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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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인가 멈춰 서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7-5)
모든 사물과 인간의 문제를 바라다보는 시각과 평가는 보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다양하게 관찰하고 분석하며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에 다원화 사회가 이루어지고 다원화사회를 꿰뚫고 있는 일관된 사상은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이념의 사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리가 필연적으로 만나야 할 21세기는 다원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으로만이 해석해 낼 수 있는 구조를 가진 다원화사회와 그 곳에서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는 군상(群像)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동학과 천도교가 신(神)의 문제가 아닌, 인간(人間)의 문제를 다루는 최고의 종교라고 정의를 내리는 것은, 필자의 독선이고 편견일 수도 있지만, 필자는 이런 해석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없이 당연한 결과이고 올바른 평가라고 확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동학과 천도교가 필요로 하는 인간은 새 인간(新人間)이며, 새 인간은 세상 사람들과 어울리며 더불어 살아가는 공존공영(共存共榮)의 이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여, 이돈화는 새 인간을 ‘종자(種子) 사람이라’고 했다. 다원화 사회가 중심이 되는 21세기는, 한 분야의 전문적인 인간(special, technical, Professional human)도 필요하지만, 다양한 분야를 통섭할 수 있는 통합적인 인간(Integrated human) 또는 융합적인 인간(Fusion man /Fusion of man)을 요구하고 있다. 다원화 사회인 통섭의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더 나은 미래를 창조하기 위해서는 한 분야의 전문적인 인간보다는, 통합적인 시각과 융합적인 지식과 해결방법을 요구하는 통섭적인 인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므로, 지상천국이라는 세상을 건설하려는 천도교로서는 21세기를 새 인간이 사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 급선무라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미 본 연구소가 걸어온 10년을 돌아보는 글에서 종학대학원을 근본적으로 개편하여 새로운 인간을 양성하자는 대안을 이미 제안한 바가 있다. 21세기라는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요구하는 새 인간을, 천도교는 ‘종자(種子) 사람’으로서 이런 새 인간을 육성(育成)하여 배출(輩出)하는데 총력을 집중함으로써, 그들이 새 시대, 새 역사 창조의 주도적인 인물이 될 것이다. / ‘지난 10년을 돌아보며’(7-7 /포덕 154(2013)년 1월 25일)와 ‘새 시대를 열기 위하여’(포덕 154(2013)년 2월 15일)를 참조하기 바람.
지난 18대 대통령선거에 앞서 대통령 후보자의 토론회 방송에서 한 후보자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타카기 마사오(高木正雄)라는 것을 밝히며 공격할 때, 우리 국민은 일제 침략기 41년간의 참상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의 사실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를 생각하면, 이 나라의 장래가 매우 걱정이 된다. 일본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왜곡에 대해서는 마치 내일이라도 나라가 망할 것처럼 흥분을 하면서, 정작 근, 현대사를 자신이나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이익을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역사를 수없이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알지도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작 알았다하더라도 사회지도층이 자신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된다면 눈감아 버리는 사회지도층의 지식인들의 행태에 대해서 우리는 무엇이라고 하고 있는가? 한 나라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는 국민의 집단지성(集團知性)이라는 것이 상식을 벗어난 무지(無知)인 것이다. 무지한 집단지성이 판을 치는 세상은, 현실의 혼란만 있을 뿐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역사의 흥망에서 배워야 한다. 과연 우리나라 국민의 집단지성은 어떤 수준에 도달해 있을까에 대한 답은 여러분 각자의 상식과 지성에 달려 있는 것이다.
41년간의 참상과 창씨개명(創氏改名)의 사실에 대하여는 이 글 안에 상세히 기술해 놓았다. 필자가 일제시대를 36년이 아닌 41년이라고 기술하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주권이 1905년에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부터 계산하기 때문이다. 일제 36년간이라고 하는 것은, 1910년에 이루어진 한일합방(韓日合邦)에 의해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하지만, 실제로는 을사늑약이후 외교권(外交權)과 관리의 임면권(任免權)이 일본에 의해 좌우되어 독립국가로서의 주권(主權)을 행사할 수 없었다면,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지배받은 것이기 때문에 주권이 없는 나라는 독립된 국가가 아니므로, 일제의 통치는 을사늑약부터 해방까지 41년이 되는 것이 옳다고 필자는 생각하여 일본의 통치를 41년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창씨개명을 한 널리 알려진 사람들의 일본이름을 아래와 같이 게재하면서, 창씨개명의 여부만을 갖고 친일파 또는 조력자(助力者)로 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역사를 보는 시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려 했고.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만을 갖고 친일분자로 모는 것은 또 다른 역사를 왜곡(歪曲)시켜 자신의 입장이나 이익을 옹호하려는 불순(不純)한 의도(意圖)에서 출발한 반역사적(反 歷史的)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평가를 하는 이유로 합당한가를 사례(事例)로 열거한 아래의 창씨 개명자(創氏 改名者)들을 살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창씨개명을 했다는 것만을 갖고 친일분자로 모는 사람들의 부모나 조부모 중, 일제의 식민지시대에서 삶을 영위했다면, 창씨개명을 한 자가 많을 수가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의 상식이나 지식이 어디까지 진실로 채워져 있을까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이동인- 淺野東仁(아사노 도진); 개화기에 활동한 인물 중, 창씨개명한 제1호(1880년 10월)
강만길 - 姜田萬吉(쿄우다 만키치)
김동인 - 金東文仁(콘도 후미히토)
김동환 - 白山靑樹(시로야마 세이쥬)
김영삼 - 金村康右(카네무라 코유)
김대중 - 豊田大中(토요타 다이쥬)
김활란 - 天城活蘭(아마기 카츠란)
리덩후이(李登輝) - 岩里政男(이와사토 마사오)
박정희 - 高木正雄(타카기 마사오) /5·6·7·8·9대 대통령, 만주군 장교 출신.
