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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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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김 용 천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061회   작성일Date 13-09-06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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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4)

    6. 계몽주의 시대의 역사학

    과거를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인간의 활동에 대한 기록을 정확하고 포괄적으로 복원하려는 학문으로,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과 종교 논쟁가들이 역사학에 부여한 추진력은 18세기 초에 거의 다 소진되었다. 질적 수준에서 판단할 때 18세기는 대체로 역사가들이 성공을 거둔 시대가 아니었지만, 과거의 역사학이 갖고 있던 몇 가지 결함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역사저술을 발표하는 것이 과거보다 더 안전해지고 쉬워졌다. 이처럼 자유가 많아지지 않았다면 18세기의 전형인 급진적인 '철학적' 역사학은 탄생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저술이 그때까지도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교회의 적대적인 내용인 나폴리 역사(1723)의 저자 피에트로 잔노네는 종교 재판소의 추적을 받고 12년 동안 투옥되어 있다가 1748년에 감옥에서 죽었다. 이탈리아의 위대한 역사가로서 잔노네를 도와주려고 애쓴 루도비토 무라토리조차도 저서의 일부를 판금당할 위험에 빠졌지만, 교황 베네딕투스 14세가 직접 개입해 위기를 모면했다. 프랑스에서는 1714년 니콜라 프레레가 프랑크족은 원래 게르만 부족들의 연합체에 불과하며 그보다 뛰어난 조상들의 후손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루이 14세의 노여움을 사서 바스티유 감옥에 갇혔다. 루이의 후계자들 시대에는 그처럼 터무니없는 일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지만, 교회나 정부를 비판한 사람들은 자주 곤경에 빠졌다. 반면에 영국·네덜란드·스위스 및 독일의 일부지방은 대부분의 저술을 마음놓고 발표할 수 있는 안전한 오아시스였다.

    18세기에 유럽의 역사학이 진정으로 새로워진 것은 그것이 자연과학의 발전에 자극을 받았고, 인간사회의 발전을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에 기초를 두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역사학의 주요특징들은 유럽 이외의 다른 대륙에 대한 관심, 모든 인류 역사는 하나라는 의식, 특정한 시대나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을 대담하게 일반화할 수 있는 능력, 인류 문명의 진보와 관련된 주제에 대한 선호 등이었다. 프랑스의 콩도르세는 1794년에 쓴 인간정신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개요에서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 전반을 9단계로 나누었는데, 위대한 발명이나 지리적 발견이 이루어진 해를 각 시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 '합리주의적'인 역사학의 결점은 자주 지적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사상가들이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하나는 각 사회를 응집력있는 개별단위로 보면서 각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생활의 다양한 측면이 서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론을 체계화시켰다는 것이다. 나폴리의 가톨릭교도인 잠바티스타 비코는 사회의 한 단계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작용하는 복잡한 영향력을 동시대인들보다 훨씬 예민하게 의식했다. 그는 로마 역사의 초기 단계에 이루어진 이런 전환을 재구성하면서 각 시대 사이에 뚜렷한 경계선을 긋지 않았다. 같은 나폴리 사람인 잔노네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로마법을 공부한 이유는 로마 법 자체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로마 제국의 사회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잔노네의 영향을 많이 받은 프랑스의 철학자 몽테스키외는 사실상 역사가는 아니었지만 역사적 현실을 인식하는 날카로운 통찰력을 보여주었다. 그가 쓴 〈법의 정신 De l'esprit des lois〉(1748)은 다른 어느 책보다도 그의 동시대인들로 하여금 각 사회를 이루고 있는 복잡한 요소들을 심사숙고하게 만들었다. 에드워드 기번은 이 책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이 어떠한 역사를 써야 할지를 결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사회제도 내에서 사회제도와 결부되며, 또 그것에 의해 설명되는 역사'였다.

    기번은 '철학적' 역사학의 걸작인 〈로마 제국 쇠망사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1776~88)에서 이 꿈을 실현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인류의 진보라는 문제에 골몰해 있었다. 인류가 끊임없이 진보할 수 있다는 믿음은 18세기 중엽에 프랑스의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와 스코틀랜드의 애덤 스미스가 공개적으로 밝혔는데, 이들이 서로 관계를 가진 것 같지는 않다. 기번은 이들 두 사상가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의 저서를 읽었고 그들을 알고 있었다. 진보에 대한 믿음은 인류 역사 전반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목적을 부여해줄 것이었다. 기번은 로마 제국이 쇠퇴한 원인을 해명함으로써, 그가 살고 있던 당시의 유럽이 로마 제국보다 훨씬 높은 발전단계에 이르러 있으며, 고대세계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18세기에 역사학은 대학과는 거의 관계를 맺지 않았다. 따라서 독일의 괴팅겐 같은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역사학파가 끊이지 않고 발전할 수 없었다. 18세기 역사가들의 가장 중요한 업적 가운데 일부는 동시대인들보다 오히려 19세기의 후계자들에게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기번은 학구적 골동품을 수집한 연구가들의 방대한 자료를 '합리주의' 역사에 활용하는 데 선구자였다.

