작용한다고 생각했다. 로마는 자연의 합리적인 질서와 자연법사상을 포함해 그리스 문화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이고 보존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혼란기 동안 개인의 구원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고, 이는 결국 그리스도교의 승리로 연결되었다.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점차 그들이 물려받은 그리스-로마 유산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절정을 이룬 '스콜라 철학'이라는 사상체계는 사물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도구로서의 이성을 부활시켰으나 동시에 이성을 영적(靈的) 계시와 그리스도교의 계시된 진리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았다. 중세 유럽에서 완전한 것으로 여겨졌던 그리스도교의 지적·정치적 체계는 인간중심주의 운동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 의해 신랄한 공격을 받게 되었다. 인간중심주의 사상은 다시 프랜시스 베이컨, 코페르니쿠스,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경험적 과학과 르네 데카르트, G. W. 라이프니츠, 뉴턴의 수학적 엄정성을 낳았다. / 브리태니커와 관련자료 종합정리.

    르네상스는 고전문화의 가치를 재발견했으며 그 과정에서 인간을 창조적 존재로 이해하는 인식이 부활되었다.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었으며 장기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쳤다. 베이컨·데카르트와 마찬가지로 루터 역시 진리에 이르는 길은 인간의 이성을 적용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지금까지 프톨레마이오스가 과학에서, 교회가 영적인 문제에서 지녀왔던 권위는 이제 해방된 인간 정신의 검토대상이 되었다. 어떤 문제에 이성을 적절히 적용했는가는 그것이 정확한 적용인가, 즉 타당성을 보장하는 추론 방법론이 어느 정도 발전되어 있는가에 달려 있다. 이러한 방법론은 과학과 수학에서 두드러지게 발전했으며 이 분야에서 이루어진 귀납·연역 논법을 바탕으로 광범위한 새로운 우주관이 탄생했다(→ 과학사). 특히 뉴턴이 행성의 운동 법칙을 몇 가지 수학공식으로 정리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인간의 지식획득 능력에 대해 커져가고 있던 믿음은 더욱 굳어졌다. 우주를 몇 가지 간단한 그리고 발견 가능한 법칙에 지배받는 장치로 이해하는 우주관은 그리스도교의 중심사상인 인격·신과 개인의 구원이라는 개념에 충격적인 영향을 끼쳤다.

    결국 이성에 근거하여 사물을 보는 움직임은 종교에도 적용되었다. 자연적, 즉 합리적 종교를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로 이신론(理神論)이 나왔다(→ 신의 존재, 자연신학). 이신론은 비록 조직적인 종파도 운동도 아니었지만 약 2세기 동안 특히 영국과 프랑스에서 그리스도교와 충돌했다. 이신론자들은 어떤 종교적 진리도 만족하게 생각지 않았으며 진리는 모든 합리적 존재에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그들은 우주라는 기계를 만들고 움직이는 유일신이 존재하고, 이 신이 어떤 상벌체계를 주관하며, 인간은 덕(德)과 경건을 실행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성을 종교에 적용한 결과 회의론·무신론(無神論)·유물론 등 이신론자들의 자연종교를 넘어서는 급진적인 사상들이 나왔다.

    계몽주의는 처음으로 종교에서 떨어져 나온 심리학, 윤리학이라는 근대적인 이론을 탄생시켰다(→ 사회계약). 존 로크는 태어날 때 인간의 마음은 백지상태(tabula rasa)이기 때문에 각 개인의 세계에 대한 경험에 따라 빈 곳이 채워지고 개성이 창조된다고 했다. 따라서 선(善)·원죄(原罪) 등 원래부터 존재한다고 여겨져왔던 속성은 현실성이 없다고 보았다. 심지어 토머스 홉스는 인간은 오로지 자신의 쾌락과 고통에만 관심이 있고 여기에 의해서만 움직인다고 쓰고 있다. 인간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다만 생존과 쾌락의 극대화와 생존에만 관심이 있다는 이러한 생각은 급진적인 정치이론을 낳았다. 과거에는 인간이 세운 국가는 신의 나라를 본뜬 것이며 영원한 질서를 지상에서 실현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이제 그것은 자연권과 각자의 이익을 주장하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진 상호 유익한 계약관계로 여겨졌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상황이 사회를 사회계약으로 보는 견해와는 너무 달랐으므로 계몽주의는 비판과 개혁, 그리고 마침내는 혁명을 지향하게 되었다. 영국의 로크와 벤덤, 프랑스의 몽테스키외와 볼테르, 미국의 토머스 제퍼슨은 모두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국가를 비판하면서 자연권에 기초를 두고 정치적 민주주의 기능을 하는 좀더 높은 형태의 사회조직이라는 국가의 청사진을 그렸다. 이런 강력한 사상은 영국에서 개혁을,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혁명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계몽주의 운동이 진행될수록 그 자체에 쇠퇴 요인이 있음이 분명해졌다. 이신론은 점차 위안과 구원을 찾는 사람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게 되었다. 또 추상적인 이성을 너무 강조함에 따라 반대되는 정신이 부각되었고 사람들은 뒤에 낭만주의로 알려진 문화운동에서 보여지듯이 흥분과 감동의 세계를 찾았다. 프랑스 혁명을 뒤이은 공포시대는 과연 인간이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갖게 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는 일반적으로 진보의 역사라고 하는 계몽주의 특유의 낙관론은 계속 살아남아 계몽주의의 가장 지속적인 유산이 되었다.→ 유럽의 역사와 문화. 유의어로. 계몽사상 (啓蒙思想) , 계몽 사조 (啓蒙思潮) , 계몽 철학 (啓蒙哲學) 참고어 몽매주의 (蒙昧主義) / 브리태니커

    ■ 유럽 각국의 계몽사상

    프랑스의 계몽사상 - 프랑스의 계몽사상은 프랑스 혁명 이전에 시작되었다. 계몽사상은 프랑스 혁명의 계기가 되었으며 민중들에게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은 하늘이 정한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 깨부수어야 한다는 강한 사회개혁 의지를 심어주었다. 민중들의 이러한 사회의식은 프랑스 혁명의 원천이 되었으며, 지금도 민중들이 그들을 억압하는 권력에 저항할 수 있다는 저항권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이 헌법에 명시함으로써 존중되고 있다.

    영국의 계몽사상 - 영국의 계몽주의 사상에서 특이한 점은 혈통주의에 따른 "선택받은 자"에 대한 점이 포함되어 있다. 고전주의의 계층 혹은 직위에 따라 개인적인 능력 또한 세습된다고 말한다.

    독일의 계몽사상 - 독일은 당시 시민사회의 발달이 미미했기에, 프랑스의 계몽사상의 활발한 전개에 영향을 받았는데, 프랑스와는 다르게 독자적으로 발달했다는 특징이 있다.

    계몽주의의 영향 - 계몽주의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에서 벗어난 자유주의 신학에 영향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책'(The book of God)이라고 불리던 성서에 대한 자유로운 비평의 토양이 되었다.

    대표적 계몽사상가

    토마스 홉스 (1588년 ~ 1679년)

    존 로크 (1632년 - 1704년)

    몽테스키외 (1689년 ~ 1755년)

    볼테르 (1694년 ~ 1778년)

    장 자크 루소 (1712년 ~ 1778년)

    디드로 (1713년 ~ 1784년)

    장 르 롱 달랑베르 (1717년 ~ 1783년)

    이마누엘 칸트 (1724년 ~ 1804년)

    니콜라 드 콩도르세 (1743년 ~ 1794년)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1770년 ~ 1831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2)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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