배정자 - 田山貞子(타야마 사다코)
서정주 - 達城靜雄(타츠시로 시즈오)
송병준 - 野田平治郞(노다 헤이지로)- 정미칠적.
쑨원(孫文) 中山樵(나카야마 쇼우)
이광수 - 香山光郞(카야마 미츠오)
이명박 - 月山明博(츠키야마 아키히로)
이봉창 - 木下昌藏(키노시타 쇼조)
이완용 - 李家完用(리케 칸요)- 을사오적, 정미칠적.
윤동주 - 平沼東柱(히라누마 토쥬)
윤치호 - 伊東致昊(이토 지코)
전택부 - 全家澤鳧(젠케 타쿠후)
장 면 - 玉岡勉(타마오카 츠토무)
장준하 - 張安俊河(쵸안 슌가)
장 훈 - 張本 勳(하리모토 이사오)
정지용 - 大弓修(오오유미 오사무)
주요한 - 松村宏一(마츠무라 코이치)
최규하 - 梅原圭夏(우메하라 요시나츠)
김석원 -金山錫源(가네야마 샤쿠겐)/ 일본군 대대장 출신으로, 중일전쟁 참전.
정일권 -中島一權(나카지마 잇켄)/ 전 국무총리, 만주군 헌병 대위 출신.
김석범 -金山照(카네야마 쇼우)/ 2대 해병대 사령관, 만주군 장교 출신.
노덕술 -松浦 鴻(마쓰우라 히로)/ 경찰, 독립지사를 검거하고 고문 등으로 악명을 떨쳤다.
심 영 -青木沈影(아오키 진에이); 심영(沈影, 1910년 9월 3일-1971년 7월 24일)은 한국의 연극인으로, 본명은 심재설(沈載卨)이며 일본식 이름은 아오키 진에이(青木沈影/あおき じんえい)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로 연극배우로 활동했고 광복 이후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했다.
이병도 -역사학자로서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자신의 이름을 지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조선사 편수회에서 수사관보와 촉탁으로 참여하였다. 이때의 경력으로 인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천도교 교단도, 일제 식민지라는 특수한 역사적 상황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교단 원로들이 창씨개명을 한 것을, 新人間 통권 151호(12월호/ 1940.12.15)부터 통권 189호(1월호/ 1945.1.15)까지에서 수많은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모두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키와 브리태니커 백화사전의‘ 관련자료 종합 재정리.
또 근자에 매우 국가의 장래가 우려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려는 좌파계열의 대표적인 민족문제연구소가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을 제작하여 공개함으로서 우리나라의 근, 현대사의 철저한 조작에 의한 역사 왜곡에 대하여, 찬반의 논쟁이 점화되어 가열되고 있다. 다큐멘터리 ‘백년전쟁’은 4.19 통일 평화재단이 제작지원을 하고, ‘History for you 백년전쟁’/ ‘당신(민중)을 위한 역사. 백년전쟁’(필자가 번역함)이라는 제작방향을 제시하면서, 민족문제연구소가 제작한 '백년전쟁' 시리즈 제작을 시작했다고 2012년 11월 23일 밝힌 후, 첫 번째 성과인 이승만 1부와 스페셜 에디션-박정희 1부를 제작(총 6부작으로 기획)하여, 일반인들을 상대로, 서울 아트시네마(종로 3가 낙원상가 4층)에서 시사회를 통해 공개하였다. 이에 반발하고 있는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사업회를 비롯하여 이승만 박사의 생애를 연구하고 있는 유영익 교수와 해방 전후사를 연구하고 있는 학계와 보수층에서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유튜브 조회수가 200만 건을 넘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논쟁의 흐름을 각종 관련 자료를 통해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하 생략.