    7. 유럽 군주제 시대의 계몽주의

    유라시아 대륙 서쪽에 돌출한 반도와 도서로 이루어진 대륙의 역사와 문화로, 계몽주의는 운동인 동시에 사상이었다. 이 용어는 유럽 지성사의 한 단계를 나타내지만 개혁안을 뚜렷이 제시하는 데에도 이바지하고 있다.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공통된 확신에서 영감을 얻은 영향력 있는 지식인들은 개혁안에서 특정한 비판대상과 행동계획을 밝혔다. 세계 문화사적 관점에서 볼 때, 17세기 프랑스인들이 문화적 우월성의 토대를 놓을 수 있었고 계몽주의 철학자들에게 18세기 유럽의 교사 노릇을 하도록 용기를 불어넣어준 것은 프랑스어가 유럽에서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철학의 영역이 종파적 또는 민족적 이해관계보다 더 상위에 있다는 생각은 사상전파에 도움을 주었다.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2가지 유산 가운데 하나인 고전을 거부하거나 재해석하고 그 나머지 하나인 그리스도교를 맹렬히 공격함으로써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지배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들은 고전 세계에 친밀감을 느꼈고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업적을 찬양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리스인들은 자연 속에서 규칙성을 발견했고 자연을 지배하는 원리인 이성적 정신을 발견했으며,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새로운 질서와 생활방식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했다. 교회법과 로마법은 대부분 로마인들이 만든 법률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일부 계몽사상가들은 고전작가들의 사상과 언어에 몰두하면서도 신앙에서는 혼란을 느꼈고, 신이교주의의 형태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대신할 대안을 찾았다. 도덕성은 이성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문학과 예술 및 건축에는 교육받은 사람들의 취향에 알맞도록 새로운 규칙과 기준이 이미 세워지고 있었다.

    태양 중심적인 견해를 지닌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의 새로운 천문학이 받아들여지자 종교적 믿음과 도덕적 원칙 및 전통적 자연관 사이의 확고한 관계가 흔들렸다(→ 색인 : 과학사). 이 과정에서 수학이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르네 데카르트의 말을 빌리면, 수학은 "양과 척도에 대해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일반과학이며 어떤 응용과학으로부터도 영향을 받지 않는 것으로 여겨진다." 수학자들은 추론과 합리적 확실성 사이의 간격을 메울 수 있었다. 그리하여 요하네스 케플러는 원뿔의 단면을 연구하다가 행성의 운행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다른 길을 따라 나아갔다. 새로운 과학은 여러 사람이 협력하는 조직적 실험에 바탕을 두어야 하며 실험 결과는 체계적으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색인 : 과학적 방법). 연구를 통해 우선 충분한 자료를 모은 다음, 그 자료를 토대로 귀납적 추론을 거쳐야만 비로소 일반법칙을 확립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과학적 노력의 두 기둥인 합리론과 경험론이 확립되었다. 계몽된 사람들은 이 두 기둥 사이에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지도의 밑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존 로크는 철학을 순수한 비판적 연구 대상으로 삼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철학은 그 자체의 독특한 문제를 가지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다른 학문과 비슷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가 쓴 〈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은 "신념·의견·찬성의 근거 및 그 정도와 더불어, 인간 지식의 원형과 확실성 및 한계를 조사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라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다. 인간의 정신은 경험에서 지식을 얻고 판단 자료를 끌어낸다고 로크는 생각했다. 인간은 타고난 생득관념을 가질 수 있다는 데카르트의 견해와는 달리, 로크의 이론체계에서는 외부 사물에 대한 관찰과 감각기관이 제공한 근거에 대한 반성을 통해 정신에 새겨진 개념들이 인간의 지식을 이루고 있다. 도덕적 가치는 쾌락이나 고통의 감각에서 나온다고 로크는 주장했다. 로크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 신앙을 주로 환경의 산물로 간주했는데, 이것은 종교적 관용에 대한 새로운 논거를 제공해 주었다. 프랑스의 사상가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1762)에서 자연법과 폭력은 둘 다 합법적 권력의 토대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각자가 모두를 위해 헌신하지만 누구를 위해서도 자신을 희생하지 않는' 사회, 즉 인간의 타고난 자유와 안전을 둘 다 보장해주는 사회를 추구했다. 그는 국가의 완전한 주권을 옹호했는데, 이것은 국민 전체의 의지가 국가를 이끌어 가리라는 가정에 바탕을 둔 정치적 신조였다. 루소가 생각한 좋은 사회는 민주적이고 평등한 공화국이었다. 그의 달변은 대서양 양쪽의 민감한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이마누엘 칸트의 엄격한 합리주의는 계몽주의의 종말을 나타냈다. 이 독일 철학자가 죽기 전에 이미 낭만적 관념론자들은 '빛의 세기'(siècle de lumière)의 정신을 거부하고 경멸했다. 인간은 올바르고 정당한 것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다는 계몽주의자들의 확신은 혁명의 공포와 독재로부터 조롱을 받았고, 계몽주의자들의 합리론은 자기만족에 빠져 있거나 완전히 비인간적인 것으로 비난받았다. 계몽주의의 업적조차도 19세기의 호전적 민족주의 때문에 결정적으로 위태로워졌다. 그러나 계몽주의의 대의는 유럽 사회에 끈질기게 이어져 내려온 자유주의와 관용 및 법률에 대한 존중 속에 대부분 살아남았다.