/ 天道敎 政治理念의 比較分析 硏究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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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道敎政治理念을 되새겨 보며 1./ 포덕 153(2012)년 3월 30일.
-동학의 ‘심학’에서 ‘천도교 정치이념’으로의 전환을 중심으로.
1. 들어가면서.
올 해는 총선과 대선을 치러, 짧게는 앞으로 4-5년간의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고, 길게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매일매일 급변하는 국내외의 정세 속에서, 잘 사는 나라, 살고 싶은 나라로 가려는 민중의 요구를 담는 현대정치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轉換點/a turning point)이 되는 한 해로, 새로운 백년대계(百年大計)를 세워야 하는 중요한 시기라 생각된다. 국민은, 우리가 선택하여 믿고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이 시점에서, 안으로는 어떤 정책을 통하여 좀 더 나은 국가가 될 것인가와 밖으로는 급변하고 있는 세계사 속에서 이 나라를 어떤 역할을 하게 할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의 삶의 전반(全般)에 걸친 대 전환을 요구하는 하나의 새로운 활로(活路)를 찾아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시점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이 든다.
예년과는 달리 정치적인 변화를 바라는 민중의 욕구가 강하게 들어나고 있고, 청년세대와 장년세대 간의 갈등이 극도로 심화되어 상호간의 불신과 배척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사실로 받아드려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고 생각된다, ‘과거가 현재의 안정을 구속하고, 현재가 미래의 발전에 족쇄(足鎖)가 된다.’는 역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하여 무지(無知)한 상당수의 청년세대와 종북(從北) 또는 친북(親北)세력과 그리고 소위 진보라고 자칭하는 일군의 반정부 반사회 반문화적인 세력들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걱정스러운 양상을 보이고 왜곡(歪曲)된 집단지성(集團知性)은 장래의 이 나라의 운명에 대한 깊은 우려를 낳게 하고 있다. 국민을 상식과 몰상식(沒常識)으로, 또는 지성과 반지성(反知性)으로 양분(兩分)하는 사상적인 태도는, 근본적으로 다양성(多樣性)을 장점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과 틀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만행이며 무지이다. 또는 국민의 지식을 양지(良知)와 무지(無地)로, 국민의 신분을 귀천(貴賤)으로 나누는 것은 인류평등 개념에 반하는 것이다. 이런 왜곡된 생각을 가진 사람을, 민중의 우상으로, 새로운 사상을 가진 사람으로,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사람으로 착각한다면, 히틀러와 김일성을 숭배한 인민과 무엇이 다르며, 그들과 그들을 추종한 인민들이 만들어 낸 역사와 어떻게 다른 역사를 창조할 것인가를 묻고 싶다.
지금 이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고, 과거 수십 년간 동안 일어난 시위문화는 폭력적이든, 평화적이라 하는 횃불시위든 선진 민주주의 법치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민주적이며 불법적이며 폭력적인 만행으로 평가될 수 있다. 전문 또는 단골 시위지도자들과 대다수의 추종시위자들은, 국민이 우리의 뜻이라고 말한 적도 없고 우리를 대신해달라고 부탁을 한 적도 없는 우리들의 뜻을, ‘대다수의 국민의 뜻’이라고 뻔뻔스럽게 빙자(憑藉)해가며 시위를 과격하게 몰고 가고 있다. 이런 잘못된 시위에 적극적으로 앞장 서 나서는 지도자들은, 궁극적인 시위의 목적이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이익과 그들만이 추구하는 목표를 위하여 선량한 국민의 뜻을 악용(惡用)하여 오직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려 하는 매우 악랄(惡辣)하고 불법적인 의사표시라 할 수 있다, 인간의 빛나는 이성으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정상인에게는 ‘누구를 위하여 시위를 해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불가사의한 시위’가, 이 나라에서는 정당한 행위로 평가되는 이런 사회가 바람직한 사회인가? 가 의심스럽다.
우리 현대사 속에서 대다수의 시위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되돌아보면, 매우 무의미한 시위였거나 국가발전에 매우 해독적인 만행에 지나지 않았다는 역사적 진실을 만나게 된다. 그때 시위주동자들이나 그들에게 속아 시위에 폭력적으로 참여했던 추종세력들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역사와 국민 앞에서 사죄한 바도 없다. 더 황당한 것은 그 시위로 인한 막대한 국가재정의 낭비에 대해 단 한 푼도 배상한 적이 없다. 어리석고 불쌍한 국민들만 정확한 이유도 모른 채 막대한 세금으로 징수당하여 그 손실을 변상하고도 억울한 줄도 모르고 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하고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어찌 한심한 나라가 아니라 할 수 있는가.
광우병사태 때, 기업의 노사분쟁 때 생사를 걸고 아귀처럼 밝혔던 수많은 촛불과 전국을 누비고 다니던 극렬 시위자들의 희망버스는, 북괴의 만행이 저질러졌을 때, 탈북난민 북송 저지 때, 북한의 인권말살 만행을 규탄할 때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왜 우리 사회는 국가발전과 사회통합을 방해하는 이런 광란의 집단을 용서하고 있는 것일까? 왜 국가와 대다수의 국민은, 선진국가로의 도약을 정면에서 방해를 하고 있는 반국가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반인륜적인 해괴한 시위집단을 무시하거나 도외시하고 있는 것일까?
이렇게 이해가 되지 않는 국가와 사회가 이성을 가진 정상적인 국가이고 사회일까? 스스로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미래가 매우 우려스러운 우리 사회의 단면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이 국민의 뜻이라고 빙자하고 행한 수많은 시위가, 정말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인가를 돌아보고 뼈아픈 반성을 해야 할 시점인 것이다. 그래야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시위가 사라져 살만한 세상이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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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항; 전문 시위꾼들에게 발목을 잡혔던 국책사업 - 月刊 朝鮮 2012년 5월호에 게재된 ‘단골 시위꾼들의 7大 국책사업 반대, 그 후의 현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1. 천성산 터널 - 도룡뇽이 사라진다고 아우성을 쳤지만, 고산 습지 어디서나 도룡뇽 알주머니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
2. 사패산 터널 - 공사 후 한 때 사라졌던 희귀식물인 산 개나리가 다시 발견되었다.
3. 양양 양수 땜 - 바다로 방류했던 연어 치어가 성장해서 남대천으로 다시 도라 왔다.
4. 한탄강 땜 - 저수하지 않는 홍수 조절 땜으로 기후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5. 인천 국제공항 - 안개공항, 환경 파괴 주장은 모두 엉터리로 판명되었으며, 7년 연속 세계 최고 공항으로 꼽히고 있다.
6. 방패장 - 방패장을 반대한 부안지역은 쇠퇴로 후회하고 있고, 경주는 인센티브를 SOS사업에 사용하여 발전하고 있다.
7. 새만금 간척사업 - 꽃게, 조기, 갈치는 감소, 전어 멸치는 증가하고 있으며, 사라진 갯벌 대신 새로운 갯벌이 형성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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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치국가에서 불법이란, 각 국가마다 존립하기 위하여 가지고 있는 특수하고 기본이 되는 체제(體制)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런 기본체제를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국가에서 삶을 누구보다 더 향유하면서 왜 살며, 그런 비지성적인 만행을 정당화하려 하는가? 그들이 원하는 나라를 찾아 가서, 그들이 주장하는 보다 나은 삶을 살면 될 수 있는 판단정도는 할 수 있는 시위자들일 것이다. 이런 무리들이 시위에서 들어나는, 평화를 가장한 가장 폭력적인 시위로 그들은 평화적이라 하면서 정부로 하여금 법의 의한 시위금지를 통제하는 과정을 폭력적이 되도록 교묘히 유도하고, 이를 반 인권적이라 항변하고 있다. 그들은 법을 집행하는 공권력의 핵심이 되는 사람들의 인권은,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알고 싶다. 반정부 반 정책을 주장하여 시위하는 사람들만 인권이 있다면, 인권평등과 민주주의와 법치국가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상대를 반인권적인 대우를 하면서 인권을 말한다는 것은, 지극히 악랄한 반지성적이며, 이런 무리들의 집단지성은 몰지각(沒知覺)한 반 역사적(反歷史的)이다. 시위 과정에서 노출(露出)되고 있는 시위대들의 행위는 인간이기를 스스로 포기한 굶주린 야수(野獸)의 몸부림과 울부짖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 현장에서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갖게 하여 독기(毒氣)를 품어내게 했을까? 이 땅에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국민은 하루하루를 연명(延命)하기 위하여 생업(生業)에서 바쁜 나날로 눈 돌릴 틈도 없는데, 그들은 무엇으로 먹고 살며 그렇게 악착같이 생사를 거는가? 이 나라와 이 민족의 장래를 위한 희생이라 말하고 싶을 것이다, 다른 시각으로 보면, 그런 야만적인 시위는 그들 스스로만 살아가기 위한 생계수단이며 고달픈 생존경쟁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만약 진정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걱정한다면, 다수의 국민들처럼 자신들의 설 자리에서 묵묵히 생업에 최선을 다하면서, 이 사회에서 야기(惹起)되고 있는 분쟁의 문제는, 그 분야의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올바른 태도이며 애국하는 국민의 바른 자세라고 생각하는 다수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현명한 국민으로서의 올바른 처신이다.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사상은, 역사의 흐름에 무지하여 생존을 위하여 피의 대가를 지불해야하는 줄도 모르는 대중을 선동(煽動)하여, 중우정치(衆愚政治)의 마당으로 끌어내어, 혈투(血鬪)를 해야 할 절실함과 이유도 모르면서 생사를 걸고 피터지게 싸우게 하여 그런대로 살만한 세상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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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에게나 농락(籠絡)당해도 즐거운 우리들/포덕 153(2012)년 8월 31일.