    8.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비판대상으로 상정한 ‘계몽’은 우리가 흔히 유럽 근대사상사에서 배우곤 하는 계몽의 이념이 아니며 계몽주의도 아니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이전의 사고방식과 구분되는 사고방식 더 나아가 ‘탈신화화로부터 비롯된 사고의 진행’을 계몽으로 상정했다. 탈마법화로서의 계몽은 환상인 신화를 해체하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우기 위한 지식을 확립하려는 사고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사고활동으로만 신화를 해체할 수 있고, 상상력을 지식으로 대체할 수 있기 때문에 신화를 환상이 아니라 사실롤 받아들이는 사고로부터 벗어나 ‘지배를 가능하게 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사고방식으로 바꾸는 것을 계몽으로 여긴 것이다.

    “세계의 탈마법화는 애니미즘을 뿌리 뽑는 것이다” 애니미즘은 신화의 근본원리인 주관적인 것을 자연에 투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애니미즘에 의거하여 성립하는 신화는 상상력의 소산에 지나지 않으며 바로 그 때문에 환상이며, 궁극적으로 허위이다. 이런 허위에서 벗어나는 것이 계몽이라고 한다면 탈마법화로서의 계몽은 탈신화화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신화가 대상에 주관을 투사한 데서 비롯된 허위라면, 이를 벗어나는 것 즉 탈신화화는 ‘인식주관’과 ‘단순한 물질로서의 대상’을 분리시킴으로써 이루어진다. 따라서 탈신화화로서의 계몽은 주관과 객관의 분리에 기초한 사고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에 따르면 탈신화화로서의 계몽적 사고란 신화의 원리를 반대로 역전시키면 신화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지만 바로 이렇게 계몽의 원칙을 역전시키는 사고방식으로 신화에 따르는 모든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던 바로 그런 계몽의 구도 자체가 신화라고 한다. 계몽적 사고는 신화를 허위라고 부정하는 데서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이 발생한다. 계몽적 사고는 대상에 주관의 모습을 투사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신화로 간주하여 바로 그 상태를 겨냥하여 탈신화화 과정을 수행하며 이러한 사고과정의 전개가 신화와 계몽의 변증법이다.

    계몽과정은 사고대상을 계속 단지 물질인 것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신화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대상을 물질 이상으로 간주하는 주관적인 것’의 부정에 달려있기 때문에 대상은 단순한 물질 이상일 수 없다. 주관적인 것의 반영을 허위로서 간주하는 계몽적 사고에 의하면 “토템동물, 혼령을 볼 수 있는 사람의 꿈, 그리고 절대적 이념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계몽적 사고를 전개하는 과정은 신화를 ‘대상에 대한 주관적인 것의 투사로서의 허위’로 간주하는 한 모든 대상을 단순한 물질로 만들어 버리는 과정이다. 주관이외의 대상은 단순한 물질이라는 점에서 동질적인 것이 되므로 대상들 간의 차이는 없어진다. 그리고 차이가 고려되지 않을 때 세계는 인간에게 종속되게 한다. 계몽적 사고는 대상을 지배대상으로서의 단순한 물질로 파악하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가 상정한 계몽은 자연지배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탈신화화 과정을 진행하는 사고이다. 신화가 대상에 주관적인 것을 투사한 것으로서 그 자체가 허위라면, 계몽은 대상에서 주관적인 것으로 보이는 것을 전부 제거함으로써 자신이 허위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는 사고이다. 계몽적 사고에 게 있어 대상은 비 주관(非 主觀)으로서 규정되며, 비 주관 즉 객체는 단순한 물질로서 지배대상이 된다. 계몽적 사고는 사고의 주재자인 자신을 제외하고는 인식대상에서 주관적인 것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이며 발견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을 단순히 인식차원에서의 변화뿐만 아니라 지배의 문제와도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계몽은 허위로서의 신화에서 벗어남과 동시에 신화에 의해 얽매여 있었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는 두 차원에서 파악되는 것이다. 또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계몽적 사고의 관심인 ‘자연지배’의 문제를 다루면서 자연지배가 인간 내부 자연의 지배로까지 확정되어 있음을 드러내었다. / 『계몽의 변증법』 TH.W.아도르노 외. 김유동 옮김. 문학과지성사. 서울. 2001.에서

     

    9. 계몽주의를 거부한 낭만주의(浪漫主義; Romanticism).

    낭만주의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중엽까지의 서구 문명에서 문학작품·그림·음악·건축·비평·역사편찬의 특징을 이룬 정신적 자세나 지적 동향으로, 고전주의 일반과 18세기말 신고전주의의 특징을 이루었던 질서·냉정·조화·균형·이상화·합리성 등에 대한 거부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으로 계몽주의와 18세기의 합리주의 및 물질적 유물론 일반에 대한 반발이기도 했다. 낭만주의는 개성·주관·비합리성·상상력·개인·자연스러움·감성·환상·초월성 등을 강조했다. 낭만주의 시대는 ‘실성(失性)의 시대’ 라고 하기도 한다. 주변 세계의 냉혹한 현실주의와 이해타산을 견디지 못하고 미쳐버리는 순수한 주인공들을 양산한 시대라는 의미이다. 비현실적(非現實的)인 기이(奇異)한 환상(幻想)의 세계를 추구하며 그 환상 속에서 인간의 진실을 발견하려 했던 19세기 유럽 낭만주의 예술가들은 광기(狂氣)와 착란(錯亂)을 일상화(日常化)했다.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격정적(激情的) 사랑은 죽음에 대한 열망(熱望)을 낳았고, 애절(哀絶)하게 사랑했던 두 연인의 죽음(동반자살)은 찬란한 사랑의 승리로 간주(看做)되었다. 그래서 노년에 낭만주의 사조를 맞이하게 된 독일의 고전주의 작가 괴테는 ‘낭만주의는 병적인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고 한다. / 브리태니커와 관련 자료 종합.

    낭만주의는 감성적인 세계인식, 유기체적 세계관, 관념주의를 중심내용으로 삼는 하나의 근대적 문예사조로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서 계몽주의와 고전주의의 반동으로 일어나 유럽 전역을 풍기한 문학운동이다. 자연 상태로서의 인간의 ‘선성(善性)과 완전성(完全性)’을 제창하면서 기성의 전통과 문명에 대하여 맹격을 가한 루소(Rousseau,J.J.)를 낭만주의의 시조로 보는 것이 통념화 되어 있다. 어떤 하나의 사조가 사상상의 자각적 개념으로서 한 시대를 지배한 시기를 그 사조의 발생과 성립의 기점으로 볼 때,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의 자연회귀사상을 바탕으로 한 본능적 욕구를 강조한 ‘감정적 인간’에다 낭만주의의 기원을 두어도 무방할 것이다.

    고전주의의 ‘이성적 폭력’ 앞에 질식된 인간의 감정적 욕구와 개성적이며 독창적인, 곧 자연상태로서의 인간의 ‘선성과 완전성’에서 낭만주의의 인간관은 형성된 것이다. ‘낭만적’이란 말은 고대 불어의 ‘로망(roman)’에서 파생되었다고 한다. ‘로망’의 고형(古形)인 ‘로망스(romans)’와 ‘로망(romant)’은 라틴어의 부사 ‘로마니스(romanice)’에서 기원하고 있다. ‘로망(roman)’이란 원래 중세 루스티카 지방의 방언으로 표준어인 라틴어에 대한 각 지방의 향토어(鄕土語)를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라틴어로 쓰인 고급의 문학에 대하여 방언으로 된 각 민족어로 쓴 방언의 문학을 지칭하기도 한다. ‘로망’이 처음에는 ‘기이(奇異)’·‘가공(架空)’·‘경이(驚異)’·‘환상(幻想)’ 등의 의미로 사용되다가 18세기 말을 전환점으로 하여 비로소 고전주의에 대립된 개념으로 ‘낭만주의(romanticism)’란 특정의 문예사조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로맨틱(romantic)’이나 ‘로맨티시즘(romanticism)’은 그 이입(移入)의 초기에는 ‘낭만적(浪漫的)’ 또는 ‘노만적(魯漫的)’과 ‘낭만주의(浪漫主義)’ 또는 ‘노만주의(魯漫主義)’로 각각 번역되고 있었으나, 오늘날은 대부분 ‘낭만적’과 ‘낭만주의’로 사용하고 있다.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초에 걸쳐서 일어난 낭만주의는 유럽의 전역을 풍미한 문학운동으로 그 시대의 철학사상과도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낭만주의는 음악·미술·건축·정치·사회의 전반에 걸쳐서 한때를 풍미한 사조이기도 하다. 따라서 브륀띠에르(Brunetiere, F.)나 허포드(Herford, C.H.) 같은 문학비평가 들도 이미 지적하고 있는바, 낭만주의가 함의하고 있는 다양성 때문에, 그 개념을 정확하고 명쾌하게 정의하기는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낭만주의의 본질과 개념을 명쾌하게 정의하기 위해 수많은 시인과 비평가들이 시도했으나, 아직도 그에 대한 명쾌한 해명은 없다. 낭만주의의 본질과 개념의 이런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먼저 고대에서 현대까지 모든 문학작품에 나타난 낭만성, 이는 문학의 사실성(reality)과 함께 문학의 기본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사실 어느 시대의 문학이건 낭만성과 사실성은 기본적 속성으로 이를 배제하고 문학을 생각할 수 없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쳐서 유럽의 전역에 펼쳐졌던 문학사조로서의 낭만주의는 계몽주의와 고전주의 문학사조의 반동으로 일어난 협의의 개념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이는 고전주의 문학의 속성과 대비하여 서로의 차이점을 밝힘으로써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다.