/ 이 나라의 국민으로 살아가야 할 후손들을 생각하며. 내가 짐승이 아닌.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를 자문(自問)하고 있다.
1. 들어가는 말.
우리 민족이 힘겹게 걸어 온, 근, 현대사의 비극을 이해하는 사람이, 국립묘지(國立墓地)를 찾아갔다면, 숙연(肅然)하고 비통(悲痛)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목숨 받쳐 지킨 이 땅에서 살아감에 대한 한없는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한 번 만이라도 찾아 갔다면, 나라를 빼앗겼던 시기에, 독립을 위하여 혼신(渾身)을 다하여 싸우시다 순국(殉國)하신 애국지사(愛國志士)나 열사(烈士)와 북괴군의 침공(侵攻)을 저지(沮止)하다 순국하신 국군장병들이, 또 세계평화를 위하여 타국에서 순국하신 국군장병들이, 생전에 대한민국 국군의 위용(偉容)을 보여주었던 열병(閱兵)과 행진을 하듯이, 죽어서도 오(伍)와 열(列)을 맞추어 그 드넓은 묘역(墓域)에 안장(安葬)되어 있는 현충원(國立顯忠院; National Cemetery, National Memorial Board,)의 현장을 보고는, 그 누구도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태롭게 하는 언행을 함부로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진정 누구를 위하여 젊은 목숨을 산화(散華)한 것인가? 그리고 해방공간 속에서 내 민족의 손에 무의미하게 암살당한 수많은 애국지사와 북괴군의 침공으로, 무참하게 총살당한 애국시민의 죽음을 누가 알아주고 위로해 줄 것인가? 우리 모두 이들의 희생을 잊고 산지 오래 됐다. 그들의 애국애족의 마음과 순국으로 지켜온 이 땅에서 웃으며 살아온 이 나라 국민으로서 목전(目前)의 손익(損益)에 눈이 멀어 그 충혼(忠魂)을 잊고 산지가 정말로 오래됐다. 정말 부끄럽다. 유족이 아닌 우리들 중에서 진심으로 그 충혼을 기리기 위해서 한 송이의 꽃이라도 바쳐본 적이 있는가? 한번 만이라도 찾아가 줄지어 서있는 묘석(墓石)을 보았다면, 내가 왜 사는 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처절(悽絶)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살아 있는 자가 함부로 가벼이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내가 앞장서서 투쟁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말라. 그런 말을 하려거든, 내가 대중을 향해 하는 언행이, 진정 사욕(私慾)을 버린 순수하며 보상(補償)을 바라지 않는 애국애족의 충성심(忠誠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행동하라.
현충원에 묻힌 수많은 전몰(戰歿) 장병들처럼 조국에 목숨을 바칠 용기는 없어도, 목숨을 바칠 조국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내 가슴을 뛰게 하는지 누가 알까? ‘無名勇士의 塔’ 앞에서, 또는 1949년 5월 4일 북한군과의 송악산 전투에서 폭탄을 안고 적의 진지에 뛰어들어 장렬히 산화한 ‘肉彈 十勇士 忠勇塔’ 앞에서, 조국이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우리의 조국이 수많은 전몰(戰歿) 장병들이 젊음을 받칠만한 가치가 있는 나라인가? 를 지금 혼돈에 빠진 조국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묻고 있다. 젊은 세대들은 조국이 어떤 나라인가를 생각하면서 지금 살아가고 있고, 조국의 미래를 어디로 몰고 가고 있는가? 에 대해서 자문(自問)해본 적이 있는 지가 궁금하다. 젊은 세대들은, 일제의 혹독한 식민지 시대를 거치고, 해방공간의 혼란을 건너 5.16군사혁명시대와 산업화 시대를 숨 돌릴 사이 없이, 곁눈질 한 번 할 새 없이, 오로지 가족의 삶을 위해 달려온 우리들 세대처럼 느끼고 있을까? ‘나라를 잃은 백성은 상가(喪家)집에 개와 같다.’는 말이 무슨 뜻이며 절실하고 가슴 저리게 느낄까? 하고 매우 궁금해 하는 내가 안쓰럽고 처량해 보인다.