    고전주의는 계몽주의와 반대의 개념이 아니라, 연속적인 개념으로 그 사상의 바탕을 같이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계몽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고전주의 문학사조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낭만주의와의 대비는 이 두 가지 사조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가 된다. 고전주의가 세계를 이성으로 파악하고 그 존재 자체의 합리성과 감각적 경험에 의해서 실증되지 않는 사실은 신뢰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서 낭만주의는 세계를 인식케 하는 힘은 이성(理性)이 아니라 감성(感性)이고, 세계 그 자체는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감각적 현실을 초월하여 관념의 세계에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다시 말해서 낭만주의는 이성보다는 감성, 합리성보다는 비합리성, 감각성보다는 관념성을 훨씬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낭만주의가 어느 특정의 시대와 민족에 결부된 문예사조로서 성립되어 고전주의와 대비된 것은 독일의 낭만주의 비평가 실레겔(Schlegel) 형제에서 비롯된다. 이전에도 시인과 자연과의 조화와 분리를 주장한 실러(Schiller,F.von.)의 ‘소박성의 시와 감상성의 시’로 나누어 ‘고전적인 것’과 ‘낭만적인 것’을 대비하기도 했다. 형식의 정연한 통일과 조화, 형식과 내용의 균형(均衡), 대상의 유형화(類型化) 등이 고전적 예술의 특징이라면, 이에 반대되는 자유분방한 예술적 속성으로서 낭만주의의 특징을 대비시키고 있다. 이를테면 “고전적인 예술은 한정적인 것을 묘사하고, 낭만적인 예술은 무한을 암시한다.”고 한 하이네(Heine,H.)를 위시하여 ≪명상록 Speculations, 1924)≫의 저자 흄(Hulme,T.E.)은 인간을 우물에 비유하여 낭만주의를 ‘가능성이 가득 찬 저수지(reservoir)’로 보고 고전주의는 ‘유한적이고 고정된 창조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외에도 ≪독일론 De I’Allemagne≫의 저자 스타알 부인(Sta○l,Mme.de)은 ‘고전적인 시’와 ‘낭만적인 시’를 함축적으로 대비하고 있는가 하면, 비어스(Beers,H.A.)는 ≪18세기 낭만주의의 역사≫에서 낭만주의의 대립개념으로서 고전주의뿐만 아니라, 바로 뒤에 대두된 리얼리즘과도 대비하고 있다. 낭만주의의 자유와 무 법칙성, 신기성(新奇性) 등을 고전주의의 법칙성과 전례(典例) 및 관습적(慣習的)인 속성에다, 그리고 낭만주의의 이상(理想)이나 동경(憧憬)과 신비감(神秘感) 등을 리얼리즘의 사실성(事實性)에다 각각 대비하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낭만주의가 사조적인 개념으로서 대두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로 한정해서 고전주의가 추구했던 세계관과 서로 다른 차이점을 추출해 본다면 주관적, 개성적, 공상적, 신비적, 동경적, 과거적, 혁명적, 정열적, 전원적, 원초적 등등과도 같은 인간의 감정적 속성으로 그 개념을 정의할 수 있다.