내 나라 내 민족도 아닌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위하여 유엔군으로 참전하여 전사(戰死)한 영혼(靈魂)을 기리기 위한 전국 도처에 세워진 유엔군 참전용사의 충혼비, 위령비, 참전비 앞에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했는가? 참괴(慙愧)함을 금할 길이 없다. 유엔군 참전용사의 높은 인류애와 세계평화를 위하여, 이름 모를 차가운 타국 땅에서 산화하여 묻힌 그들의 숭고한 죽음에 대하여 우리는 무엇으로 보답하고 있는가? 이들의 젊음을 바친 애국애족과 인류애를 생각하며, 현충원에 줄지어 선 묘석(墓石)을 보며, 살아 있는 우리들의 뜨거운 울음이 목을 메이게 한다. 살아가기 힘든 지금의 삶이라 할지라도, 한 번 현충원을 찾아 가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산화한 국군장병들의 묘비명(墓碑銘)을 살펴보고 그들의 충혼을 위로해 주시기 바란다. 오늘의 나의 삶이 그들의 죽음의 연장선상(延長線上)에 있기 때문이다. 위로(慰勞)하고 감사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올바른 상식(常識)이고 지성(知性)인 것이다.
지식(知識)만 있고 인성(人性)이 다듬어지지 않은 사람은, 자신과 세상을, 나답게, 사람답게 살만한 세상으로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 진리이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애당초 더불어 어우러져 살 생각(同歸一體 또는 共存共榮)이 없고, 자기만의 이익과 명예를 지켜 존경받으면서 잘 살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자기만 잘 살 수 있는 지식은, 교묘(巧妙)한 논리(論理)와 언사(言辭)로 대중을 기만(欺瞞)하여 자기이익을 위해서 사람이 살 수 없는 세상으로 몰아가 붕괴(崩壞)시킬 수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역사에 대한 책임감이 없고 거시적(巨視的)인 안목(眼目)도 부족하다 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존엄성도 없다.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省察)과 언행에 대한 반성에 인색하고, 더불어 사는 타인을 함께 살아가야 할 상대로 대등하게 인격 있는 존재로 인정하고 수용하기를 거부하며 타인의 언행에 대해서는 가혹한 비판과 혹평을 서슴지 않는다. 똑같은 상황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럴 수 있다고 가볍게 비판하지만, 타인일 때는 그럴 수 없는 인간에 대한 만행이라고 혹평하기를 주저하지 않아 너와 나의 형평성은 본질적으로 있을 수 없어야 하고, 너와 나는 근본이 다른 존재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한국인의 비극인 것이다. 적대적 감정으로 투쟁은 있으나 동등한 인간으로 수용할 의사가 없어, 타인과의 조화(調和)와 균형(均衡)을 이룰 마음이 없다. 또 목전(目前)의 이익이나 유리한 여건과 위치와 조건을 양보하여 미래를 향한 거시적인 합의(合議)를 하려는 긍정적인 미래지향적인 사고는 더 더욱이나 없다. 가혹한 비판은 있어도 상대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협력하려는 마음은 없다.
자신을 숭앙하고 추종한 다수의 대중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독단적(獨斷的)으로 자신의 지지(支持) 세력(勢力)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버리고, 자신의 져야 할 책임과 의무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이 그들이 말하는 영리한 재주인 것이다. 이렇게 몰상식(沒常識)한 언행을 해도 추종자(追從者)들은 그들의 무지(無知)가, 자신들을 멸시(蔑視)하는 언행(言行)에도 극찬(極讚)을 아끼지 않는 지극히 편향적(偏向的)인 애정을 보낸다. 어떤 말에도 귀기우리지 않으며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고 멈출 줄을 몰라 장애물에 부딪쳐 온 몸이 깨어져야 비로소 안다. 왜 그들은 스스로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아무 생각 없이 버리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하면서, 내가 싫은 것이 있기 때문에 내가 좋은 것만 취하고, 다른 것은 돌아볼 필요가 없다고 하는가? 이미 균형감각(均衡感覺)을 잃어버려 편향적이 되어버린 자신들을 비난(非難)할 때에는, 짐승의 기운을 느낄 정도로 위압적(威壓的)이고, 공격적(攻擊的)이어서 무서워질 정도이다. 때로는 거친 행동으로 상대를 제압(制壓)하기도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독선(獨善)인데, 소통(疏通)을 말하고 자기의 주장이나 판단에 무조건 인정할 것을 강요한다는 것은 몰상식(沒常識)인 것이다. 자신은 그럴듯한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면서 소통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자기의 주장만 하면서, 남들 보고 소통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고 있는 것도 또한 상식을 크게 벗어난 비정상적(非正常的)인 몰상식인 것이다.