    한국에 있어서 낭만주의 문학운동은 ‘백조(白潮)’동인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함은 이제까지의 통념으로 되어 있다. 이를테면 ‘폐허(廢墟)’동인과 ‘장미촌(薔薇村)’동인을 거쳐 ‘백조’동인에 이르는 과정에서 한국 낭만주의는 제 나름의 모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낭만주의의 이런 한국적 특질이 엄밀한 의미에서 ‘낭만주의’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양한 서구 문학사조의 동시적 유입과 그것도 각 사조의 핵심적 차원이 아닌 표피적인 일국면의 영향을 받고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영성(零星:수효가 적어서 보잘것없음)하기 이를데 없다. 그것이 결국 감읍벽(感泣癖), 곧 비애와 감상(感傷)의 정조와 병적(病的) 관능(官能) 등의 속성을 띠게 된 것이기도 하다.

    먼저 한국 낭만주의의 특질을 논의하기에 앞서 서구 낭만주의가 우리 나라에 이입되어 오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에서 ‘로맨티시즘’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1907년에 출간된 유승겸 역술의 ≪중등만국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역사교과서(歷史敎科書)에 나타난 용어의 제시일 뿐이지, 그 개념 정의나 구체적인 설명은 없다. 아무래도 ‘로맨틱’이나 ‘로맨티시즘’의 일본화된 용어의 본격적인 도입, 곧 개념의 정의나 본질의 설명이 다소라도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1920년대 전반기를 기다려야만 했다. 김안서(金岸曙:金億)의 <문예사조>를 위시하여 최학송(崔鶴松:崔曙海)·현철(玄哲)·백대진(白大鎭) 등의 서구문학과 사조의 소개와도 같은 극히 제한된 평문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특히 1921년 ≪개벽≫지에 연재된 김안서의 <근대문예>에서 낭만주의와 고전주의를 대비하여 그 차이점을 밝히고 있다. 이를테면 이성과 감성, 현실과 꿈, 객관과 주관, 규제와 자율, 고대와 근대 등으로 두 사조의 속성을 차별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서구의 낭만주의 시인이나 작가 및 작품들의 소개도, 그 이입(移入)의 초기에는 극히 제한적이고 단편적이었다. 작품과 함께 작가의 전기적 국면의 본격적인 소개가 이루어진 낭만주의 시인이나 작가로는 바이론(Byron,G.G.)·위고(Hugo,V.M.)·루소 등이 있을 뿐이다. 바이런은 1910년 10월호 ≪소년≫지에 실린 육당(六堂:崔南善)역의 <해적가 海賊歌 The Corsair)>와 오랑(鰲浪)역의 <대양 The Ocean>을 위시하여 1921년 1월호 ≪신천지≫에 실린 김한규의 <팔대문호약전 八大文豪略傳> 중 ‘문계(文界)의 마왕(魔王)’에서 그의 생애와 문학을 연관지어 본격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위고는 ≪소년≫과 ≪청춘≫ 양지에다 ≪레 미제라블 Les Miserables≫을 육당이 초역(抄譯)한 <에이비시계 ABC契>와 <너 참불상타>를 비롯하여 민우보(閔牛步) 역의 ≪애사 哀史≫ 또는 ≪쟝발잔의 설움≫이 단행본으로 출간되기도 했다. 그리고 위고의 생애와 문학에 대한 전기적 국면의 소개는 김한규의 <팔대문호약전>의 <낭만파 문인 뷕토 유고>에서 본격화된다. 루소는 이광수(李光洙)의 <자녀중심론>이나 <정육론 情育論>에서 인간의 본성을 존중하는 에밀(Ɛmile)사상을 소개한 것을 위시하여 1920년 11월호 ≪개벽≫에 실린 묘향산인(妙香山人)의 <근대주의의 제1인 루소 선생>에서 그의 생애와 사상이 체계적으로 소개되고 있다. 이 외의 낭만주의 시인이나 작가로는 하이네(Heine,H.)·괴테(Goethe,J.W.von)·블레이크(Blake,W.) 등이 작품과 함께 단편적인 소개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며, 여타는 이름만 열기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한마디로 서구 낭만주의의 이입과정은 극히 제한적이고 구체화되어 있지도 않다. 그들을 소개하는 전신자들의 취향에 의해 극히 단편적이고 문학의 핵심이나 심도와는 거리감이 있는 이입현상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이 말은 폐허·장미촌·백조동인이 펼친 한국 낭만주의운동이 서구 낭만주의의 영향만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반증도 된다. 오히려 그 당시 김안서 역의 ≪오뇌의 무도≫나 기타에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된 프랑스 상징주의 시인들, 특히 베를레느(Verlaine,P.)·보들레르(Baudelaire,C.h.)·랭보(Rimbaud,A.)·사맹(Samain,A.)·구르몽(Gourmont, Remy de)·모레아스(Moreas,J.) 등의 영향요소로서 폐허·장미촌·백조·금성(金星)동인들의 작품에 나타난 시어나 이미지, 시적 발상법 등에서 프랑스 상징주의 시와의 관련성을 짚어볼 수가 있다. 이는 단적으로 말해서 1920년대 전반기에 그 유입이 집중화된 서구문학 사조의 혼류현상을 반영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한국 낭만주의 문학에 나타난 특질을 백철(白鐵)은 감상성의 과잉(過剩)과 환몽적(幻夢的) 요소, 우울(憂鬱)이나 비애(悲哀)의 정조를 들어 ‘병적(病的)인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특히 한국 낭만주의 문학운동의 본격적인 단계로 통념화된 백조파 동인들의 문학적 특색을 “이념에서는 낭만주의요, 기분에서는 퇴폐적(頹廢的)이요, 문학태도에서는 상징주의요, 예술관에서는 유미적(唯美的)”이라 하고 있다. 그리고 조연현(趙演鉉)은 백조파 동인들의 작품에 나타난 치기(稚氣)어린 감상과 비애의식이 정조화 되어 하나의 큰 흐름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하고, 한국 낭만주의의 다양성을 ‘감상적’·‘퇴폐적’·‘서정적’·‘정신주의적’·‘감각적’·‘관념적’·‘저항적’·‘탐미적’·‘민족적’ 등의 문학적 경향으로 유형화하고 있다.

    이들 문학적 경향의 유형화에 대한 타당성 문제는 앞으로 논의되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낭만주의의 한국적 양상은 다음의 두 시기로 구분되는데, 말하자면 1921년 황석우(黃錫禹)가 주재하여 출간한 시지 ≪장미촌≫을 기점으로 폐허동인의 활동을 전기로, 백조동인의 활동을 후기로 볼 수 있다. 이들 두 동인지의 출간기간의 차이는 불과 2년이지만, ≪장미촌≫을 중심으로 전후기의 시적 특색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전기의 폐허동인의 시적 경향이 무겁고 어둡고 우울한 정조를 기조로 한데 반하여, 장미촌이나 백조동인의 시적 경향은 가볍고 밝은 정조와 감상성을 기조로 하고 있다. 폐허동인을 중심으로 한 전기 낭만주의의 특색으로, 먼저 김안서·황석우 등이 ≪태서문예신보≫에서 본격화되는 서구시의 번역 소개와 함께 한 시작활동이 습작품들이긴 하지만, 근대 자유시 운동을 선도한 것은 사실이다.

    한마디로 폐허동인들의 문하적 경향을 놓고 그 다양성이 지적되기도 하지만, 일괄해서 프랑스 상징주의의 영향을 받아 세기말적 사상에 휩싸여 절망과 퇴폐, 죽음과 허무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이를테면 황석우의 <태양의 침몰>은 태양이 잠긴 암흑의 세계를 노래한 것으로 그가 프랑스 상징주의 시론을 근거로 자신의 시학을 확립한 전신자적 역할과 관련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의 황폐화와 허무에다 새 생명을 태우려는 남궁벽(南宮壁)의 ‘대지의 생명과 비의(秘義)’와 자연 친화의 사상, 그리고 강한 민족의식을 타오르는 정열로 승화한 변영로(卞榮魯)의 <논개>, 오상순(吳相淳)의 ‘방랑(放浪)’과 ‘허무혼의 절규’ 등은 모두가 낭만적 발상법이 되고 있다. 백조동인이 결성되기 직전에 간행된 ≪장미촌≫은 그 동인의 구성으로 보아 폐허와 백조동인의 성격과 같이하고 있다. 황석우와 변영로가 폐허동인이었고, 박종화·박영희(朴榮熙)·노자영(盧子泳) 등은 후에 백조동인이 된 것이다. 따라서 이들 동인의 구성으로 보아, 장미촌 동인의 시적 경향은 폐허동인과 백조동인의 중간적 특색, 곧 백조파 동인의 비애와 감상적 낭만과 밝은 정조는 이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백조≫지를 주재했던 홍사용(洪思容)의 <나는 왕이로소이다> 등 일련의 초기 시에 나타난 허무와 비탄(悲嘆), 동경(憧憬)과 감읍벽(感泣癖), 향토적 정서, 그리고 <나의 침실로> 등 이상화(李相和)의 일련의 초기 시에서 보인 데카당스와 병적 관능은 보들레르나 베를레느와 같은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아 이루어진 것으로 홍사용과 함께 한국 낭만주의 시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색(色)’·‘성(聲)’·‘향(香)’의 감각에 의한 오관(五官)의 작극을 시도한 박영희의 <미소(微笑)의 허화시(虛華市)>에 나타난 환몽(幻夢)과 낭만적 정조와 박종화의 <흑방비곡> 시편들에 나타난 비애와 감상성 등은 거의 프랑스 상징파 시인들의 영향을 받은 것들이다. 그리고 바로 뒤이어 결성된 금성동인의 한 사람인 이장희(李章熙)의 ‘고양이’의 시적 발상법도 보들레르의 ‘고양이’ 시편들과 연관되고 있다. 이와 같이 백조파를 중심으로 한 1920년대 초반의 우리 낭만주의 시인들이 프랑스 상징파 시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면서도 프랑스 상징파의 시나 시론의 깊이에 이르지 못하고 주관과 감성을 기조로 한 환몽(幻夢)과 비애의 눈물과 감상성을 띠게 된 것은 한국 낭만주의 시의 한계성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한국 낭만주의가 서구의 문예사조들이 일시에 유입되어 다양성을 띠게 된 요인으로는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환경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대 자연주의/문학과 과학적 합리주의/문학에 반대하여 20세기 초엽에 일어난 새로운 낭만주의/문학이다. 