세상을 보는 시각과 역사관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아서, 타인(他人)이 없는 세상에서 자신들의 어떤 권리와 인권을 찾겠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자신이 지지(支持)했던 사람이, 지지 세력에게 단 한 마디 상의나 양해 없이 자신의 권리인양 양도(讓渡)하는 것에 대한 불합리(不合理)와 몰상식에 대한 분노(憤怒)를 느끼지도 않는가? 지지 세력들은 무지몽매(無知蒙昧)한 종속적(從屬的)인 인간들의 군상(群像)일 뿐인가? 그렇게 자신의 권리와 인권을 찾겠다고 하던 주체적(主體的)이며 주도적(主導的)인 인간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들은 대중을 지킬 것처럼 온유(溫柔)한 말과 행동으로 속삭이던(교활하게 감언이설로 첩구교변을 하던)그가, 자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대중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태연히 사라져 버리는 모습을 해방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도 없이 많이 봐왔다.
주(註) 01; 감언이설(甘言利說)과 첩구교변(捷口巧辯)- 감언이설은 남의 비위에 맞도록 꾸며서 하는 달콤한 말과 이로운 조건을 내세워 꾀는 말을 의미하고, 첩구교변은 거침없는 달변(達辯)으로 재치 있고 그럴듯하게 꾸며내어 하는 교묘한 말을 의미한다.
우리 사회에서 시급히 해결해야 할 병리현상 중에 하나는,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하고, 변해야 할 것이 변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춘 것이, 선거의 전과 후(前後)의 진풍경(珍風景)이다. 해방이후 지금까지 해온 이 나라에서의 모든 선거는 당선자들의 공약(公約)은 공약(空約)으로 쉽게 변하고, 선거권(選擧權)을 행사했던 국민은 어느 새 지지(支持)에서 반대(反對)로 모두가 변해버려 그 책임을 물을 대상이 없어지는 해괴(駭怪)한 일이 반복되어 재신임을 받은 정권이 없을 뿐만 아니라, 단임(單臨)이라도 성공한 정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실패한 정권을 창출한 것은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닌 우리 스스로의 선거와 성공한 정권을 탄생시켜보려는 마음이 없었던 이 나라 국민인 우리들이라는 것이, 매우 아이러니칼(ironical)하지 않는가? 포복절도(抱腹絶倒)할 코미디가 아닌가? 누가 누구더러 신뢰할 수 없는 정권이라 비아냥거리는가? ‘누워서 제 얼굴에 침 뱉기’ 란 속담이 딱 어울리는 세상이다.
오직 남아 떠돌아 다는 것은, 당선자를 지지한 자신의 책임은 없고 네 탓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태의연(舊態依然)한 정치권(政治權)이라 매도(罵倒)하고 있다. 그런 정치판을 누가 뽑아서 만든 정치판이냐고 누구 하나 묻는 사람도 없다. 대한민국에는 당선자는 있는데 선출한 선거권자는 없는 유령(幽靈)사회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공약(公約)을 공약(空約)으로 답한 당선자는 다음 선거에서 탈락을 시켜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의 높은 수준에 있는 민중의 역할(役割)이고 소명(召命)일 텐데, 재선(再選)이상을 시켜 주어 당선자들은 무서울 것이 없는 당당한 당선자로 만들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도 내심(內心)으로 쾌재(快哉)를 부르면서, 어제까지 높은 수준에 있는 민중이라고 속삭이던 다정한 마음은 어디로 가고, 대중이 매우 어리석다고 웃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의도나 추구하는 목표를 모를 뿐만 아니라 의심하지도 않는 순박(醇朴)한 마음으로 메시아처럼 숭앙(崇仰)하기 때문에, 교활(狡猾)한 그들의 교언영색(巧言令色)과 미사여구(美辭麗句)에 잘 속아 넘어가는 것이다.
또 이 사회에서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성폭행자의 신상공개와 고지는 재범과 그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하여, 국가가 평등하게 보호해야 할 인권을 포기한 것이다. 성폭행자의 신상공개와 고지는, 법이 정한 바의 자유로운 삶을 위한 거주이전을 위한 선택의 자유와 인권보호를 법이 스스로 포기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법의 형평성을 위하여 성폭력보다 더한 국가와 민족에게 자해행위를 하는 반사회적, 반국가적인 행위자를 국가가 인권보호라는 명분으로 성폭행자의 신상공개와 고지와 같은 법을 집행하지 않는 것은 법의 형평성에 위배되는 것이며, 정치범이나 사상범 또는 불법적인 시위자는 치외법권적인 법에 준하는 혜택을 받아야 할 특권계층인가? 생계형 범법자나, 성폭행자에 적용되는 법은 차등적(差等的)인 법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가가 궁금하다. 국가가 보호할 필요가 없는 범법자인 사회를 문란하게 하는 다양한 범법자들은, 국가가 보호할 필요가 없는 것이 법의 형평성에 맞는 집행인 것이다. 악의적으로 국가와 사회를 혼란하게 하여 국가의 장래를 위태롭게 한 범법자는 성폭행자와 같이 신상공개와 고지를 반드시 해야 형평성에 맞는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해결의 최선의 방법이 아니라는 점은 사형제도 폐지의 기본정신에서 이해할 수 있다. 범법자에 대한 응분(應分)의 처벌은 있어야겠지만 생사를 결정할 정도의 중벌(重罰)이 되면, 재범(再犯)과 흉악범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사례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범법행위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사회여건의 조성이 되어야 하고, 올바른 삶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한다. 학력이 아닌 경력과 재능이 대접받고 적성에 맞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는 사회의 기반조성이 되어야 하고, 안정된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야할 타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가치가 형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사회의 주체들이 많이 생겨야 안정된 사회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動力)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선행(先行) 되어야 할 것은, 올바르고 정확한 지식과 극히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상식과 정상적인 언행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며, 각자가 현상 속에 깔린 내재적 요인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통찰력과 과거로 회귀하지 않는 퇴행적(退行的)인 역사관을 갖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거시적 안목과 사관을 갖추는데 최선을 다하는 국민이 되는 일이다.