독일에서는 바그너/문학, 니체/문학 등을 시조로 하여 호프만시탈/문학, 게오르게/문학, 하르트/문학, 후흐/문학 등이 신낭만주의 부활을 시도했다. 영국에서는 페이터/문학, 와일드/문학 등의 예술지상주의/문학 및 탐미주의/문학가 이에 속한다. 또 미국에서는 포우/문학의 신비주의/문학, 프랑스에서는 보들레르/문학의 상징주의/문학가 여기에 속한다. 대체로 유럽에서는 세기말 문예의 한 경향이라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광수/문학과 창조/문학동인의 주요한/문학, 폐허/문학 동인인 오상순/문학, 김억/문학, 장미촌/문학의 황석우/문학, 백조/문학의 박종화/문학, 노자영/문학, 박영희/문학 , 이상화/문학, 홍사용/문학 등이 근대 낭만주의에 속한다. 신낭만주의는 시인부락/문학의 서정주/문학, 생리/문학의 유치환/문학 등에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서구의 경우와도 같이 여러 문학사조들이 순차적(順次的)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1920년대 초의 극히 짧은 기간에 여러 사조들이 집중적으로 유입되어 혼류현상(混流現象)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시대 우리 시인 및 작가들이 서구의 다양한 문학사조를 심도있게 받아들일 만큼의 문학적 소양이나 지적 수준이 못 미쳐 있었고, 사상적 기반도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낭만주의뿐만 아니라, 그 시대에 도입된 다른 문학사조들도 그 본질이나 깊이에 접근했다기보다는 표피적인데 머물러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 민족문화 대백과사전에서.

    ■ 신낭만주의 (新浪漫主義/ Neo-Romanticism. Neuromantik.)

    20세기 초에 독일에서 시작된 문예사조로, 결정론적인 인간파악으로 인해 한계를 드러낸 자연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19세기말이 되면서 여러 형태로 시도되었으며, 자연주의의 주창자였던 하우프트만 자신도 이른바 신낭만주의로 전환했다. 이 명칭은 반 합리주의(反合理主義), 상징주의 속의 낭만파의 전통을 되살려 지향한 데서 유래했다. '신의 죽음'을 역설한 니체의 문명비판을 배경으로 주체적, 자발적인 심정의 복권(復權)을 주장한 것이 특징이며, 전환기문학의 주된 경향으로서 자연주의 이후 독일문학의 큰 흐름을 반영한 사조라고 할 수 있다. 이 유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도취적인 시경(詩境)을 노래한 데멜을 선두로 초기의 호프만슈탈에 이어 게오르게, 릴케 등의 서정시인을 꼽을 수 있다. 한편 신낭만주의를 독일미술의 유멘트 양식과 병행관계인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브리태니커

    세기 말적 문예의 하나로 19세기 말 자연주의나 과학적 합리주의에 대립해서 일어난 예술적 경향이고 주체적 정신활동을 중히 여기는 구 낭만주의에 비하여 주지성이 명확한 점이 다르다. 독일에서는 바그너, 니이체를 시조로 하여 호프만시탈이나 게오르규 등이 낭만주의의 부활을 도모했다. 미국에서는 에드가 알랜 포우의 신비주의, 프랑스에서는 보들레에르의 상징주의, 영국에서는 피이터, 와일드의 예술지상주의 및 유미주의(唯美主義)의 주장 등이 이에 속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신낭만주의 (Neo-Romanticism) 국어국문학자료사전, 1998, 한국사전연구사)

                                                                                          / 계몽주의란 어떤 사조(思潮)인가(4-4) 大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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