지금 우리는 세계에서 10위를 넘나드는 경제 대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병리현상의 여러 측면은 매우 걱정을 넘어 위태로움을 느낄 정도이다. 특히 우리 사회처럼 민주주의 정체를 가진 세계의 여러 나라보다 일상생활에서 유달리 정치적 관심과 논리가 논쟁의 핵심이 되는 나라는 드물다. 그런데 그런 논쟁의 기초 이론과 지식에는 우려할 정도의 표피적(表皮的)이거나 무지(無知)에 가까워 논쟁의 핵심이 사라져 버린, 진흙탕 싸움일 뿐이라는 점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진실(眞實)과 허상(虛想)에서 헤매는 우리의 상식이,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사회적 여러 여건을 갖추었는데도 모든 사회적 갈등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리고 피상적(皮相的)인 지식과 무지에서 오는 비판과 갈구(渴求)가 사회를 분열시키고 있다.
국민총생산인 GNP가 4만 달러 전후인 국가가 시행하고 있는 사회복지를, 이제야 2만 달러를 겨우 넘은 국가의 국민이, 4만 달러 전후인 국가와 대등한 사회복지를 요구한다면 누가 이것을 상식적이며, 정상적이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나라가 한국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사회민주주의가 핵심인 국가에서 사회복지의 기본정책이 성공한 서유럽 국가에서는 의료비와 대학까지의 교육비가 무료인 나라들이 있다. 이런 사회복지정책을 쓸 수 있는 나라는, 우리보다 담세율(擔稅率)이 두 배 가까이 되고 면세자(免稅者)가 훨씬 적다. 그러므로 사회복지 재정이 확보될 수 있는 여건이 오랜 시간동안에 확보되었다는 것이 진실이다. 반면에 우리나라는 담세율이 매우 낮고, 납세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국민인, 면세자가 약 60%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면세자 비율이 50%가 넘는 다는 것은, 국민으로서의 결격사유인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세계에서 10위를 넘나드는 경제 대국이라 할 수 있는 것은 경재정책의 잘, 잘못을 떠나 기적인 것이다. 우리나라는 서유럽과 같은 사회복지 혜택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만약 우리의 경제현실에서 특별한 재정확보가 확정될 수 없는 여건에서의 서유럽 수준의 사회복지 혜택을 요구한 다면, 서유럽 수준의 담세율(擔稅率)과 약 20% 미만의 면세자(免稅者)가 확보되어야 하는 데, 이것은 정부의 몫이 아니라 세금을 부담해야 할 국민의 몫인 것이다. 이것이 진실인데도 막무가내 식으로 사회복지와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여론에 밀려, 재정확보 없이 장기적인 대안이 없이, 사회복지와 반값 등록금을 정당정치를 핵으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정당이 정권유지 또는 교체를 위하여 정상적인 논리와 상식을 벗어나 인기영합주의로 국민에게 약속한다면 정당과 국민이 공멸(共滅)하는 망발(妄發)이며, 창피스러운 탐욕(貪慾)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불행을 자초하는 것이다. 이런 사고로 나라의 발전을 막는 다면 GNP 4만 달러는 언제 달성하겠다는 것인가? 다수의 국민들이 서유럽 수준의 담세율(擔稅率)과 약 20% 미만의 면세자(免稅者)로 축소하는데 동의하며, 자발적으로 복지재정확보에 협력하겠다고 당당히 약속하여 자진납세하고, 서유럽 수준의 사회복지를 요구하는 것이 상식이고 정상이며 이로 인하여 국가와 국민 간에, 사회와 대척(對蹠)하고 있는 국민간의 갈등은 자연히 해소되어, 사람답게 대접받으며 ‘품위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미래의 나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언제인가 멈춰 서서 내동댕이쳐질 수도 있는 팽이 같은 세상(7-5)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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